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4화. 끝 >
사방을 에워싸고 점멸하던 메시지 창들이 이내 하나, 하나 모습을 바꿔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이전에 직접 본 적이 있는 석가모니였다.
“오랜만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레 인사를 해오는 그를 보며 나는 고개를 숙였다. 곧이어 주변이 온갖 초월자들로 가득 들어찼는데 그중 몇몇은 얼굴이 낯익었다.
일단 하나는 천마, 그리고 또 하나는······.
“프레위르?”
“내가 천사님을 돕게 될 줄은 몰랐네. 잘 지냈어?”
조금 강한 검사였을 뿐인 엘프가 초월자가 되어 나를 도와주러 왔다.
그런 그녀를 보며 잠시 감상에 젖어있자 네브로가 말했다.
[“그 외에도 다 구면일 거야. 애초에 널 알고 있는 녀석들만 온 거거든.”]
그렇게 말해도 정작 난 다른 이들의 얼굴은 몰랐다. 몇몇 호칭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으니.
‘기억 끝에서 망각하는 자가 레테, 모든 것을 내려다보시는 지배자가 관세음보살······.’
그 외에도 네브로의 아버지인 아이온과 네브로를 봉인했던 그리스도가 존재했다.
불교 대장과 기독교 대장이 한 자리에 모이다니 내가 종교 대통합을 이뤄냈군.
“연자여.”
관세음보살이 저 양반인가 보네.
여전히 연자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관세음보살은 주위를 둘러보며 내게 말을 걸었다.
“이 또한 모든 게 인연일지니······.”
“오랜만에 봐도 여전하시네요.”
“연자와의 만남은 내게 있어서 그리 오랜 일이 아님이라, 찰나와도 같았지.”
관세음보살을 제외하고도 한 명, 한 명 인사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때는 아니었다. 특히 이름도 모습도 처음 보는 이들은 정체가 궁금했지만 인사를 건너뛰었다.
[시스템 과부하]
[공간을 리셋합니다.]
라플라스의 악마가 강제력을 발휘했다.
공간이 비틀리며 진입한 초월자들을 단숨에 밀어내려 했다.
쩌저저적!
그 순간 바닥에서 식물들이 자라나며 순식간에 공간을 메우기 시작했다. 새하얬던 장소는 어느새 숲 속에 들어온 듯 싱그러움으로 가득 찼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돕겠습니다.”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나는 식물을 소환한 이가 누군지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세계수.”
폭식으로부터 구했던 세계수의 본 모습은 인간의 형태가 아니었다. 형태가 불분명한 정령의 형상에 가까웠다.
“안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베어내주지.”
그때 천마가 검을 뽑으며 나섰다.
특유의 흑빛 마나가 그의 전신을 감쌌다.
“운명이니 뭐니 하는 알 수 없는 네놈 노름 때문에 본좌가 등선하고 처음으로 인정한 사내가 죽었다.”
천마가 불만을 토해내며 검을 휘둘렀다. 실체도 없는 라플라스의 악마를 상대로 뭘 노린 건지는 몰라도 무언가가 베였음을 난 느낄 수 있었다.
[Player, 썩은 희망을 속삭이는 자. 시스템에서 퇴출합니다.]
“본좌의 힘은 네놈 따위가 왈가왈부할 게 아니다.”
콰지직------!
맹렬한 기세의 충돌이 일어났다.
점차 초월자에 익숙해지는 걸까. 이전이었으면 눈에 보이지도 않았을 이들의 싸움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마를 시작으로 이곳에 모인 초월자들이 각자의 전투에 들어갔다. 라플라스의 악마는 의식을 잘게 쪼개며 초월자의 수에 맞게 대응했다.
[“아드리아스.”]
유일하게 싸우지 않고 구경만 하던 네브로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너도 이제 신이다.”]
“난······.”
실감이 나지 않는 말을 뱉는 네브로를 보며 잠시 망설이자 녀석이 웃기 시작했다.
[“너답지 않게 뭘 그렇게 쫄고 있는 거냐. 뭐, 그만큼 아드리아스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기 싫은 거겠지.”]
네브로가 갑자기 다가왔다. 그러더니 내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네브로?”
[“이제 우리 차례다.”]
네브로가 돌아오자 감각이 생생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는 내 능력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절대 질 수 없는 우리의 마지막 싸움이다.”]
우웅---!
초월의 힘이 날 맴돌았다.
오만을 사용했을 때에서야 비로소 사용할 수 있었던 내 오러 비기.
‘진화.’
이제는 시스템의 영역을 벗어난 온전히 나만의 능력이 된 초월적 기술이 다시 펼쳐졌다.
후와아앙!
진화를 통해 일곱 장의 날개가 펼쳐졌다. 동시에 반투명한 4개의 거대한 팔이 내 곁에 둥둥 떠다녔다.
소환된 그것은 네브로의 팔이었다.
[“최종 진화다, 이 빌어먹을 시스템아!”]
내 자신 뿐만 아니라 검술도 함께 진화시키자 지금껏 보아온 다른 인물들의 오러 비기를 자연스레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난 곧바로 루이스의 화안금정을 베껴왔다.
촤좌좡!
콰르릉! 콰가가각!
보이지 않던 라플라스의 악마가 선명히 눈에 띄었다.
후웅!
그 난잡한 전투 속에 내가 끼어들자 순식간에 전투의 흐름이 뒤바뀌었다.
[경고······!]
콰직!
네브로의 거대한 주먹이 한 녀석을 짓눌렀다. 동시에 어디서 났는지 모를 검이 네브로의 손아귀에 소환되며 주변을 검은 불바다로 만들었다.
[“아드리아스! 네 오러 비기 정말 미쳤는데?”]
언뜻 보면 네브로가 흥분해서 날뛰는 것 같았지만 모든 것은 내 통제 아래에 있었다.
“받아라.”
그때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처음 보는 여인이 내게 무언가를 던졌다. 받아보니 구불구불한 외형의 검이었다.
[“제 꼬리를 물고 있는 자, 요르문간드다.”]
요르문간드? 그게 누군데?
소개는 나중이었다. 우선은 받은 검으로 라플라스의 악마를 처리하는 게 먼저였다.
그런데 내게 무언가를 건네주는 건 요르문간드가 끝이 아니었다.
“천사님, 내 것도.”
“아가야, 이걸 받으려무나.”
검을 여러 자루를 차고 다니던 프레위르가 검을 하나 던졌고 또 누군지 모를 여인이 검을 줬다.
“갈락슈르?”
프레위르야 그렇다쳐도 이름 모를 여인이 내게 준 검은 갈락슈르였다. 그렇다면 이 초월자가······.
“닉스?”
[“손이 두 개 밖에 없는 녀석한테 검 세 개는 사치지. 프레위르 거는 내가 쓰마.”]
“너 쓰라고 준 거 아니거든?”
이내 내 양손과 네브로의 네 개의 팔에 모두 무기가 들렸다.
지금이라면 내 모든 걸 쏟아부을 수 있겠다.
끼아아아악-----!
귀곡성이 흐르며 보이지 않는 검날이 주변을 휘몰아쳤다. 로들렌 아카데미 기사학부장 수라한의 오러 비기, 무량귀곡반야가(無量鬼哭般若歌).
콰직! 콰직!
끊임없이 의식을 분열하며 수를 늘려가는 라플라스의 악마들을 베어 넘겼다.
“후읍.”
이어지는 오러 비기는······.
등 뒤로 거대한 오러의 형체가 나타났다.
지금은 내 수하가 된 오크대전사 알-구르드의 오러 비기.
흉신악살(凶神惡煞).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카가가각!
비록 검집이 없는 상태였지만 난 흉신악살을 사용한 상태에서 발검술을 사용했다. 공기와의 마찰로 이루어내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기술이 펼쳐졌다.
용병왕 무토 키네인의 개벽(開闢).
꽈득!
콰과과과과광--------!
오러 비기의 합작은 무시무시한 위력을 만들어냈다.
[경······고]
다른 초월자들이 상대하던 녀석들까지 휘말려 들어가며 아주 박살이 나버렸다.
“다른 초월자들과는 다르다더니 이유가 있었군.”
아이온이 그런 나를 보며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네브로가 용케도 아이온까지 데려왔네.
[Player, 가장 어두운 곳에서 빛나는 자. 저항을 멈추십시오.]
“급해진 모양이야?”
싸울수록 점점 더 내 힘을 이해하고 잘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경고! 세계선이 붕괴합니다!]
“그니까 그냥 날 놓아주라고.”
라플라스의 악마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의식을 분열시키며 덤벼왔다. 갈수록 점점 강해지는 걸 보면 처음에는 경고의 뜻이었다가 진심을 다하고 있는 모양인데······.
끝내는 의식이 뭉치며 물량으로 덤비는 게 아닌 정예화를 거듭하기 시작했다. 이내 거대한 하나의 괴물로 변한 악마의 의식은 이전과는 다른 강대한 기운으로 내게 대항했다.
[경고.]
묵직한 라플라스의 악마가 입에서 빔과 같은 공격을 토해냈다. 새하얀 빛이 경로 상에 존재하는 모든 걸 지워버리며 내게 다가왔다.
우우웅!
그러나 나는 상대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맞받아쳤다.
데슈른 폴론 스승님의 삼라만상(森羅萬象).
피식!
내 영역에 들어온 모든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다. 공격을 막자마자 나는 또 다른 오러 비기를 사용했다.
에반의 빛의 검.
수많은 빛의 검이 내 주위로 만들어지며 악마의 의식을 향해 날아갔다.
[경고.]
육각형의 방어막이 의식의 주위로 생겨나며 빛의 검을 막아냈다. 그렇지만 난 그 틈에 의식에게 가까이 붙은 이후였다.
[Player······.]
“널 부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막시민 크로넬의 분신술.
12명의 분신과 나까지 총 13명이 의식을 둘러쌌다.
[경고. 세계선이 붕괴······.]
꾸우웅!
아직도 굴복하지 못하겠다면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주마.
양손에 하나씩 들고 있던 검을 하나만 남기고 바닥에 던졌다. 이내 하나의 검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집중했다.
니켈 라이프힐의 내려베기.
내가 아는 한 공격력만큼은 가장 강한 오러 비기가 12명의 분신과 함께 펼쳐졌다.
-난 아드리아스 크롬웰.
콰직!
악마의 의식이 세운 방어막이 깨지며 내려베기가 적중했다. 사방에서 난도질당한 의식은 이내 금이 가며 부서져 내렸다.
-띠링!
[시스템이 계약을 제안합니다.]
라플라스의 악마가 부서지자 공간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를 돕던 초월자들이 퇴출당하듯 갑자기 사라졌다.
[Player, 아드리아스 크롬웰. 당신에게 계약을 제안합니다.]
해낸 건가?
갑자기 라플라스의 악마가 고분고분해졌다.
“뭔데. 들어나 보자.”
[Player, 아드리아스 크롬웰은 초월자가 아닌 인간입니다. 그곳에서 인간으로서의 생명을 다할 때까지 유예를 드리겠습니다.]
“바로 데려가지 않고 조금 기다려주겠다는 소리냐?”
[그렇습니다.]
진즉에 이렇게 나왔으면 싸울 필요도 없었잖아. 왜 굳이 막 데려가겠다고 고집을 피운 거야.
[프로젝트 : 샛별이 완료되었기에 시간을 지체하면 인과율과 세계선이 지속해서 붕괴합니다.]
“그래서 막무가내로 데려가려고 했다는 거지? 그래서 그게 얼마나 부서지는 거길래 호들갑을 떤 거야?”
[······.]
아니 점점점을 메시지로 보내는 건 무슨 심보냐.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하여간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네.
[“나쁘지 않은 제안이네.”]
“안 갔냐?”
아직도 남아있던 네브로에게 말했다.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데 정도 없는 새끼.”]
“초월자가 되면 다시 널 볼 수 있는 거 아니야?”
[“그건 나도 모르고, 라플라스의 악마도 모를 거야.”]
그렇다면 조금 아쉽긴 하네.
네브로와 쌓아온 인연이 있는 만큼 마지막이라고 생각되자 바로 떠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어쨌든 계약은 받는 게 좋아 보인다. 어차피 아드리아스로 살다가 죽는 게 중요한 거잖아?”]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라플라스의 악마를 향해 말했다.
“그 계약 받아들일게. 구체적인 사정은 모르겠지만 나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고생 좀 대신 해줘라.”
-띠링!
[계약이 완료되었습니다.]
하아, 이제 끝난 건가.
드디어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되자 어서 빨리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어졌다.
[“나도 이만 가본다.”]
“일리아스가 있는 곳에 같이 있는 거야?”
[“덕분에.”]
네브로가 쑥스럽게 웃으며 말하는 게 느껴졌다. 이제야 내가 알던 그 찐따 네브로 같이 느껴졌다.
[“······고마웠다.”]
감사의 말을 마지막으로 네브로의 기척도 사라졌다.
이제 나만 남았는데······.
“왜 돌려보내주지 않냐?”
또 할 말이 남아있는 건가, 아니면 내가 알아서 나가야하는 건가.
[계약은 ‘인간으로서의 생명을 다할 때까지 유예’ 입니다. 계약은 이행되었습니다.]
“그래, 그니까 돌려보내달라고.”
[계약은 이행되었습니다.]
악마가 말을 반복하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나는 감정을 억누르며 물었다.
“너, 나한테 사기 친 거냐?”
[Player, 아드리아스 크롬웰의 생체리듬은 끊겼습니다. 고로 계약은 이행되었습니다.]
······.
난, 내가······.
“내가 죽었다고?”
[Player, 아드리아스 크롬웰은 죽는 순간 계약의 공간으로 전송되었습니다.]
허무한 감정이 밀려왔다. 상대에 대한 분노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완전 사기 먹었네. 괜히 악마가 아니야.”
애써 웃어보았지만 바람 빠진 소리만 공허하게 흘러나왔다.
이제 내 곁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허무와 공허가 소용돌이치며 곧 끔찍한 감정들이 전신을 지배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저항이 떠올랐다.
굳이 라플라스의 악마와 계속 싸우려면 싸울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난······!”
“아드리아스.”
어?
순간 환청을 들은 줄 알았다.
“아드리아스, 나의 요정님.”
그러나 다시 한 번 들려오는 따스한 목소리에 착각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시선을 천천히 옮겼다.
그러자 그곳에는 새하얀 공간 안에 수채화 같은 색상이 번진 장소가 따로 존재했다.
“미안해, 기다렸지?”
비비안.
아니, 비비안.
비비안, 당신이 왜 여기에······.
“환상인가?”
라플라스의 악마가 날 속이기 위해 만든 환상인가?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님을 시스템이 직접 증명했다.
[식별되지 않은 Player 침입]
시스템 메시지가 고요히 울렸다.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건 진짜로 비비안?
비비안이 천천히 걸어왔다.
그녀의 걸음이 닿는 곳마다 수채화 물감과 같은 색깔이 번져나갔다.
“아드리아스.”
“정말 비비안입니까?”
“응.”
이내 내 앞까지 다가온 그녀가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데리러 왔어.”
“아아······.”
혼자라고 생각했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비비안이 내 앞에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분명 그녀는 진화로 인해 잠들어있었을······.
‘성공······했어?’
내가 계약의 공간으로 오기 전에, 마침 진화 시간이 끝나는 타이밍이었다.
이게 정말 꿈이 아니라면.
정말로, 정말로 내 앞에 존재하는 비비안이 진짜라면.
“돌아가자.”
비비안이 내 손을 잡았다.
동시에 시스템이 메시지를 날려 왔다.
-띠링!
[계약이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계약이 이행되지 않았다고?
[Player, 아드리아스 크롬웰.]
라플라스의 악마가 기계적으로 말했다.
[식별되지 않은 Player의 힘으로 되살아났습니다. 고로 지금부터 다시 계약을 이행해주십시오.]
확인 도장을 찍듯 라플라스의 악마가 인정해주자 나는 결국 눈물을 흘렸다.
끝난 게 아니었다. 난······끝난 게 아니었어.
“울지 마. 이제 시작이고 앞으로 행복할 일밖에 없으니까.”
비비안이 손을 잡지 않은 나머지 한 손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며 미소 지었다.
“고생했어, 아드리아스.”
난 비비안의 손을 꼭 붙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왔습니다.”
< 414화. 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