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5화. 크롬웰 전투 >
드넓은 평야에 수많은 군마가 모였다. 금방이라도 출진을 할 것처럼 어수선한 가운데 그들의 통솔권자로 보이는 인물이 보고를 받고 있었다.
“로스 각하, 상부에서 공격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초인들은?”
“함께 갈 것 같습니다.”
부관의 보고에 로스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고 주변 부장들에게 손짓했다.
“출진이다.”
“출진! 출진이다!”
각자가 맡은 부대로 향하며 출진의 신호를 알리는 사이 로스 후작의 시선이 크롬웰 영지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설마 아드리아스 크롬웰이 흑마법사였을 줄이야. 왜 제국에 반기를 들었는지 알겠군.”
“이번 키메라 사건도 그의 소행이라고 하니 꽤 이전부터 준비했던 모양입니다.”
황궁에서 내려온 공문.
그 안에는 이번 키메라 사건의 주동자가 아드리아스 크롬웰이고 모든 반군 토벌 병력을 크롬웰로 돌린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렇게 모인 병력은 이제껏 통틀어 가장 많았고 무려 30명이 넘는 초인들까지 동원되었다.
“키메라와의 충돌은 최대한 자제하고 움직이라는 명령은 조금 이해하기 힘들군.”
“병력을 보존하는 게 우선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글쎄.”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최대한 키메라를 피해서 움직이라는 상부의 명령이었다. 크롬웰만 처리하면 모든 키메라들이 기능을 멈춘다고는 하지만 혹여나 크롬웰을 공략하던 중에 키메라들에게 포위라도 당한다면 낭패였다.
‘적어도 진군 진로 상에 있는 것들은 정리하는 것이 옳은 게 아닌가.’
그냥 병력도 아닌 무려 초인들만 30명이 넘게 포함된 전력이었다. 제국의 역사를 통틀어 이렇게 많은 초인들이 뭉친 전례가 없을 정도.
소문으로는 황가에서 황실 직할령을 이번에 전부 내놓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마치 뒤를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퍼주는 보상에 고개가 갸웃해졌지만 설마 초인들을 상대로 거짓 대가를 제공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가 의문일 뿐이었다.
“키메라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조금 과한 전력과 보상이야.”
“정보에 의하면 키메라가 어디선가 계속 생산이 되고 있다는 것 같습니다. 초기의 추정 개체 수는 20만이었지만 현재는 25만으로 계속 늘어나고 있는 추세······.”
“뭐, 크롬웰만 정리하면 문제없겠지. 주인이 없어지면 기능이 정지한다는 로들렌 마탑의 연구결과가 있으니.”
움직이기 시작한 제국의 토벌대가 바글거렸다. 이미 준비된 병력을 운용하는 것이었기에 그들은 얼마 안 가 크롬웰의 근처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끼에엑!
-그어억!
그런 그들이 마주한 풍경은 키메라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크롬웰 성이었다. 그동안 의외다 싶을 정도로 키메라들과의 동선이 겹치지 않았던 그들은 의문을 가진 채 그 모습을 보았다.
“뭐지? 왜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는 건가?”
“혹여 본인들도 통제를 제대로 못하는 게 아닐까요?”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사방에서 키메라들이 크롬웰에 집결한다는 정보를 들었지만 정작 토벌군과 동선이 겹친 키메라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피해가라고 명령이라도 내린 것과 같은 느낌이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이미 크롬웰은 키메라들과 혈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로스 각하, 듀란 각하께서 하실 말씀이 계시다고······.”
“그래.”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사이에도 키메라들은 토벌군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로스 후작을 비롯한 수뇌부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뭔가가 이상함을 깨달은 상황이었다.
“로스 공, 고생이 많군.”
“부르셨습니까, 듀란 각하.”
같은 후작이었으니 오러 마스터인 듀란과는 명성과 지위에서 차이가 나는 로스가 슬쩍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자네도 느꼈겠지만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어.”
“그렇습니다.”
“우리끼리 나눈 이야기지만 아무래도 속은 것 같아.”
듀란 후작의 말에 로스 후작이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봤다.
“허면······.”
“크롬웰이 키메라를 만든 게 아닌 것 같다는 게 우리의 의견이네.”
듀란 후작의 우리라는 말은 곧 30여명의 초인들을 뜻함이었다. 로스 후작도 내심 짐작하고 있었던 의견이었기에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어쩌지요?”
“아드리아스 크롬웰이 흑마법사라는 건 사실이다. 게다가 반군이라는 것도 변치 않지. 우리는 계획대로 크롬웰을 세상에서 지울 것이다.”
“키메라들은······.”
“이용하는 것도 좋겠지. 여기서 조금 대기하다가 결정타만 날리겠다.”
듀란 후작의 냉정하면서도 잔혹한 말에 로스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키메라들이 알아서 토벌군을 피해가며 굳이 크롬웰만 공격한다면 불필요한 전력 소모는 최소한으로 하는 게 좋았다.
“그나저나 크롬웰도 나름 선전하는군. 변방의 소규모 영지라고 생각했는데 저 키메라들을 상대로 버티다니 말이야.”
크롬웰 성벽 주위로는 발 디딜 곳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키메라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얼마나 많은지 우글대는 모습이 벌레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곧 쓰러지지 않겠습니까. 고작 영지 하나가 감당할 숫자도 아니거니와 키메라 한 마리는 병사 열을 상대해도 멀쩡할 정도로 강한······.”
콰아아앙-----!
로스 후작의 말이 굉음에 파묻혔다.
깜짝 놀란 표정으로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무언가가 있었다.
“저, 저, 저게······!”
“허어······.”
그것은 거대한 용이었다.
전래동화나 전설로만 전해지고 제국의 유력인사들은 어쩌다 유해만 구경해봤을 존재.
고대한 용은 키메라들을 향해 불길을 한 차례 내뿜더니 이내 첨탑 위에 착지했다. 그러자 용의 등에 타고 있는 누군가가 희미하게 보였다.
“부관! 망원경!”
“예, 옙!”
오러 마스터인 듀란 후작은 망원경이 필요 없이 마나를 이용해 안력을 높였다. 그러자 드디어 용을 타고 온 자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저 자는······.”
“아드리아스 크롬웰!”
성 안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아드리아스의 등장에 후작들이 놀라는 사이 아드리아스가 성벽 위로 내려섰다.
금방이라도 키메라들을 향해 마법을 사용할 것 같던 그는 시선을 멀리 던졌다.
“우리를 확인했군.”
“흐음.”
토벌군이 도착했음을 확인하고 있는 아드리아스를 보며 로스 후작은 알 수 없는 조급함과 초조함을 느꼈다.
“선제공격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굳이 먼저 힘을 뺄 필요는 없지. 아무리 아드리아스 크롬웰이라고 해도 저 많은 키메라를 상대로 힘이 안 빠질 수는 없을 거야.”
애초에 저만한 숫자는 초인 하나가 이겨낼 수 없었다. 확실한 처리를 위해 직접 나서야할 때가 오겠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게 듀란 공작의 생각이었다.
“듀란 후작.”
그때 아드리아스의 목소리가 전장의 소음조차 뚫으며 토벌대에게 전달되었다.
“마법인가.”
듀란 후작이 피식하고 웃으며 중얼거릴 때 아드리아스의 목소리가 다시 전달되었다.
“지금이라도 병사들을 데리고 물러난다면 살려주겠다.”
그의 말은 토벌대 전원이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터무니없는 내용에 모두가 멍을 때릴 때 듀란 후작만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우습군. 지금 저 용을 가지고 기고만장한 모양인데 우리를 너무 물로 봤어.”
아드리아스의 말은 오히려 훌륭한 도발이 되었다. 오러 마스터가 된 이후로 싸울 일이 없었기에 자신이 진다는 상상은 전혀 해본 적 없던 듀란 후작은 살기를 드러냈다.
“네 녀석은 내가 친히 죽여주마.”
아드리아스의 목소리를 들은 나머지 초인들도 호화로운 마법 텐트에서 나와 비웃기 시작했다.
“간덩이가 부었군요.”
“주변에서 최연소 초인이라고 띄워주니 주제를 모르는 거겠지.”
30여명의 초인.
그들의 등장만으로 토벌군이 위치한 장소에 넘실거리는 기세가 가시화될 정도였다.
“세, 세상에 존재하는 초인들은 모두 모인 것 같군.”
“조용히 해! 들으면 어쩌려고.”
같은 토벌군의 병사들마저 두려움에 떨 정도로 그들의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하하하하······응?”
아드리아스를 비웃던 초인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간 잘못 보았나 싶었지만 그의 시선에 비친 아드리아스는 분명 웃고 있었다.
“웃어?”
그 순간 아드리아스의 목소리가 다시 전달되었다.
“재물에 눈이 멀어 초인의 긍지조차 잊고 달려온 황제의 사냥개 주제에 좋다고 웃는군.”
“······.”
전투의 소음이 일순 적막에 휩싸인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너희들이 돈을 받고 움직이는 용병과 다를 게 뭐냐. 용병들은 그래도 일을 가려받기라도 하지 너희는 그저 좋다고 침을 흘리며 구별하지 못하는구나.”
“우리를 모욕하려는 속셈인 것 같다만 그런 술수가 통할 것 같느냐.”
워록 중 하나가 마법을 사용하며 아드리아스에게 되갚아주었다. 그러나 아드리아스는 여전히 비웃는 얼굴로 말을 이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내 말이 틀렸나?”
“틀렸다! 우리는 황제 폐하의 어명을 듣고 감히 제국에 반기를 든 역적을 토벌하는 명예를······.”
“명예? 웃기지 마라.”
아드리아스가 손을 펼쳐 보이며 주변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과 키메라들을 가리켰다.
“괴물들에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도 느껴지는 게 없는 건가? 애초에 이 키메라들은 너희가 떠받드는 황제가 만든 괴물들이다. 이런 자의 명령을 듣고 괴물과 함께 인간을 공격하는 행위가 명예라고?”
“헛소리로 우리를 현혹하려 들지마라. 이 키메라들도 너의 소행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이 키메라들이 내게 아니란 걸 속으로는 알고 있으면서 찔리는 모양이지?”
아드리아스의 말대로 말을 하던 워록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멈췄다. 키메라들이 진짜 아드리아스의 소유물이었으면 지금의 광경이 말이 되지 않았기에 그도 할 말이 없었다.
“화, 황제 폐하께서 저런 사악한 종자들을 만들었을 리 없다!”
“그건 내 알 바 없고. 이제 이야기는 끝이다.”
아드리아스가 마지막 경고를 했다는 듯 대화의 끝을 고했다.
“지옥을 보여주마.”
우드득!
처음에는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다. 그렇기에 천천히 벌어지는 변화의 물결도 바로 알아차릴 수 없었다.
“응?”
가장 먼저 전장의 이상을 눈치 챈 건 다름 아닌 듀란 후작이었다.
“왜 저들끼리 싸우지?”
“뭐라?”
듀란 후작의 말에 다른 초인들도 시야를 넓히며 전장을 살폈다. 그러자 듀란 후작의 말대로 키메라들이 서로를 공격하고 있었다.
“뭐지?”
“역시 아드리아스 크롬웰이 키메라를 만든 범인······!”
워록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자세히 살펴보자 바닥에 쓰러져 있던 시체들이 그게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일어나 키메라들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네크로······맨서?”
상상도 못한 상황에 그들이 당황하고 있을 때쯤 갑자기 어디선가 뿔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뿌우----
뿌---!
“이건 또 뭔······.”
사방에서 울려오는 뿔나팔 소리는 분명 제국의 것이 아니었다. 이내 주변을 정찰하고 있던 병사 하나가 급하게 달려오며 말했다.
“보, 보고 드립니다!”
“말해라!”
“후방에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병력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제국의 병력은 아닌 것이······.”
“······말도 안 되는 소리. 제국의 군대가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국경을 넘고 왔다는 것이냐. 다른 영주의 병력이 아닌 것이냐?”
“귀, 귀가 뾰족했습니다!”
귀가 뾰족하다?
보고를 함께 듣고 있던 초인들은 이내 한 존재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엘프?”
“헉, 헉. 다시 보고 올립니다! 동쪽으로 30분 거리에서 엘프의 군대를 발견! 라, 라스틸리아의 문장입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엘프들이 국경을 넘어서 이곳까지 왔다?
아니, 애초에 라스틸리아에서 폐쇠적으로 지내는 종족들이 대체 무슨 이유로 이곳에 왔다는 말인가?
“로스 각하! 그, 급보입니다!”
“이번에는 또 뭐냐! 엘프의 소식이라며 믿기지 않지만 이미 들었다!”
“그게 아니라 제국 북부의 국경이 북부 야만인들로 인해 뚫렸다는 소식입니다!”
정적이 휩싸였다.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연속으로 들은 수뇌부는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몽롱하게 병사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북부가 뚫려? 어째서······아!”
거의 대부분의 제국 병력들이 현재 이곳에 몰려있었다. 게다가 초인들마저 대부분이 이곳에 모인 상황.
이미 한 차례 뚫려 아직까지도 복구가 되지 않은 북부가 충분히 함락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뿌우우-----!
뿔피리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리고 저 멀리 정찰 부대로 보이는 엘프들이 기묘한 탈것을 탄 채 언덕 위로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허허, 진짜로 엘프 군대라니······.”
“도대체 왜?”
초인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실력에 자신이 있는 만큼 두려움은 없었지만 이 사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들이었다.
“음? 저 자는······.”
누군가가 엘프 정찰 부대 사이에 끼어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이내 그 정체를 눈치 챈 듀란 후작이 소리쳤다.
“······데슈른 폴론?!”
근육질의 노인이 언덕 위에서 엘프들과 함께 씨익 웃고 있었다.
“누가 감히 내 제자를 건드리느냐!”
< 405화. 크롬웰 전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