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12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아무 성과 없이 지점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던 우린 계획대로 펠룩스를 감시하기로 했다.
“오빠 무리하진 말아요!”
“응. 돌아가면 연락 하고.”
나와 프레드 선배는 지점장과 밀라를 돌려보낸 다음 다른 행원이 준비해준 차로 갈아탔다.
우린 에이펙즈 엔지니어링의 주차장이 보이는 위치에서 사장이 퇴근하길 기다렸다가 미행할 생각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알리샤 씨가 불륜 상대는 한 명이라고 그랬잖아.”
“저도 모르겠어요. 밀라가 잘못 본 건 아닐 텐데.”
프레드 선배가 한숨을 쉬자 트레이드 마크인 메기 수염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추측이긴 한데, 여직원들이 전부 사장과 그렇고 그런 관계일 거라곤 생각이 들지 않아요. 전부 가느다란 화살표인 데에다 일방통행이었다고 그랬잖아요.”
밀라의 능력으로 알아낸 건 어디까지나 사장이 에이펙즈 엔지니어링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욕망 가득한 눈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그녀들이 사장을 남자로 보고 있는지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
저들이 펠룩스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건 그들에게서 붉은색 계통의 화살표가 뻗어나오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긴…아무리 그 밉상 아재한테 돈이 많아도 젊은 직원들 여럿이 전부 넘어가는 건 말이 안 돼.”
“아마도 사장이 일방적으로 직원들에게 나쁜 마음을 품고 있을 뿐이겠죠.”
“그럼 여직원들 사이에 불륜 상대가 섞여 있는 건 아니겠네.”
“마냥 그렇게 단정지을 수도 없을 것 같아요.”
내가 말하자 프레드 선배가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감정 없이 돈만 보고 만나는 관계도 있잖아요.”
“지안 씨 엄청 시니컬하네….”
“리얼리스트라고 불러주시죠.”
안타깝게도 지구에선 꽤 흔한 일이라서 말이다.
그나저나 15억 돌려받으려고 시작한 일이 어느샌가 사장의 애인을 찾는 미션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과연 이게 은행원이 해야 할 일일까.
아니, 애초에 은행원이고 자시고 월급 받고 이런 일 하는 사람이 흥신소 직원말고 있긴 한가?
밀라를 불러오면 쉽게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런 복병이 도사리고 있을 줄이야.
“뭐, 일단은 사장을 미행하는 거 말곤 방법이 없어 보이네요.”
“이런 짓 해도 괜찮은 걸까. 아슬아슬하게 불법의 영역에 발을 걸친 것 같은데.”
“인제 와서 약한 소리 하면 안 되죠, 선배. 그리고 이건 불법이 아니라 탈법이라고요.”
“그, 그런가?”
“저쪽이 돈 떼먹고 오리발 내미는 데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요. 오리발 만지작거린다고 15억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프레드 선배는 생긴 거에 비해 상당히 무른 성격이니 일단은 내가 적극적으로 움직여야겠지.
펠룩스 토니토 같은 쓰레기가 소중한 고객님들이 은행을 믿고 맡긴 돈을 가져가게 둘 순 없으니까.
“선배, 저기. 사장 차.”
때마침 퇴근한 펠룩스가 젊은 운전수와 함께 뒷문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연료 보급 부탁해.”
“여기요.”
나는 핸들을 잡은 프레드 선배의 입에 싸구려 도넛을 쑤셔 넣었다.
“형사물 버디 무비 찍는 기분이야.”
“선배 얼굴이 그쪽 계통이긴 해요.”
“칭찬이지?”
-부릉!
가속하는 업무용 차량,
다음에 나쁜 녀석들 시리즈 3편까지 선물해줘야겠다.
* * *
에이펙즈 엔지니어링 사무실을 처음으로 찾아간 날부터 2주가 지났다.
나와 프레드 선배를 비롯한 서부 포독스 지점 소속 행원들은 그동안 매일같이 교대로 사장을 미행했다.
사장의 동선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수행 운전기사가 모는 차를 타고 월세집과 회사, 그리고 헬스장을 왕복.
심플하기 그지없는 생활이었다.
“의외로 술집 같은 곳은 가지 않나 보네요.”
“그러게. 생긴 거랑 다르게 건전하게 노네.”
뜻밖에도 펠룩스 토니토가 유흥업소를 방문하는 기색은 없었다. 감시나 추심을 의식한 행동은 아닌 모양이었다.
지점장이 친하게 지내는 주류업체 대표가 알아봐준 정보에 따르면 펠룩스가 유흥에서 손을 뗀 지 벌써 몇 년인가 지낫다고 한다.
다만, 집, 회사, 헬스장을 오가는 심플한 생활을 보내는 와중에도 불륜 상대와는 여전히 주기적으로 만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기 돈으로 고용한 운전기사가 모는 차를 타고 모텔과 고급 호텔 등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저 나이대 아저씨가 일주일에 세 번씩 혼자 호캉스 갈 리는 없지.”
“당연하죠.”
우린 회원제 헬스장 고객과 에이펙즈 엔지니어링 직원, 심지어는 그가 예전에 들르던 유흥업소 점원의 사진까지 확보해 그들이 펠룩스가 묵은 곳에 들르는지 감시했다.
하지만, 리스트에 있는 여성 중 펠룩스와 두 번 이상 동선이 겹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전부 허탕. 펠룩스 근처엔 여자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이름을 알아낸 족족 여자들 사진에 직무권능을 사용해봤지만 원하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사실 펠룩스는 강령술사라 귀신이랑 연애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가능성은 있겠죠. 근데 대학교 전공이 그쪽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어. 상경 쪽이었어.”
“방금 지식인에 물어봤는데 강령술로도 귀접은 불가능하다네요.”
“으음….”
펠룩스의 애인을 찾아내려는 시도는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15억 굴덴의 대출 만기까지 남은 시간은 2주.
지금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에이펙즈 엔지니어링이 도산하는 건 그보다 이를지도 모른다.
대출 담당자가 진즉에 퇴사한 탓에 이대로 가면 모든 책임을 서부 포독스 지점의 행원들이 뒤집어 쓰게 될 상황.
“시간이 없습니다. 2주 내에 단서를 찾지 못하면 그땐….”
무언가 놓친 정보가 있는 게 틀림없다.
“한 번만 더, 그분을 불러보죠.”
나는 지점장에게 부탁해 펠룩스의 전 부인 알리샤 나볼리를 만나보기로 했다.
* * *
조용한 카페에서 펠룩스의 전처 알리샤와 만난 우린 그녀에게 그동안 조사한 결과를 알려주었다.
펠룩스 토니토가 이혼 전부터 교제해온 것으로 추측되는 불륜 상대와 계속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회사 여직원들에게도 계속 흑심을 품고 있다는 이야기 역시도.
“그렇군요. 그이는 아직도 그런 생활을…조금이라도 기대한 제가 바보였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지 못해 정말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쉬울 거라곤 생각 안 했으니까요. 예전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미련을 가져봤는데, 헛된 기대였나 봐요.”
드센 인상의 얼굴은 어느샌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슨 기분인지는 굳이 추측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지막 희망마저 잃은 사람에게 질문을 퍼붓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감정을 억누르고 준비해온 질문을 던졌다.
“실례되는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처음 전남편에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건 언제부터셨죠.”
“그이의 차가 모텔에서 나온 걸 봤다는 목격담을 듣고 나서였어요. 직접 확인한 다음부터 확신을 가지게 됐습니다.”
“상대를 목격하신 적은 있나요. 뒷모습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전혀요.”
“으음….”
내가 짧게 신음을 발하자 알리샤는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언젠간 돌아올 거라 생각한 제가 바보였어요.”
알리샤는 감정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양육비를 보내지 않을 때 알았어야 했는데. 아비로서 가져야 하는 책임감따윈 진즉에 내다 버린 거겠죠.”
“……?!”
…양육비를 보내지 않았다?
“실례지만, 방금 ‘양육비를 보내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게 맞습니까.”
“예, 맞아요.”
“펠룩스 사장과 따님 사이에 교류가 없었다는 뜻인가요.”
“둘 다 서로 만나기 싫어하더라고요. 벌써 7년째예요.”
이건 좀 말이 안 된다.
지점장님은 분명 몇 년째 펠룩스가 딸에게 준다는 명목으로 기념품을 받아갔다고 했다.
그런데, 실제론 딸과 7년째 교류가 끊어진 상태.
입욕 세트를 챙긴 건 딸에게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뜻이다.
즉, 직접 쓰거나 다른 사람한테 주려고 받아갔다는 얘긴데.
설마.
“몇 가지 더 여쭤봐도 될까요.”
“네. 말씀하시죠.”
“혹시 당행의 기념풍 중 후달라야 핑크솔트 입욕 세트를 집에서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처음 듣는 이름이네요. 그런데 갑자기 입욕 세트는 왜….”
“믿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이번 일을 해결할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지점장과 알리샤가 물음표가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단호하게 질문을 이어갔다.
“이혼 후에 전남편이 댁에 차원신용금고의 기념품을 선물로 보낸 적이 있나요?”
“양육비도 보내지 않는 사람이 그런 걸 챙길 리가.”
예상했던 답이 돌아왔다.
딸아이의 양육비도 내지 않는 사람이 자잘한 기념품을 챙겨줄 리 없다는 생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합리적 의심이 가능한 상황.
펠룩스 사장은 몇 년 동안 계속 차원신용금고의 기념품인 핑크솔트 입욕 세트를 계속 받아갔다.
딸아이가 그것을 좋아한다는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그것이 뜻하는 바는 아마도―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지점장이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뭔가 떠오른 모양이군요.”
“아직은 의심단계지만요. 일단 전산관리과에 연락 한 통만 넣어주셨으면 합니다.”
“누굴 찾는지 말해주시죠.”
나는 그 녀석의 짜증 섞인 히스테릭한 목소리를 듣게 될 지점장과 전산관리과 행원에게 심심한 경의를 표하며 대답했다.
“과타노차 계장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동기 좋다는 게 뭐냐.
이럴 때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 거지.
* * *
새벽 2시.
머리의 자잘한 촉수에 롤을 묶고 파마하다 불려 나온 과타노차는 상당히 기분이 나빠 보였다.
“어째서 고등 생명체인 내가 이딴 범죄 행위를 도와야 하는 건지 설명해라, 1진화 인간.”
왜 사람을 포X몬처럼 부르는 거냐 이 새끼는.
6세대 악 타입 오징어 X켓몬처럼 생긴 주제에.
“인센티브 준다잖아. 한 번만 도와줘.”
“무능한 생명체들 같으니라고….”
과타노차는 투덜대면서도 내가 내민 검은 두건을 뒤집어쓰고 에이펙즈 엔지니어링 사무실이 위치한 잡거 빌딩의 계단을 올라갔다.
“직무권능 발동.”
과타노차가 은행원 뱃지에 촉수를 대자 주변의 감시 카메라가 일제히 스파크를 튀기며 고장을 일으켰다.
녀석이 지닌 직무권능의 이름은 라이프 핵生體干涉.
일정 거리 내에 있는 전자기기에 대해 제어권을 얻는 이 힘으로 과타노차는 다섯 명 몫의 전산관리 업무를 혼자 처리한다고 들었다.
“원시적인 자물쇠로군.”
-파지직!
이런 식으로 남의 사무실에 침입하는 데에 사용할 수도 가능한 능력인데, 진심 이 녀석이 아군이고 법 따윈 무시하는 성격이라 다행이다.
“이쪽이야.”
라이프 핵으로 전자 도어락을 해제한 우린 곧바로 사장실로 직행했다.
한동안 플래시를 켜고 전용 라커를 뒤진 결과 나는 목표로 하던 물건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찾았다….”
이미 개봉된 후달라야 핑크솔트 입욕 세트.
그리고 이게 들어있던 건 사장의 라커가 아니라 ‘그 사람’의 것이었다.
“네, 지점장님. ”
나는 곧바로 델 몬테 지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상한 대로입니다. 예. 상의한 대로 콜로닌 은행 대외협력팀에 연락하면 좋을 것 같네요.”
반격 개시.
먹잇감을 함정에 빠뜨릴 시간이 왔다.
* * *
1주일 후.
12월 3주차.
모두가 바캉스를 떠나는 계절.
펠룩스 토니토는 어제 그의 연인과 함께 8 차원의 사막 국가 라라비아의 오아시스에 위치한 대도시 아둠바드에 도착했다.
차원항공기의 일등석에 몸을 싣고 날아온 두 사람은 7성급 호텔에서 낭만적인 하룻밤을 보낸 참이었다.
모두 펠룩스의 돈을 관리하던 애인이 주거래은행인 콜로닌 은행의 경품 이벤트에서 커플 해외 여행권을 따낸 덕분이었다.
외환 환전 고객을 대상으로 자동 추첨이 진행된 결과라는데 설마 1등 상품이 당첨될 줄은 몰랐다.
빼돌린 자금이 상당했기에 자기 돈으로도 충분히 갈 수 있었지만 공짜란 늘 사람을 기쁘게 하는 법.
사용 기한이 연내였던 것도 있어 펠룩스는 망설이지 않고 연인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다만, 아둠바드는 부유하고 현대적이지만 특정 종교의 엄격한 율법에 의해 지배되는 도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노골적인 애정 행각을 벌였다간 처벌을 면치 못할 거라고 판단한 그들은 객실에서 회포를 풀고 로비로 내려왔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 오후에는 사파리 투어가, 밤에는 유목민과 함께 하는 사막 캠핑이 기다리고 있다.
아둠바드는 오아시스에 세워진 낙원.
즐길 거리가 가득한 이 도시에서 둘은 일주일 동안 마음 가는 대로 시간을 보내다 그레이트후리텐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팔자가 썩 좋아 보이네요, 갚을 돈이 없다는 분 치곤.”
행복했던 기분이 나락으로 추락하는 데엔 고작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로비로 내려온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차원신용금고의 은행원들이었다.
사무실에서 본 인간 행원과 책상을 반으로 쪼갠 태엽장이 지점장.
어떻게 여기까지 따라온 건진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이 자리를 모면해야만 했다.
“할 일 참 없군. 은행원이 평일에 해외 여행이나 다니다니.”
“엄연히 업무 보러 출장 나온 거라서요.”
“…업무?”
“채권 회수하는 것도 일이다보니. 참. 이참에 고맙다고 한 마디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1등석 티켓이랑 숙박비, 저분들이 내주신 건데.”
인간 행원이 가리킨 방향으로 눈을 돌리자 험악한 얼굴을 한 사내들이 모여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네모난 꽃을 조각한 뱃지를 옷깃에 달고 있었다. 다름아닌 콜로닌 은행의 로고.
펠룩스는 그제야 1등 상품 당첨이 행운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지안 씨, 이쪽은 증거 회수 끝났어.”
이제야 사태를 파악하기 시작한 펠룩스의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비닐 봉투를 든 메기 머리 은행원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저건….”
“하우스 키퍼 분께 양해를 구하고 두 분이 묵었던 방에서 꺼내왔습니다. 프레드 선배에겐 죄송하게 되었군요.”
그 안에 든 게 무엇인지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펠룩스와 연인이 지난밤 사용한 물건이었으니까.
“제가 지금 경찰을 불러 이 증거를 건네면 두 분은 바로 잡혀가겠네요. 법정에선 아마도, 음….”
김지안이라고 적힌 명찰을 단 인간 행원은 건방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결혼하지 않은 남녀의 성관계를 금지하는 혼외 간통 처벌법대로 유죄 선고를 받겠군요?”
지안이 말을 마치자 펠룩스의 옆에 서 있던 운전수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레이트후리텐의 법에선 없어진 지 오래된 죄목이죠? 그래서 두 분을 라라비아까지 모셨습니다.”
“아, 아니야…나는 남자랑 그런 짓은―”
은행원은 대답 대신 운전수에게 다가가 재빨리 모자를 벗겼다.
흘러내리는 풍성한 장발.
당황한 틈을 타 운전수의 턱에 붙어있던 가짜 수염까지 떼어내자 영락없는 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직 뭘 잘 모르시나 본데, 다 알아보고 온 겁니다, 저흰.”
펠룩스는 주춤거리며 물러갔지만 이내 로비에 세워진 거대한 대리석 기둥에 가로막혀 퇴로를 봉쇄당하고 말았다.
“운전수가 남장여자라는 것도, 이 나라에선 다른 차원에서 온 사람들도 예외없이 처벌받는다는 것도, 전부요.”
상대가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본 김지안이 빠르게 마저 말했다.
“계속 사장님 곁을 떠나지 않고 쫓아다니던 사람이 있다는 걸 까맣게 잊었지 뭡니까.”
펠룩스가 연인의 손을 잡고 내빼려 했지만 김지안의 말이 그 발목을 잡았다.
“도망치면 바로 경찰에게 증거를 제출하겠어.”
김지안의 손가락은 화면에 떠오른 수화기 마크에 닿을듯 말듯 펠룩스를 위협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돌 맞아 죽기. 아니면 떼먹은 돈 당장에 갚기. 하나만 골라.”
목숨을 위협하는 살벌한 협박.
“…갚겠습니다.”
펠룩스와 그의 연인은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에서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