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6화. 도착 그리고 폭풍전야 >
산양의 주점을 벗어나 걸은 지 12시간.
우리는 드디어 샤이야에 도착했다.
“여기가 샤이야.”
네브로가 묘한 감정을 드러내며 눈앞에 나타난 도시의 정경을 바라봤다. 나도 네브로와는 다른 의미로 놀란 감정을 숨기며 샤이야를 보았다.
‘내가 본 샤이야는 사막이었는데 말이야.’
이게 그 사막이라고?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였다. 여태껏 보아온 도시들 중에서는 가장 거대하면서도 기묘한 분위기였다.
“벌써부터 적들의 기운이 느껴지는군! 으하하하!”
그리고 그런 도시를 바라보며 토르가 거대한 웃음을 터트렸다.
토르의 말대로 사방에서 느껴지는 기운들이 질식할 듯 주변을 뒤덮고 있었다. 단순히 하수인들만 온 것이 아니라 수많은 초월자들이 직접 행차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죠?”
“으하하하! 겁먹을 것 없다! 우리는 우리의 모험을 계속 이어나가면 된다!”
토르가 당당한 발걸음으로 도시를 향해 나아갔다. 네브로는 그런 토르를 보며 일리아스를 호위하듯 곁에 섰다.
-흥! 나는 안중에도 없냐!
“아, 미안해요. 그린나래도 제가 꼭 지켜드리겠습니다.”
네브로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그린나래는 작은 날개를 뽈뽈 거리며 토르의 뒤를 쫓았다.
“네브로.”
“예, 일리아스.”
“여기까지 무사히 온 적은 처음이야.”
일리아스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그 안에 담긴 불안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동안은 알고 있던 미래였지만 이제는 모르니 불안해지겠지.’
게다가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있으니 그러한 감정이 더욱 깊어질 것이다.
[“당당하게 걸어라.”]
불안해하는 둘을 향해 의지를 전달했다.
[“어차피 적들은 우리의 존재를 눈치 채고 있다. 여기서 겁먹은 모습을 보여 봤자 좋을 건 하나도 없어.”]
상대를 방심하게 만드는 용도라면 몰라도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좋지 않았다. 차라리 토르처럼 대놓고 당당하게 굴면 적들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거다.
‘소수의 세력이 온 게 아니다.’
이 기운들을 느끼고 있자니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세력들이 모두 집합한 듯했다. 그 중에서는 갈락슈르를 노리는 녀석들도 있을 거고, 구경만 하려는 이들, 어부지리를 노리는 이들 등 다양할 것이다.
“적이 예상보다 많아서 긴장해버렸네요.”
[“오히려 좋아. 적들도 한 세력이 아니니 서로를 견제하느라 우리를 함부로 공격하지 못할 거야.”]
“그러네요.”
내 의지를 전해들은 네브로가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광대들아! 거기서 뭐하냐! 어서 따라와라!”
“응, 갈게.”
토르의 외침이 강한 기운을 품고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와 함께 잠든 것 같았던 도시의 화사함이 생기를 띄었다.
기형화초와 어우러진 거대한 마도 도시.
온갖 식물에 얽힌 형형색색의 빛깔과 미래지향적인 외형의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는 샤이야에 입성했다.
**
도시의 면적은 한눈에 보기에도 어마어마했다. 사막이었던 땅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넓이였는데 다른 도시들에는 없었던 고층 건물들까지 있자 이게 같은 세상이 맞나 싶을 정도로 혼란을 불러왔다.
“토르!”
“으하하! 이게 누구야!”
그런 도시에서 용케 토르를 찾아낸 누군가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토르가 반갑게 맞이하는 걸 보면 적은 아닌 듯한데······.
“티알피! 어디 있다가 온 거냐!”
“어디 있다가 왔다니요! 토르가 절 놔두고 간 거지 않습니까!”
등장한 인물은 소년이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토르를 대하다가 이내 뒤에 선 우리 일행들을 바라왔다.
“이들이 갈락슈르의 운반자들이군요.”
“내 광대들이지! 으하하!”
“지금 웃을 땝니까?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난리난 거 모르세요?”
티알피라는 이름의 소년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그러더니 이내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더 이상 토르님을 엮이려 들지 마라. 도와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상황을 보아하니 토르가 독단적으로 우리를 돕고 있는 모양이었다. 솔직히 지금도 우리를 왜 도와주는지 잘 이해가 안가는 상황이라 할 말이 없었다.
“무슨 소리냐! 모험이 거의 다 끝났는데!”
“모험은 무슨 모험입니까! 토르가 이들을 도와주고 있다는 소문 때문에 제가 얼마나······.”
열변을 토하던 티알피는 갑자기 말을 멈추며 두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토르의 잘린 팔로 향해있었다.
“토, 토르?”
“안 돼! 난 모험을 무조건 마칠 거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팔은 어떻게 된 거예요?”
티알피의 물음에 토르가 특유의 근육을 만드는 포즈를 취했다. 그러나 왼팔이 없어 뭔가가 허전하게만 느껴졌다.
“으하하! 훈장이다!”
“훈······장?”
“최근 새로 넘어온 천마라는 녀석! 강하더군! 으하하하하!”
토르가 웃어재끼자 티알피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더니 이내 시선을 우리 쪽으로 돌렸다.
“당신들 때문에!”
“무슨 소리냐, 티알피! 이건 내가 한 선택이다! 주변을 탓하는 건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아!”
토르가 씨익 웃으며 주저앉은 티알피의 목덜미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도,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이들을 도와주는 겁니까!”
“응? 모험이 바로 앞에 있는데 왜라니?”
토르는 오히려 이해가 안가는 표정으로 티알피를 바라봤다. 마치 숨을 쉬는데 왜 심장이 뛰냐는 질문을 들은 듯한 표정이었다.
“하아, 하긴 이유가 있을 리가 없죠. 당신이 저를 거둬들인 것도 변덕이었으니······.”
“말을 섭섭하게 하는구나, 티알피! 변덕이라니! 으하하!”
“하여간 지금 이곳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티르와 스카디가 와있어요.”
티알피는 토르에게 말을 하면서도 시선을 계속 우리에게 주었다. 그 모습이 마치 우리 보고 들으라는 것 같았는데······.
‘미안하지만 난 티르랑 스카디가 뭐하는 작자들인지 몰라.’
토르야 워낙 유명하니까 알지만 저 둘은 몰랐다. 북유럽신화 쪽 신들이겠지, 뭐.
“그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쟁쟁한 놈들이 몰려왔습니다. 아! 흐룽그니르도 왔어요.”
“흐룽그니르! 그 녀석도 오다니 잘됐군! 으하하하! 이번 기회에 녀석의 골수를 맛보겠다!”
강한 녀석들이 이곳에 있다는 소식은 도리어 토르를 자극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티알피도 그걸 깨달았는지 자신의 얼굴을 감싸며 한숨을 내쉬었다.
“토르, 이번에는 정말로 죽을 지도 몰라요.”
“죽음이 두려워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건 겁쟁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토르는 그런 티알피를 향해 여유롭게 웃어보였다.
“내가 강해지고 유명해질 수 있던 이유를 생각해라, 티알피.”
“전 몰라요. 토르가 죽으면 저희 간의 새겨진 계약도 깨지니 오히려 좋죠.”
툴툴대는 티알피였지만 모르는 사람이 봐도 그가 토르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으흐흐. 그러고 보니 소개가 늦었군! 이 녀석은 내 시종인 티알피다. 평범한 인간이지.”
“어차피 죽을 사람들하고 뭣 하러 통성명을 합니까. 됐습니다.”
티알피는 그 말을 끝으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움직임을 보자 역시 그도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쑥스러워하기는! 으하하하!”
“일단 갈락슈르의 운반부터 끝내야겠습니다.”
토르는 몰라도 우리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티알피의 말이었다. 호랑이 굴에 들어왔다는 게 실감이 나는 느낌이라고 할까.
네브로의 말에 일리아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섰다.
“여기서부터는 일리아스가 앞에 설게.”
“흐음, 갈락슈르는 중앙으로 옮겨야 하는 거겠지?”
“응.”
중앙이라고 하면······.
[“이 도시의 중앙을 말하는 거냐?”]
“응.”
이렇게 넓은 도시의 중앙까지 걸어가려면 적어도 며칠은 걸릴 듯한데. 샤이야에 도착했다고 끝이 아니었구만.
스스슥-
그리고 도시에 들어온 순간부터 우리를 대놓고 따라다니는 기척들이 있었다. 딱히 본인들의 기운을 숨길 생각도 없는 듯했는데 하나하나가 초월자의 기세였다.
“으하하하! 좋구나! 아무나 나와서 덤벼라! 이 토르님이 상대해주지!”
그 상황에서 토르는 광역 도발을 시전하고 있으니 네브로의 안색이 갈수록 안 좋아지는 게 이해가 갔다.
[“너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라. 여기까지 와서 동료들을 죽게 둘 셈이냐.”]
“아, 아닙니다!”
나도 토르와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그건 나 자신의 죽음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 언제나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왔기 때문일까.
하지만,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주변 사람의 죽음이 두려웠다. 그런 내 마음은 강렬하게 네브로에게 투영되었다.
[“네브로, 죽음이 두렵나?”]
“그, 글쎄요. 무섭긴 하죠.”
[“일리아스의 죽음은? 만약 그린나래가 죽는다면?”]
“아······.”
내 물음을 통해 무언가를 깨달은 듯 네브로가 나직하게 침음을 냈다.
[“둘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정신 차려야 돼. 적어도 네가 살아있는 상황에서, 그것도 눈앞에서 죽는 것만은 막아야지.”]
“예!”
네브로에게 있어서 이 일행들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관계였다. 그런 만큼 내가 내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처럼 이들을 아끼겠지.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그렇게 우리는 온갖 무리들을 이끌고 샤이야의 중앙으로 향했다.
**
샤이야의 중앙, 제단이 위치한 장소.
이미 수많은 신과 초월자들이 모여 있는 상황이었다.
“먹을 건 하나밖에 없는데 많이도 몰려왔군.”
“우리는 너희를 막기 위해 온 거다, 이 불한당들아.”
“흐흐. 그러다가 기회만 보이면 바로 입속에 넣을 거면서 고상한 척 하기는······.”
초월자들의 기운으로 인해 평범한 사람들은 제단이 있는 장소 근처로도 다가오지 못했다. 대륙 역사상 지금껏 이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많은 수의 초월자들이었다.
“뭐야, 투전승불(鬪戰勝佛)도 왔잖아?”
“그뿐이냐. 아주 별별 놈들이 다 왔더군.”
이미 갈락슈르가 샤이야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부 퍼진 상태였다. 덕분에 모두 신경이 곤두 선 모습으로 서로를 경계하고 있었다.
정작 갈락슈르를 운반해오는 이들은 전혀 염두에도 없는 기색이었다.
“토르가 있다던데.”
“듣기로 한쪽 팔이 잘렸다고 한다.”
“토르의 팔을? 대체 누가?”
대화를 나누던 이들의 시선이 한쪽에서 나른하게 술을 마시고 있는 흑의의 사내에게 향했다.
토르의 팔을 자름으로서 단숨에 유명해진 천마가 그곳에 있었다.
“음?”
천마는 무수히 쏟아지는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술을 퍼마시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 반응에 함께 있던 소달기가 흥미를 보였다.
“왜 그러셔요, 오라버니?”
“넌 느껴지지 않는 것이냐.”
천마의 말에 달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마가 보는 방향을 보았다. 그곳에는 아무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거렁뱅이가 후드를 뒤집어 쓴 채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특이한 분이시긴 하네요. 아무 기운도 느껴지지 않다니······.”
“아무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천마는 마시던 술을 내려놓고 긴장한 기색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자 달기는 천마가 자신을 놀리는 줄 알고 빙긋 미소 지었다.
“천마 오라버니께서 이런 장난기가 있는 줄은 몰랐어요. 호호.”
“본좌가 장난?”
천마가 싸늘한 목소리로 달기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제야 이상을 깨달은 달기가 다시 한 번 후드를 뒤집어 쓴 인물을 찾으려 했으나 어느새 모습이 사라진 이후였다.
“방금 그 자는······?”
“흐흐, 흐하하!”
갑작스레 웃음을 터트린 천마가 모여 있는 초월자들의 면면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다시 한 번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래도 인과율이 작용한 듯하군.”
“네?”
“굳이 찾아갈 필요가 없었어. 본인이 직접 여기까지 왔군. 녀석은 운이 좋아.”
“오라버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소녀는 모르겠어요.”
달기가 답답하다는 얼굴로 귀엽게 토라진 반응을 해보였다. 그러나 천마는 전혀 흔들림 없이 그저 중얼거렸다.
“모든 죄와 굴레를 뒤집어 쓴 자가 왔다.”
“모든 죄와 굴레를 뒤집어 쓴 자?”
그게 뭐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달기의 궁금증을 천마는 해결해주지 않았다. 그저 곧 있으면 일어날 수라장을 상상하며 다시 술을 집어들뿐.
< 396화. 도착 그리고 폭풍전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