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05화
“플랫 샤펜도라?”
“네. 그런 이름이었어요.”
신청서와 함께 제출해야 하는 서류를 확인해 보니 빠진 게 있어 플랫을 돌려보낸 나는 곧바로 프레드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직 수습 중인 주제에 호기롭게 ‘돈, 빌려 드리겠습니다’ 같은 소릴 지껄여 버린 탓에 선배를 구워삶아야 하는 상황에 처한 까닭이었다.
…어인이니까 굽거나 삶는다는 표현은 좀 NG인가? 어쨌든.
“그 플랫 샤펜도라가, 은행에 돈을 빌리러 왔다니….”
막상 내가 얘길 꺼내자 자칭 영화광이라는 프레드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유명한 배우예요?”
“정확히 말하면 ‘유명했던’ 배우지. 왕년에 엄청나게 잘나갔어.”
“왕년이라고 하면 대충 언제쯤이죠?”
“어… 20년 전? 이제 갓 서른 넘었을걸.”
“20년 전이면 열 살이잖아요.”
“아역 배우였으니까.”
프레드는 스마트폰으로 플랫 샤펜도라의 필모그래피를 검색해 내게 보여 주었다.
당연히 지구에서 자란 내가 본 적 없는 영화들이었지만 제목 옆에 적힌 흥행 성적은 하나같이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세상에 0이 몇 개야 대체….”
지구와 달리 국가가 아닌 차원 단위로 배급되는지라 이쪽에선 영화 한 편 잘 찍으면 로열티로 대대손손 먹고 살 수 있는 돈이 손에 들어온다.
하지만 흥행 성적보다 인상적인 건 영화 포스터에 박혀 있는 이상적인 미소년의 얼굴이었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지만 내가 만나고 온 남자가 이 아이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평생 놀고 지내도 될 만큼 벌었던 사람이 어쩌다 은행에 돈을 빌리러 온 걸까요.”
“그야 모르지. 흥청망청 쓰다 다 날렸을 수도 있고, 아니면 부모가 다 채갔을지도.”
“자주 듣는 얘기네요.”
“그보다 필모를 잘 봐.”
스마트폰 화면의 스크롤을 내려 확인한 필모그래피는 영화 여섯 편이 전부였다.
“화려한 흥행 성적으로 데뷔한 플랫은 4년 동안 히트작 몇 편을 연달아 찍고 나서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어.”
“무슨 일이 있던 걸까요.”
“추측성 기사만 난무하고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었어. 어쩌면 사춘기 겪으면서 어마어마하게 역변한 걸지도.”
확실히 아까 본 살집 붙은 털보의 모습은 왕년의 천재 아역 배우와 거리가 멀었다.
스타덤에 올라선 아역이 청소년기에 약물 등에 빠져 패가망신하는 건 지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플랫의 눈빛은 과거의 영광에 취해 길을 잃은 얼간이의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저런 눈은 오직 뚜렷한 비전과 계획을 품고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스스로를 과신하는 광인.
아니면 진짜배기 실력자.
과연 어느 쪽일까.
직무권능을 믿어 본다면 후자일 텐데.
“그래서, 지안 씨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저요?”
“담당자는 지안 씨잖아. 지안 씨가 생각하기에 믿을 만하다 싶으면 내가 지점장님을 설득해 볼게.”
프레드는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대체 어떻게?
“괜찮겠어요?”
“솔직히 말해서 불안해. 3,000만 굴덴 빌려 간다고 리즈 시절의 외모가 돌아올지도 모르겠어.”
“동의해요. 게다가 16년 동안 공백기를 갖고 있던 배우가 오디션에 합격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고요.”
“근데 지안 씨. 그걸 알고도 엄청 대출해 주고 싶어 하는 표정이잖아, 지금. 믿는 구석이 있는 거야. 그렇지?”
선배는 금융 상품 파는 건 젬병이어도 다른 업무 이해도가 높아 인재개발부가 사내 강사 후보로 점찍어 둔 사람이다.
눈치도 빠르다는 건 알고야 있었는데 생각했던 이상으로 예리하다.
“근거는 있어요.”
“직무권능?”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용도나 담보는 없지만 빌린 돈 갚을 능력은 확실히 있다고 봐요.”
“그런 것도 알 수 있다니 편리한 권능이네. 실적 올리는 데엔 내 것보다 훨씬 도움 될 거 같아.”
프레드는 작은 콧구멍을 벌렁대며 씨익 웃었다.
“근데, 제가 대출해 주고 싶어도 품의서 자금용도란에 미용이나 오디션이라고 적을 순 없잖아요.”
“정확하게 봤어.”
“내규 안 걸리는 범위 내에서 어떻게 할 순 없을까요.”
“실은, 확신만 있다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아니야.”
선배가 품의서의 직업란을 가리킨 순간 나는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깨달았다.
“하긴, 은행이 연예인에게 쉽게 돈을 빌려주긴 하죠.”
연예인의 신용도는 인지도와 비례한다.
플랫 샤펜도라는 그저 그런 배우가 아니라 여섯 편의 초대박작에 연달아 참여했던 스타다.
당장은 인지도가 없더라도, 그 필모그래피를 본다면 3,000 정도는 빌려줄 수 있다. 아마 지점장님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다 돈을 빌려야 할 정도로 몰락했는지는 몰라도 유명 배우의 네임 밸류를 무시할 순 없을 거야.”
이쪽 세상이 돌아가는 꼴 역시 대한민국과 그리 다르지 않다.
유명 연예인들은 투자를 위해 개인이 아닌 법인 명의로 거액의 돈을 은행에서 대출해 비싼 건물을 사곤 한다.
이는 은행이 유독 유명인들에게 금고 문을 쉽게 열어 주는 버릇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연달아 대출을 거절당한 이유도 알 것 같네요.”
“지안 씨도?”
“네. 행원들이 유명 배우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거겠죠. 그게 아니면 영화는 봤어도 주연 배우 이름을 몰랐다거나.”
“제일 최근에 개봉된 작품이 16년 전의 영화니까 기억 못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지금 그의 모습은 20년 전의 미소년과 거리가 멀다.
아무리 검색해 봐도 플랫 샤펜도라의 최근 사진은 한 장도 나오지 않았으니 이름만 듣고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건 불가능했겠지.
“오디션 준비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얘기 듣자마자 돌려보냈을 거 같은데요.”
“이래서 실적만 보고 기계적으로만 업무를 처리하는 애들은 승진이 느린 거겠지.”
“다른 은행 사람들은 직무권능도 없으니까요.”
“그건 그래.”
나는 플랫과 함께 중간까지 작성한 대출 신청서 옆에 두었던 품의서를 꺼내 비고란에 몇 자 끼적였다.
대표작의 박스 오피스 수익.
직무권능으로 확인한 정보.
그리고 기타 등등, 유리한 정보들만 골라서.
“16년의 침묵을 깨고 재기를 꿈꾸는 천재 배우라….”
“지안 씨 방금 그거 비고란에 적어 둬. 지점장님, 오늘처럼 흐린 날엔 평소보다 감상적으로 변하시거든.”
새삼스럽지만 다시 한번 떠올렸다.
내가 한 명의 은행원으로서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인지.
“멋진 일이네요. 돈을 빌려주는 거.”
“나도 그렇게 생각해.”
각자의 자리에서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꽤 낭만이 있을지도.”
은행은 언제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 * *
플랫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필요한 것을 전부 챙겨 은행으로 돌아왔다.
전화로 확인한 건데 그는 자신이 직접 법인 대표를 맡고 있었다.
조사한 자료에는 그의 유일한 가족인 계모가 기획사 대표를 맡고 있다 적혀 있었는데 뭔가 사정이 있는 듯하다.
어쩌면 플랫이 빈털터리가 된 이유와 관계가 있을지도.
다만, 여기서부턴 사적인 영역이니 발을 들여선 안 된다.
나는 대출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은행원의 본분을 다하면 된다.
“네. 거기까지 적어 주시면 됩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서류에 적힌 정보를 전산에 입력하고 품의서를 마저 완성했다.
조회한 주소는 어째서인지 주택이나 아파트가 아닌 포독스시 변두리에 있는 낡은 여관의 것이었다.
묘하다. 위그드라실 위키엔 시골에 단독 주택 짓고 산다던데 돈이 필요해서 집을 팔아치운 거려나.
아무래도 편집이 자유로운 인터넷 백과사전의 신뢰도가 떨어지는 건 이쪽 차원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이 여관은 플랫 씨가 소유하고 계신 건가요.”
“아니요. 그제부터 장기 투숙 중입니다.”
“여관 말고 전입 신고 마치신 주소를 적어 주셔야 합니다. 이 부분만 다시―”
“집은 제 손으로 불태웠습니다.”
“네?”
“목표를 이루기 전까진 돌아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
“전입 신고는 끝내 두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플랫의 눈에선 비장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어쩌면 난 직무권능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이 사람에게 설득되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주소는 이대로 두는 거로.”
집을 불태웠다는 얘긴 굳이 비고란에 적지 말자.
그 대신, 나는 지점장님이 품의서에 태클 거는 일 없이 스무스하게 사인해 주길 진심으로 기도했다.
대출이 승인되지 않으면 다음에 불타는 건 이곳 차원신용금고 서부 포독스 지점이 될지도 모르니까.
“심사 끝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언제까지 가능할까요.”
“이르면 내일 오전에는 문자로 알려 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플랫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표정.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도 무언가 뜨거운 것이 벅차올라 홀린 듯이 같이 일어나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김지안 씨.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확정된 것도 아닌데요 뭘.”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보답이라.
대배우로 화려하게 스크린 복귀해 주가 떡상한 다음 방카슈랑스랑 랩 어카운트 같은 상품을 많이 사서 내 실적을 올려 주면 좋겠다.
VVIP 전용 자산 관리 서비스 가입하면서 내 소개로 왔다고 말해 줘도 고맙고.
“잘되면 투자자분들께 말씀드려서 스태프분들 예금 계좌 좀 저희 쪽으로 옮겨 주세요.”
“기억해 두겠습니다.”
다만, 너무 욕심 그득한 속내를 비치는 건 장기적으로 좋지 않아 보여 가볍게 농담처럼 한마디하고 끝냈다.
“오디션, 건투를 빕니다.”
문을 열고 지점을 나서는 플랫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로써, 나의 첫 대출 상담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이제 남은 건―
* * *
메기 수염이 트레이드 마크인 검은 피부의 어인족 프레드는 지점장실에서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분명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전도유망한 후배에게 큰소리를 쳐 뒀지만 막상 지점장실에 들어오자 긴장을 감출 수 없었다.
차원신용금고 서부 포독스 지점장 라비도 델 몬테는 전신이 금속으로 이루어진 것치곤 상당히 사람 냄새가 나는 상사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다른 태엽장이와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
다른 종족 출신 행원들과 비교했을 때 그들은 압도적으로 꼼꼼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이곳에 대출품의서를 가져오는 건 프레드가 아닌 과장 혹은 차장의 역할.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상사가 과연 수습 1개월 차 신입 행원이 작성한 품의서에 순순히 사인해 줄까.
심지어 그 고객은 신용도도 담보도, 심지어 제대로 된 숙소도 없지 않은가.
“음. 오케이.”
다행히도, 고통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이즈 큰 것만 본점 심사부에 올려 둘게요. 나머지는 전부 결재 끝났으니까 대출 집행하는 거로.”
“…네?”
뜻밖에도 델 몬테는 한마디도 토를 다는 일 없이 김지안의 품의서에 서명해 주었다.
심지어 이율은 낮은 고정 금리에 상환 기한 역시 꽤 나중이었다.
“7번가의 기적 같은 피자 선물. 매년 크리스마스에 빠뜨릴 수 없는 영화죠. 그새 플랫 샤펜도라가 서른이 되었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
“지점장님, 혹시 팬이신가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사적인 감정에 휘둘린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행장님께서 직접 고르셨다는 김지안 계장의 직무권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확인해 보고 싶군요.”
델 몬테는 웃고 있었다.
프레드가 서부 포독스 지점에서 근무한 지 2년이 넘었지만 몇 번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이 품의서는 따로 보관하고 상시 경과 보고하세요.”
“예. 그리하겠습니다.”
프레드는 깊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다음 지점장실에서 나왔다.
그의 시선 끝에는 태풍의 눈으로 추측되는 정체불명의 낙하산 신입 행원이 있었다.
“지점장님까지 관심을 둘 정도면, 역시 지안 씨가 키 퍼슨인가.”
다수의 은행이 합병한 까닭에 임원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이 세 개의 파벌로 갈라져 다투는 차원신용금고.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특별한 직무권능을 지닌 김지안은 지위와 명예를 걸고 다투는 사내 정치의 테이블 위에 나타난 새로운 블루칩일지도 모른다.
“조만간 크든 작든 풍파가 일어날지도….”
물론, 이번에 대출을 받고 플랫 샤펜도라가 얼마나 성공할지 지켜보는 게 먼저겠지만.
“조만간 본점이나 다른 데에서 지안 씨 채가려 들겠지.”
김지안은 능력 있는 신입이고, 아마 빠른 시일 내로 더욱 중요한 자리에 발탁될 가능성이 있다.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
프레드는 자판기에서 비타민 음료를 뽑았다.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김지안과 같이 일할진 모르겠지만 사수 된 사람으로서 도움은 아끼지 않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