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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4/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04화

내가 근무하게 된 지점은 본점에서 남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포독스시에 위치하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계장님.”

차원신용금고 서부 포독스 지점의 아침은 이르다.

직원용 통로에서 창구 업무 전문 텔러분들과 인사를 나누며 출근.

한국의 일부 1금융권 시중 은행이 그런 것처럼 나는 반년의 수습 기간 동안 계장 직함을 달고 일하게 되었다.

수습이 끝나면 바로 대리로 승진하고 연봉도 오른다는데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

“지안 씨 좋은 아침.”

“안녕하세요 프레드 선배, 오늘 점심 뭐 드실 거예요?”

“어… B정식?”

금고에서 선배 행원과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당일 필요한 만큼 현금을 꺼내 시재함에 넣고 영업 준비를 마쳤다.

정장을 입고 창구에 앉으면 느껴지는 이 만족감.

취업에 성공했다는 자부심이 의욕 증진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은 아름답다.

“지안 씨 일 많이 빨라졌네.”

어인족 대리 프레드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메기 수염을 씰룩이며 웃는 게 퍽 흡족해 보인다.

“다 선배가 가르쳐 준 덕분이죠, 뭘.”

아부는 아니었다.

한 달 동안 같이 점심 먹고 커피 마시면서 친해진 덕에 텔러와 다른 행원 선배들에게 현장 업무를 수월하게 배울 수 있었으니까.

“아니야. 이렇게 빨리 배우는 사람 공채 동기 중에도 없었다니까.”

“더 정진하겠습니다… 하하.”

특채로 들어왔다고 노골적으로 낙하산 취급하지 않는 사람이 사수라서 정말 다행이다.

실수 없이 일하기까지 최소한 석 달은 걸릴 줄 알았는데 나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업무에 적응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일이 적성에 맞는 듯싶다.

“어제 빌려준 영화 다 봤어?”

“1편 다 봤고 오늘 마저 달리려고요. 액션 미쳤던데요?”

깔끔하게 정돈된 아프로 헤어가 인상적인 프레드 선배는 영화광이다.

그는 이쪽 세상의 명작 영화를 빌려주는 등 업무 외적인 부분에서도 내게 친절하게 대해 주고 있었다.

“맞다. 오늘부터 과장님 자리 비우는 거 알지?”

“예. 병가라고 들었습니다. 많이 아프신가요?”

“그것 때문인데, 부득이하게 내가 대행으로 전결권 받게 됐거든. 2,000만 굴덴이 한계지만.”

“진짜요?”

프레드 대리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결권은 일정 액수 이하의 대출을 지점장이나 본점 여신 심사부의 결재를 받지 않고 내줄 수 있는 권한이다.

전결권이 주어진 과장급 행원은 원화로 환산했을 때 2,000~3,000만 굴덴 정도의 금액을 빌려줄 수 있다.

은행 입장에서 보면 그리 크다곤 할 수 없어도 평범한 샐러리맨의 몇 달 치 월급에 달하는 액수.

대리라고 해 봤자 입행 시기가 나와 2년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프레드가 심적인 부담을 느끼는 것도 이해가 갔다.

“내가 왜 이 얘길 하냐면, 부지점장님도 출장 나가 계시잖아?”

“예.”

“과장님 일 내가 맡아야 하니까 지점장님이 내가 하던 업무 지안 씨한테 맡겨 보라 하시더라고.”

“그래도 돼요?”

솔직히 말해서 쾌재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프레드 대리는 중간 규모 이하의 대출을 원하는 개인과 법인 고객의 상담을 맡고 있었다.

물론 사수와 상사에게 대출품의서를 올려서 결재를 받아야 하지만 수습 한 달째인 햇병아리 계장인 내겐 여신 업무를 경험해 볼 좋은 기회다.

여신 업무를 맡아 보고 싶은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은행원이 되고 나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바로 남에게 돈을 빌려주는 거였으니까.

“안 될 게 뭐 있어. 나 하는 거 몇 번 봤잖아. 퇴근 후에도 계속 복습하고 있다며. 품의서 쓸 줄 알지?”

“저번 주에 혹시 모르니 배워 두라고 하셔서 연습해 두긴 했죠. 그래도 실전은 처음이라 선배가 검토해 주셨으면….”

“철저하네. 괜히 행장님이 데려온 게 아니었어.”

“아….”

그 얘긴 누구한테 들은 걸까. 당황한 찰나 프레드 선배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디서 들었나 궁금해?”

“아무래도, 네….”

“본점 지인이 말해 줬어. 걱정하진 마, 어디서 떠들고 다닐 생각 없으니까. 그냥, 나중에 잘되면 나 모른 척하지 말아 줘. 알았지?”

넉살맞게 웃으며 어깨를 두드리니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근데 선배, 사실 저 행장님 만난 적 없어요. 아시다시피 출장소도 없는 3-1차원 지구 출신이고요. 왜 뽑힌 건지 솔직히 아직도 모르겠거든요.”

“차차 알게 되겠지. 10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얘기가 돌던데… 뭐, 이건 지금 당장 신경 쓸 일이 아니니까.”

“하긴, 높으신 분들 일이니 뭔가 생각이 있겠죠. 그래서 대출 상담, 오늘부터 바로 시작하면 되나요?”

“당연한 소릴.”

“예쓰…!”

나는 불끈 주먹을 쥐고 의욕을 과시한 다음 입출금 창구에 있던 명패를 집어 대출 창구로 옮겼다.

내가 담당자가 된다 해도 책임은 결재해 주는 양반들이 대부분 져야 하니까 부담 가질 필요는 없다.

지루한 수신 업무만 맡으며 통장이나 개설하던 시간과는 작별.

마침내, 한 달 동안 아껴 온 직무권능을 써먹을 때가 왔다.

“그럼 어디. 대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상담해 볼까.”

-찰싹

양 볼을 손바닥으로 두드려 기합을 주입.

새삼스럽지만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언제 대출 업무를 맡을 수 있을까 손꼽아가며 기다리고 있던 내겐 꿈을 이루는 출발선에 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갑 사정이 넉넉한 월초라서 그런 걸까.

대출을 원하는 고객은 영업이 시작되고 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사이 나는 대기 중이던 다른 고객을 창구로 받아 계좌 개설이나 예·적금 등의 수신 업무를 진행해야만 했다.

안타깝게도, 지루한 상황은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갈 때까지 이어졌다.

“…왜 아무도 안 오는 거지.”

평소 개인이든 법인이든 대출받으려고 앞다퉈 번호표를 뽑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대출 신청자는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놀리는 것도 아니고, 진짜.”

왜 내가 창구 맡자마자 이 꼴이 난 걸까.

그나마 아까 맡은 고객님 중 몇 분이 펀드 들고 IRP(개인형 퇴직 연금) 가입해 주셔서 실적 올리긴 했지만, 방문 고객은커녕 상담 전화 한 통 없다.

솔직히 말해서 그놈의 실적 좀 안 나와도 되니까 어서 대출 좀 해 주고 싶다.

“왜 그래. 어디 가려워?”

“아뇨, 프레드 선배. 잠깐 땀 나서.”

“부담 갖는 것도 이해는 가는데 긴장하진 말어.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 밥 언제 먹을 거야?”

“선배 돌아오고 나서요.”

“오케이. 빨리 먹고 올게.”

오전 업무를 마친 프레드는 담뱃갑을 들고 직원 식당으로 향했다.

아무리 봐도 일 처리 속도 장난 아니다, 저 사람.

공채 행원 중에서도 에이스에 속한다는 소문은 사실인 모양이다.

나도 질 순 없지.

다시 만전의 준비를 기하고 최고의 미소와 자세로 대출 신청 고객을 기다리기 시작한 지 15분이 지났을 즈음.

대출 창구 전산에 표시된 대기 중인 고객의 숫자가 0에서 1로 변했다.

-딩동!

“B-001번 고객님, 4번 창구에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번호표를 든 사내가 이쪽을 보았다.

개과 동물의 귀와 꼬리가 달린 인간과 흡사한 외모의 종족, 도베르.

덥수룩한 머리카락과 수염, 그리고 안경이 가린 얼굴. 중간 정도 되는 키에 군살이 꽤 붙어 있다.

캐주얼… 하기보다 깔끔한 옷이 없어 아무거나 주워입고 나온 듯한 지저분한 복장.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40대 정도로 보인다.

헤어스타일과 수염을 보니 샐러리맨은 아닐 테고. 자영업자. 아니, 프리랜서일까.

어느 쪽이든, 은행의 도움이 필요하고 성실히 사는 사람이라면 미소로 맞이하는 게 나의 업무. 일하자, 일.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고객님.”

“돈을 빌리고 싶습니다. 3,000 정도.”

3,000만 굴덴이면 신용 대출로 충분히 커버되는 금액이다. 신용도에 따라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일단은 담당하게 될 첫 대출 안건으로서 흠잡을 데 없는 사이즈. 해낼 수 있다.

“용도를 알려 주시겠어요?”

내가 묻자 사내는 낮게 깔린 미성으로 대답했다.

“저는 누가 봐도 멋지고 잘생긴 모습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다음 달 말까지.”

그렇게 말하는 사내의 눈동자에는 강렬한 의지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

“…….”

예상치 못한 대답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잘생겨지고 싶어서 은행에서 돈을 빌린다고?

한 달 뒤에 소개팅 있다거나 그런 건가.

대출품의서의 자금용도란에 미용이라고 적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3,000만 굴덴은 프레드 선배의 전결권을 초과하는 금액이다.

선배야 내가 간곡히 부탁하면 한숨 쉬면서 도장을 찍어 줄지도 모르지만 그걸 지점장실로 가져갔다간 대참사가 일어날 것이다.

지점장님이 도장 대신 파일 모서리로 나와 선배의 정수리를 자비 없이 찍는 광경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모발 이식을 받고 싶진 않았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 몇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좋습니다.”

그래. 뭐, 빌려주지 못하는 건 아니다. 신용 대출이잖아. 갚기만 하면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그 전에 몇 가지 확인해야 할 게 있다.

“성형 수술 비용이 필요하신 건가요?”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무례한 질문을 던졌다.

의료미용대출. 중국에서 실제로 유행했었다고 하니 이쪽 세상에서도 비슷한 걸 원하는 사람이 있어도 이상하진 않다.

다만, 과거 신용금고라고 불리던 한국의 2금융권 금융 기관과 이름이 비슷하긴 해도 차원신용금고는 엄연한 1금융권 시중 은행.

대부업체의 이자율 34.9% 여성 전용 무담보 소액 대출이라면 모를까, 빌린 돈으로 성형 수술을 하겠다는 고객한테 냉큼 입금해 줄 순 없는 법이다.

“그럴 리가요.”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 묻는 듯 사내는 무심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가장 주목받던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충분합니다.”

이제야 조금은 드러난 이목구비.

살집에 파묻히지 않고 이글이글 빛을 발하는 눈매.

사내가 품은 기묘하리만치 강렬한 자신감은 보이지 않는 벽처럼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흐음.”

확실히 몇몇 파츠에서 긁지 않은 복권의 느낌이 나긴 하는데.

…는 개뿔.

지금은 이딴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성형 수술 목적의 대출이 아니라고 하셔서 안심했습니다.”

“그럼 대출 가능한 건가요?”

“몇 가지만 더 확인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사내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지금 알아야 하는 건 두 가지다.

눈앞의 이 사내가 대출까지 받아 가면서 복권을 긁으려 하는 구체적인 이유.

그리고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경제적 능력과 담보 등 돈을 갚을 수 있는 여력의 유무다.

이 사람이 클럽에서 날아다니든 부잣집 아가씨와 맞선을 보고 기둥서방이 되든 은행 입장에선 상관이 없다.

고객이 돈을 떼먹는 일 없이 이자까지 쳐서 갚기만 하면 아름다운 대출과 상환의 고리가 완성되는 거니까.

근데, 아무리 그래도 자금용도란에 미용이라고 적을 순 없는 거잖아.

“죄송합니다만 미용 목적이라고는 서류에 적을 수 없다 보니, 미용을 통해 어떤 목적을 이룰 계획이신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목적, 말입니까?”

“네. 예를 들어 입사 면접을 앞두고 계신다든지….”

사내는 아랫입술을 앙다물고는 이해한 듯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대출을 받아 본 적이 없긴 하지만 제 나름대로 알아보니 신용도나 담보 같은 게 중요한 모양이군요. 제겐 없습니다만.”

“…….”

그럼 무슨 깡으로 돈 빌리러 온 겁니까 당신은.

“그러니까,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드리는 게 도리인 것 같습니다. 제가 왜 그 돈을 필요로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갚을지를.”

어째서일까, 내 눈에 그의 모습은 궁지에 몰린 미치광이가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까 입사 면접을 예시로 드셨죠? 프리랜서인 제가 해야 하는 일은 면접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포트폴리오를 제출한 클라이언트와 면담을 진행해야 하나요?”

“비슷합니다. 다만, 저는 영화배우니까 그것을 오디션이라고 부릅니다.”

내면에 가득 찬 확신과 카리스마가 스며 나오는 목소리. 나는 고개를 붕붕 젓고 다시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오디션?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미안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남자 영화에서 괜찮은 배역 따내는 배우들과는 혈연 지연 학연조차 없을 비주얼이다.

“혹시 당행을 찾으시기 전에 타행에서도 대출 상담을 진행하셨는지요.”

“예. 다섯 곳 모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거절하더군요.”

“…….”

괜히 짠해졌다.

저 사람이 요구한 액수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금액이었긴 한데 나도 화가 시절 비상금 대출 신청했다가 은행 다섯 곳에서 까여 봤다.

똑같이 상업 예술 분야에 종사하던 사람으로서 무시할 수 없는 상담.

저렇게 자신만만한 걸 보아하니 이 양반에겐 믿는 구석이 있는 듯한데 그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믿을 수 있는 근거인지는 알 수 없다.

매뉴얼을 따른다면 내가 지금 해야 하는 행동은 다음과 같다.

필요한 서류를 말해 주고 집으로 돌려보낸 다음 이것저것 조사하는 것.

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

직무권능을 쓰면 되니까.

“고객님께선 성함이….”

“플랫 샤펜도라입니다.”

나는 대출 신청서를 찾는 척 배지에 손을 가져다 댔다.

-파아앗

직무권능이 발동되자 사내의 머리 위에 내 눈에만 보이는 자그마한 대리석 여신상이 나타났다.

조각상이 오른손에 들고 있는 건 멋들어진 청동 저울.

저울의 팔 양 끝에 달린 접시 위에는 각각 검은색과 하얀색을 띤 구체가 올라가 있었다.

내가 각성한 직무권능의 이름은 ‘여신판단女神判斷’.

대상이 가까운 장래에 얼마나 큰 돈을 벌어들일지 단기적인 잠재력을 파악하는 능력이다.

저울의 팔이 하얀 공이 있는 방향, 그러니까 오른쪽으로 크게 기울수록 대상의 잠재력은―

“……?!”

저울의 눈금이 극단적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한 달 동안 대출 상담 고객들에게 몰래 권능을 써먹어 봤지만 처음 보는 케이스.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든 알 수 있다.

이 남자, 돈 되는 고객이다.

그렇다면 내가 취해야 하는 행동은 하나뿐.

“역시 대출은 어렵습니까.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 플랫의 손목을 붙잡았다.

-턱

“돈, 빌려 드리겠습니다.”

영화배우라고 했나?

미래의 우주 대스타에게 디딤돌을 놓아주기로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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