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화 특성으로 최강 네크로맨서-415화 (415/415)

< 415화. 시작 >

눈을 뜬 아드리아스의 시선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옆에 나란히 누워서 눈을 감고 있는 비비안의 얼굴이었다.

“비비안?”

설마 이게 꿈은 아닐까.

비비안은 왜 눈을 감고 있는 거지?

하는 의문들이 그의 뇌리를 스쳤으나 이내 상대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잘 잤어?”

마치 꿈이 아니라는 듯, 다정한 말과 함께 비비안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를 따라 아드리아스도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상황과 장소를 파악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일어난 아드리아스를 눈치 채고 소리를 질렀다.

“친구우우우우!”

“루나? 큽.”

품안으로 달려온 루나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부딪혔다.

“으아아아!”

마치 전투의 함성과 같은 기괴한 울음소리를 낸 루나는 이내 아드리아스의 품안에서 눈물을 터트렸다.

정신이 없던 아드리아스는 그런 루나의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으며 시선을 옮겼다.

어딘지 익숙한 방의 내부.

그리고 침대에 눕혀져있는 자신의 모습.

사방을 둘러싸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

“구경났습니까?”

“멀쩡하군! 하하하!”

데슈른이 그런 아드리아스의 모습을 보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 새끼가, 누구 때문에 전부 여기 모여 있는 건데······.”

말투는 험했지만 입 꼬리가 올라가서 내려올 생각이 없는 살렘이 애써 표정을 숨겼다.

“멀쩡한 거 같으니까 이만 나간다. 안 그래도 정신없는데 너 하나 때문에 다들 손에 일을 못 잡고 있잖냐.”

투덜대며 방을 나가는 살렘 예디디아였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보며 말은 안했지만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여간 제일 난리를 피웠던 양반이 솔직하지 못하게······.”

“어떻게 된 겁니까? 이건 꿈이 아니겠죠?”

아드리아스는 여전히 눈앞의 광경을 믿기가 힘들었다. 물론 모든 상황에 맞춰서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는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마지막을 못 보고 계약의 공간에 간 탓에 어리둥절했다.

“네가 불러낸 사람들 덕분에 무사히 문은 닫았어.”

설명을 해준 것은 디에네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옆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바하트 마탑주님도 계셨군요.”

“내 딸이 이곳에 있는데 당연히 오지 않고 있겠느냐.”

바하트가 퉁명스레 말했지만 그런 바하트를 보며 모른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바하트가 아니었으면 문도 닫지 못했을 게다. 제때 도착한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어.”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마탑주님.”

모른과 아드리아스의 감사에 바하트는 애꿎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했다.

“다시 말하지만 난 우리 디에네를 위해 힘을 써준 것이지······.”

“몸은 좀 어때?”

디에네가 치고 들어와 끊겨버린 말에 바하트의 안색이 무안해졌다. 아드리아스는 그녀의 질문에 몸 상태를 살피고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다.

‘분명 치명상이었을 텐데······.’

죽었기 때문에 계약의 공간으로 끌려갔다. 죽었다는 것은 그만큼 심대한 부상이었을 텐데 몸은 의외로 멀쩡했다.

“역시 이건 꿈인가?”

“뭔 소리야. 네가 불러온 사람 중에 인형 같은 사람들이 널 치료해줬어. 우리도 나름 고생했고.”

“내가! 내가 바하트하고 루시아랑 포션 만드는 거 도와줬어! 예전에 친구 살렸던 거!”

품에 안겨있던 루나가 눈물, 콧물을 매단 채 고개를 들어 올려 외쳤다.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엽게 느껴져 아드리아스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볼을 조물딱거렸다.

탁탁탁탁!

바깥 복도에서 소란이 느껴졌다.

동시에 방의 문이 열리며 자리에 없었던 인물들이 동시에 들이닥쳤다.

“오빠!”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일어나신 겁니까?!”

에이미와 아카데미 4인방이었다.

아드리아스의 마지막 기억에는 세레나와 크리스가 없었는데 둘도 함께 있는 걸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너넨 왜 여기 있냐?”

“당연히 도와주러 왔죠! 괴물들의 소식을 듣자마자 가문에서 병력을 데리고 급히 출발했어요!”

세레나가 말하자 옆에 있던 크리스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전후처리에 큰 도움을 받고 있어. 그것보다 몸은 좀 어때? 우린 다 오빠가 죽은 줄 알았다고.”

에이미가 결국 눈물을 보이며 아드리아스에게 다가갔다. 눈치를 살피던 루나가 이내 슬쩍 물러나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아드리아스에게 안겼다.

“에이미.”

“몸은 어때? 괜찮은 거야? 어디 좀 봐봐. 그러게 왜 혼자서 그렇게 무리를 한 거야, 이 바보 같은 놈아!”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말과 함께 멈출 줄을 모르는 눈물이 그녀의 고운 얼굴을 적셨다.

“난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아아? 그게 지금 할 말이야!”

무슨 말을 해도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았던 아드리아스는 그저 어색하게 웃어넘겼다.

“비비안 언니가 자기 능력으로 오빠를 깨울 수 있다고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모두들 포기하고 있었어. 그런데 정말로 이렇게 깨어나다니······.”

에이미가 다시 울음을 터트리자 난감한 기색의 아드리아스는 그저 조용히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는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도 최선을 다했지만 네놈의 목숨은 이미 끊긴 상태였다.”

바하트가 덤덤한 목소리로 설명을 해주었다.

“몸 내부가 이미 손을 쓸 수가 없을 정도로 망가져있었는데 그걸 네가 불러낸 이모탈이라는 존재들이 억지로 돌려놓았지. 그 뒤로는 우리가 포션을 제조해서 먹였다. 그럼에도 죽은 자를 되살려낼 수는 없었어.”

“근데 그걸 비비안 언니가 해냈어요.”

그때까지 조용히 곁에 서있던 루시아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이어서 말했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선배.”

“······그래. 고맙다, 루시아.”

점차 모든 게 실감이 나는 걸 느낀 아드리아스는 고개를 돌려 비비안과 눈을 마주쳤다. 진화를 했음에도 외모는 변한 게 없어 보이는 비비안이 그런 아드리아스를 마주보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드리아스는······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혼자 고생했었어.”

나직하게 울려 퍼지는 그녀의 말에 주변이 가라앉았다.

“이제 다 끝난 거지?”

속삭이듯 말했지만 그녀의 질문은 모두의 귀에 전해졌다. 사람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아드리아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끝······.”

아드리아스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을 묶고 있던 모든 굴레가 이제 끝났음을.

아니, 끝이 아니었다.

“이제 시작입니다.”

“아······.”

아드리아스가 하는 말에 의미를 이해한 사람들이 밝아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작이지. 시작이고말고.”

“허허, 좋구나.”

데슈른과 모른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만 번지르르 한 녀석.”

“아빠도 솔직하지 못하시네요.”

“뭐, 뭐? 크흠.”

알븐 부녀가 티격 댔고,

“정말 다행입니다, 선배님.”

“으흐흑, 형님!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크흑!”

“그만 좀 울어. 정말 괜히 나까지 눈물 나오려고 하잖아······뭐야? 크리스, 너까지 울어?”

아카데미 4인방이 왁자지껄하게 떠들었다.

에반은 그저 그림자처럼 멀찍이 떨어져있었지만 격동하는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웠는지 고개를 바닥에 수그리고 있었다.

“선배, 저도 한 번만 안아 봐도 돼요?”

“나도! 나도 더!”

“우리 오빠에요! 조금 더 저한테 오빠의 품을 양보하세요!”

에이미와 루시아, 그리고 루나가 어리광을 부리며 아드리아스의 품을 파고 들었다.

콰앙!

“어이, 어이! 우리 서방님이 깨어났다고! 거짓말이기만 해봐!”

뒤늦게 나타난 안젤라가 방 안의 분위기를 살피더니 이내 아드리아스와 눈을 마주쳤다.

“진짜잖아······.”

아무래도 이런 일들이 한동안 계속 이어질 것 같다는 직감이 든 아드리아스였다.

**

제국은 무너졌다.

대부분의 병력들이 크롬웰로 몰린 틈에 그동안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남부 연합과 서부 반란군 연합이 힘을 합쳐 총공세를 펼쳤고, 누구도 예상 못한 북부 야만인들의 깜짝 수도 진격으로 결국 황가가 무너졌다.

황제조차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제국의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제국의 귀족들은 각자의 이해득실을 따지며 발 빠르게 움직였다.

결국 제국은 잘게 쪼개지며 제후들이 난립하는 전국 시대로 치달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대한 세력을 지녔던 것은 역시나 준비가 철저했던 모하임을 필두로 한 서부 귀족 연합이었다.

그러나 그런 서부 귀족 연합, 아니 모하임 가문에서 파격적인 선언을 공표했다.

‘우리 모하임 가문은 크롬웰과 하나가 된다.’

단순히 생각하면 모하임 가문이 크롬웰을 먹었나 싶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바로 모하임이 크롬웰의 밑으로 들어간 것.

사람들은 이 뜻밖의 행보에 여러 구설수를 입에 올렸지만 결국 그 누구도 왜 모하임이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아내는 이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태껏 어느 세력에도 소속되지 않았던 알븐 가문마저 크롬웰 밑으로 종속되기를 희망했다.

이는 모하임 가문의 건과는 달리 전대륙에 충격을 주는 사건이 되었다.

‘대륙 10인 중 하나이자 대륙 제일의 마탑의 마탑주가 대체 왜 크롬웰에 복속되었는가?’

사람들은 그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점차 커지는 크롬웰의 세력은 이내 제국이었던 땅의 절반을 먹으며 구설수 따위는 신경도 쓰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때 쯤 다른 소식들이 대륙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크롬웰은 엘프들과 동맹이다.’

‘크롬웰은 수인족들의 도움도 받는다.’

‘샤이야에 있는 사막 부족들과 북부의 야만족들이 전부 크롬웰 휘하의 세력들이다.’

그 외에도 그랑디스 왕국에서 지원을 받는다는 소문이나 뱀파이어들의 가호를 받는다는 소문, 그리고 크롬웰 가문이 모든 흑마법사들의 종주라는 소문도 돌았으나 진위여부가 정확히 파악되지는 못했다.

결국 크롬웰은 제국의 황가가 무너지고 3년 후, 왕국을 선포하고 새로운 대륙의 패자가 되었음을 톡톡히 보여주었다.

**

크롬웰 왕국 휘하에는 개국공신 가문들이 여럿 있었다. 그 중에는 당연히 모하임이나 알븐과 같이 유명한 가문들도 있었으나 알려지지 않은 가문들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루시아의 홀링턴 가문이 있었으며 세레나의 에레스티얼 가문, 그리고 크리스의 유노르 가문이 존재했다.

“이제 나한테 안 되겠지?”

대련용 검 끝을 크리스의 목에 드리운 세레나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 세레나를 보며 크리스는 무뚝뚝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재미없어.”

“몸은 좀 어떤가.”

“어떠긴 뭐가 어때. 이렇게 멀쩡한데.”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세레나였지만 그녀의 배는 조금 불러있었다. 그리고 크리스가 살살 대응한 것도 그 때문임을 알고 있는 세레나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검을 집어넣었다.

“참 자상한 아버지 납셨네.”

“난, 아이보다 너를 걱정하는 거다.”

“······뭐래.”

뜬금없이 치고 들어오는 크리스의 말에 세레나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부부가 된 둘은 연을 맺은 이후에도 늘 평소와 같이 수련을 함께하는 사이였다.

“그나저나 곧 식을 올린다고 했었는데.”

“음, 한 달 뒤로 알고 있다.”

“설마 루이스가 에이미 아가씨와 맺어질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호위 기사인 만큼 정이 깊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래도 공과 사는 엄격한 루이스인데 설마 했지.”

이내 가볍게 연무장을 정리하고 돌아온 둘은 바쁘게 지나가는 아가타를 발견했다.

“어, 고양이 언니. 어디 가요?”

“아! 세레나. 지금 막 복귀했거든. 빨리 보고 올리고 쉬어야지. 크리스도 안녕.”

인간과 수인의 혼혈인 아가타는 더 이상 자신의 귀를 숨기고 다니지 않았다. 그동안 수많은 임무를 수행하며 자신감이 쌓인 그녀는 대륙에서도 이름을 날리는 해결사가 되어있었다.

“고생 많으시네요.”

“그 고생도 곧 끝이야. 슬슬 대륙 정세도 안정화되고 있으니까. 근데 둘은 웬일로 본성에 와있는 거야?”

“모른 할아버지께서 정기적으로 건강 검진을 해주는데 매번 와주시는 게 미안해서 이번에는 직접 왔어요.”

“아, 임신을 했으니까 신경 써야지. 모른 영감한테도 그렇게 미안해하지마.”

“겸사겸사 이곳에 있는 사람들 안부도 묻는 거죠. 거리도 그다지 멀지 않으니까.”

“어쨌든 보기 좋아서 다행이다.”

“네, 바쁘신데 오래 붙잡아뒀네요. 푹 쉬세요.”

"그래,. 너도 몸조리 잘하고."

이내 아가타와 헤어진 둘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마치 신호가 닿은 것처럼 서로의 의도를 파악한 세레나와 크리스는 이내 어딘가로 향했다.

똑똑.

“누구?”

“언니, 저에요. 크리스도 같이 왔어요.”

“들어와.”

어느 방 앞에 도착한 둘은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시녀에게 손을 저어주며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와.”

방 안에는 비비안이 있었다. 그녀의 품에는 이제 막 태어났을 법한 갓난아이가 안겨있었다.

“어머!”

“여기 왔다는 소식은 들었어. 몸은 좀 어때?”

“너무 좋아요. 오히려 요즘에는 식욕이 너무 땡겨서 탈이라니까요.”

“다행이네. 여기 앉아.”

크리스와 세레나는 비비안의 품에 안긴 아기한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미쳤다. 어쩜 이리 귀엽고 얌전해요?”

“아이 아빠를 닮았나봐.”

“그건 좀······.”

세레나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크리스와 결혼을 한 이후로 아이만 보면 너무나 귀엽게 느껴졌었는데 실제로 비비안의 아이를 보자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쳤다.

“진짜······너무 예뻐요.”

“왜 갑자기 울고 그래. 크리스, 얘 몸 괜찮은 거 맞아?”

“평소와 같다.”

크리스가 무뚝뚝하게 말하며 세레나의 감동을 날려버렸다.

“에휴. 내가 이런 남자랑 같이 살아요, 언니.”

“그래도 좋아하잖아.”

“그건 그렇죠.”

“아드리아스는 만났어?”

비비안의 물음에 여전히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세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바쁘신 분을 어떻게 뵙겠어요.”

“생각보다 바쁘지 않아. 한 번 만나고 가도 될 거야.”

“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그럼 나랑 지금 같이 보러 가자. 안 그래도 나갈 생각이었거든.”

비비안이 조심히 일어났다. 그러자 오히려 세레나가 조마조마한 표정을 지으며 아기에게서 시선을 못 뗐다.

“괘, 괜찮을까요? 아기도 그렇고······.”

“응.”

비비안이 방을 나서자 세레나와 크리스가 급히 따라나섰다. 그렇게 셋이 도착한 아드리아스의 집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야, 어디 가셨데?”

“전하께서는 지금 연무장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집무실을 지키고 있던 시종의 말에 셋이 이내 연무장으로 내려가자 누군가와 대련을 하고 있는 아드리아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콰장!

“국정 때문에 바쁘신 거 아니었어······?”

세레나가 그 모습을 보고 중얼거리자 비비안이 얕게 웃음을 흘렸다.

“말했잖아. 생각보다 바쁘지 않다고.”

이내 다른 사람들이 들어온 걸 눈치 챈 아드리아스가 대련을 멈췄다. 그의 대련 상대는 다름 아닌 니켈이었다.

“세레나, 크리스. 오랜만이네.”

반갑게 맞이한 아드리아스는 곧바로 비비안에게 다가가 이마에 입술을 댔다. 그리고 품에 안긴 아이를 보며 웃었다.

“예쁘지?”

“네? 네에.”

“비비안을 닮아서 벌써부터 너무 예쁘다.”

“그건 맞는 거 같아요.”

팔불출 성향을 보이는 아드리아스를 애매한 눈으로 쳐다본 크리스와 세레나는 이내 물었다.

“바쁘신 거 아니었어요?”

“다 맡겨놨어. 이제 알아서 일이 돌아가.”

“······그래도 돼요?”

세레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지만 아드리아스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꽤 예전에 한 번 말했던 거 같은데 난 왕이나 권력에 관심 없어. 이걸 하고 있는 것도 더 나은 세상에서 평화롭게 살려고 하는 거야.”

“그렇다고 정말로 왕위를 포기할 거라고는 생각도 안했는데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 안하고요.”

“글쎄. 아마 안정화가 확실히 되면 그냥 이 자리도 믿을만한 사람한테 넘겨주고 어디 시골 같은 곳에서 평화롭게 살지 않을까.”

아드리아스의 말에 크리스와 세레나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으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나 아드리아스라면 정말로 되겠다는 생각이 어렴풋하게 스쳤다.

그는 그 어떠한 권력조차도 부숴버릴 무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건 그때 일이고. 자, 여기까지 왔으니까 저녁이나 같이 먹자.”

“그럴게요. 다른 분들도 오시나요?”

“한 번 물어볼게. 아마 오지 않을까.”

아드리아스의 근황까지 살핀 세레나와 크리스는 꽁냥대는 아드리아스와 비비안을 놔두고 돌아왔다.

“저녁 식사 자리에 다 모이면 굳이 일일이 찾아가서 인사할 필요는 없겠다.”

“디에네 알븐은 마탑의 일로 바빠서 못 올 수도 있지 않나.”

“아, 이번에 마탑주가 됐지. 돌아가는 길에 그럼 들르자.”

세레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크리스는 이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이 왕위를 내려놓고 물러난다면······과연 평화가 이어질 수 있을까.”

“우리가 강요할 문제는 아니잖아. 그리고 지금도 보니까 딱히 본인이 하는 일은 없는 것 같고.”

“사랑하는 이들과 초야에 묻혀서 산다라······. 꿈만 같은 일이긴 하군.”

“우리도 따라갈까?”

세레나가 농담처럼 묻자 크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 몇몇 이들만 함께하겠지. 비비안과 루시아, 디에네, 안젤라······. 가끔 놀러가는 건 좋아할 지도 모르겠군.”

“농담인데 뭘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여.”

“혹시나 해서 말했다.”

크리스의 진지한 말에 세레나는 결국 웃고 말았다. 이런 점도 좋다고 느끼며 이내 세레나가 중얼거렸다.

“언젠가 정말로······정말 아드리아스 선배가 말한 평화가 찾아와서 그런 일이 생기면 좋겠네. 가끔씩 놀러가고 아이들끼리도 교류하고······.”

“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아드리아스 크롬웰의 힘은 불가능도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힘이니. 적어도 그가 살아있는 동안은 가능할 거다.”

“그래. 그럼 그때가 오면 자주 놀러가자. 아카데미 때처럼.”

그때를 생각하며······.

둘은 서로를 보며 미소 지었다.

**

“여기가 소문의 그곳인가.”

내 이름은 타르만.

일평생 수행을 하던 수도원에서 나와 드디어 세상과 교류를 시작한 수도승이다.

내가 멍하니 건물 앞에 서있자 지나치던 소년 하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 누구세요?”

“난 타르만이라고 한다. 혹시 여기가 적기사라 불리는 사내가 운영하는 검술도장인가?”

“아! 맞아요! 손님이신가요?”

“그렇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유명한 무술도장이나 아카데미들을 찾아가 가르침을 구하는 것. 그 첫 번째 행선지가 된 것은 바로 이곳, 적기사가 운영하는 검술도장이었다.

‘인간이 아닌 자가 운영한다고 해서 소문이 꽤 퍼졌던 곳이지.’

처음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고 들었지만 지금은 이 도시를 대표하는 명소라고 한다. 특히나 관주의 그 뛰어난 검술실력으로 인해 유명해졌지.

[“어서 오십시오, 제가 제롬 드라쿨입니다.”]

소문대로 적기사라 불리는 사내는 인간이 아니었다. 2m가 훌쩍 넘는 큰 키와 붉은 외형은 꽤나 위압감을 주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샤마드 수도원에서 수행을 해온 타르만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한 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방문했습니다.”

[“보아하니 권법가 같군요. 여기까지 찾아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상대는 생각보다 예의가 발랐다. 겉모습에서 나오는 편견 때문인지 별 것 아닌 말과 행동이었음에도 훨씬 친절하게 느껴졌다.

“한 눈에 권법가임을 눈치 채시다니 역시 소문대로입니다.”

“어? 손님이야?”

그때 안쪽에서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살펴보니 은백색의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가 신비한 색깔의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안녕?”

“아, 안녕하십니까. 전 타르만이라고 합니다.”

“난 루나야! 루나 펜드래곤!”

“루, 루나 펜드래곤!”

아, 예상치도 못한 이름에 실례를 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상대의 이름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수행의 성과가······.

“날 알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드물 것 같습니다. 아드리아스 대제의 동료이시지 않습니까?”

“맞아! 내 친구야!”

해맑은 얼굴로 말하는 걸 보니 솔직히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제롬 드라쿨이 가만히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 유명한 루나 펜드래곤이 맞는 것 같았다.

“그럼 난 이제 가볼게! 수고해, 제롬!”

[“다음에 또 보마. 그때는 내가 아드리아스를 찾아가지.”]

“응!”

이내 루나가 나를 지나치며 도장을 나갔다. 아니, 그것보다 제롬 드라쿨도 아드리아스 대제의 지인이었단 말인가!

“제롬 님. 아드리아스 대제와 인연이 있으신 겁니까?”

[“제 은인이십니다.”]

“허어! 혹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습니까?”

[“이야기를 하자면 긴데······괜찮으시겠습니까?”]

“제가 세상에 나온 이유는 견문을 넓히기 위함이 가장 큽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롬 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그렇다면 못해드릴 것도 없습니다.”]

제롬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나는 그가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안쪽으로 들어오시죠. 차를 마시며 제가 아는 아드리아스 크롬웰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부터 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흥분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곧 듣게 될 아드리아스 크롬웰의 일대기를 기대하며······.

< 415화. 시작 > 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