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0화. 천둥 >
묘지기의 무덤은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기괴한 땅이었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봐왔던 도시나 여러 장소들도 꽤나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겼는데 여긴 말 그대로 신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풍경이었다.
-고오오.
하늘에서 거대한 배가 날아다녔다.
그러나 그 배는 단순한 배가 아니라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대며 종종 소리를 냈다.
“으, 냄새.”
프레위르가 그런 배를 보며 중얼거렸다.
······나만 저 배가 신기한 건가?
“끄윽, 이토록 좋은 향을 맡고도 그런 반응이라니 안타깝군.”
“뭐? 이게 향기롭다고? 여기서 살다보니까 코가 망가진 모양이네.”
“끄윽, 향기도 모르는 녀석과 나눌 대화는 없다.”
주변을 구경하고 강글라티와 헛소리를 하며 걷다 보니 허허벌판에 애매하게 존재하는 왕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건물 하나 없이 덩그러니 의자만 있는 건 또 뭐냐.’
그리고 그 왕좌에는 우리가 만나고자 했던 인물이 존재했다.
“헬라님, 데려왔습니다.”
강글라티가 고개를 숙이고는 전과 같이 슬쩍 사라져버렸다. 순식간에 우리만 남겨지자 애매한 공기가 주변을 맴돌았다.
“갈락슈르의 운반이니?”
반은 미녀, 나머지 반은 해골로 이루어진 헬라는 내가 살던 세상의 파이시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응.”
“네가 이번 무녀겠구나. 수고가 많아.”
생김새나 분위기와 달리 헬라는 포근한 어조로 일리아스를 상대했다. 곧이어 그녀는 나머지 일행들의 면면을 훑어보다가 문득 네브로에게 멈춰 섰다.
“재미난 걸 가지고 다니는구나.”
[“날 말하는 건가?”]
“그렇다.”
이전의 싯다르타가 그러했듯 헬라도 네브로가 아닌 나와 눈을 마주쳤다. 실제로 내게 눈은 없었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아이온의 아들이니?”
“그, 그렇습니다.”
내게 시선을 거둔 헬라가 이내 네브로에게 말했다. 네브로가 어정쩡한 모습으로 대답하자 그녀는 살포시 웃고는 이내 프레위르와 그린나래에게 시선을 옮겼다.
“라스틸리아의 혈통, 그리고 이제 사라져가는 요정들의 여왕인가.”
-사라지지 않아!
그린나래가 입에 거품을 불며 두 눈을 희끄무레하게 뒤집었다. 그 모습이 하찮으면서도 미친 것 같아 프레위르가 다급하게 붙잡았다.
“네가 부정해도 요정들은 이 세상에서 곧 지워질 거다. 흐림이 왜 비명나무 숲까지 찾아갔겠느냐. 설마 내가 보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아악!
광견병에 걸린 것 마냥 거품을 물며 발악하는 그린나래를 프레위르가 간신히 잡고 있었다.
“요정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할 것도 없구나. 그래서 갈락슈르의 계약을 이행하러 왔다고?”
“거짓말이야.”
헬라의 입이 그대로 멈췄다. 지켜보던 우리도 일리아스를 멍하니 바라봤고, 프레위르의 품에서 날뛰던 그린나래도 경악한 얼굴로 일리아스를 돌아봤다.
-거짓말······?
“응. 거짓말.”
그린나래의 중얼거림에 일리아스가 한 점 부끄럼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갈락슈르의 계약은 이행됐어.”
“닉스의 무녀야, 지금 날 가지고 노는 것이냐?”
헬라가 미소 지은 얼굴 그대로 스산한 말을 했다. 동시에 주변의 안개가 점점 짙어지며 땅이 들썩거렸다.
“일리아스.”
프레위르가 심각한 표정으로 일리아스를 불렀다. 그러나 일리아스는 미동조차 없이 헬라를 주시하고 있었다.
‘저렇게 도발을 하는 이유가 뭐지?’
현재로서는 일리아스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이 상황을 몇 번 겪어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처음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아르고스를 박살냈다는 건 들었다. 흐림조차 따돌린 실력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수도 있군. 그러나 나와 그들을 비슷하게 생각하고 건방을 떠는 거면 틀렸다고 말하고 싶구나.”
콰드드득!
쿠구궁!
대지가 무너져 내렸다.
우리를 밝고 선 땅을 제외하고 모든 땅에서 언데드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일리아스.”
프레위르가 검을 뽑아들며 다시 한 번 일리아스의 이름을 불렀다. 주변 광경은 점차 비현실적으로 변해가며 어느새 눈앞에 있던 헬라도 거대한 모습으로 변해 우리를 마주하고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갈락슈르를 내가 가져가야겠구나. 이번이 아마 마지막 운반이었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초월자들의 힘이 깃든 물건이라······.”
얼굴을 들이밀며 말하는 헬라는 얼마나 거대한지 눈썹 하나가 거의 사람 크기였다. 그 압도적인 거대함에 말을 듣고 있는 것만으로 짓눌려 죽을 것만 같았다.
“미안해, 헬라.”
“사과해도 늦었단다, 무녀야.”
“아니, 그걸 말하는 게 아니야.”
일리아스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그 알 수 없는 시선 처리에 모두의 시선이 위로 향하자······.
콰르릉!
번개가 내리치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몰려들었다.
“······저 녀석이 오늘 온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니?”
그 모습을 본 헬라가 일리아스를 향해 물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하늘로 향해 있었다.
우르르쾅쾅!
“으하하하!”
이내 떨어지던 번개 사이로 누군가가 나타나며 우리 곁에 내려섰다.
“헬라! 그런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죽여 버릴 수도 있다고! 하하!”
섬뜩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금발의 미남이었다. 그의 몸에는 여전히 번개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는데 이내 우리가 눈살을 찌푸린 걸 확인하고는 아차차 하며 번개를 껐다.
“이건 또 뭐야! 나를 위해 초청한 광대들인가! 헬라, 네가 나를 그토록 생각해주는지 몰랐군! 으하하하!”
웃을 때마다 천둥이 치는 그는 아무리 봐도 내가 아는 그 유명한 신인 것 같았다.
[“토르인가?”]
“오오! 이 녀석은 또 뭐야! 넌 왜 그런 꼴을 하고 있는 거냐!”
토르가 날 보며 껄껄 웃어댔다. 마치 철창 안에 갇힌 사람을 보며 웃는 듯한 모양새였는데 원래 저런 성격인 듯싶었다.
그때 프레위르가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애매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토르······.”
“오! 넌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프레위르 뇨르드 제 팔라렘이라고 합니다.”
웬일로 존대를 사용한 프레위르가 공손하게 몸을 숙였다. 그러자 토르도 기억이 났다는 듯 얼굴이 환해지며 그녀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하하하! 뇨르드의 딸이었군! 반갑구나, 프레위르!”
아무래도 일리아스의 목적은 헬라가 아닌 토르한테 있었던 모양이군. 토르라면 나조차도 알 정도로 유명한 신인만큼 일리아스가 그에게서 뭘 얻어낼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 녀석들은 내 먹잇감이다.”
신나서 악수를 하고 있던 토르를 향해 헬라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토르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헬라를 돌아보았다.
“먹잇감? 날 위해 초청한 광대들이 아니었어?”
“아니야. 오늘 너와 약속을 잡은 것 맞다만 그 녀석들은 별개지.”
“허어, 그건 안 되겠는데?”
“뭐?”
“내 눈에 띈 이상 이 녀석들은 나를 위한 광대다! 으하하하!”
헬라는 그렇다쳐도 토르는 완전 미치광이 같은데. 사고방식 자체가 범인의 범주를 벗어난 인물이었다.
“토르.”
“그렇게 내 이름을 불러도 안 되는 건 안 돼. 죽고 싶나?”
토르가 입가만 웃으며 안광을 번뜩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네브로의 오금이 저려오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됐으니 난 내 광대들을 데리고 이만 가보겠다. 만남은 즐거웠어, 헬라! 하하하하!”
“그게 무슨······!”
저 헬라마저 당황시킨 갑작스런 토르의 언행은 당연히 우리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일리아스만은 이 모든 일을 미리 짐작했다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가자! 광대들아!”
“응.”
가만히 있던 일리아스가 드디어 반응하며 토르의 뒤를 따랐다. 덕분에 일행들은 얼떨결에 토르의 뒤를 따르게 됐다.
[“헬라와 약속이 있던 게 아니었나?”]
“응? 광대가 호기심도 많군! 만나서 얼굴을 봤으니 된 것 아닌가!”
역시 저 놈의 사고방식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어쨌든 이것도 다 일리아스가 의도한 것일 테니 큰 걱정은 없었다.
"멈춰라."
······걱정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건 너무 마음 편한 소리지.
까드득!
탁탁!
언데드들이 주변을 에워싸며 우리의 길을 막았다. 어느새 하늘을 날던 배도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고, 그 외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많은 무리들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토르, 적당히 하거라.”
“호오?”
토르가 맑은 눈으로 정말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헬라를 돌아봤다.
“헬라! 네가 오늘 죽을 날인가 보구나!”
“정말로 그렇게 나올 거냐?”
콰앙!
문답무용이었다.
순식간에 번개가 방출되며 헬라에게 쏘아졌고 헬라는 그 번개를 씹어 삼켰다.
쿠릉! 쿠릉!
이내 헬라의 몸속에서 천둥소리가 나며 잠잠해졌지만 그 한 수만으로 격의 차이를 느낀 듯 표정이 굳었다.
“헬라! 이렇게 좋은 날에 널 죽이게 만들지 마라! 하하하!”
“······모두 물러나라.”
결국 백기를 든 것은 헬라였다.
헬라가 명령을 내리자 언데드들이 물러났다. 이내 길이 쭉 뚫리고 토르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나아갔다.
“하하하하! 헬라, 너와 싸우지 않게 돼서 기쁘군!”
“당장 꺼져라.”
헬라는 속이 상했는지 크기를 줄이며 다시 왕좌에 앉았다. 이내 짙게 어둠을 깔고 모습을 숨기자 그녀의 언데드들도 땅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자, 가자! 광대들아! 우리의 모험이 이 앞에 기다리고 있다!”
형형한 안광으로 소리치는 토르를 보니 진심으로 하는 말인 것 같아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저런 게 바로 맑은 눈의 광인이라는 건가?
“일리아스······.”
프레위르가 나직하게 일리아스를 불렀지만 일리아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 팔을 들어올렸다.
“오.오! 모.험.을.떠.나.자.”
마치 국어책을 읽듯 어색하게 말한 일리아스가 토르의 뒤를 따랐다.
[“저게 정답이라는 거겠지.”]
“그, 그렇겠죠?”
결국 나머지도 알쏭달쏭한 얼굴로 그의 뒤를 쫓았다.
“미리 이렇게 될 거라고 말이라도 해주지.”
프레위르의 억울한 듯 나직한 목소리가 아련히 울려 퍼졌다.
**
묘지기의 무덤을 벗어나자 뚜벅뚜벅 걸어가던 토르가 멈췄다.
“그런데 어디로 가지?”
“······.”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그때 일리아스가 기다렸다는 듯 토르의 말을 받아줬다.
“샤이야.”
“샤이야? 광대들아, 너흰 샤이야로 가는 중이었나?”
“응. 샤이야로 가는 모험이었어.”
“샤이야는 별로인데······.”
토르가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좁히자 일리아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갈락슈르를 샤이야까지 옮겨야해. 수많은 적들이 우리를 방해할 거야. 그리고 우린 결국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샤이야에 도착하는 거지.”
“갈락슈르? 그게 너한테 있나?”
토르가 묻자 일리아스는 순순히 갈락슈르를 보여주었다.
“정말이군! 좋아! 재밌는 모험이 되겠어! 으하하하하!”
토르가 갑자기 의욕이 넘친다는 표정으로 팔뚝에 힘을 쥐며 포즈를 취했다.
“갈락슈르에는 내 힘도 깃들었지! 하하하! 이걸 노리는 적들을 물리치고 결국 샤이야에 도착한다면 굉장히 뿌듯하겠군!”
갈락슈르.
역시 내가 들고 다니던 검이 맞는 모양이었다. 설명을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앞서 헬라가 했던 말이나 토르의 지금 말을 들으면······.
‘이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신들의 힘이 담긴 물건.’
어쩌다 외형이 그렇게까지 변했는지는 모르겠다. 오관이 마지막 봉인을 풀기 위한 제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만약 봉인을 풀었으면 저런 모습으로 변하려나?
“그건 그렇고 너도 이 모험의 동반자인가?”
갑자기 토르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네브로도 자신에게 시선을 준 것이 아님을 깨닫고 조용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래.”]
“어째서지?”
[“어째서라니?”]
또 뭔 소리를 하려는 거야, 이 양반.
“너와 같은 격을 지닌 자가 이런 모험에 동반한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그런다! 하하!”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이제 보니 너, 정상이 아니군?”
토르가 씨익 웃으며 갑자기 손을 뻗어왔다.
예상도 못하고 있던 네브로가 뒤로 물러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머리통을 붙잡힌 뒤였다.
“더 크기 전에 내가 잡아먹는 것도 좋겠어! 하하하!”
스멀스멀.
끔직한 살기가 네브로의 전신을 옥죄었다.
< 390화. 천둥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