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11화

같은 시각.

사수인 요정 폴로미에게 업무를 배우고 지친 몸으로 사택으로 돌아온 밀라 레브리에는 잠옷 차림으로 침대 위를 뒹굴고 있었다.

은행원이 맡는 일 중에 쉬운 건 없다고 하지만 인사부의 업무에는 다른 부서가 경험할 수 없는 종류의 스트레스가 동반되었다.

누가 새로 채용되어 조직에 합류하게 되는지.

누가 본점의 어느 부서로, 혹은 어느 지점으로, 어떤 직위로 얼마나 빨리 승진하는지.

누가 경쟁에 밀려 시골의 출장소로 유배되는지.

누가 큰 잘못을 범해 해고당하는지.

조직의 구성원들은 신규 채용과 인사이동, 징계 등에 언제나 큰 관심을 보이기 마련이다.

행 내에선 언제나 인사 시즌과 비시즌을 가리지 않고 인사이동의 결과를 갖고 이런저런 추측과 불만이 오갔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차원신용금고는 여러 차원에 고객을 보유한 세 은행이 합병해 탄생한 거대 은행이다.

소속된 정규 행원의 숫자만 해도 작은 섬나라 열 곳의 인구를 합친 것보다 많은 메가 뱅크지만 모두가 탐내는 자리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조직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한정된 의자를 두고 펼쳐지는 치열한 경쟁은 공정한 양상을 띠는 법이 없었다.

성과를 따라, 과실을 따라, 그리고 그 이상으로 행 내 권력을 나눠 가진 세 파벌의 입김에 따라 행원들의 운명은 갈렸다.

인사이동 결과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는 이들의 숫자가 많은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러나 이러한 불만은 직장인 익명 게시판의 게시글이 되어 인사부 소속 행원들을 찌르는 칼날이 되곤 했다.

인사부의 일은 인사권자에게 조언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무시하는 걸까.

인사권자를 향한 불만보단 인사부를 공격하는 발언이 훨씬 많은 게시판을 확인하는 밀라의 얼굴은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선배들은 화살받이가 되는 것 역시 인사부의 일이라고 자조했지만 근무 기간 반년 미만의 신인에겐 감당하기 버거운 현실이었다.

“괜히 확인했네…. 대리님 말 들을걸.”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고 했던가.

오늘도 밀라는 익명 게시판을 확인하고 말았다.

자신과 직접 관계없는 일이지만 소속된 부서가 공격받는 건 연약한 성품의 밀라에겐 상당한 스트레스로 작용하고 있었다.

인사부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열 번은 더 베개를 눈물로 적셨다.

누군가의 운명이 결정되는 과정에 손을 보태는 것만으로도 책임감에 짓눌려 숨쉬기 힘든 지경인데 원망까지 들으니 도저히 견딜 자신이 없었다.

사수인 폴로미는 밀라를 아껴 주며 이런저런 조언을 주었지만 그 대부분은 무뎌지라는 말로 결론지어졌다.

얼마 전 동기인 김지안을 만났을 땐 차마 이런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정보를 준다는 구실로 불러낸 주제에 그의 앞에서 울어 버렸다간 귀찮은 여자로 낙인찍혀 거리가 멀어질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오빠한텐 말해도 됐을 것 같은데.”

김지안은 밀라를 동생처럼 취급하니까 어리광을 부려도 받아 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남자의 심리를 알지 못하는 밀라로선 지안이 무슨 생각을 할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아.”

그러다 문득, 끊어졌던 필름이 이어지며 지안과 술을 마신 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지안이 출장소 이야기에만 흥미를 갖는 게 짜증이 났던 밀라는 그를 무작정 택시 안으로 끌어들였다.

혼자 돌아가는 건 외로우니까 자신을 집에 바래다주었으면 하고 저지른 행동이었는데.

‘야. 도착했어. 일어나.’

‘훼… 후에에.’

‘후에에는 개뿔. 침이나 닦아.’

“…….”

갑자기 얼굴이 화악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팡팡팡팡팡!!!

얇은 차렵이불에 발차기가 작렬.

몸을 일으켜 거울을 보니 옅은 갈색을 띤 볼이 발그레 홍조를 띠고 있는 게 보였다.

“내가 왜 그랬지. 미쳤나 봐 진짜.”

화장대 서랍을 열자 지안이 빌려준 손수건이 보였다.

깨끗하게 세탁해서 접어 두었는데, 대체 언제 돌려주면 좋을까.

다음에 만나면 일 얘기도 좋지만 영화나 다른 화제로 실컷 떠들고 싶다.

소주 말고 달달한 칵테일 마시면서, 안주는 모둠 과일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맞다. 샴푸 뭐 써?’

‘샴푸는 갑자기 왜요.’

‘좋아서.’

‘네헤?! 가가가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미쳤어미쳤어진짜―’

‘그 향 좋아서 나도 사려고.’

그날 지안이 물어봤던 샴푸 이름도 알려 줘야지.

-꾸욱

“아으으으….”

밀라는 애꿎은 베개를 껴안고 허벅지와 팔로 세게 조였다.

-아아 레게 모래사장 빅 웨이브~♩ 겁나 팍팍 웰컴 위켄드~♪

다음 순간, 스마트폰이 토해낸 흥겨운 레게 사운드에 놀란 밀라의 몸이 앉은 자세 그대로 1cm가량 허공에 떴다.

-삑

“지안 오빠?”

<쉬는데 미안. 내일 시간 돼?>

“뭐예요 뭐예요? 차였어요? 외로워요? 같이 술 마실 친구 필요해요?”

<술은 무슨. 오전에 데리러 갈 건데.>

“오전에요? 저 아직 수습 기간이라 반차 쓸 짬이….”

<일 때문에 보는 거야.>

“…….”

-퍼억

밀라는 벽에 베개를 집어 던진 다음 내일 병가를 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 * *

다음 날.

“그럼, 잠시 밀라 빌려 가겠습니다.”

“네에. 천천히 데리고 있다가 내일 저녁까지만 반납해 주세요.”

“제가 물건인 것처럼 말하지 말아 줄래요?!”

밀라가 성질을 냈지만 폴로미 대리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그녀가 귀에 대고 숨을 한 번 불어넣자 밀라는 마취총을 맞은 치타처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흐아아. 놀리지 말라니까요 진짜….”

폴로미는 꺅꺅대는 밀라와 나를 번갈아 보고는 작게 윙크했다.

“우리 밀라 귀엽죠? 일도 잘하고.”

“대리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저번부터 느끼는 거지만 밀라네 사수, 상당히 장난기가 심하다. 이럴 땐 포커페이스를 유지해 원하는 반응을 돌려주지 않는 게 최고다.

“아니이 이 사람들이….”

볼을 풍선처럼 부풀린 밀라는 툴툴대며 내가 서부 포독스 지점에서부터 몰고 온 업무용 차량에 몸을 실었다.

“아까 저한테 왜 그랬어요? 선배가 저 귀엽고 일도 잘한다고 칭찬하는데 오빠가 그렇게 굴면 제가 무안해지잖아요.”

“화내는 포인트가 이상한 것 같은데.”

“저 귀엽고 일 잘하는 건 팩트잖아요!”

내가 본점 근무자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아냐.

“도착하려면 좀 걸리니까 이거라도 먹어 둬. 혈당 떨어진 거 같은데.”

“아, 또 또 말 돌리려고 그런다! 근데 그게 뭐예요?”

“뭐긴, 달달한 거지.”

내가 상자를 열자마자 밀라는 금방 화를 풀었다.

“대에박….”

오는 길에 근처의 백화점 지하에 들러 사 온 딸기 슈크림이 뇌물의 역할을 충실히 다해 준 덕이었다.

“시간 내줘서 고마워. 업무 많이 바빴을 텐데.”

“15억 걸린 일이면 당연히 도와야죠. 하나 더 먹어도 돼요?”

“어. 다 먹어.”

“지안 오빠 최고…!”

밀라는 입가에 잔뜩 묻은 딸기 커스터드 크림을 핥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고마워할 필요 없어. 지점 법카로 산 거야.”

“그래도요. 저번에 이거 먹고 싶다고 한 거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사 온 거잖아요. 그냥 스치듯이 말했었는데.”

“내가 먹고 싶어서 사 온 건데?”

“저 다 먹으라면서요.”

“그건 딸기맛 얘기고. 난 미리 멜론이랑 초코맛 하나씩 먹고 왔어.”

“완전 약았어!! 제일 비싼 거 골라 먹고!!”

“영수증 낼 땐 전부 네가 먹었다고 보고할 거야.”

“헐! 저 돼지라고 소문나면 오빠가 책임질 거예요?!”

“내가? 무슨 책임?”

“이 인간이 진짜…!!”

우린 이런저런 잡담과 이번 사태에 관한 의견을 나누며 차원신용금고 서부 포독스 지점으로 향했다.

나야 평소처럼 편하게 놀려먹고 있었지만 밀라는 이번 사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 줄 예정이다.

내 이야기를 들은 지점장이 간식이든 음료든 챙겨 주면서 극진히 모셔 오라고 했을 정도로.

“직무권능, 요즘 잘 써먹고 있어?”

“네. 엊그제도 사수랑 같이 불륜 한 건 적발했어요. 홍보부 과장이랑 신입 사이에 진한 분홍색 화살표가 꽂혀 있더라고요.”

인사부가 기대한 대로 그녀는 업무에 적합한 직무권능을 개화해 사용법을 익히는 중이었다.

밀라는 직무권능을 발동하면 사람이 품은 호감이나 혐오 등의 감정을 화살표의 형태로 볼 수 있다.

그녀의 능력은 특별 관리 지정까진 받지 않았어도 인사부 사람들과 나를 포함한 소수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것이었다.

듣자 하니 인사부가 특정 행원에 관해 조사할 때 밀라의 능력이 아주 유용하기에 주위에 알리지 말라고 지시해 두었다고 한다.

“가정 있는 사람이 바람피운 거니까 백퍼 유배당하거나 잘리겠네.”

“아무래도 그렇겠죠?”

1금융권 시중 은행 중에서도 차원신용금고의 은행장은 유독 불륜에 관해 엄격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행장이 내건 슬로건 중 ‘도덕의 결여는 곧 신뢰의 붕괴’라는 말은 특히나 강조되고 있었는데, 쉽게 말하면 행원의 도덕적 해이가 외부에 알려지면 은행의 신뢰가 추락한다는 소리다.

이런 까닭에 횡령과 배임, 그리고 불륜을 행한 행원은 강력한 수위의 징계를 받곤 했다.

남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특수한 직군이 늘 그렇듯, 행원 간에 불륜 관계가 발생하는 건 흔한 일이었고, 밀라의 능력은 행 내에서 은밀히 진행되는 불륜을 감시하는 데에 유용했다.

녀석이 도와준다면 펠룩스가 이혼 전부터 교제하던 불륜 상대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지안 씨 아침부터 운전하느라 고생했어.”

“좋은 아침입니다. 김지안 계장, 레브리에 계장.”

차에 프레드와 델 몬테 지점장까지 태운 나는 곧바로 에이펙즈 엔지니어링의 새 사무실로 직행했다.

이전한 본사 주소는 예전에 사무실이 자리 잡고 있던 으리으리한 빌딩과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다.

“이곳이군요.”

포독스시 남서부에 위치한 엘리베이터도 없는 허름한 잡거 빌딩 앞에 차를 세운 우린 곧바로 5층으로 올라갔다.

“펠룩스 사장은 안에 계십니까?”

델 몬테 지점장은 안에 들어가자마자 입구 근처에 앉아 있던 여직원에게 고압적인 어조로 물었다.

상대는 이쪽을 호구로 알고 벗겨 먹으려 했으니 이쪽도 예의를 지킬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죄송합니다, 대표님은 지금 장기 출장 중이셔서―”

개소리다.

“대표의 차는 밖에 세워져 있습니다. 보닛이 아직 따뜻하더군요.”

나는 그렇게 말한 다음 곧바로 허락도 없이 먼저 회사 내부로 진입했다.

펠룩스 토니토가 어느 차종을 몇 대 소유하고 있는지는 이미 전처를 통해 확인했다.

직원들이 다급히 말리려 들었지만 이쪽엔 덩치 좋기론 불곰 수인 우르수Ursu 못지않은 어인魚人이 있다.

“어어, 밀지 마세요. 왜 그러십니까.”

프레드 선배가 팔을 몇 번 휘젓자 사원들의 저항선은 허무하게 붕괴했다.

-쾅!

그 틈을 타 내가 사장실 문을 난폭하게 열자 지점장과 밀라가 점잖게 인사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토니토 대표님.”

“아이고. 델 몬테 지점장님 아니십니까.”

펠룩스는 고양이 귀가 달린 기름진 대머리를 번들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옆에 있는 비서가 따라준 아이스커피를 여유롭게 마시는데 반들반들한 정수리를 힘껏 후려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는지.”

우리가 왜 찾아왔는진 뻔히 알고 있는 주제에 얼굴 가죽이 상당히 두껍다.

“에이펙즈 엔지니어링의 당좌 예금 잔고가 부족하여 이대로는 불가피하게 해약 절차를 밟아야 할 듯합니다. 괜찮으신지요.”

“돈이 없으니 어쩔 수 없네요. 오늘 마침 콜로닌 은행 계좌가 최종 부도 예정인데 잘됐습니다. 차원신용금고도 계좌 정리해 버립시다.”

예상대로 펠룩스는 돈을 갚을 생각이 없었다.

이미 전부 자금을 빼돌렸으니 직원들 월급이랑 입막음 비용만 주고 회사가 도산하길 기다릴 생각인 듯했다.

“당좌거래정지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당행에서 대출한 15억을 상계相計하기엔 예금 액수가 터무니없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돈 없는데 어떻게 가져가시려고? 이쪽은 콜로닌에서 대출한 20억도 못 갚고 있는데.”

“그렇다면 어째서 거액의 추가 대출을 요구한 거죠?”

“그야 50억 융통해 주면 실적 좋아질 때까지 버틸 수 있어서 그런 게 아닙니까.”

“헛소리…!”

-쾅!

나와 프레드 선배가 원본 장부와 조작된 장부를 각각 책상 위에 집어 던졌다.

“확실한 분식 회계의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감옥에 가고 싶지 않다면 빼돌린 돈을 돌려놓는 게 좋을 겁니다.”

“협박인가? 근데 어쩌나. 나는 깜빵 가는 게 하나도 무섭지 않아서. 안에 친구들이 많거든. 쾌적하게 지내다가 3년이면 나오겠지.”

걷어붙인 팔뚝의 문신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돈 벌기 전엔 성실했다는 전처의 말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기준으로 봤을 때의 이야기.

중견 건설 회사 대표라고 했을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 자식 분명 깍두기 출신이다.

“만에 하나 내가 분식 회계를 지시했다고 치자. 증거는 있고?”

그렇게 말한 펠룩스는 곁을 지키고 있던 비서에게 야릇한 시선을 던졌다.

이쪽과 나누는 대화 따윈 흥미를 지닐 필요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찾으면 나오겠죠. 당행은 사해행위취소권을 행사해 15억을 회수할 생각입니다.”

지점장의 머리에서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게 보였다.

설마 이대로 쇼트를 일으키는 건 아니겠지.

“난 돈 빼돌린 적 없어. 내가 그딴 짓을 했다고 생각하면 직접 찾아보든가―”

-콰직!!

지점장의 손날이 벼락처럼 펠룩스의 책상에 내리꽂혔다.

-우득

-콰아앙

정신을 차리니 아이스커피가 담겨 있던 잔과 책상이 단번에 반으로 갈라져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다.”

평소의 온화한 목소리가 아닌, 합성된 듯한 차가운 기계음.

태엽장이들이 발하는 날것의 목소리였다.

“네가 훔쳐 간 건 수많은 고객이 은행을 믿고 맡긴 피 같은 돈이다.”

고주파 블레이드로 변한 손날이 윙윙거리며 위협적인 소리를 발했다.

“당행이 쌓아 올린 신뢰와 지켜온 약속에 맹세코, 너를 이대로 놓아줄 생각은 없다.”

“미친 새끼….”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델 몬테 지점장은 대전쟁 시대 직전에 태어난 태엽장이.

즉, 살아 있는 전쟁 병기였다.

“…새로운 책상과 컵을 구매하는 데 드는 비용은 당행에 청구하길 바랍니다. 귀사의 채무가 완제된 다음 지불을 고려하겠습니다.”

원래대로 돌아온 목소리.

지점장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사장실을 나섰고 나와 프레드 선배, 그리고 밀라는 장부를 챙겨 그 뒤를 따랐다.

썰물처럼 물러나는 직원들 사이를 걸어가는 지점장은 어느샌가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지점장님 박력 쩔었어요.”

“플랫 씨 나오는 영화 보고 많이 연습했습니다.”

“연기였어요?”

내가 묻자 지점장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레브리에 계장. 불륜 상대는 알아냈습니까?”

“비서한테 옅은 분홍색 화살표가 뻗어 있었어요.”

“분홍색은 무슨 감정을 가리키는 화살표인가요.”

“성적 흥미입니다. 다만 비서 쪽은 사장에게 관심이 없어 보이네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직원 명단은 이미 손에 들어왔으니 비서와 그 가족의 계좌를 파 보도록 하죠. 김지안 계장, 장부를 가져오는 건 좋은 생각이었습니다.”

“효과가 있으면 좋겠네요.”

“분명 우리 예상대로 움직일 겁니다.”

장부를 가져와 으름장을 놓는 건 내 아이디어였다.

이 방법으로 위협하면 펠룩스는 꼬리를 밟히지 않으려고 무언가 액션을 취할 것이다.

놈을 감시하면 중요한 단서가 손에 들어올 터.

“목적은 달성했으니 다음 단계로 가 보죠.”

프레드 선배가 닫힌 사장실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제부턴 사장과 비서, 그리고 둘의 주변 인물을 집요하게 파고들면 된다.

에이펙즈 엔지니어링 사무실을 나서기 직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뱅커 자식들. 돈 받아 가고 싶으면 예의부터 다시 배워 오라지…!”

열 받은 표정의 펠룩스가 사장실 문을 열고 나온 순간, 밀라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야, 그럴 리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표정.

밀라는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더니 가쁜 숨을 골랐다.

“뭐야, 어떻게 된 건데.”

“화살표가….”

밀라는 힘겹게 고개를 들고는 나를 보고 마저 말을 마쳤다.

“사장에게서 뻗어 나온 분홍색 화살표가 모든 여직원에게 꽂혀 있었어요.”

“…미친?”

몇 명 있었더라, 여자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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