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9화. 초월 >
검술의 벽.
헤이겔의 초대를 받고 첫 집회에 참여했을 때 느꼈던 그 벽은 내가 성장함에 따라 두터워져 갔다.
진화의 부작용인가 싶었는데 어쩌겠나.
결국 그 벽을 넘을 때가 이렇게 왔으니 아쉬울 건 없었다.
“오러 비기? 그깟 인간의 기술이 우리에게 통할 거라 보나.”
“우리는 신에게 선택 받은 자들이다.”
화신들이 재수 없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미 화신을 잡아본 전적이 있는 내게는 우스울 뿐이었다.
“귀엽네.”
날개를 펼친 지금 화신들은 내 상대가 안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상대를 해준 이유는 손끝에 닿을 듯한 벽 때문이었다.
화신이 되었다는 고양감에 취해 아무런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는 녀석들을 이제 슬슬 끝낼 시간이었다.
“지원군이 오니 자신감이 생긴 모양이군.”
여유로운 내 모습을 보며 오해를 한 화신 하나가 안타깝다는 눈초리로 보냈다.
“하지만 아무 의미 없다. 뱀파이어들은 의외지만 저들조차 우리를 막지는 못할······.”
말을 하던 화신의 목에 얇은 실선이 생겼다.
소리도, 기척도 없이 이루어진 은밀한 공격.
그 공격을 눈치 챈 건 이미 죽음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을 때였다.
“푸흡.”
피를 쏟은 상대가 당황하는 게 눈에 보였다. 니켈과 티무르로 건드려보니 유난히 재생 능력이 좋았던 화신이었는데 내 검에 당한 상처는 재생이 불가능한 걸 깨달은 모양이다.
“조금만 더하면 벽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너희로는 이제 안 되겠다.”
애초에 화신들은 적수가 아니었다. 내가 정말로 경계하고 있는 건 베리얼과 마왕.
베리얼은 당장에 살렘이 맡고 있었지만 마왕의 경우 망나니처럼 오만을 휘두르고 있었다. 미리 마법을 통해 마왕을 적극적으로 막지 말라고 전달했기에 피해가 크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곧 한계가 보였다.
“끄륵.”
결국 목이 베인 화신이 쓰러졌다. 점차 검게 물들어 가는 시신을 보며 나머지 세 명의 화신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수를 쓴 거지?”
여전히 위기감이 없는 얼굴들이었다. 당한 녀석을 바보로 생각하는군.
“끄아아악!”
저 멀리서 혼자 휘젓고 다니던 화신의 비명이 들려왔다. 에반의 빛의 검으로 온몸이 꿰뚫리고 뱀파이어들의 혈마법과 집회의 흑마법이 속박을 해놓은 상태였다.
“허어.”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은 한 화신이 창을 치켜들었다.
“이해가 가지 않아. 신에게 선택 받은 자가 어떻게 저따위 녀석들한테 지는 거지?”
“너도 곧 그렇게 될 거야.”
저주가 섞인 오러가 넘실거렸다. 이내 날개가 한 번 펄럭이자 세 명의 화신이 순식간에 난도질당했다.
“뭣······.”
초월자와 관련된 것 앞에서는 압도적인 화력을 보이는 날개가 이전까지 본 적도 없던 출력을 냈다.
“이게······오러 비기?”
푸화아악-----!
피분수가 터져 나오며 화신들이 쓰러졌다.
저주가 섞인 공격은 평소였으면 통하지 않았을 테지만 날개를 소환한 지금은 너무도 잘 먹혀 들어갔다.
베인 부위가 검게 물들어가며 화신들은 쓰러진 채 일어나지 못했다.
“주군!”
때마침 저쪽에 있던 화신도 마무리 짓고 온 에반이 다급히 달려왔다.
“빨리 오셨군요.”
“몸은 괜찮으십니까?”
“예.”
막시민이 보이지 않네. 그 외에는 모두가 모여 있었다.
쿠우우웅!
마왕을 막고 있던 니켈에게서 신호가 전해져왔다. 사도로 진화한 니켈조차 쉽사리 막을 수 없는 괴물이 모른의 정예 언데드들을 전부 때려 부수고 있었다.
“저 괴물은 대체······.”
에반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보았다. 모른의 정예 언데드들은 비록 오러 마스터에 버금가지는 못하지만 셋 이상이 모이면 충분히 한 명을 막을 정도였다.
그런 정예 언데드가 무려 백 구.
사실상 모른 혼자서 30명의 초인들을 상대할 수 있다는 단순 계산이 나왔다.
‘아무 기교도 기술도 없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검에 그런 정예 언데드들이 쓸려나간다.’
게다가 모른의 언데드만 있는 게 아니라 내 언데드와 드미트리의 영물도 함께하고 있었음에도 역부족이었다.
“끄윽.”
“아직도 안 죽었군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빛의 검이 화신들을 마무리했다. 저것들도 언데드로 사용해먹어야지 속으로 생각하면서 이제 베리얼과 마왕의 처분을 고민했다.
“어떻게 할까, 네브로.”
[“······오만을 먹으려면 막아야지, 뭘 어떻게 해.”]
갑자기 중얼거리는 나를 에반이 이상하게 보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에반.”
“말씀하십시오.”
“살렘을 도와주세요. 저 괴물은 제가 맡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걱정 어린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를 막지는 않았다.
콰아아앙----!
마치 태풍이 휘몰아치듯 마왕의 근처로 모든 게 터져 나갔다. 유형화된 마나가 대놓고 보일 정도로 선명했다.
“왔느냐.”
다가가는 나를 향해 모른이 반겨주었다. 그의 곁에는 어느새 데슈른과 메르쿠르, 그리고 라스틸리아에서 온 아이미르가 있었다.
“자기야, 나 왔어.”
안젤라도 웃으며 다가왔는데 그녀와 함께 있던 이자벨이 다소곳이 말했다.
“임자가 있는 분이시란다.”
“나도 알고 있거든.”
정말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전부 모인 느낌이었다. 모두들 하나 같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부담스럽다기 보다 반가운 감정이 먼저 튀어나왔다.
“이 늙은이도 쓸모가 없구나. 저런 괴물이 대륙에 존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충분히 잘 버텨주셨습니다.”
“저게 바로 마왕의 신체겠지?”
모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마왕의 이야기를 처음 듣는 이들이 잘못 들었나 싶은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마왕?”
“여기까지 와서 우스갯소리를 하는 건 아닐 테고······.”
콰아아앙!
소음이 점점 커져갔다.
사실은 모두 알고 있겠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게 여기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거겠지.
애초에 싸울 수 있었으면 진즉에 저 안으로 들어가 싸웠을 인물들이니까.
‘끼어 들 수 없다.’
마왕은 강했다.
무려 데슈른과 같은 오러 마스터도 여기서 지켜보는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어떡할 거죠?”
결국 이자벨이 먼저 나섰다.
사람들이 외면하던 질문을 그녀가 솔선수범하며 묻자 다시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제가 처리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은인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저건 평범한 힘을 벗어났어요. 일종의 자연재해와 같은 힘.”
“괜찮습니다.”
“막시민이 올 때까지 기다려요.”
이자벨이 슬쩍 내 앞길을 막아섰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루시아도 한 마디 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나요, 선배?”
나도 안다. 이왕이면 막시민까지 기다리고, 살렘과 에반이 베리얼을 쓰러트린 뒤에 다 같이 마왕을 공격하는 게 낫겠지.
하지만······.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적어도 마왕, 아니 네브로 만큼은 내 손으로 해결해야 했다.
“친구?”
루나가 내 옷깃을 잡았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오히려 역효과였다. 일리아스와 닮은 그녀의 외모는 내 죄책감을 더욱 자극했다.
“꼭 죽으러 가는 것처럼 말하네. 왜 고집을 부리는 거야?”
디에네가 화를 내며 이자벨처럼 내 앞을 막아섰다.
“전 절대 죽지 않습니다. 생각 없이 행동하는 건 더 아니고요.”
“그게 무슨 소리······.”
툭!
하늘에서 왕관이 떨어졌다.
크리브마허가 떨어트린 왕관을 잡아내고 천천히 머리 위에 얹었다.
“막시민이 와도, 살렘이나 에반이 함께 해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도움이 되지 않거든요.”
“뭐?”
아공간에서 시약병을 하나 꺼냈다. 그걸 본 모른의 두 눈이 흔들렸다.
“아, 아가야!”
“너무 걱정들 하지마세요.”
이내 시약병의 뚜껑을 열고 마셨다. 모른을 제외한 사람들은 그저 내가 만든 포션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시약은······.
[코덱스 아포칼립스 : 3장 친절한 질투를 흡수했습니다.]
동시에 지금껏 아껴둔 죄악을 발동시켰다.
[특수 기술 ‘탐욕’을 사용합니다.]
[특수 기술 ‘나태’를 사용합니다.]
[특수 기술 ‘분노’를 사용합니다.]
지금이라면, 제어가 가능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의 날개가 충돌을 상쇄시킵니다.]
[???의 날개가 Player의 의지를 바로 세웁니다.]
[특수 기술의 지속시간이 666초로 증가합니다.]
그리고 시스템은 내 예상이 맞았다는 듯 곧바로 메시지를 띄우기 시작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거의 다 끝났다, 네브로.”
몸과 영혼이 따로 분리되어 억겁과 같은 시간동안 견뎌왔을 네브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이제 고통은 끝이다.”
왕관에서 검은 빛이 일렁였다. 그리고 곧 그 검은 빛은 헤일로가 되었다.
[“천사님.”]
오만을 제외한 육대죄악이 모였다.
고양감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걸 초연한 것처럼 미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마치 내가 인간이 아닌 듯한 느낌.
썩 좋은 감정은 아니었지만······.
“네브로, 조금만 빌린다.”
갈락슈르가 움직였다. 그러자 주변의 풍경이 시커먼 죽음의 대지로 물들었다.
[“나생문(羅生門).”]
지금까지 죽여온 모든 영혼들이 내 힘이 되었다. 그리고 그 힘은 단순히 검술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닌 불가사의한 무언가로 변했다.
이게 바로 네브로의 오러 비기, 나생문.
수많은 신들을 살해하고 얻은 힘으로 끝내 인과율과 신들의 시대마저 부숴버린 능력.
쿵!
마왕이 한참 모른의 언데드를 부수다 나를 돌아보았다. 비록 몸뿐이었지만 이 힘의 정체를 느낀 모양이었다.
-구아아아아악!
아무 이지조차 보이지 않는 순수한 분노의 함성이 마왕의 몸에 달린 황제와 헤이겔의 입을 통해 토해져 나왔다.
삐걱-
이내 마왕에게 달려가려했지만 무리한 힘의 운용으로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죄악들이 서로 내 몸을 통제하려는 듯한 상황이었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네, 천사님.”]
그런 나를 향해 네브로가 비웃으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제대로 움직여보라고.”]
파앙!
네브로의 의지가 내 몸을 조종했다. 곧이어 일곱 장의 검은 날개가 펄럭이며 죄악들을 조율했다.
[“어이, 난 도끼 따위 사용한 적이 없다고!”]
네브로가 마왕을 향해 외치며 내 몸의 통제권을 내게 돌려주었다. 동시에 코앞까지 다가온 마왕이 한 손에 들고 있던 양날 도끼를 맹렬한 기세로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한 번의 휘두름에 대지가 갈라졌다. 더욱 신기한 것은 내가 그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자, 이제 누가 진짜 괴물이냐.”
검은 헤일로가 불길하고 넘실거렸다. 미처 피하지 못한 마왕의 도끼는 내 왼손에 잡힌 채 꼼짝도 못했다.
이게 바로 초월자의 힘인가.
어쩌면 그냥 초월자도 아닐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상대는 무려 마왕. 비록 네브로가 직접 조종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 육체만큼은 온갖 신들을 죽인 괴물이었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아쉬운 점은 존재했다.
막강한 힘을 손에 넣었으나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는 점. 그래서 조금 전의 공격도 피하지 못하고 잡을 수밖에 없었다.
퍼버버버벅!
곧이어 나생문이 만들어낸 죽음의 기운이 사방에서 마왕을 두드렸다. 죽음의 힘만 존재한다면 생각할 수 있는 어떠한 형태로든 힘이 발현되는 나생문도 아직 내 생각만큼 원활히 사용할 수 없었다.
[“내 걸 베끼는 게 아니라 천사님의 오러 비기를 써야지.”]
“그게 됐으면 진즉에 사용했지.”
쿠웅! 콰지직!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울렸다.
마치 네브로의 몸속에 있었을 때 겪었던 초월자들의 전투가 재현된 듯했다.
‘제한시간은 666초. 그 안에 끝낸다.’
마지막 남은 10분.
모든 걸 불사르고 간다.
< 409화. 초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