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03화
면접관들이 기대하던 것과 다른 대답을 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채용이 거의 확실한 상황에서 괜한 짓을 한 건진 몰라도 마음은 후련했다.
“결과는 2주 후에 문자로 통보하겠습니다.”
면접을 마친 나는 오만 원권 지폐 두 장이 든 봉투를 받아 들고 빠른 걸음으로 승강기로 향했다.
1층으로 내려와 회전문을 밀고 나온 직후 무심코 돌아섰는데, 간판이 익히 아는 시중 은행의 것으로 변해 있었다.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 봤지만 그곳에 차원신용금고의 로비는 없었다.
귀신에게 홀린 건 아니다.
나는 지금 10만 원이 든 봉투를 들고 있었고 겉면에는 분명 차원신용금고의 로고가 인쇄되어 있었으니까.
“뭐, 붙으면 연락 오겠지….”
남은 건 결과를 기다리는 것뿐.
비일상이 비일상으로 끝난다면, 그건 인연이 아니었다는 뜻이겠지.
나는 집주인을 찾아가 5만 원을 주고 며칠만 더 시간을 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그리고는 입원한 동안 녹이 슨 몸을 다시 움직일 겸 공사 현장을 전전하며 돈을 벌어 밀린 월세를 냈다.
이미 면접 합격 여부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 안에는 작지만 강력한 엔진이 자리 잡았다.
팔리지 않는 그림이나 그리던 나를 불러낸 은행이 있다.
그 사실은 내게 여태껏 시도한 적 없는 방식으로 세상과의 관계를 정립할 수 있다고 일깨워 주었다.
탈락하더라도 좋다.
지금의 나에겐 어떤 길이든 걸어갈 힘이 생겼으니까.
채용 발표를 의식하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며 지내다 보니 2주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그렇게 맞이한 11월 1일 월요일.
나는 일찍 일어나 샤워를 마치고 면도를 했다.
머리를 말리고 정장으로 환복.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스마트폰을 두고 가만히 진동이 울리는 걸 기다렸다.
정자세로 앉아 대기하길 어언 한 시간.
<제목 없음>
[Web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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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르륵
일주일 만에 열린 반지하 단칸방 창문.
날것의 햇살이 안으로 쏟아졌다.
2021년 11월 1일 월요일. 맑음.
[김지안 님, 차원신용금고의 새 가족이 되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나는, 은행원이 되었다.
* * *
3개월 후.
“지금부터 신입 행원 사령장 교부식이 있겠습니다.”
행가 제창을 마친 신입 은행원들이 차례차례 단상으로 올라가자 선배 뱅커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곳은 차원신용금고 본점 지하 1층, 대강당.
오늘은 지난 3개월 동안 진행된 합숙 연수를 마친 신입 행원들이 임명장과 배지를 받는 날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2021년 하반기 공채, 특채를 통해 입행한 우수한 인재들, 이었지만.
그중에 딱 한 명.
스펙도 커리어도 없는 캐리커처 화가가 끼어 있었다.
“다음. 김지안 씨.”
경력 없이 특채로 뽑혀 공채 행원들에게 낙하산 5인조의 멸칭으로 불리는 다섯 명.
그중 첫 번째로 부행장에게 배지를 받는 건.
“네.”
그래. 나다.
“연수원 성적이 나쁘지 않더군.”
“감사합니다.”
부행장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공채 합격자들에겐 가벼운 덕담 한마디씩 던지던 그였지만 내겐 굳이 연수 성적까지 들먹이며 주시하고 있다는 어필을 하고 있다.
이유야 뭐, 쉽게 짐작이 갔다.
“자네를 불러들인 행장님의 판단이 옳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할 거야.”
내 지켜볼 걸세.
성분 구성이 복잡한 미소를 지은 늙은이는 내 재킷 옷깃에 배지를 달며 목소리를 낮췄다.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네. 일개 환쟁이가 은행에서 뭘 할 수 있다는 건지.”
당사자인 나는 그놈의 은행장 얼굴도 본 적 없는데 주위 사람들은 전부 낙하산 취급.
정황상 그 사람이 날 은행으로 불러들인 건 사실인 듯하니 반박할 순 없지만 날 얼마나 오래 봤다고 저딴 식으로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제가 여기서 뭘 할 수 있는진 천천히 찾아갈 예정입니다.”
“별생각 없이 산다는 건 잘 알겠으니 이쯤 해 두지―”
“다만, 무슨 생각으로 행장님의 호의를 받아들였는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정면을 주시한 채로 말하자 옆에 있던 특채 동기에게 다가가던 부행장이 걸음을 멈추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말해 보게.”
“월급 많이 주잖아요.”
“흠….”
내 대답을 들은 부행장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에게 그만한 값어치가 있길 바라네.”
“노력하겠습니다.”
그 연봉이 탐나서 석 달 내내 구보 뛰고 산도 타고 이론이랑 전산 다루는 법을 익혔다.
이제 와서 사고치고 잘릴 수는 없지.
“다음, 밀라 레브리에―”
부행장은 다시 꾸며낸 미소로 특채 동기 넷에게 차례대로 배지를 달아 주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소동물처럼 귀여운 인상의 다크엘프.
빛의 고리와 날개를 가진 장발의 천사.
지적인 인상의 이족 보행 도마뱀.
그리고 정장을 입은 파란 촉수 다발.
“이상으로, 2021년 차원신용금고 하반기 신입 행원 사령장 교부식을 마칩니다.”
객석의 임직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를 발했다.
그들의 대부분은 동기들이나 부행장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모습과 상당히 동떨어져 있었다.
“이제야 실무 투입인가. 오래 걸렸네.”
석 달 전이었으면 지레 겁을 집어먹었을 법한 광경이지만 익숙해진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차원신용금고次元神用金庫.
신이 맡긴 자금을 보관하는 금고이자 이를 다양한 차원에서 운용하고 융통하는 초거대 은행.
나는, 이 은행에서 일하는 최초이자 유일한 지구인이다.
* * *
“오빠, 왜 멍 때리고 있어요. 고기 다 식겠어요.”
볼에 닿은 유리병의 냉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회상을 끊어 냈다.
범인은 특채 동기인 밀라.
자칭 25세로 나보다 세 살 어린 밀라는 곱게 땋아 올린 금발과 갈색 피부, 그리고 길쭉한 귀를 지니고 있는 다크엘프였다.
원래는 지안 씨, 밀라 씨 하고 존댓말을 쓰고 있었지만 연수 기간 중 밀라가 먼저 편하게 불러 달라고 말해서 오빠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다.
“어제 늦게 잤더니 좀….”
이곳은 차원신용금고 본점이 위치한 6-2차원의 고깃집.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는 건 나, 다크엘프, 미개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사는 촉수 생명체, 그리고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는 천사, 넷이었다.
연수 무사히 마쳐 놓고 동기끼리 모여 파티하는데 고생하던 시절의 일을 떠올렸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어 대충 얼버무렸다.
“맞다. 오빠랑 아이작 씨는 지점 근무부터 시작한댔죠. 연수에서 배운 거 복습하다 늦게 잔 거예요?”
“뭐. 그렇지.”
거짓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어젯밤도 세 시까지 인재개발부 사내 강사가 녹화한 실무 이론 강의 영상 보고 필기하다 잤으니까.
고객의 돈을 보관하는 수신受信, 고객에게 돈을 빌려주는 여신與信, 그리고 다양한 차원과 국가의 화폐를 다루는 외환에 이르기까지.
현장에서 뛰는 은행원은 다양한 업무를 소화해야 하는 만큼 다양한 지식이 필요하다.
본점 근무가 결정된 다른 세 동기와 달리 나와 리자드맨 아이작은 지점에서 일해야 하니 이론을 완벽하게 외워야만 했다.
실무 투입 후에도 당분간 강의 영상을 끼고 살아야 할 걸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아파질 따름이었다.
“고생이야 하겠지만 몇 년 있으면 큰 지점 거쳐서 본점 기업고객부나 여신심사부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에이스들이 거쳐 가는 출세 가도… 멋지네요.”
“말이 쉽지. 그냥 해 본 소리야. 잘리지만 않아도 나는 만족한다고.”
나 같이 대학교 중퇴하고 관련 자격증도 없는 놈이 은행에 취직해 초봉 6,500을 받는 건 한국이었으면 꿈도 못 꾸는 일이다.
어지간한 대한민국 1금융권 시중 은행 초봉이 5,000 조금 넘는 걸 생각하면 시작부터 파격적인 대우.
같이 일하는 행원이나 앞으로 맞이할 고객이 인간이 아니어도 월급이 통장에 꽂히는 이상 최선을 다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어?”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앞접시를 내려다보니 분명 조금 전까지 쌓여 있던 소고기 부챗살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옆을 보니 밀라가 엉뚱한 방향을 보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야.”
“…….”
계속 입을 우물대는 것만 봐도 고기를 씹고 있는 건 확실하다.
“너는 오늘 냉면 압수야. 김치말이 국수도.”
“오빠가 안 먹고 식게 놔둔 게 잘못이라구요! 고기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녀석은 그제야 황급히 집게로 불판 위에서 먹음직스럽게 익고 있던 새우살을 대량으로 집어 내 앞접시에 올려놓았다.
“쯧. 하여튼.”
기름장에 찍어 한 입.
취업하기 전엔 오랫동안 먹을 엄두도 내지 못하던 마블링 가득한 소고기가 혓바닥에 기름을 칠해 주고 있었다.
“사족류 유기체끼리 잘들 노는군.”
고기 맛을 음미하는 도중 가라앉은 바리톤이 끼어들었다.
어디 붙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발성 기관으로 감정 없는 목소리를 발한 건 맞은편에 앉아있던 촉수 뭉치였다.
“벌써 몇 번인가 말한 것 같은데 이건 다리가 아니라 팔이라고.”
“어느 쪽이든 진화가 완전하지 않다는 뜻이겠지. 하등 생물 같으니라고.”
“아앗. 방금 한 말은 다크엘프를 심각하게 무시하는 차별 발언이에요. 철회해 주세요!”
“시끄러워, 검둥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성격이 고약해 보이지만 실은 저 녀석도 연수받는 동안 친해진 특채 동기, 과타노차다.
이 녀석을 싫어할 이유야 차고 넘쳤지만 그럼에도 나와 밀라는 녀석과 같이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배급이다, 포유강 영장목.”
과타노차는 다섯 가닥의 촉수로 각각 쥐고 있던 집게로 빠르게 고기를 집어 나와 밀라의 접시 위에 올려두었다.
이번엔 핑크 솔트를 찍어 한 입. 아까 먹은 새우살보다 완벽하다.
“중심 온도 55도, 수분 손실 4% 미만. 완벽한 미디움 레어다.”
“뭐야. 각성한 직무권능이 온도랑 수분량 확인하는 거였어? CPU 온도나 서버실 습도라도 재게?”
“이 정도 갖고 권능이라니. 미개하군.”
세상에서 가장 이로운 자부심이 있다면 바로 고기 부심이 틀림없다.
말본새랑 태도가 재수 없는 녀석이긴 하지만 과타노차는 주변 사람을 끔찍하게 잘 챙긴다.
좋은 의미로 앞뒤가 다르다고 해야 하나.
연수 갔을 때도 야간에 편의점 닫힌 시간대에도 다들 이 녀석을 찾아가 먹을 걸 받아왔을 정도니까.
“이로울은 고기 안 줘도 되는 거야?”
“지금 줘 봤자 먹지도 않을 놈한테 뭣 하러.”
“아….”
또 다른 특채 동기이자 감사부 신입인 천사는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기도 중이었다.
“나의 주여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내리시사―”
긴 백발을 중간에서 한 번 묶은 미청년.
그의 정수리와 일정 간격을 유지한 채 부유 중인 빛의 고리와 접힌 날개는 그의 출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감사부의 감사를 감사 찬송 할 때의 감사로 착각해서 지원했다가 연수원에서 진실을 듣고 쇼크로 기절해 유명해진 녀석인데, 보아하니 감사부에서 어떻게든 일해 볼 생각인 듯하다.
“…감사 기도드립니다. 잘 먹겠습니다!”
마침내 고개를 든 이로울의 뒤통수에서 후광이 사라진 걸 확인한 과타노차는 앞접시에 수북하게 소고기를 쌓기 시작했다.
“이 육즙… 머릿속에서 뿔 나팔 소리가 들려 오는군요. 과타노차 형제님. 당신의 존재는 모든 차원에 주어진 크나큰 축복입니다.”
“기도 완료 예상 시간을 5초 초과했군. 육즙 손실이 높아지고 있으니 닥치고 먹어라.”
“너는 언제 먹게.”
내가 묻자 과타노차는 음침한 웃음소리를 발하고는 대답했다.
“너희들이 비교적 저렴한 부위로 배를 불린 다음 완벽하게 익힌 고급 부위를 혼자 탐닉할 생각이다.”
싱글벙글 고기를 입으로 나르던 이로울이 흠칫하며 손을 멈췄다.
“오빠, 전 과타노차 씨가 성격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어요.”
“적극 공감해. 여기 메뉴판 좀 주세요!”
아무리 은행에 취업했다지만 대부분이 사회 초년생인 우리가 꽤 값이 나가는 소고기를 마음껏 먹고 있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연수가 끝났으니 우린 내일부터 각자 다른 부서나 지점에서 일하게 될 예정이다.
당분간 업무에 치여 사느라 모이지 못할 테니 오늘만큼은 비싼 걸 먹으며 동기의 끈끈한 정을 확인해야만 한다.
“연수 시작했을 땐 중간에 나가떨어질까 봐 걱정했는데, 어떻게든 살아남았네.”
“그러게요. 금융권 사람들이 산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설마 매일 구보 뛰고 등산할 줄은….”
밀라가 말하자 이로울이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수원이 12차원 올림포스에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맞아. 거기 사는 대주주가 한둘이어야지.”
하필이면 연수원이 대주주들 사는 부자 동네 근처라 아침마다 등산 코스에서 아저씨 아주머니에게 폴더 인사 박았던 기억이 있다.
케르베로스 산책시키던 하데스가 고생 많다고 자판기에서 넥타르 뽑아 줬을 때 얼마나 황당하던지.
뭐, 이젠 전부 무사히 지나간 일이니까.
“내일부턴 실전이니 정신 차리자고.”
우린 술잔을 부딪치고 말없이 비웠다.
앞으로 본격적인 은행원 커리어가 시작되는 생각에 숙연해진 걸까.
잔을 꺾는 동기들의 표정에는 결연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공채분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도록 힘내 보죠.”
“촉수도 없는 놈들이 오만하게 구는 꼴은 볼 수 없지.”
소고기를 집던 젓가락이 멈춘 건 불판을 네 번 갈고 영수증이 일곱 장 겹쳐질 즈음이었다.
“연수원 밥도 나쁘진 않았지만 사회 음식은 역시 다르네.”
“그건 좀 감옥 갔다 나온 사람이 하는 말 같은데요.”
“나 전과 없어.”
시계는 어느덧 9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
슬슬 해산할 시간이다.
“오늘 헤어지면 당분간은 모이기 힘들겠는데.”
“그래도 계속 연락은 하고 지내요, 저희.”
“어이, 포유류들. 계산은 누가 하는 거지?”
“이로울. 우리 지점 감사 나오실 땐 살살 부탁할게.”
“횡령과 배임은 즉결 심판입니다아….”
“그런 짓 안 할 거니까 안심해.”
“계산은 누가 하냐고. 이 하등 생물들아.”
천사도 취하는구나. 처음 알았다.
“그나저나 아이작 얘는 아예 못 오나 보네?”
“아까 오빠 톡 보내지 않았어요? 답장 왔는지 보죠.”
밀라의 말에 스마트폰을 확인해 보니 아이작으로부터 답장이 도착해 있었다.
[그딴 걸 맛있다고 먹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굶고 살았나.]
[가엾고 딱해서 회식비 더 보낸다.]
[<800,000굴덴을 받으세요.>]
“…….”
이게 맛없다는 놈은 평소에 뭘 먹고 사는 건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파충류라 고기 맛을 모르는 건 아닐까.
-꾹
[<800,000굴덴 받기 완료!>]
그래도 회식비 줬으니까 인정.
조금 남을 거 같은데 이건 내가 챙겨 둬야겠다. 착복하는 건 아니고, 다음 모임 예산으로 남겨 두는 거다.
“아이작 씨가 뭐라고 하던가요?”
“자기가 사겠대.”
“와아. 대박….”
“부유한 파충류로 등급을 상향해야겠군.”
면접 날에도 길이 20m짜리 리무진 타고 왔던 걸 보면 잘 나가는 집안 도련님인 건 확실한데 어쩌다 은행에 취직하게 된 걸까.
“슬슬 파하자. 출근 준비도 해야 하고.”
“아쉽지만 그래야겠네요.”
마음 같아선 좀 더 남아서 수다라도 떨고 싶지만 본점에서든 지점에서든 막내인 우린 첫 출근을 앞두고 컨디션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늦게 돌려보냈다가 출근 첫날부터 상사에게 피곤한 얼굴을 보이게 되면 큰일이니까.
“그럼 저는 이쯤에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로울과 과타노차는 같은 택시를 타고 본점 근처의 사택으로 향했다.
“흐아아. 배불러…. 지안 오빠 돌아가면 연락 주세요.”
“그럴게.”
“꼭이에요!”
밀라는 그녀를 마중 나온 어머니의 차를 타고 귀가.
홀로 본점에서 8km 떨어진 지점 근처의 사택으로 돌아온 나는 아무렇게나 놓인 짐을 뒤져 자그마한 파란 상자를 꺼냈다.
“이제 나도 은행원인가.”
상자를 열자 차원신용금고의 로고인 주황색 눈이 그려진 순금 배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혹시라도 때가 탈까 봐 출근 전까진 옷깃에서 떼어 소중하게 보관하는 중이었다.
차원신용금고는 신들이 맡긴 자금을 운용하는 은행.
신의 축복을 받은 정규 행원들은 업무에 도움이 되는 초능력을 다룬다.
“이게 뭐라고 긴장되냐.”
배지에 피를 한 방울 묻히면 나도 ‘직무권능’을 각성하게 된다.
다른 차원과 이종족의 존재를 비교적 쉽게 받아들인 것 말곤 이렇다 할 특징 하나 없는 내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로또 경력 2년인 나였지만 이만큼 간절했던 적은 없던 것 같다.
“제발 쓸 만한 직무권능 좀….”
이 배지를 통해 은행원은 자신의 특기나 재능을 초능력의 영역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데, 과연 나는 어떤 직무권능을 얻게 될까.
심호흡을 하고 소독한 바늘로 왼손 검지 끝을 가볍게 찔렀다.
-톡
핏방울이 배지 위에 떨어진 순간, 환한 광채가 비좁은 거실을 가득 채웠다.
빛이 가시고 눈을 뜨자 청동 저울을 든 대리석 여신상이 허공을 부유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흘러드는 직무권능의 정보.
각성한 능력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지만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이 힘만 있다면―”
나는 될 수 있다.
차원신용금고의 역대급 대출 천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