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2화. 빛나는 자 >
‘아니겠지.’
루나와 너무도 닮은 외모에 놀랐지만 이내 다른 인물임을 깨달았다. 루나가 여기 있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무생물과 같은 표정이 내가 알던 루나와 엇나갔다.
“이 분은 닉스의 무녀입니다. 이름은······.”
“일리아스.”
루나와 닮은 소녀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음색에 고저가 없이 기계처럼 느껴지는 말투였다.
“난 일리아스.”
“말로만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더 특이하게 생겼네. 반가워, 난 프레위르.”
“저, 전 네브로라고 합니다.”
자기소개를 하는 네브로의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뭐냐. 첫 눈에 반하기라도 한 거냐?
“닉스라면 샤이야의 일족들이잖아. 왜 이런 곳에 있냐?”
“······.”
프레위르가 아는 척을 해봤지만 일리아스는 대답 없이 서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싯다르타가 대신 나서서 설명을 해주었다.
“일리아스는 이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오, 그래? 근데 닉스의 무녀가 북구로주에서 태어났다는 게 신기한데.”
“그녀의 어머니이자 전대 무녀가 이곳에서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어머니의 역할을 자연스레 물려받았고요. 처음부터 그러한 계약이었으니······.”
“우리가 모르는 복잡한 사정이 있나보네. 그런데 샤이야에는 그냥 데려다 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네브로는 여전히 일리아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건방져 보여도 프레위르가 똑 부러지게 행동하니 다행이군.
“그렇습니다. 다만, 꽤 힘든 여정이 되실 수도 있습니다.”
“음?”
“옮겨야 할 물건을 노리는 자들이 있을 거예요.”
싯다르타가 인자한 얼굴로 섬뜩한 말을 했다.
“평범한 일은 아니라는 거지. 하긴, 그러니까 그만한 보상을 챙겨주는 거겠지.”
프레위르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그렇게 위험한 일이면 더 확실한 사람들한테 맡겨야하는 거 아니야? 우리한테 맡겨도 되겠어?”
“걱정하지 않습니다.”
싯다르타가 미소 지으며 말하자 네브로의 시선이 드디어 그에게 향했다. 그러자 두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 분이 계시다면, 결국 이 모든 건 인연이군요.”
“저, 저요?”
싯다르타의 손가락이 네브로를 향했다.
그러자 네브로는 고개를 갸웃하며 당황해했다.
“당신과 함께하시는 분.”
지지직---------!
싯다르타의 말과 동시에 세상이 뒤틀렸다.
마치 노이즈 낀 텔레비전 마냥 주변이 지직거렸다.
아니야. 이건 나한테만 느껴지는······.
“예, 예? 전,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당황한 네브로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띠링!
동시에 익숙한 효과음이 나에게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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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떹뻆뿔놸뎪떹뻆뿔놸뎪떹뻆뿔놸뎪떹뻆뿔놸뎪]
[죻삻₵쟃ꎾ욶]
네브로에게는 보이지 않는 건가.
익숙한 메시지 창, 그러나 뭔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아!’
그리고 마치 잊었던 듯한 정보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이건 환상이 아니야, 이제 현실이 됐어.’
싯다르타, 아니 석가모니가 내 존재를 인지하고 인정한 순간 이 모든 게 현실이 되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사실 나도 놀랐다. 마치 잊고 있던 정보를 떠올린 듯한 감각이었으니까.
‘난 원죄의 기술에 걸려서 환상을 보고 있는 게 아니야.’
속이 메스꺼웠다.
몸도 없으면서 정신만큼은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은 듯 어지러웠다.
“사견이 길었군요. 멀리서 오신 분들을 데리고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습니다. 출발 당일까지는 아직 남았으니 그동안 조금 휴식을 취하시지요.”
싯다르타의 말에 일리아스가 마치 안내를 하겠다는 듯 네브로와 프레위르에게 몸짓했다.
“일리아스를 따라와.”
“너, 말 웃기게 한다. 자기 입으로 자기 이름을 말하는 거야?”
“프, 프레위르. 시, 실례에요.”
그동안 왜 현실감각이 떨어졌었던 걸까.
아무 생각 없이 무려 5년이라는 시간동안 네브로의 보모 노릇을 해왔다.
그러나 내게 조급함이 없었던 것을 이제는 깨달았다.
마치 내 정신을 지키고 있던 벽과 같은 게 한 꺼풀 벗겨진 기분이었다.
‘나는······.’
돌아가야 했다.
어떻게 이곳을 벗어나야하지?
결국 싯다르타와의 만남도 끝이 나고 일리아스라 불린 소녀의 뒤를 따라 방으로 안내받았다.
“천사님?”
간만에 제대로 된 장소에서 휴식을 취하게 된 네브로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나를 불러왔다.
[“어.”]
“아, 깨어있으셨네요. 다행이다.”
[“난 항상 깨어있어.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동안 드문드문 의지를 전달할 수 있었던 게 제한이 없어졌다. 이것도 그냥 본능적으로 깨닫게 된 사실이고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그······싯다르타라는 분이 천사님을 눈치 채신 것 같은데 별 문제는 없겠죠?”
[“글쎄.”]
석가모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제약도 풀렸으니 내일 한 번 네브로의 입을 빌려 대화나 좀 해볼까.
[“네브로.”]
“예, 천사님.”
[“내일 싯다르타와 대화를 좀 해볼 수 있을까.”]
“그 말씀은······천사님이요?”
[“그래. 내 말을 좀 전해줬으면 좋겠다. 해줄 수 있나?”]
네브로는 짐짓 당황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고개를 열렬히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동안 제가 천사님께 해드린 것도 없었는데······.”
[“그래. 부탁할게.”]
석가모니 정도의 초월자면 나의 대한 해답도 알고 있지 않을까. 적어도 그가 다른 초월자와는 달리 나를 알아봤다는 건 꽤 고무적인 일이었다.
‘······사실은 다른 초월자들도 눈치 챘던 건가?’
사마엘이나 아이온도 굳이 티를 내지 않았을 뿐 알고 있었을까. 그들이라면 충분히 그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사님.”
[“왜.”]
“천사님도 초월의 격에 이르신 분인 거죠?”
물어봐놓고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는 네브로가 느껴졌다. 감정도 공유가 되니 부끄럽고 미안한 그의 마음이 그대로 전달이 되었다.
[“실례일 줄 알았으면 서도 물어본 거냐. 미안하지만 난 그냥 천사야.”]
“예, 그렇죠. 천사님이시죠. 하하.”
말은 저렇게 했지만 나를 초월자로 생각하는 그의 감정과 기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던 몸을 마법이라는 기술로 자유롭게 만들어줬는데 그리 느낄 수도 있겠다.
‘난 어차피 떠나야할 사람이다.’
여기서 언제까지고 있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에게는 지켜야할 사람들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저쪽에 남아있었다.
[“나한테 너무 기대지 마라.”]
“예?”
[“결국 네가 스스로 극복해야할 문제도 있어. 그리고 난 언제까지고 네 곁에 있는 게 아니야.”]
“무, 물론입니다! 천사님께서도 천사님의 일이 있으니까요. 물론 천사님이 떠나신다면 조금 씁쓸하겠지만 맞는 말씀이십니다.”
네브로는 그렇게 비참한 삶을 살아왔음에도 참 착했다. 그래서 더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내가 필요 없을 정도로 강해져라.”]
“예!”
그깟 연민과 동정이 내 행복보다 우선되지는 않았다.
**
다음날, 네브로는 내 부탁을 위해 아침을 먹자마자 싯다르타를 보러 왔다.
“오셨습니까.”
싯다르타는 저번처럼 차를 끓이며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나와 네브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이군요. 앉으시죠.”
싯다르타의 손짓에 자연스레 탁자 앞에 앉은 네브로는 뭔가 숨기는 거라도 있는 사람처럼 초조하게 손을 움직였다.
“그렇게 불안해하실 것 없습니다.”
“그, 그게······.”
싯다르타의 말에도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결국 내가 나섰다.
[“죄 지었냐?”]
“예, 예? 압! 그, 그게 아니라······.”
내 의지에 화들짝 놀라 대답한 네브로는 싯다르타의 눈치를 살피며 손을 저었다.
“호, 혼잣말이었습니다!”
[“어차피 내 말을 전달해야 하는데 숨길 필요 없어.”]
내 말에 네브로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거짓말해서 죄송합니다. 혼잣말이 아니었어요.”
“괜찮습니다. 차라도 한 잔 드시고 편안히 마음을 다스리시지요.”
네브로는 고분고분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아니, 이놈아. 네가 지금 그럴 때냐.
[“날 눈치 챘는지 물어봐.”]
“쿨럭!”
차를 마시던 네브로가 입 밖으로 내뿜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마법을 이용해 자신이 내뿜은 액체를 치웠다.
“죄, 죄송합니다!”
“허허.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그분께서 재촉을 하시는 모양이군요.”
역시 알고 있군.
네브로가 손을 휘젓는 사이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나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물어봐라.”]
“그,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마른침을 삼킨 네브로가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싯다르타가 눈을 반개하고는 네브로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니, 저건 나를 보고 있는 건가?
“네브로 님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전 부처, 공통된 단어로는 초월자입니다.”
“예······.”
“네브로 님의 아버지나 형제 중에도 계시죠.”
“저를 알고 계셨군요.”
네브로가 부끄럽다는 듯 하는 말에 싯다르타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네브로 님과 함께 하시는 분도 그렇습니다.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뭔 소리야. 누구 마음대로?
‘내가 초월자? 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내 생각을 무시하듯 싯다르타는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말을 이어나갔다.
“모든 세상에는 인과율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인과율.”
“모든 세상이 이어지는 통로이자 초월자들이 교류하는 장소. 그것이 바로 이곳, 갈락슈르 대륙이죠. 다른 어느 세상보다도 그 인과율의 영향력이 가장 적게 작용되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곳에 실존할 수 있고, 당신 곁에 있는 그분께서도 존재할 수 있죠.”
갈락슈르? 내 칼? 그게 대륙 이름이었어?
생각해보면 대륙은 그냥 대륙일 뿐이지 따로 명칭은 없었던 것 같은데 이 무렵에는 갈락슈르라고 불렸구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닌가.
“인과율이라는 게 뭐죠? 그렇다면 천사님이 제 곁에 있는 이유는······.”
“인과율은 짧게 설명하기 힘듭니다. 이해하시기 쉬운 표현으로는 명분과 제약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나저나 천사님이라······재밌는 호칭이군요.”
“아, 그건······.”
“네브로 님. 당신의 곁에 있는 분은 지금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고 있습니다. 당신과 있는 이유도 다 인연이지요.”
“예?”
[“뭔 소리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하여간 초월자 놈들은 말을 돌려 말하는 병이 있나보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소리만 하네.
“그분이 본인을 천사라 지칭한 순간, 진짜 천사인 것이죠. 그분은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으니까요.”
“그, 그렇군요.”
“고로 그분이 악행을 저지르면 인과율에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마 굉장한 제약을 받게 될 거예요.”
영 뜻 모를 소리만 해대는데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나 들어야겠다.
[“그만 하면 됐고. 그것보다 어떻게 하면 내가 되돌아갈 수 있는지 아냐고 물어봐.”]
“천사님께서 어찌하면 되돌아갈 수 있는지, 혹시 싯다르타님께서는 알고 계신지 여쭤보고 계십니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싯다르타는 네브로가 아닌 나를 바라봤다.
너무나 명백한 시선에 나도 고요히 그의 눈을 바라봤다.
“당신은 길을 잃지 않았습니다. 지금 가는 길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잘 해내고 계십니다.”
길을 잃지 않았다라······.
결국 네브로를 돕고 있는 게 맞다는 건가.
“당신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소중한 인연들을 다시 보게 될 겁니다.”
추가로 이어진 말이 결정적이었다.
내 고민을 알고 답해준 듯한 그 말에 나는 조금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아무렴 그 유명한 석가모니가 하는 말인데 틀릴 리가 있나.
[“고맙다.”]
“감사하다고 합니다.”
[“너한테 하는 말이야.”]
“아! 아, 아닙니다. 제가 한 건 말을 전달해드린 것뿐인데요.”
네브로가 쑥스러워 하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여전히 감사와 칭찬에 약하구나.
“마음이 곧 길을 비추는 빛일지니, 마음을 잃지만 않으면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싯다르타님.”
“별 말씀을. 그것보다 저도 준비를 해야겠군요. 떠나시기 전에 다리를 낫게 할 약을 지어야하거든요.”
“오오! 감사합니다!”
네브로가 연신 허리를 꾸벅 숙였다.
뭐하는 거냐. 어차피 기브앤테이크인데.
‘길을 잃지 않았다······.’
석가모니조차 구체적인 방법을 모른다면 결국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내가 돌아갈 방법을 모를 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전력을 다해서 네브로를 도와줘야지. 굳이 네브로에게 들어온 이유가 있을 테니까.
[“다리가 나으면 곧바로 검술 수련이다.”]
“예!”
매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찾는다.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남았다.
난 포기하지 않는다.
< 382화. 빛나는 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