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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10/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10화

지점장과 프레드 대리는 잠시 낭패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린 남은 단서를 수집하기 위해 사무실 구석구석을 뒤지고 촬영했다.

“분명 두 달 전 방문했을 땐 멀쩡히 영업 중이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사무실 이전한다는 말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분명… 음?”

“어째서 건설 회사 사무실에 트레이딩 팀이 있는 거죠?”

내가 물었지만 프레드 선배는 고개를 저었다.

“건축에 사용되는 철강 코일 등의 원자재 선물을 트레이딩한다고 들었습니다.”

대답한 건 지점장이었다.

“그런 일이 가능한 건가요.”

“항공사도 원유 선물을 거래해 유가 급등 리스크를 헷지하지 않습니까. 법적인 문제는 없습니다.”

영 석연치 않은 이야기였다.

정상적인 건설 회사가 원자재 선물을 거래할 이유는 없다. 제대로 못 하면 도박과 다름이 없는 짓이니까.

그런데 이 회사는 아예 트레이딩 팀을 위해 전용 사무실까지 하나 만들어 자금을 운용하고 있었다. 마치 이쪽이 본업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리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해도 구린 냄새가 난다.

“묘하군요.”

버려진 신문 중 가장 오래된 것의 날짜를 토대로 추측해 보건대 이곳을 비운 건 일주일 전이다.

야반도주와 돈을 잃을 가능성이 큰 선물 거래, 어째 관계가 있을 것 같다.

-지리리리링

내 추리는 예고 없이 들려 온 전화벨에 의해 중단되었다.

“델 몬테입니다. 예? 뭐라고요?”

-푸쉬이이이

대답을 마치자마자 지점장의 머리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기 시작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누군가가 소리치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동상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지점장님?”

뭐지.

“쇼트 일어났네… 나 고칠 줄 모르는데.”

프레드 선배가 딱딱하게 굳은 지점장을 부축하는 동안 나는 그의 손에서 스마트폰을 빼냈다.

<지점장님? 뭐라 대답 좀 해 보세요! 아니 진짜 미쳐 돌아 버리겠네.>

“전화 대신 받았습니다. 김지안입니다.”

<아, 김지안 계장! 나야 블린겔! 지점장님 어떻게 되신 거야?! 어?>

차장님이었다. 목소리가 상당히 격양되어 있는데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쇼트, 일으키신 것 같습니다.”

<하이고오… 그래서 내가 메모리 제때 교체하라고 말씀드렸는데.>

“괜찮으시다면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에이펙즈 엔지니어링이 부도났어!! 콜로닌 은행이 대출해 준 20억 굴덴, 원금 한 푼도 못 건질 거야!!>

“……?!”

주거래 은행인 콜로닌에게 빚을 갚을 생각이 없는 놈들이 차원신용금고에게 15억을 갚으려 할 리 만무하다.

-삑

“…X됐네.”

손 써 볼 새도 없이 사태는 최악의 결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 * *

점포로 돌아온 우린 곧바로 지점장의 머리를 열어 메모리 카드를 교체한 다음 긴급 회의에 돌입했다.

나와 프레드 선배가 조작된 장부를 살피고 위화감을 느낀 부분을 찾아 이동식 투명 칠판에 메모했고, 상석에 앉은 지점장과 노련한 블린겔 차장은 조용히 그것을 바라보며 의견을 교환했다.

원본 장부가 수중에 없는지라 에이펙즈 엔지니어링이 무슨 장난을 쳤는지 알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시도할 수 있는 건 전부 해 볼 생각이었다.

“연체가 있었다면 진즉에 이야기가 돌았을 텐데, 그런 낌새 없이 만기 당일에 배 째라는 식으로 나왔답니다.”

“콜로닌 쪽도 상당히 당황하고 있겠네요.”

콜로닌 은행은 역시나 1금융권 시중 은행으로 에이펙즈 엔지니어링의 주거래 은행이었다.

그동안 연체 한 번 없이 갚고 있던 대출을 갑자기 펑크낸다는 건 이번 일이 계획된 것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었다.

“영업 종료 시간까지 갚지 못했으니 1차 부도… 내일까지 갚지 못하면 최종 부도로 판정되겠네요.”

“아마 차원신용금고에서 대출한 15억 굴덴도 갚을 생각이 없을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계획도산計劃倒産 같군요.”

내가 말하자 델 몬테 지점장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도산, 경영자가 고의로 자신의 회사를 도산시키는 행위.

심지어 장부에 수상한 구석이 여기저기 보이는 거로 보아 누군가가 대량의 회삿돈을 빼돌린 거로 추측되었다.

원본 장부가 수중에 없어 구체적으로 얼마나 해 먹었는진 알 수 없지만 분명 어마어마하게 뒷돈을 챙겼으리라.

“그나마 다행… 이라고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완전히 야반도주를 한 건 아닌 모양입니다. 사무실 이전 사실을 알리지 않았을 뿐.”

한층 차분해진 블린겔 차장이 반들거리는 녹색 이마를 손수건으로 닦으며 지도 앱이 기동 중인 태블릿 화면을 가리켰다.

에이펙즈 엔지니어링은 기존에 입주했던 곳보다 훨씬 월세가 싼 작은 건물로 사무실을 옮긴 모양이었다.

아마도 저기서 적당히 버티는 척 도산을 기다릴 생각이겠지.

“만일 추가로 50억 굴덴을 빌리러 온 것까지 승인했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김지안 계장 덕에 추가적인 피해를 막을 수 있어 천만다행이었죠.”

지점장은 내 공로를 칭찬했지만 기뻐할 때가 아니었다.

“그 정도론 만족할 수 없습니다.”

“지안 씨….”

프레드 선배가 눈치를 줬지만 나는 하고 싶은 말을 하기로 했다.

“15억, 회수해야죠. 담보 대출이 아니었으니 가만히 두면 한 푼도 못 건질 겁니다. 고객님이 맡긴 소중한 예금이지 않습니까.”

지점장의 눈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저 색깔이 나타내는 건 아마도, 억눌린 분노.

“당연히 그럴 생각입니다. 은행 전체의 예금 규모를 기준으로 잡으면 15억은 큰돈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서민들에겐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이죠.

누군가가 은행을 기만하고 도망치게 둔다면 차원신용금고의 명성과 신뢰는 바닥에 떨어질 터.

그런 일이 벌어지게 둘 순 없습니다.”

지점장이 눈짓하자 고블린이 큰 귀를 쫑긋거리며 대답했다.

“아쉽게도, 법인 계좌와 대표의 계좌를 가리지 않고 잔고가 얼마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처분 가능한 자산은?”

“없습니다. 집은 이혼 위자료를 물어 주려고 진즉에 팔아치운 모양입니다.”

“이혼 후에 새집을 장만하지 않은 건 이번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겠네요.”

“애초에 위장 이혼이었고 대표가 빼돌린 돈을 전처가 감추고 있을 가능성도….”

프레드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지점장실 문이 활짝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건 긴급 사태에 관해 듣고 출장에서 복귀해 서류를 확인하던 부지점장이었다.

“지점장님. 급히 뵙고 싶다는 고객님이….”

“영업 끝났으니 돌려보내세요.”

“실은 그게… 에이펙즈 엔지니어링 펠룩스 토니토 대표의―”

-척

부지점장의 옆에 처음 보는 장년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선글라스를 쓴 강렬한 인상의 아주머니.

“전처, 되시는 분이랍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 * *

“알리샤 나볼리예요. 잘 부탁드려요.”

방문자의 신분을 확인하자마자 우리는 바쁘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녀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내 직무권능으로 확인하는 것이었다.

알리샤의 머리 위에 나타난 저울은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고 두 접시 위의 공은 각각 뚜렷한 검은색과 흰색을 띠고 있었다.

지점장을 비롯한 배석한 모두에게 알려 그녀가 이번 사태에 엮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한 나는 곧바로 전남편의 사진을 요구했다.

“어떻습니까, 김지안 계장.”

“확인 중입니다.”

대상의 이름만 알고 있다면 내 직무권능은 사진을 보고도 사용할 수 있었다.

펠룩스 토니토는 살이 뒤룩뒤룩 찐 고양이 귀가 달린 대머리 중년.

그의 사진을 노려보자 자그마한 저울이 머리 위에 나타났다.

“역시….”

오른쪽을 가리키는 눈금. 침식된 하얀 구슬.

저울의 상태는 에이펙즈 엔지니어링을 대상으로 권능을 발동했을 때 본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

나와 시선을 교환한 지점장, 부지점장, 차장, 그리고 프레드 선배가 차례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부정을 지시하고 주도하고 있는 수익자는 에이펙즈 엔지니어링의 대표, 펠룩스가 틀림없다.

“뭘 하고 계신진 모르겠지만 슬슬 얘기 시작해도 괜찮을까요?”

우릴 지켜보고 있던 펠룩스의 전처 나볼리는 선글라스를 내려놓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호랑이를 닮은 인상.

문신으로 새긴 진한 눈썹은 상대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용건을 말씀해 주시죠.”

펠룩스의 전처는 대체 무슨 목적으로 우릴 찾아온 걸까.

우리가 조용히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이가 직원에게 분식 회계를 지시한 건 알고 계시죠?”

“예.”

지점장이 대답하자 여인은 가방에서 두꺼운 서류철을 두 개 꺼내 들었다.

“원본 장부입니다. 입김이 닿는 직원에게 부탁해서 가져왔어요.”

“……?!”

모두가 벙 찐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델 몬테 지점장이 홀로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래. 놀라고 있을 시간은 없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15억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상황이지 않나.

“저희가 확인해 봐도 괜찮겠습니까.”

“필요하실 것 같아서 가져온 거예요.”

지점장에게 장부를 받아든 프레드 선배가 내용을 살피는 척 직무권능을 발동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장부에선 그 어떤 거짓의 악취도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모든 돈의 흐름이 정직하게 기록되었다는 뜻.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다. 나도 내 할 일을 해야 한다.

-쿵

“선배, 여기요.”

“응. 지안 씨는 이쪽 부탁해.”

나는 재빨리 조작된 장부를 가져와 원본 장부 옆에 내려놓았다.

우린 두 장부를 비교하며 빠르게 내용을 확인했다.

“원본 쪽 가지급금이 이상할 정도로 많네요… 전부 용도 불명. 횡령인가.”

“하청업체에게 줬다는 돈이 가짜 장부에선 몇 배는 부풀려져 있는데요?”

“최근 두 달 동안 선물 거래에 들어간 돈이 하청업체에 지불한 금액이랑 비슷합니다.”

“트레이딩, 전부 거래량이 적은 파생 상품만 건드린 모양이군요.”

“자전 거래로 고의로 손해를 봐서 돈을 다른 곳으로 흘려보낸 건 아닐지.”

“굳이 트레이딩 팀까지 만든 건 이걸 위해서였군요.”

.

.

.

진짜와 가짜의 차이점을 확인하니 펠룩스가 무슨 장난을 쳤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횡령에 사용되었다고 추측되는 수법만 해도 다섯 종류 이상.

이 증거는 돈을 되찾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펠룩스 사장이 대출 만기를 두 달 앞두고 자산을 빼돌린 건 확실합니다. 본점에 연락해 사해행위취소권 행사를 준비하도록 합시다.”

“예!”

이 장부를 손에 넣음으로써 우린 반격의 준비를 절반 이상 마친 셈이 되었다.

사해행위詐害行爲란, 채무자가 의도적으로 재산을 감소시켜 채권자가 충분한 변제를 받지 못하게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은행은 사해행위취소권詐害行爲取消權을 행사함으로써 채무자가 재산을 빼돌리려고 행한 증여, 양도 등의 행위를 취소시킬 수 있다.

한마디로 돈 떼먹으려는 머저리에게 은행이 선사할 수 있는 필살의 일격.

“이 장부가 있다면 15억을 되찾은 것과 다름없군요.”

“이젠 펠룩스 사장이 어디로 돈을 빼돌렸는지만 알아낸다면….”

“잠깐만요.”

하지만 흥분했던 것도 잠시.

문득,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나볼리 씨.”

“네.”

“에이펙즈 엔지니어링의 주거래 은행은 차원신용금고가 아닌 콜로닌 은행이었던 거로 기억합니다만. 어째서 이 자료를 저희에게….”

내가 묻자 그녀는 표범 무늬 꼬리를 작게 흔들며 대답했다.

“이런 건 은행에서 쉽게 꺼낼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계획도산의 실행자와 같이 살던 여자가 장부를 증거랍시고 가져와도 믿어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나볼리의 눈은 나를 지긋이 주시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어찌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역변한 플랫 샤펜도라를 믿고 돈을 빌려준 사람이 여기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녀만이 아니었다.

프레드 선배, 몇 번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는 블린겔 차장과 부지점장, 그리고 델 몬테 지점장까지.

“그런 분이라면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을까 싶었어요.”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렇군요.”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저 주어진 일을 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어느새 내게 조금씩 신뢰를 주기 시작했다.

학력도, 커리어도, 아무것도 없이 은행원이 된 낙하산인 나에게.

“정말 잘 오셨습니다. 그 믿음에 반드시 부응하겠습니다.”

나볼리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표정엔 이내 쓸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성실한 남자였어요, 사장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혼을 결심하신 건 설마….”

“네. 외도가 원인이에요. 흔한 이야기죠?”

“…….”

“가진 걸 다 잃어버리면, 가족에게 돌아오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나볼리는 강렬했던 첫인상과는 매치되지 않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눈으로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직원이 전화를 엿들었어요. 결혼 전부터 만나고 있던 불륜 상대의 계좌에 빼돌린 돈을 감춘 모양이에요.”

“실례되는 질문인 건 알고 있습니다만 외도의 대상이 누구인지 알고 계신지.”

“아뇨.”

“연락에 사용한 전화를 입수할 수만 있다면….”

“사무실을 옮기면서 곧바로 폐기했다고 하네요.”

부점장과 차장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일전에 흥신소에 부탁해서 두 달 정도 추적해 봤지만 아무 단서도 얻지 못했어요. 하지만, 은행이 시도한다면 뭔가 다를지도 모르죠.”

장부가 수중에 들어온 이상 펠룩스의 돈을 관리하는 불륜 상대가 누군지만 알 수 있다면 사해행위취소권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가장 중요한 퍼즐 조각을 잃어버린 상황.

“펠룩스는 파산 신청을 동시에 진행 중일 겁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기회를 놓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점장의 머리에 달린 냉각팬이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숨겨 둔 애인을 찾는 거,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그쪽 일을 전문으로 맡는 업자도 해내지 못했을 정도니까.

다만.

“포기하긴 아직 이릅니다.”

다행히도 내 지인 중에는 이런 유형의 일에 특화된 직무권능을 지닌 사람이 하나 있다.

“불륜 상대를 찾는 일에 한해서라면 흥신소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유능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다크엘프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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