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07화
공백기를 극복하고 아역 배우 시절의 찬란한 미모에 꿀리지 않는 성숙한 모습으로 돌아온 플랫 샤펜도라.
영화의 성지 로렐트리를 지배하는 예술의 신 아폴론의 총애를 받는 드워프 출신 거물 감독 겸 제작자 베르게네프 매스터한트.
지구 밖 차원의 영화계 사정에 어두운 나였지만 다른 텔러나 행원, 고객들의 반응만 봐도 저 두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위치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특히나 플랫의 재방문은 내 첫 번째 대출 상담 고객인 데에다 마침 출연작을 보고 팬이 된 참이었던지라 무지하게 반가웠고.
“주연 발탁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지안 씨 덕분입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상품에 관해 설명드리고 싶은데.”
“하하….”
하지만 지금은 업무 시간.
나는 두 사람을 앞에 두고 차분하게 금융 상품의 설명을 마쳤다.
“…이상, 상품에 관련된 설명이 모두 완료되었습니다. 모두 이해하셨고 신규 가입을 희망하실 경우 태블릿의 반투명한 글자를 전용 펜으로 똑같이 따라 써 주시면 됩니다.”
플랫과 베르게네프는 열댓 개의 신규 가입 신청서에 서명한 다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정도로 보답이 될 것 같진 않으니 시간 나실 때 크게 한턱 쏠게요.”
“보답이라뇨, 당치 않습니다. 그냥 제 일을 했을 뿐인데요.”
“제겐 잊을 수 없는 은인이십니다. 촬영 시작하려면 아직 두어 달 남았으니까 언제든 연락 주세요.”
플랫은 웃으며 내게 명함을 건넸다.
멋들어진 폰트로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간결한 디자인.
“배우는 얼굴이 명함 아니었나요.”
“얼굴에 전화번호가 써 있는 건 아니잖아요.”
나와 플랫 사이에 오간 대화를 들은 이들이 일제히 질투와 선망이 담긴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유명 배우의 연락처가 억만금을 쌓아도 손에 넣을 수 없는 물건인 건 이쪽 차원에서도 똑같은 모양이다.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명함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하겠습니다.”
플랫과 베르게네프는 기자들을 거느리고 로비를 떠났다.
취재진 중 몇몇은 은행에 남아 끈질기게 질문을 퍼부으려 했지만 다행히도 프레드 선배와 다른 행원들이 나서서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들은 플랫이 했던 것처럼 내 창구에 하나씩 명함을 두고 갔다. 특종 거리가 생기면 연락 달라는 말과 함께.
“이것도 써먹을 날이 오려나.”
나는 수북하게 쌓인 명함을 정리해 서랍에 집어넣었다.
물론 플랫의 것은 별도로 지갑에 보관했다.
이쪽 차원에서 비싼 밥 먹은 적이 별로 없었는데 잘 됐다. 다음에 한 끼 얻어먹고 와야지.
* * *
점심시간.
나는 프레드 대리와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하여튼 지안 씨 정말 대단하다니까. 지점장님 저렇게 좋아하는 거 처음 봤다고. 감정 회로 망가진 줄.”
“그 정도였나요?”
멀리 서 있어서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진 잘 못 봤는데.
“아까 사인 부탁드린다면서 가입 신청서 뭉텅이로 꺼내는 거 보고 식겁했잖아, 나.”
“과욕이었으려나요?”
“왜? 다들 좋아하던데.”
프레드 선배는 킥킥대며 베르게네프 감독이 대중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알려졌는지 말해주었다.
듣자 하니 그는 언론을 능숙하게 활용하는 쇼맨십이 강한 감독인 듯했다.
이번에 지점을 찾아온 건 나와 플랫 사이에 있던 일로 이슈를 만들 겸 차원신용금고의 간부들과 면식을 틀기 위한 행동으로 추측되었다.
플랫에게 부탁받은 건지 내가 돋보이도록 신경을 써 준 듯한데, 낙하산이라고 알려진 나로선 고마울 따름이었다.
한술 더 떠서 실적까지 챙긴 건 온전히 내 판단이었지만.
“아마 지안 씨가 적극적으로 신청서 들고 어필하지 않았다면 지점장님이나 윗분들만 이득 봤을 거야.”
“그러게요. 공짜 마케팅 성공했다고 좋아했겠죠.”
“앞으로도 이런 일 있으면 높으신 분들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누구 공로인지 확실히 어필해 두는 게 좋아.”
“최대한 노력해 볼게요.”
그래. 남이 내 실적 가로채게 두어선 안 되는 법이지. 내 인센티브는 내가 지켜야 한다.
“고생 많았어. 뉴스에도 나왔으니 본점 사람들도 우리 지점에 더 주목할 거야.”
“그럼 저도 이제 어깨 좀 펴고 다녀도 되나요?”
“당연하지. 지안 씨 덕분인데. 내려가 있을게. 담배 다 피우고 천천히 와.”
프레드 선배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1층으로 돌아갔다.
“…이제 낙하산 취급은 안 당하려나.”
몇 모금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자 그제야 흥분이 가라앉았다.
방금 일어난 일을 돌이켜본 결과 나는 자신이 예상했던 이상의 수확을 거뒀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게 되었다.
내 실적은 단순히 셀럽 두 명이 주거래 은행을 옮기게 하고 몇 가지 금융 상품에 가입시킨 데에 그치지 않았다.
베르게네프 매스터한트는 떠나기 전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자신이 CEO 겸 회장으로 재직 중인 영화 제작, 배급사인 뮤지스 파트너즈에 소속된 모든 임직원들의 월급 계좌를 차원신용금고로 옮기겠다고.
뮤지스 파트너즈는 어마어마한 부자들과 거대 배급사들을 뒷배로 둔 합작회사다.
그곳의 주거래 은행 자리를 가져왔으니 차원신용금고는 장기적으로 크고 작은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베르게네프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번 작품에 커리어와 회사의 명운을 걸겠다고 밝힌 적이 있다.
주연 배우 캐스팅을 도왔다고 주거래 은행까지 옮기는 걸 보니 명운을 걸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나 보다.
부탁을 들어준 건 이미 영화의 성공을 확신하고 플랫에게 도움을 준 내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함일 터.
“미안해질 정도로 보답받아 버렸네.”
남의 돈을 빌려주고 거하게 생색을 낸 꼴.
하지만, 은행원이 하는 일이 원래 다 이런 거니까.
“인센티브 많이 나오겠지.”
추가로 인사 고과에도 이번 실적이 진하게 반영되었으면 좋겠다.
-툭
꽁초를 재떨이에 투척. 슬슬 다시 창구로 돌아가려고 옥상 문을 연 그때.
-디리리리
갑자기 울린 스마트폰 화면엔 뜻밖의 이름이 보였다.
“…밀라?”
얘가 왜 이 시간에 전화를.
* * *
다행히 점심시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던지라 1층에 가서 프레드 선배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오빠 대출 상담 맡자마자 한 건 제대로 터뜨렸다면서요?>
“어어. 뭐, 그렇게 됐어.”
<플랫 샤펜도르라니. 놀랐어요. 7번가의 기적 같은 피자 선물, 옛날에 엄청 재밌게 봤는데.>
“나도 새벽에 두 번 봤어. 쩔더라.”
<그쵸그쵸!!>
우린 3분 동안 플랫의 데뷔작에 관해 서로의 감상을 늘어놓았다.
오랜만에 들은 밀라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들떠 있었다.
전화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매번 통화 시작하고 몇 초 동안은 애써 지친 티를 감추고 있는데 대화하다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지 점점 톤이 밝아진다.
아마도 인사부의 업무가 상당히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다.
그나마 동기인 나와 전화하면서 마음의 평안을 찾는 걸까.
밀라는 생긴 것처럼 멘탈이 물렁하다. 다른 동기들은 주동적으로 얘를 보듬어 줄 성격이 아니니까 내가 잘 챙겨 주는 수밖에.
<맞다. 이런 얘기 하려고 전화한 게 아니었는데.>
“그럼 무슨 일인데.”
<실은 업무 때문에 연락했어요.>
“업무면… 인사부?”
<맞아요.>
“인사부가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다고.”
기묘한 예감이 들었다.
서부 포독스 지점에 온 지 몇 달이나 됐다고 인사부가 나를 찾는 걸까.
설마 인사이동은 아니겠지.
수습 기간 반년 중 절반밖에 지나지 않은 타이밍에 인사 발령이라니, 말이 안 된다.
누군가가 인사부와 손을 잡고 날 다른 지점으로 날려 버린 다음 공로를 가로채려 하는 걸까.
…아니. 이건 너무 나간 것 같다.
차원신용금고는 내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거대하다.
뮤지스 파트너즈를 고객으로 끌고 온 건 분명 나쁘지 않은 실적이긴 하다만 인사부를 움직여서까지 가로채려 들 공로는 아니겠지.
<다른 건 아니고, 지금부터 제 사수가 서부 포독스 지점 방문할 거라네요. 이번 일 관해 직접 보고받고 싶다던데.>
“오…?”
<헤헤. 참고로 저도 갑니다아.>
“너는 왜.”
<지안 오빠 동기니까 따라가도 되냐고 물어봤더니 괜찮다던데요?>
“잘됐네. 온 김에 차라도 마시고 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밀라가 따라온다는 건 안심해도 좋다는 뜻이다.
동기가 보는 앞에서 내 트집을 잡거나 그러진 않을 테니까.
<참. 오빠 만나면 퇴근 시간 다 되니까 본점 들르지 말고 바로 귀가하라는데요.>
“그래서?”
<저 맛있는 거 사 주면 안 돼요? 생선 먹고 싶은데.>
“생선?”
빈손으로 오려는 게 아니었군.
밀라가 이런 얘길 한다는 건 초밥이나 회 값이 아깝지 않은 정보를 물어왔다는 뜻이다.
<둘이서 밥 먹는 거 오랜만이잖아요.>
“레브리에 계장님, 똑같이 수습 기간 중인 동기한테 비싼 밥 사 달라는 건 좀 양심 없는 행동 같습니다만.”
<히이. 오빠 갑자기 왜 존댓말하고 그래요 무섭게.>
“너 하는 거 봐서 사든 말든 하겠다고.”
<모처럼 재밌는 얘기 준비해 왔는데….>
“저번처럼 인사부 개그 같은 거 치면 계란찜이랑 생강 절임밖에 못 먹을 줄 알아.”
<언제 제가 그런 개그 쳤다고 그래요!>
밀라는 당황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됐고, 시재 출납 끝나면 사택에서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까 후문 카페에서 기다려. 가게 예약해 둘게.”
<네에~!>
밀라가 어떤 선물을 가져왔을지 기대해 봐야겠다.
* * *
밀라의 사수는 그림에 그린 듯한 커리어 우먼이었다.
타이트한 H라인 스커트와 안경이 인상적인 인사부 요정… 이라고 해야 하나.
처음엔 밀라만 먼저 도착한 줄 알고 편하게 얘기하고 있었는데 녀석이 싱글벙글 웃으며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손을 내밀길래 깜짝 놀랐다.
“안녕하세요. 인사부 폴로미 대리예요.”
편한 자세로 밀라의 손바닥 위에 앉아 있는 날개 달린 여자.
비유 같은 게 아니라 그녀의 종족은 진짜로 요정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지안입니다.”
인사부 사람들이 장난기가 심하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면 귀여운 축에 속하겠지.
“지안 씨 너무 긴장했다. 오늘은 그냥 얘기 들으러 온 거니까 편하게 대답해 주면 돼요.”
“아, 예….”
폴로미 대리는 밀라를 시켜 조그마한 전용 의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앉더니 플랫의 대출에 관해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
그녀가 서부 포독스 지점을 찾은 건 예상했던 대로 단순히 윗분들을 대신해 이번 일의 자초지종을 알아보기 위함인 듯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감추는 일 없이 답했고 폴로미는 대출품의서에 서명한 프레드 선배와 지점장을 찾아가 질문을 던졌다.
“대단하네요. 신입 행원이 이런 실적을 내는 건 흔한 일이 아닌데.”
“운이 좋았습니다.”
청취를 마친 폴로미는 내 주위를 빙글빙글 날아다니며 귓가에 대고 간질간질한 목소리로 칭찬을 늘어놓았다.
날개의 인분이 피부에 닿아 알레르기를 일으킨 걸까,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역시 인사부가 상대라 그런지 밀라가 옆에 있는데도 긴장하고 말았다. 센스 있는 농담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얘기 잘 들었어요.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는 거로. 위에는 잘 보고해 둘게요.”
“고생하셨습니다.”
폴로미 대리는 택시를 불러서 귀가.
나는 옷을 갈아입은 다음 카페에서 기다리던 밀라를 데리고 가게로 향했다.
예약한 레스토랑은 어패류를 다루는 곳인데 방문객 평가가 나쁘지 않았다.
“차조기를 얹은 농어 뱃살입니다.”
“으흐음~!”
생선회를 입에 넣자마자 작렬하는 밀라의 콧소리.
나도 한 점 집어 먹어 보니 절로 감탄이 나왔다.
꽤 가격대가 있는 코스긴 한데 저번엔 밀라가 술 샀으니까 한 번쯤은 대접할 만하다.
물론 이 녀석이 내 흥미를 끌 만한 정보를 가져왔다는 게 전제 조건이지만.
“그래서, 재밌는 얘기가 뭔데.”
앙증맞은 술잔에 담긴 정종을 홀짝이던 다크엘프는 빙글빙글 눈웃음을 짓더니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밀라가 보여 준 건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이건….”
“아까 부장님 자리에 있던 서류를 우연히 봤는데 글쎄, 지안 오빠 이름이 보이더라고요?”
“나?”
굳이 톡이나 전화로 알리지 않고 직접 만나려 한 건 이것 때문이었나.
사진을 확대하자 내 이름 석 자가 뚜렷하게 적혀 있는 게 보였다.
이름 외의 부분은 파일로 가려져 있어 알아볼 수 없었지만 인사부 서류에 이름이 있다는 건 조만간 인사이동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내 이름 외에 알 수 있는 정보는 빈칸에 적힌 ‘3개월’이라는 단어가 끝.
마침 나는 석 달 후 수습 기간을 마치고 대리로 승진할 예정이다.
그 타이밍에 맞춰 서부 포독스 지점에서 다른 곳으로 발령된다는 뜻일까.
“제대로 찍은 사진은 없어?”
“펼쳐 보려 했는데 부장님이 문 열고 들어오셔서 후딱 튀었어요….”
수습 기간 중에 이런 일이 생길 경우 상정 가능한 가능성은 두 가지다.
아주 좋거나.
혹은 아주 나쁘거나.
“인사 발령 관련 서류 같은데, 짐작 가는 곳은 없어?”
“실은 한 군데….”
밀라는 한참을 고민하다 평소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 음량으로 말했다.
“어디야. 본점?”
“아니요.”
“…그럼, 지방?”
“이건 어디까지나 제 예상인데요, 절대 오빠가 촌구석 지점으로 유배당하거나 그런 건 아니고―”
“뜸 들이지 마.”
밀라는 내 귀에 얼굴을 바싹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요즘 본점에 소문이 하나 돌고 있는데요.”
“무슨 소문.”
“듣기로는 이사회의 결정으로 조만간―”
밀라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 절로 눈이 번쩍 뜨였다.
“후보 선발…?”
“네. 그렇게 들었어요으읍.”
나는 내 앞접시에 놓인 초밥을 집어 밀라의 입에 쑤셔 넣었다.
녀석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녹아내릴 것만 행복한 표정으로 우물우물 초밥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많이 먹어. 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단품으로 추가해도 돼.”
“네헤 오빠아….”
직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이건 흔치 않은 기회가 틀림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