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글 옴니버
소개
“세계수를 담보로 대출받고 싶으시다고요?”
당신의 대출 상담, 차원신용금고 김지안 대리가 맡겠습니다.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01화
인생은 정답이 없는 영원한 수수께끼다.
흔히들 하는 말이었고 대한민국에 태어나 먹고 살기 위해 치열하게 발버둥 치던 나 역시 이에 몹시나 공감하고 있었다.
지난 28년 동안 삶은 내게 몇 번이고 난제를 던져 왔다.
영어 유치원 입시, 부모의 별세 등 오래돼서 기억도 나지 않는 시련이나.
어느 정도 머리가 크고 나서 겪은 수능, 환승 이별, 군대 부조리 등.
나는 언제나 문제와 맞닥뜨릴 때마다 최선의 답안을 제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만, 이번만큼은 제대로 된 해답을 내놓기 쉽지 않아 보였다.
문제.
가난한 그림쟁이가 밀린 월세를 독촉받았다.
그가 거리로 나앉기 전에 안정된 직장 혹은 충분한 생활비를 구하시오.
“고객님, 죄송한데 대출 어려우실 것… 같은….”
“네?”
나는 화가가 직업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은행이 보기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요즘 본점이 무직자에겐 대출을 승인해 주지 않는 쪽으로 노선을 바꿔서….”
“무직이요?”
“직업란에 화가라고 적으셨죠?”
“네.”
정확히는, 캐리커처 전문 화가… 인데.
“화가나 전업 투자자 같은 직업은 일괄 무직으로 취급하고 있거든요.”
그런 내가 무직이라니.
“죄송하지만 다른 은행을 찾아가 보시는 게….”
“방금 들렀다가 오는 길이에요.”
“…정말 죄송합니다.”
직원은 큰 실수라도 한 것처럼 내게 연신 고개를 숙였지만 감흥은 없었다.
나는 오전부터 지금까지 은행 다섯 곳에서 연달아 미안하다고 사과를 받다가 이곳으로 흘러온 참이었으니까.
“에효. 씨발.”
-쏴아아아
300만 원의 비상금 대출을 거절당하고 거리로 나오자마자 느닷없이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예보에도 없던 비였던지라 나는 홀딱 젖은 채로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우산 갖고 올걸.”
잘 생각해 보니 갖고 오고 싶어도 우리 집엔 우산이 없었다.
편의점에 들러 하나 살 돈도 당연히 남아 있지 않았고.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온 걸까.
잠시 과거를 돌아봤지만 딱히 이렇다 할 이유를 찾아볼 수 없었다.
스물둘에 화가가 되고 나서 첫 3년은 벌이가 꽤 짭짤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내 그림은 점점 팔리지 않게 되었다.
단순한 슬럼프인가 싶어 악착같이 3년을 더 매달려 봤지만 늘어난 건 빚뿐이었다.
요가를 배우고 명상도 했다. 심지어는 심리 상담까지 받아 봤다. 하지만 무슨 짓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저, 혹시 이상한 꿈 꾼 다음부터 작업 수행 능력이 현저하게 낮아지는 경우도 있나요?’
‘어떤 꿈이죠?’
누가 내 눈알을 뽑아내고 새 안구를 이식하는 꿈을 꾼 이후로 묘하게 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시엔 개꿈이라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게 내 슬럼프가 시작된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단 말이지.
‘그건 개꿈 맞네요.’
정신과 의사는 심드렁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고 난 여태껏 슬럼프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실은 나도 그 꿈이 원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살면서 꾼 수많은 꿈 중 하나다. 악몽 좀 꿨다고 그림 실력이 변하면 그게 판타지지 인생인가.
다만, 내겐 무언가 탓할 게 필요했을 뿐이다. 실력이 모자랐다고만 생각했다간 자신이 한없이 비참해지니까.
-우우웅!
잠시 비를 피하려 지하도에 들어가자마자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요란한 진동을 토해냈다.
[지안 씨 월세 언제 줄 거야]
[커팡 HUB 출근 확정 문자]
[베민 커넥트 교육 일정 안내]
보기만 해도 속이 쓰려지는 글자들의 향연.
주머니를 탈탈 털어 봤지만 담배는커녕 라이터를 살 돈도 남아 있지 않았다.
3년 전만 해도 그럭저럭 즐거운 독신의 삶을 영유하던 나는 캐리커처 판매량이 격감하자 일용직을 전전해야만 했다.
택배 상하차와 공사장 노가다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었지만.
그 결과 몸이 축나 몇 달인가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라고 좋아서 몸 쓰는 일만 하는 건 아니었다.
고졸에 제대로 된 경력도 없는 데에다 운도 따라 주지 않아 번듯한 사무직에 취업하지 못했을 뿐이지.
결과부터 말하자면 얼마 없는 돈조차 입원 비용으로 모조리 소모되었고, 나는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 않으면 월세도 낼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쳤다.
그런데, 설마 주거래 은행을 포함해 들르는 족족 비상금 대출을 거절당할 줄이야.
그것도 고작 정해진 일터가 없다는 이유 하나로.
“…시발.”
[김지안 님 다음 진료 예정일은 11월 14일―]
메신저 앱의 상단에 고정된 병원의 상담 채널이 눈에 거슬렸다.
나같이 사회적 안전망 하나 없는 사람은 함부로 아파서도 안 된다.
그건 자신을 더욱 깊은 나락으로 밀쳐내는 짓이니까.
하지만 그런 불행이 소액 대출을 거부당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내가 은행의 여신 심사 담당이었다면 절대로 대출을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내가 성실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게다가 300만 원은 일해서 갚지 못할 돈이 아니지 않나.
“마크 트웨인이 옳았어.”
톰 소여의 모험을 쓴 미국의 소설가는 말했다.
은행은 날씨가 맑을 때 우산을 빌려주지만, 비가 내리면 그것을 빼앗는다고.
우산이 없는 스물여덟 살의 화가 김지안은 거리에 나앉기 일보 직전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장장 30분을 비 내리는 거리를 걸어 귀가.
작년에 이사 온 반지하 단칸방에 대고 의미 없는 인사를 던지자 우울함이 벅차올랐다.
우체부가 신발장에 쑤셔 넣은 공과금 청구서는 석 달 치를 넘어가고 있었다.
월세를 내지 못해 보증금이 바닥난 지 어언 반년.
집주인은 물이 새는 천장을 수리해 주는 일 없이 내가 견디지 못하고 방을 빼기만을 기다리는 중이다.
목에 칼을 들이댄 세상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반항은 무릎 높이의 양동이를 두고 습기와 동거하는 것뿐이었다.
“하아.”
좀 더 내 특기를 살릴 수 있는 직업을 택할 걸 그랬다.
내 특기는 인간 관찰이었다.
연락하고 지내던 다른 그림쟁이든, 고등학교 동창생이든.
옛날부터 내가 잘될 거라고 예상한 놈들은 무슨 난관이 닥치든 전부 이겨 내고 성공했다.
반대로, 내가 글러 먹었다고 판단한 놈들은 집에 돈이 많든 재능이 쩔든 전부 다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런 재주를 살려 보려고, 누군가의 삶을 그림에 담아 보려고 택한 길이 화가였는데.
아무래도 직업을 고르는 재주는 내게 없던 모양이었다.
“그러게 왜 그림 같은 걸 그려가지고….”
-우우웅!
젖은 몸으로 몇 시간이고 멍하니 주저앉아 있던 나를 현실로 끌고 온 건 스마트폰의 진동이었다.
“월세 달라 할 거면 누수부터 고쳐 주든가….”
스마트폰을 확인했는데 발신인은 집주인이 아니었다.
<제목 없음>
[Web발신]
[차원신용금고] 축하드립니다! 김지안 님, 2021년 하반기 차원신용금고 신입 사원 특별 채용 서류 전형에서 합격하셨습니다.
면접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2021년 10월 18일 10시 00분] 면접 장소: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차원신용금고….”
은행이 서류 합격 문자를 보냈다.
“뭐지?”
[-면접 참여 후 교통비와 식비(10만 원)를 지급할 예정입니다.]
“…….”
은행에 이력서 같은 거 낸 적 있던가.
경험상 이런 미끼에 낚여서 좋은 꼴 본 적이 없다.
영 느낌이 좋지 않으니 10월 18일은 밖에 나가지 말고 그냥 집에서 쉬어야겠다.
“―치킨 5마리.”
그렇게 생각했지만 내 눈은 10만 원이라는 액수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 * *
~10월 18일 월요일 오전 9시 반~
“…하아.”
나는 결국 한 벌밖에 없는 정장을 입고 문자로 통보받은 주소에 도착해 있었다.
“진짜였네.”
고개를 들자 큼지막한 빌딩 입구 위에 차원신용금고라고 적힌 주황색 간판이 걸려 있는 게 보였다.
큼지막한 눈깔 역시 글자 옆에 보이는데 이게 차원신용금고의 로고인 걸까.
유리문 너머에선 창구 담당자들이 바쁘게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누가 봐도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은행 본점 1층의 풍경.
“그래. 잃을 건 없으니까….”
붙으면 대박. 떨어져도 상관은 없다.
면접만 보면 10만 원을 준다고 하니 어느 쪽이든 이득이다.
나는 보무도 당당하게 빌딩 정문으로 들어갔다.
“자메이카 통다리 시켜야지.”
오늘 저녁은 치킨이다.
* * *
-파츠츳
김지안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차원신용금고’라고 적힌 주황색의 간판이 순식간에 평범한 시중 은행의 간판으로 변했다.
그가 열어젖힌 문은 건물 1층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곳이 아닌, 어딘가 먼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