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3화. 굴레 >
샤이야로 떠나는 첫날 아침이 밝아왔다.
예상 이동시간은 대략 3개월 정도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그놈의 제약이 뭔지는 몰라도 참 골치 아프네.’
초월자의 힘을 사용한다면 단숨에 공간을 도약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반드시 걸어서 운반을 해야 이 모든 일에 의미가 생긴다는 게 싯다르타의 설명이었다.
‘정확히 뭘 운반하는지도 설명해주지 않았고 말이야.’
걱정이 된다면 역시 주변의 방해였다.
싯다르타는 물건을 노리는 자들이 무조건 있을 거라고 경고하며 우리에게 무운을 빌어주었는데 그 모습이 참······무책임하다고 해야 하나.
“이, 일리아스 님. 첫날 이후로 처음 뵙는 군요.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입구에서 미리 나와 대기하고 있던 네브로가 천천히 걸어 나오는 일리아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몇 번을 봐도 루나와 비슷한 외모에 신기한 감정이 생겼다.
“일리아스.”
“예?”
“님자 말고 그냥 일리아스.”
“아, 알겠습니다. 그냥 일리아스라고 부를 게요. 아, 혹시 잊으셨을지 몰라서 다시 소개하자면 전 네브로입니다.”
네브로가 굳이 오지랖을 부렸다.
심장이 두근두근 거리는 것이 완전히 사랑에 빠진 소년의 그것과 같았다.
‘몇 번 봤다고 벌써 사랑에 빠지냐.’
하긴 이 녀석이 살아온 환경을 생각하면 영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지만.
“응. 운반자.”
“예?”
“운반자 일.”
소녀가 손가락을 들어 네브로를 가리켰다.
“운반자 이.”
그리고는 꼭두새벽이라 저기압 상태인 프레위르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하하······.”
“어이, 닉스 꼬맹이. 나한테는 프레위르라는 이름이 있다고.”
일리아스의 말에 발끈한 프레위르가 하품을 하며 말했지만 일리아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일리아스는 책임자, 너흰 운반자. 그것뿐인 관계.”
“그렇다고 굳이 이름을 안부를 필요는······.”
네브로가 은근슬쩍 말을 걸어봤지만 일리아스는 대답 없이 앞서 걸어 나갔다.
“하아, 고난한 여행길이 되겠구만. 아닌가? 오히려 저런 태도가 편할 수도 있겠어. 그것보다 네브로, 너 약은 받았냐?”
“예. 덕분에 받았습니다.”
네브로가 배낭 속에서 단단한 재질로 만들어진 약병을 꺼내들었다.
“매일 정오에, 100일 동안 복용하면 저주를 완전히 없앨 수 있다고 해요. 그전에도 차차 회복이 될 거라고 하셨고요.”
“다행이네.”
“그러고 보니 프레위르는 이번 일에 대한 보수로 무얼 받았나요?”
“비밀.”
이네 프레위르도 일리아스의 뒤를 쫓자 네브로가 다급히 따라붙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미안한데 한 마디만 하자.”]
갑작스런 내 의지에 네브로가 살짝 경직되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싯다르타는 분명 물건을 노리는 자가 있을 거라고 했어. 근데 너희 태도를 보니까 너무 안일해.”]
“으으.”
네브로가 꾸지람을 받은 얼굴로 풀이 죽었다.
[“분위기가 좋은 건 좋아. 하지만 항상 주변 경계에 철저해라.”]
“말씀 감사합니다.”
분위기가 좋은 건 좋다고 말했지만 네브로는 금세 긴장한 기색이 되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이 딱봐도 불안한 사람처럼 보여서 광고를 하는 꼴이었다.
[“긴장 풀고. 어깨도 펴.”]
“예, 옙!”
“음? 왜 그래?”
네브로의 대답에 프레위르가 고개를 돌렸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하.”
“약을 잘못 받았나?”
“아직 먹지도 않았어요.”
프레위르는 쿨하게 넘어갔다.
지금껏 그녀와 함께하며 이랬던 적이 꽤 있었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긴 하지.
[“주변을 경계하라는 건 항상 머리 한 구석에는 염두에 두란 소리야. 그렇게 긴장하란 말이 아니고.”]
“예······.”
[“네브로.”]
“예!”
[“넌 강해. 내가 알려준 마법은 고작 2년 만에 익힐 수 있는 게 아니야. 하지만 넌 그 시간 안에 모두 익힌 것도 모자라서 완벽하게 사용하지. 넌 조금 더 자신감을 가져도 돼.”]
“······예.”
다리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 검술을 마저 가르칠 예정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이미 내 모든 마법을 흡수한 네브로가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건 시간이 아깝지.
[“오늘부터 검술 지도다.”]
“오, 오늘부터······.”
마치 자신은 아직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배우냐는 의미가 감정에 섞여있었다.
[“다리? 중요하지. 하지만 미리 배워둬서 나쁠 건 없어.”]
“예. 부탁드립니다.”
의문도 잠시일 뿐, 네브로는 곧바로 감사한 기색을 띄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도 강함에 대한 갈망이 커서 꽤나 가르치기 좋은 학생이었다.
‘플레이어블을 가르친 거랑 아주 잠깐 동안이지만 교수를 해본 게 도움이 되는군.’
네브로에게 큰 기대는 없었다. 이미 마법에 대한 것만으로 기대를 충족하고도 남은 상황이었으니 검술은 그저 호신의 용도로만 익혀도 괜찮겠지.
**
후웅!
‘그저 호신용으로만 익혀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첫째 날이 무사히 지나가고 밤이 되었다.
다행히 밤이면 항상 괴물들이 나타나는 건 아니었고, 특정한 조건에 따라 나타나다 보니 생각보다 힘들 일은 없었다.
후웅!
덕분에 노숙을 하며 개인 정비 시간 동안 기초적인 움직임과 동작들을 가르치는데 내 예상이 무참히 부서졌다.
“이, 이게 맞을까요?”
[“어.”]
네브로.
이 녀석은 마법만 천재였던 게 아닌 모양이었다.
후웅- 후웅-
마법을 이용해 검의 모양으로 만들어낸 철덩어리가 네브로의 손에서 가볍게 휘둘러졌다. 몸도 약한 네브로가 그 무거운 철검을 부드럽게 휘두를 수 있는 이유는······.
[“마법은 사용 금지.”]
자연스레 마법과 연계해서 검을 움직이는 것이 미쳤다는 말밖에 안 나왔다. 나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마법을 사용하네.
네브로는 마법의 한 종류인 염동력, 아니 정확히는 인력과 척력을 숨 쉬듯 사용해 철검을 손 안에서 굴리고 있었다.
“아, 일단은 몸이 먼저 익숙해져야겠죠?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어. 그리고 네 말이 맞아. 지금은 실전이 아니니까 수련의 목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게 좋을 거야.”]
“예.”
마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그의 움직임은 초심자 같지 않았다. 오히려 날 속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
‘그건 아니지.’
무려 5년이란 시간동안 지켜보았다. 그는 그의 형인 사마엘이나 아버지인 아이온처럼 선천적으로 가시적인 능력을 지니지는 않았지만 그 잠재력만큼은 대단했다.
터벅!
“뭐해?”
잠시 수련을 한다며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빠져있었는데 프레위르가 수풀을 헤치며 다가왔다.
“검?”
“아, 수, 수련 중이었습니다.”
검을 휘두를 때는 꽤 진지한 얼굴로 괜찮아보였는데 금세 쭈글이가 되는 네브로를 보자 한숨이 나왔다.
“수련? 아니, 그 특이한 능력을 수련하는 게 아니라 검을 수련한다고?”
“예에······.”
숨길 필요 있나.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말해라.
“혼자서 수련하겠다는 거야?”
“그, 그게······.”
잠시만.
생각해보면 프레위르한테도 내 검술을 알려줘도 되지 않나? 굳이 네브로한테만 알려줄 필요가 있나?
결국 목표는 일리아스와 그녀가 가진 물건을 무사히 샤이야로 옮기기만 하면 되는 일. 물론 그걸로 내가 돌아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당장의 위협이 있는데 숨기거나 아낄 필요가 없지.
[“프레위르도 가르칠까.”]
“엑?!”
네브로가 놀라서 사레들린 소리를 냈다.
그러자 프레위르가 의심쩍은 시선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까 내 존재는 네 가족들한테만 들키지 않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어어······.”
그동안 나를 숨기기 바빴던 네브로는 갑작스런 상황의 변화에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프레위르도 보니까 썩 실력이 나쁜 건 아니란 말이지.’
굳이 내가 살던 시대로 따지자면 아이비 클레어급이라고 할까. 오러 마스터는 애매하게 아닌데 검술 자체만은 그를 뛰어넘은 느낌이라고 할까.
말하다보니 조금 애매해지는데 중요한 건 내가 충분히 가르칠 게 있다는 것이었다.
‘마침 어울리는 것도 알고 있지.’
혼자 계획을 세우고 있는 사이 프레위르가 두 눈을 치켜뜨며 네브로에게 다가왔다.
“너, 예전부터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뭐 숨기는 거 있냐?”
“그, 그게······.”
[“말해도 돼. 이왕 이렇게 된 거 나한테 둘 다 검술이나 배워라.”]
내 의지를 전달 받은 네브로가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거, 검술을 배워보시지 않겠습니까?!”
“······뭐?”
뭔가 많이 생략된 말인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의지를 전달했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자세를 취해라.”]
내 의지가 전달되자 네브로가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사아아-
발이 부드럽게 움직이고,
후웅-
손에 들린 철검이 기묘한 방향으로 꺾였다.
“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프레위르가 놀란 목소리를 낸 순간 네브로가 폭발적인 움직임으로 옆에 있던 나무를 베었다.
‘무결(無結).’
언젠가 라스틸리아의 세계수에서 익혔던 검법. 남궁일영에게 배운 무공도 있었지만 마침 여자 엘프라고 하니 딱 맞는 검법이 아닐 수 없었다.
“······너 검도 익혔던 거냐?”
“아, 그게······.”
[“익혔었다고 대답해, 그냥.”]
회상에 잠겨서 잠시 놓쳤지만 생각할수록 괴물 같은 녀석이었다. 고작 동작과 그 의도를 설명했을 뿐인데 무결을 엇비슷하게 따라하다니 괴물이 아니면 뭐냐.
“이, 익혔었었습니다.”
“었었습니다는 얼마나 과거형인 거냐?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방금 그 검술, 나한테 가르쳐준다고 한 거냐?”
“예! 저도 완벽하게 익힌 건 아니지만······.”
네브로가 살짝 뜸을 들이더니 이내 고백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제, 제게는 스승님이신 천사님이 곁에 계십니다!”
“이건 또 뭔 소리야.”
아무래도 설명이 길어질 것만 같았다.
**
“그럼 그 천사라는 양반도 초월자겠네.”
일리아스를 혼자두면 안 된다는 네브로의 의견에 의해 되돌아온 후 설명이 끝나자 프레위르가 말했다.
“천사님은 본인이 초월자가 아니라고 하십니다만······.”
[“초월자 아니라니까.”]
너도 못 믿는 눈치구나.
하긴, 이 시대에는 없었던 마법이라는 혁명적인 학문을 전파했으니 충분히 오해를 살만 하다.
“어쨌든 그 천사라는 양반이 너한테 마법이라는 기술이랑 조금 전의 대단했던 검술도 가르쳐줬다는 소리잖아.”
“그, 그렇죠.”
“완전 호구 잡았네. 그 양반, 그렇게까지 퍼주면서도 인과율은 안 뒤틀린데?”
“아! 그, 그런 건가요?”
[“나 초월자 아니라고. 그니까 그 인과율인지 뭐시긴지도 의미 없어.”]
내 의지는 네브로에게만 전달이 되니 프레위르까지 설득하기에는 무리였다. 애초에 네브로마저 내 말을 안 믿으니 의미 없었지만.
“아까 그 검술, 정말로 알려줄 거야?”
“천사님께서는 같이 배우는 게 일리아스를 지키기 수월할 거라고······.”
네브로의 시선이 한참 전부터 먼저 잠이 든 일리아스에게 향했다.
“나야 감사하지. 초월자의 검술을 배우는 거니까.”
흠, 생각해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애초에 무결은 초월자의 검술을 보고 만든 거니까.
‘······잠시만. 설마 그 초월자도 이 시대에 존재하는 건가?’
있으면 곤란하려나. 원죄가 있었으면 물어봤을 텐데 조금 아쉬웠다. 그때 보니까 아는 눈치던데.
애초에 원죄도 자신이 초월자였다고 했는데 이 세상에 존재하나?
네브로가 원죄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내일부터 알려준다고 해라.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렇다고 안 가르칠 생각은 없었지만 생각을 먼저 정리해야겠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 천사님께서 내일 알려주신다고 하시네요.”
“그럼요, 그럼요. 초월자께서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렇게 네브로의 검술 재능과 복잡한 생각들을 확인하며 첫 번째 날이 지나갔다.
< 383화. 굴레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