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06화
플랫의 계좌에 무사히 3,000만 굴덴이 입금되고 한 달 하고도 29일이 지났다.
이곳은 넓이가 바다와도 같은 대하大河, 오케아노스강에 둘러싸인 12차원.
그 중심에 자리 잡은 12차원의 신들이 거하는 올림포스산이 플랫의 목적지였다.
“몇 년 만이지.”
케이블카의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 그 너머로 보이는 경사면에 세워진 대형 간판을 바라보며 플랫이 쓸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창문 너머로 해발 수천 미터에 달하는 올림포스산의 봉우리에 각각 자리 잡은 열두 도시들이 보인다.
개중 플랫이 향하고 있는 건 하얀 금속 간판으로 만든 글자가 열 개 세워진 도시.
예술의 신 아폴로가 다스리는 영화의 성지 로렐트리LAURELTREE였다.
“변한 게 없구나, 여긴.”
점점 가까워지는 올림포스의 문화 수도는 플랫이 기억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11개의 봉우리에 위치한 도시를 전부 합쳐야 겨우 6-2차원의 대도시와 비슷해질 정도로 로렐트리는 작은 도시였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이 봉우리에 살길 꿈꾸고 동경해 마지않았기에 로렐트리의 땅값은 해마다 치솟고 있었다.
이곳이 성공한 영화 관계자나 부유층 자제, 아티스트, 은퇴한 스포츠 스타 등의 셀럽들이 모여 사는 부촌.
그리고 모든 차원을 통틀어 가장 권위 있는 시상식이 열리는 상업 영화의 중심지인 까닭이었다.
“…….”
로렐트리 분지를 보는 동안 잊고 지내던 과거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플랫의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거대한 기회와 치명적인 유혹이 손에 손을 잡고 춤추는 월계수의 도시.
그는 움푹 파인 봉우리에 자리 잡은 이 거리에서 이른 전성기를 보냈다.
그 시절의 플랫은 연기력과 별개로 그 나이의 아이다운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이는 어머니와 사별 후 홀로 자신을 키운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싶다는 일심으로 연기력을 갈고닦았다.
아버지 역시 자식의 행보를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었고, 온전하게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천재는 자신의 재능을 꽃피웠다.
‘너는 별이다. 어디에서 빛나든 사람들은 기어코 널 찾아낼 거다.’
데뷔 전, 세 번째 오디션에서 떨어져 낙심했던 아홉 살의 플랫에게 아버지가 건넨 위로는 흔들리지 않는 지남침이 되어 주었다.
또래 아역 배우들이 유혹에 넘어가 길을 잃는 동안에도 플랫은 연기와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실력과 존재감.
소년은 업계 관계자들을 경악시키며 한 편 한 편, 명작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게 되었다.
플랫의 아버지는 어머니 없이도 아들이 훌륭하게 자라고 있다는 사실에 더없는 행복을 느꼈다.
그는 아이에겐 모든 좋은 것을 내어주고 자신의 시간을 아들의 건강한 활동과 교육을 위해 사용했다.
재산이라곤 플랫의 유일한 보호자이자 매니저로서 품위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번 돈으로 구매한 정장 몇 벌과 시계가 전부.
집은 진즉에 자식에게 물려주었고 돈 역시 모조리 플랫 명의의 계좌에 보관했다.
심지어는 아이가 배우가 아닌 한 사람의 아이로서 일상을 보낼 수 있도록 촬영 스케줄을 최대한 조절하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아버지와 아들은 만족스러운 생활을 손에 넣었다.
플랫이 처음 연기를 시작한 계기는 집안의 경제적인 부담을 덜기 위함이었으나, 점차 배우라는 직업에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고 아버지는 이를 무척이나 기쁘게 여겼다.
부족한 것 하나 없는 인생이었다.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아버지가 알게 된 건 플랫이 열네 살이 되던 해의 일이었다.
‘췌장암입니다.’
의사에게 시한부 선고를 받은 부친은 아들에게 심려를 끼치지 않으려고 진료 결과를 숨겼다.
그는 곧 죽게 될 자신을 대신해 아들을 돌봐줄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후보는 뜻밖에도 금방 나타났다.
가정적인 데에다 배우로 활동한 경험이 있어 플랫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줄 수 있는 여자.
자신의 사후에도 아들을 돌봐줄 가정적인 배우자를 찾던 플랫의 아버지는 금방 재혼을 결심했다.
최소한 그녀는 샤펜도라 집안의 재산을 탐내 어린 플랫을 함정에 빠뜨리지 않을 선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혼인 서약과 성혼 선언을 마침으로써 두 사람은 완전한 부부가 되었습니다. 신랑은 신부에게 키스하십시오.’
플랫에겐 새어머니가 생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를 잃었다.
‘고인은 자랑스러운 아버지이자 신실한 성도였으며―’
주연을 맡은 네 번째 영화가 공개되며 대 히트를 기록한 그 날, 아버지는 플랫의 눈앞에서 숨을 거뒀다.
상냥했던 계모는 가면을 벗고 진짜 얼굴을 드러냈다.
그동안 보여 왔던 현모양처의 모습은 전부 연기.
그녀는 플랫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남편의 변호사와 짜고 거짓 증거를 만들어 소송을 걸었다.
시한부 선고가 빚어낸 초조함이 플랫의 아버지의 선구안을 흐리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순간이었다.
플랫은 순식간에 재산의 대부분을 잃었고, 계모는 모습을 감췄다.
아버지에게 췌장암 말기 판정을 내린 병원 의사가 그녀의 지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한참이 지난 다음이었다.
로렐트리를 떠난 플랫은 정처 없이 여러 차원을 방황하기 시작했다.
고향에는 데뷔 전 아버지와 살던 단독 주택이 남아 있었지만 그곳으로 돌아갈 용기는 없었다.
플랫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방탕한 생활을 경험했다.
계모가 심은 트라우마 탓에 여자를 가까이하진 않았지만 그만큼 술을 가까이하게 되었다.
재산의 대부분을 빼앗긴 다음에도 수중에 남은 돈이 적지 않았던 덕에 술값이 모자라는 일은 없었다.
실버스크린 속 순수했던 플랫은 그늘 속 삶에 적응했다.
둥글둥글 귀여웠던 아이는 2차 성장을 겪으며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눈매를 가진 미청년으로 변했다.
새로 구한 가짜 신분. 몸에 문신을 새긴 플랫은 패거리와 몰려다녔지만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차원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은 아래로 흘러내렸고 플랫은 그 흐름을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계모에게 떠밀려 모든 불행이 고여 썩어가는 바닥을 향해 추락하던 남자.
장장 8년 동안 자포자기한 삶을 살고 있던 그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건, 아이러니하게도 또 다른 여인이었다.
‘혹시 연기에 관심 없어?’
‘꺼져.’
‘이렇게 눈이 예쁜데 왜?’
‘시끄러워.’
‘촌동네에서 썩긴 아까워. 아우라가 있다고 해야 하나. 좋은 자질을 가졌어, 넌.’
‘따라오지 말라고 했잖아.’
아마추어 영화감독을 자칭하는 고양이 귀가 달린 여자.
도베르犬人와 사이가 썩 좋지 않은 페르시猫人 태생의 아마추어 감독은 플랫의 뒤를 종일 쫓아다니며 끈질기게 설득을 시도했다.
‘어때? 이번에 새로 쓴 각본이야. 누가 썼냐고? 각본가 고용할 돈이 없어서 직접 머리 싸매고 만들었지.’
‘그렇군.’
꼬리를 살랑거리며 매일같이 각본을 들고 찾아오는 그녀의 공세에 견디지 못한 플랫은 강경 대응에 나섰다.
-부욱!
‘뭐 하는 거야! 그거 원본이라고!! 아직 복사도 못 했는데―’
‘네가 쓴 건 각본이 아니라 쓰레기다, 멍청하긴.’
‘그렇다고… *훌쩍* …찌, 찢어 버릴 것까진 없잖아….’
여자는 플랫의 냉혹한 문전박대에도 굴하지 않고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찾아왔다.
결국, 스물두 살의 플랫은 겁 없는 아마추어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8mm 필름 카메라 앞에 서게 되었다.
‘이 장면은 프레임아웃이라고 몇 번을 말해. 머저리 같으니라고.’
‘미안! 근데 연기 한 적 없다더니 어떻게 그리 잘 아는 거야?’
‘…….’
‘사람이 물어보면 대답을 해 달라고오 쫌!’
‘…다시 찍어. 방금 씬 납득 안 가.’
‘왜? 좋았는데?’
‘지금부터 내가 줄 긋는 대사 3분 내로 고치지 않으면 필름 꺼내서 태울 거야.’
‘히이익!!’
제대로 된 설비와 스태프가 갖춰지지 않은 원시적인 촬영 현장.
경험 많은 플랫은 열정 말곤 가진 게 없는 감독 탓에 팔자에 없는 고생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런 나날이 즐거워지기 시작한 건.
‘오다 주웠다.’
‘아이스크림? 마침 더웠는데 잘됐… 시네마스코프 35mm 필름 카메라?! 어디서 이런 걸―’
‘내일 지미집 배송되니까 직접 카메라 들고 뛰어다닐 생각일랑 말어.’
‘왜 나한테 이런 것까지….’
‘똑바로 다뤄. 떨어뜨리면 죽여 버린다.’
로렐트리를 떠난 이후 처음으로, 플랫의 통장 잔고는 유의미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다.
8년의 공백이 있었지만 그동안 겪은 수많은 사건과 풍파는 그의 연기에 성숙함을 더해 주었다.
플랫의 가르침을 받은 감독 역시 점차 재능을 꽃피워 갔다.
[문댄스 영화제 최우수단편상은―]
두 사람을 중심으로 제작된 영화는 작은 영화제에서 최우수단편상을 수상했지만 놀랍게도 플랫의 정체를 눈치채는 이는 없었다.
처음으로 맛본 작은 성공.
감독은 계속해서 플랫과 함께 독립 영화를 찍었고, 지금까지 네 편의 장편 영화를 발표했다.
플랫은 그녀와 자신의 성취를 진심으로 기뻐했다.
‘너는 별이다. 어디에서 빛나든 사람들은 기어코 널 찾아낼 거다.’
아버지의 말은 옳았다.
플랫은 발견되었고, 또 다른 빛나는 별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관측함으로써 각자의 자리를 찾았다.
마침내 플랫은 행복을 찾았다.
아버지와 함께 있던 시절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욱.
케이블카에서 내린 플랫은 품에서 지갑을 꺼내 안에 넣어 둔 사진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플랫과 감독, 그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
가족사진 속 세 사람은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젠 알 것 같아.”
돈이 되지 않는 독립 영화만 계속 찍었다간 가족에게 좋은 기회를 줄 순 없다.
플랫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아내와 딸에게 더욱 밝은 미래를 선물하고 싶었다.
‘너는 별이야. 아빠 눈 속에서 가장 빛나는 별.’
갓 태어난 아기에게 무의식적으로 아버지가 했던 것과 비슷한 말을 건네자마자 깨달았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아버지가 된다는 건.”
아버지의 말대로 플랫은 삶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도 자신의 빛을 잃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 광채에 주목했다.
그의 아내와 딸이.
영화제의 심사 위원이.
심지어는 대출을 담당한 은행원까지도.
“…….”
자신을 바라봐 준 이들이 없었다면, 그들의 응원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는 건 불가능했다.
독립 영화의 배역을 위해 찌운 살을 6주 동안 빼 전성기의 미모를 되찾은 건.
슬픈 기억이 남은 고향 집을 불태운 건.
아내에게 감추고 있던 본명을 밝힌 건.
예정보다 반년 앞당겨진 오디션에 참가하기 위해 은행을 찾아가 돈을 빌린 건.
전부, 자신이 새로운 모습으로 로렐트리에 돌아왔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아빠 일하고 올게.”
플랫은 사진 속 아내와 딸에게 입을 맞췄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라면 가장 높은 곳에서 빛나는 별이 될 자신이 있었다.
스포트라이트 같은 햇살 속을 걷는 남자의 뒷모습에서 쓸쓸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플랫 샤펜도라.
그는 자랑스러운 아들이자 성실한 남편.
그리고 한 아이의 아버지였기에.
* * *
[사람은 피자 한 판이면, 행복해질 수 있어요. 어른이 되어도 아마.]
마지막 대사와 함께 막을 내린 <7번가의 기적 같은 피자 선물>.
조용한 음악과 함께 흘러가는 엔딩 크레딧을 지켜보는 내 눈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제목만 보고 X신 같은 B급 영화인 줄 알았는데….”
노련한 배우들 사이에서도 플랫의 연기력은 단연 돋보였다.
그가 감상적인 대사를 툭툭 뱉을 때마다 눈물샘이 폭발할 정도로.
“이런 재능을 가진 사람이 3,000만 굴덴이 없어서 은행을 찾아오는 게 말이 되나?”
그런 일이 벌어지게 둔 책임은 플랫이 아닌 세상에게 있는 게 틀림없다.
“제발 플랫 씨 오디션 합격했으면….”
나는 같은 프레드 선배에게 새로 빌린 플랫 샤펜도라 출연작 네 편을 쉬지 않고 전부 관람한 다음 데뷔작인 <7번가의 기적 같은 피자 선물>을 한 번 더 본 참이었다.
당연히 전부 디지털 리마스터링 감독판이었고.
“아. 벌써 6시네. 창구에서 졸면 안 되는데.”
보는 내내 눈물을 짜내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다. 출근 시간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큰일이다.
“퇴근하면 한 번 더 봐야겠다. 아니, 이틀 연속 철야는 좀 무린가….”
여운을 곱씹으며 샤워를 마치고 환복.
밥을 먹는 동안에도, 사택에서 나와 출근하는 동안에도 영화 속 주옥같은 명대사가 계속 머릿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이쪽 차원의 사람들도 크리스마스를 기념한다는 게 의외였지만 7번가의 기적 같은 피자 선물이 완벽한 크리스마스 영화라는 점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리라.
섬세한 각본에 뿌리를 둔 출연자들의 연기, 거기에 더해진 다채로운 연출까지.
퇴근하면 프레드 선배랑 신나게 영화 감상을 늘어놓으며 떠들고 싶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가장 돋보인 건 누가 뭐라 해도 아역 배우 시절의 플랫이었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긴 해도 그의 연기는 분명 영화가 내게 준 감동을 계산했을 때 4할 이상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플랫이 돈을 빌려 간 지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슬슬 오디션 결과가 나와도 좋은 시기일 텐데.
그가 아직도 어린 시절의 연기력을 지니고 있다면 오디션 통과는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16년 동안 공백기를 가졌으니 당장 주연 배우로 발탁되진 못하더라도 괜찮은 배역을 따내면 다시 인지도를 쌓아갈 수 있겠지.
단순히 내가 처음으로 대출 상담을 맡은 고객이 플랫 씨라서 응원하는 게 아니다.
저런 천재가 성공하지 못하면 내가 이 세상에 절망할 것 같다는 게 그의 성공을 기원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저런 천재를 서포트하는 것 역시 은행의 사회적 책임 중 하나일 터.
…인정해야겠다. 사실 절반은 팬심이라는 것을.
“음?”
사택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위치한 서부 포독스 지점에 도착한 나는 흔히 볼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방송국 취재 차량이 대로변에 줄지어 서 있다.
우리 지점을 취재하려는 건 아닐 테고, 근처에서 뭔가 특종이라도 터진 걸까?
나는 혹시라도 두리번대는 기자들에게 붙잡혀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조용히 행원용 통로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선배, 밖에 무슨 일 있는지 아세요?”
“글쎄. 범죄자라도 체포된 게 아닌가 싶은데.”
조용한 동네라 치안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방범 스프레이라도 사 둬야 하나.
그런 걱정은 잠시 접어 두고 평소처럼 시재 점검을 비롯한 오픈 준비를 완료.
부지점장의 지도 아래 이번 달의 금융 상품 판매 목표를 점검하자 시계가 9시를 가리켰다.
영업 개시.
저번 달 잠시 복귀했던 오킨다 과장이 지병이 심해져 병가를 재신청한 덕에 나는 다시 대출 창구를 맡아야 했다.
또 저번처럼 내가 창구 맡자마자 아무도 오지 않는 게 아닐까, 일말의 불안을 품은 것도 잠시.
-딩동
오늘은 아침부터 대출 상담 고객이 있었다.
“B-012번 고객님, 4번 창구에서 안내 드리겠습니다.”
내가 번호를 부르자 고급 정장을 몸에 걸친 선글라스의 사내와 헐거운 티셔츠 차림의 안경잡이 드워프가 성큼성큼 걸어와 창구 앞에 앉았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금일 대출 상담을 담당할 김지안입니다.”
내가 인사하자 정장의 사내가 조용히 선글라스를 벗었다.
영화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생긴 도베르 미남자.
창구 사무원과 고객을 가리지 않고 은행 안에 존재하는 모든 여성의 시선이 그에게 날아가 꽂히고 있었다.
옆에 있는 드워프는 사업 파트너인 걸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대출을 상환하려 합니다.”
“상환, 말씀이신가요?”
이런 사람이 대출받으러 왔었나.
내가 맡은 건은 아닌 것 같다. 프레드 선배나 과장님이 담당한 안건일지도.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사내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기억 안 나시나 봐요. 이 창구에서 제가 신청서 작성하는 거 도와주셨잖아요.”
이 창구에서, 내가?
지점에서 근무한 지 고작 두어 달밖에 지나지 않은 내가 맡은 대출은 얼마 없다.
그중 도베르 고객은 단 한 명뿐.
꼬질꼬질한 비주얼의 살찐 중년 배우―
“…어?”
나는 그제야 반갑다는 듯 귀를 까딱대는 도베르 사내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낯이 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안 씨 괜찮아? 갑자기 왜―”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눈치챈 프레드 선배가 다가왔지만 그 역시 창구에 앉은 사람을 보고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베, 베베베베르게네프 매스터한트 감독….”
누가 일시 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선배가 멈춰 있길래 잠시 양해를 구한 다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유명해요?”
“엄청.”
프레드가 모기만 한 소리로 대답한 걸 듣고 스마트폰으로 이름을 검색하자 화려한 필모그래피가 표시되었다.
수상 이력과 흥행 성적 등으로 미루어 보아 지구로 치면 제작자와 감독을 겸하는 유명인인 듯한데.
-쿠당탕탕!!
다음 순간, 은행 문이 열리더니 카메라와 마이크를 든 취재진의 무리가 로비 안으로 들이닥쳤다.
도베르 미남과 시선을 교환한 드워프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유롭게 기자들에게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터지는 플래시.
보고를 받고 사무실에서 나온 건지 델 몬테 지점장도 일련의 소란에 주목하고 있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프레드 선배가 목소리를 죽이고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 역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이쯤이면 되겠군. 나쁘지 않은 그림이야.”
한동안 카메라 세례를 즐기던 베르게네프 감독인가 하는 드워프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신발을 벗고 의자에 올라갔다.
그는 옆에 선 도베르와 어깨동무를 하더니 대뜸 내게 고개를 돌리고 이렇게 말했다.
“은행의 도움이 없었다면 세상은 플랫 샤펜도라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 베르게네프 매스터한트는 이 자리를 빌어 차원신용금고와 대출 담당자 김지안 씨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든 은행이 대출을 거절하는 가운데 지안 씨만이 플랫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습니다.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준 건 바로 당신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아까 검색한 스마트폰 화면을 내려다보니 한 줄의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단독] 오랜 침묵을 깨고 컴백한 플랫 샤펜도라
9,000 대 1 경쟁률 뚫고 매스터한트 감독 최신작 ‘마스터 오브 텔레폰’ 주연 발탁. | 다차원뉴스
다시 고개를 들자 고작 두 달 만에 살을 빼고 완성된 배우의 포스를 풍기게 된 플랫이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말했잖아요. 반드시 보답하겠다고.”
맞잡은 손. 기자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셔터를 눌러 댔다.
잠시 고개를 돌리자 델 몬테 지점장이 나를 보고 엄지를 곧게 세우고 있는 게 보였다.
…멘트 쳐도 괜찮다는 뜻이겠지, 저거?
“저는 일개 은행원으로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차원신용금고가 고객보다 우선하는 가치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런 의미에서?”
“대출 상환을 접수하기 앞서 개인적으로 두어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뭐든 말씀하시죠.”
“괜찮으시다면 두 분의 사인을 몇 장인가 받아도…?”
“좀 더 큰 부탁을 하셔도 될 것 같군요.”
베르게네프 감독이 호기롭게 말했다.
그래, 나 꽤 큰일 했잖아.
사인받는 정도는 괜찮겠지.
“그럼, 사양 않겠습니다.”
나는 플랫이 왕년의 천재 아역이었다는 사실을 선배에게서 들은 날부터 언젠가 반드시 써먹겠다는 생각으로 서랍에 고이 준비해 두었던 종이 뭉치를 꺼내 부채처럼 펼쳤다.
영혼을 거두는 자 집합투자상품 신규 가입 신청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연금저축계좌 신규 가입 신청서.
세계수의 바람 자유적립적금 신규 가입 신청서.
풍성한 여신의 축복 주택청약종합저축통장 신규 가입 신청서.
무배당 영원한 동반자 세액공제연금 신규 가입 신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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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등등 고객의 서명을 받으면 내 실적에 그대로 반영이 되는 서류들.
“사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
“괜찮으시다면 감독님도 같이.”
“…….”
“스태프분들의 예금 계좌도 당행으로 옮겨 주신다면 정말로 좋을 것 같습니다.”
“…….”
방금 전의 열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은행 로비가 침묵으로 뒤덮였다.
“혹시 볼펜보다 만년필을 선호하시나요?”
아, 왜 사인 안 해 주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