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8화. 폭식 그리고 원죄 >
쿠구구궁!
“음?”
벤자민에게 아드리아스의 말을 전해 듣고 있던 스렌달은 미세한 진동을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
“바깥에 무슨 일이냐.”
“확인해보겠습니다!”
수하 중 하나가 급히 밖으로 나가려했다.
그러나 열린 문으로 다른 인영이 박차고 들어왔다.
쿵!
“헥, 헥. 스렌달, 큰일 났다.”
“무슨 일이냐, 울루그.”
“카르만하고 그 똘마니들이 일을 저지른 것 같다.”
“······죄악을 건드린 건가.”
스렌달의 외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러나 그 표정에는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이 새끼들, 영감이 나간 걸 확인하고 바로 일을 터트린 게 분명해!”
“진정해라, 울루그. 차라리 잘 된 일일 수도 있다.”
“뭐?”
사나운 맹수의 얼굴이 돌연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잘 된 일? 그게 무슨······.”
“우리는 씬.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건 수인들이다. 카르만이 무슨 생각으로 일을 벌였는지 짐작이 가는군. 아마 황제가 이곳에 있다는 정보도 결정에 한몫 했을 거야.”
“스렌달! 수인이 우선이라는 네 말에는 동의한다. 그렇지만 죄악은 양날의 검이야! 우리는 인간과 공존을 도모해야해. 그렇지만 죄악이 날뛰고 그게 우리의 소행이라는 게 밝혀지면······.”
말을 하던 울루그의 시선이 벤자민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벤자민이 뭘 꼬라보냐는 눈으로 그를 마주 봤다.
“왜. 날 죽여서 입막음 하려고?”
“크릉.”
“자신 있으면 덤벼라. 호랑이 고기는 무슨 맛인지 궁금하군.”
날카로운 기세가 벤자민의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 심상치 않은 기백에 스렌달이 차분히 상대를 달랬다.
“그대와 이곳에 있는 인간들을 헤칠 생각 없다. 도리어 우리가 당할 게 뻔한데 그런 멍청한 판단을 하지는 않아.”
“지금 상황을 좀 설명해봐라. 죄악이 뭐지? 지금 이 지진과 연관이 있는 건가?”
갈수록 심해지는 지진에 도시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음으로 인해 이제는 서로의 말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봉인되어있던 괴물이다. 우리 측 인물 중 하나가 독단적으로 그 괴물을 깨운 듯하고.”
“그까짓 괴물 따위.”
벤자민이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그 모습에서 마검의 주인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자신감과 기세가 느껴졌다.
“우선 나가봐야겠군.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스렌달이 당당한 걸음걸이로 앞장서 나갔다. 그 뒤를 울루그와 수하들이 따라붙었다.
“죄악······.”
벤자민은 조금 전에 아드리아스와 오관의 대화에서 들었던 그 단어가 다시 나왔음을 깨닫고 곧바로 아드리아스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
“이것이······폭식의 죄악.”
거대하다는 표현으로도 모자란 그 무언가가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아비규환의 현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으아아악!”
“사, 살려줘!”
그들은 폭식을 깨우기 위해 다가갔던 수인들이었다. 수많은 수인들이 깨어나기 시작한 그 존재에게 짓밟히고 잡아먹히며 죽어갔다.
“죽기 싫어!”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카르만, 이 도마뱀 새끼야!”
카르만은 멀찍이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지옥이 현세에 강림한 모습이 이러할까. 모래에 휩쓸리며 이내 한줌의 핏물이 되어 사라져가는 자신의 동포들을 카르만은 냉혹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너희들의 희생은 잊지 않겠다.”
-꾸에엑!
-끼이익!
폭식이 몸을 일으키자 그 몸에서부터 수백 마리가 넘는 새끼들이 떨어져 나왔다. 마치 먹이를 갈구하듯 울어재끼는 거대한 살덩이들은 끔찍하고 징그러웠다.
“카, 카르만 님. 아무래도 일을 너무 대책 없이 진행한 건 아닌지······.”
“모든 일은 백지에서 시작된다. 비록 당장은 우리도 피해를 입겠지만 지금의 세상은 인간들의 것, 고로 인간들의 피해가 더욱 막심하겠지. 이 모든 세상을 무로 되돌린다면 우리가 역전할 발판을 만들 수 있을 거야.”
“아니, 그건······.”
카르만의 의견에 동조했던 간부는 이 괴랄한 광경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미 늦었다!’
게다가 이 사건의 주도자인 카르만은 오히려 당연하다는 태도를 보이자 강경파 간부들은 슬슬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왜들 그러나. 설마 짐작하지 못했다는 순진한 소리를 할 건 아니겠지?”
“카르만! 이건 미친 짓이다! 나는 가족들을 데리고 물러나겠어!”
간부 하나가 급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수웅!
퍼억!
“크헉!”
몸을 돌린 수인의 몸에서 창날이 튀어나왔다.
“저 수많은 동포들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고 있는데 도망을 치겠다고?”
“이익, 도마뱀 같은 게······! 지는 구경만 하고 있는 주제에 어디서 수작질이냐!”
수인족 특유의 강인한 생명력으로 창에 꿰뚫렸음에도 죽지 않고 버티자 카르만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콰직!
이내 욕을 하던 상대의 머리를 씹어버린 카르만은 입을 으적대며 살기가 가득 찬 눈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누군가는 이 모든 일에 책임을 져야한다! 감히 여기서 도망치고 싶다면 나를 죽이고 가라!”
“카르만 님, 당신은 미쳤습니다! 비틀렸다고요!”
누군가가 덜덜 떨며 소리치자 카르만은 피가 흥건한 입으로 미소 지었다.
“다시 한 번 묻지. 정말 이리 될 줄 몰랐다고?”
“그, 그건······.”
“저건 그냥 괴물도 아닌 무려 죄악이다. 흑마법사 집회 놈들이 그토록 찾던, 세상을 멸망시킬 수도 있는 괴물.”
카르만의 말에 점차 실감하기 시작한 수인들의 털이 곤두섰다.
“우, 우리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카르만! 이게 다 너 때문이다. 난 잘못한 게 없어!”
“도망쳐야 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도망쳐야 돼. 도망쳐야 돼!”
폭식으로 인해 죽어가는 수인들도 혼란스러웠지만 그걸 지켜보는 수인들도 미쳐가기 시작했다.
“약해빠진 녀석들. 원래 혁명이란 피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피? 맞는 말이다, 도마뱀.”
갑자기 들려온 생소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러자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은 목이 잘려나가고 있는 카르만의 모습이었다.
“아······?”
“아주 잘도 일을 벌여놨구나. 버러지 같은 놈들. 뭐, 덕분에 심심하지는 않게 됐어.”
살렘 예디디아가 카르만을 곤죽으로 만든 ‘사악한 뱀’을 되돌리며 말했다. 뿐만 아니라 에반과 막시만, 모른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
“주군의 허락이 있기 전까진 대기한다, 살렘.”
“허, 웃기는 소리하지 마. 저걸 그냥 그대로 두라고? 딱 보니 주변을 먹어치우고 점점 힘을 불려가는 게 보이는데?”
에반의 말을 단칼에 쳐낸 살렘이 씨익 웃었다.
“그럼 넌 여기 있는 버러지들이나 정리하던지. 난 죄악을 좀 만져봐야겠다.”
살렘이 뛰쳐나가자 에반의 안색이 굳었다.
그런 에반을 보며 모른이 껄껄댔다.
“그냥 두게나. 뭐, 저러다 죽으면 본인 손해지.”
“살렘 예디디아는 주군의 강력한 전력 중 하나다. 주군을 위해 헌신하는 일로 죽으면 상관없으나 제멋대로 죽는 건 용서할 수 없다.”
“허허허! 죽음조차 용납하지 못한다니, 저 녀석이 죽게 된다면 내가 직접 언데드로 만들어서 아드리아스에게 붙여주마.”
섬뜩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둘을 보며 막시민이 고개를 저었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 연관이 없다는 듯 달관한 태도였다.
“다, 당신들은 무섭지 않은 거요? 어째서 그런 태도를 보일 수 있는 거요?”
“음? 무섭다고? 뭐가 무섭다는 게지? 끽해야 죽기밖에 더 하겠나. 허허.”
모른의 말에 질문을 던진 수인은 벌벌 떨며 그대로 도망쳤다.
“다 미쳤어! 미친놈들뿐이야!”
“허허. 미친 건 자네 같구먼.”
이내 주변에 있던 모든 수인들이 도망가자 삼인방은 형체를 드러내고 있는 폭식을 바라봤다.
“저놈이 이곳에 있었을 줄이야. 허허. 연구해볼만 한 소재로군.”
“난 이만 주군을 보필하러 가겠다.”
“그럴 필요 없어.”
막시민이 어느 한 방향을 바라보며 에반의 말을 막았다.
“이미 오고 있군.”
어느새 또 개수가 늘어난 검은 날개가 눈에 띄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그가 날개를 펼친 채 다가오고 있었다.
**
‘바깥으로 나가는 게 좋나? 아니면 몸이 전부 땅속에서 나오기 전에 처리를 할까.’
폭식이 등장한 이상 이런 좁은 공간보다 탁 트인 장소가 나았다. 어차피 폭식은 워낙 거대하기에 상반신은 저절로 밖에 꺼내질 거다.
하지만 이왕 기회를 잡은 김에 몸이 전부 나오기 전에 사냥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형님, 어떡하죠?”
날 부르러 왔던 벤자민이 질린 표정으로 폭식을 바라봤다.
-꾸우어어억!
폭식의 생김새는 기괴했다.
거대한 몸체를 지녔지만 마치 지렁이처럼 원통형이었으며 그 주위로 지네처럼 다리가 수백 개가 붙어있는 모습.
그러나 다리나 얼굴 같은 부분은 너무도 선명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쿠웅!
특히 얼굴 바로 옆에 달린 크고 작은 양팔에서는 끊임없이 기생충과 같은 살덩이, 즉 새끼가 피부를 뚫고 나오고 있었다.
“나와라.”
우우웅--
주변으로 검은 아공간이 생겨나며 그동안 모아온 언데드들이 튀어나왔다. 원래 있던 녀석들과 이번에 새로 생긴 뱀파이어 언데드들이었다.
“형님, 이건······?”
벤자민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는 게 느껴졌지만 이내 쏟아져 나오는 폭식의 새끼들을 보며 눈빛이 변했다.
쿠와아아악-----!
마검 루벤스가 이 자리에 현현했다.
“모든 일이 끝나면, 그때는 다 말해줄게.”
“약속한 겁니다, 형님.”
강대한 마력에 휩싸인 벤자민의 두 눈이 붉게 충혈 되었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저 시점에서 이미 마검에게 몸을 빼앗겼겠지.
피잉-
쿠아앙----!
벤자민이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
그 뒤를 따라 후폭풍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오러 마스터가 아니었어도 웬만한 오러 마스터는 찜 쪄 먹었겠는데?’
과연 어떤 비기를 익혔을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지.
“덩치에는 덩치다. 루도, 한 쪽 손은 맡긴다.”
-구어어어어!
폭식의 손은 큰 손과 작은 손이 존재했는데 루도의 크기가 딱 큰 손과 비슷했다.
‘폭식은 덩치만 컸지 그렇게까지 까다로운 상대가 아니다. 속에 있는 핵만 제거하면······.’
우로보로스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훨씬 스케일은 작아졌다고 볼 수 있지.
결국 죄악이 멸망급 에피소드가 되려면 적어도 둘 이상 모여야 하니 하나, 하나의 힘은 우로보로스와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둘 이상에다 제물도 엄청나게 필요하지. 사실상 제물 때문에 멸망급 에피소드로 분류해도 될 정도니까.’
사막의 인구가 전멸하고 대륙 각지에서 공수한 인신 공양이 결국 죄악의 마수를 불러낸다.
그러기 전에 이미 집회를 무너트렸지만.
“그럼 먹어볼까.”
나는 그냥 이 자리에서 처리하기로 했다.
보아하니 살렘이 먼저 날뛰고 있는 모습이 보였는데 이만한 전력으로 굳이 기다려주는 것도 실례였다.
두근!
그나저나 이 고동, 드럽게 거슬리네.
[“아드리아스 크롬웰.”]
“음? 원죄?”
갑자기 네가 왜?
뜬금없는 원죄의 등장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이제 거의 모든 게 모였구나. 아직 조금 남아있긴 하지만 거의 다 끝난 거나 마찬가지니.”]
“뭔 소리야. 어차피 나한테 말을 건거면 알아듣게 좀 말해라.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하지 말고.”
[“내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았냐?”]
“이제 와서?”
솔직히 말하면 궁금하긴 하다.
지금은 갈락슈르의 봉인 해제 준비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오관이 분명 마왕이라고 했었지.
‘하지만 게임 속에서 마왕이란 존재는 단 한 번도 언급이 된 적 없다.’
이게 말이 되나? 마왕이라고 불릴 정도의 존재, 그것도 무려 죄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원죄가 마왕이었는데 그에 대한 정보가 게임에서 하나도 없었다니?
[“내 존재는 초월자들에 의해 지워졌다. 전생의 너에게 알려질 수 없게 한 거지. 그렇지만 이제 많은 제약이 풀렸어. 이미 이야기는 끝을 다다르고 있거든.”]
“마왕이든 뭐든 네가 날 게임 속에 보낸 개발자가 아닐까 의심하긴 했었다. 그건 맞냐?”
[“말을 걸었던 건 내가 맞지만 널 여기로 보낸 건 내가 아니야. 나한테 무슨 힘이 있어서 널 여기로 보냈겠어.”]
“하여튼, 이야기가 끝에 다다랐다는 게 게임 에피소드를 말하는 거지?”
[“게임? 하하.”]
원죄가 비웃듯이 헛웃음을 흘리고는 갑자기 내 육체를 옥죄기 시작했다.
“뭐하자는 거냐?”
[“넌,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너의 정체도, 내 정체도, 이 세상의 정체도, 그리고 널 이곳에 보낸 자도.”]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말하라니까······.”
[“오러 비기, 나생문(羅生門).”]
카가가각!
피 비린내가 코끝을 진동했다.
세상이 반전되며 마치 수면 아래로 떨어지듯 의식이 곤두박질쳤다.
자색과 적색이 뒤섞이며 시야를 잠식해갔고 순식간에 펼쳐진 지옥도가 눈앞으로 생생히 다가왔다.
토가 쏠려왔다.
이건 대체 뭐지?
“역시 이 정도로는 아무렇지 않은 건가.”
“······.”
입을 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저 목소리가 원죄의 그것이라는 것만은 깨닫고 있었다.
“천천히 지켜보아라. 내가 누군지 말이야.”
원죄, 아니 온몸이 타들어간 잿빛 불씨의 사내가 반쯤 사라진 얼굴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말로 해줘도 되지만 이건 단순한 화풀이야. 너한테도 이렇게 된 책임이 있거든.”
타고 남은 재의 사내가 경쾌한 미소를 지었다.
< 378화. 폭식 그리고 원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