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7화. 봉인 해제 >
자카타의 인적이 드문 거리 중 어느 낡은 건물 안.
삼삼오오 모여든 수인들이 바글대고 있었다.
“믿기지가 않아. 어떻게 인간을 이곳에 들일 수가 있지?”
“그 늙어빠진 영감도 간신히 용인해주고 있었는데······. 이건 명백히 선을 넘었다.”
그들은 소위 강경파라 불리는 씬의 조직원들이었다. 자카타에 존재하는 모든 수인들이 씬에 소속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자리에 모인 수인들만큼은 모두 씬에 소속되어 있었다.
“결단을 내려야합니다.”
모여든 수인들의 시선이 누군가에게로 향했다.
도마뱀의 외형을 한 수인이 그곳에 서있었다.
“폭식을 깨우겠다.”
“오오!”
도마뱀 수인의 말에 모두가 조용한 환호성을 터트렸다.
“마침 데슈른이 떠났더군. 이제 눈치 볼 것도 없어졌지. 게다가 황제가 이곳에 왔다고? 오히려 좋다. 황제가 없어진 틈을 타 폭식을 깨우고 제국에 혼란을 일으키면 완벽해.”
도마뱀 수인, 카르만은 이 모든 게 자신들을 위한 운명으로 느꼈다.
“그래도 며칠 준비가 필요하겠지요?”
“아니, 당장 실행한다.”
“네? 하, 하지만 제물들이······.”
“교류회는 열렸겠지? 조금 부족해도 그 녀석들을 공양 삼아라. 나머지는 스스로 보충할 거다.”
카르만의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렀지만 이내 강경파 수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생각도 지금이 아니면 적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조금 준비가 부족하긴 해도······.’
지금의 상황을 놓치는 것보단 나았다.
“그럼 각자 역할을 정하겠다. 그 중에 희생을 해야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그 희생은 숭고히 여겨질 것이다.”
“인간 박멸을 위해서라면 상관없습니다!”
“드디어 우리 수인들의 세상이!”
뜻밖의 거사에 잔뜩 흥분한 수인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카르만은 그 모습을 세로로 찢어진 눈으로 고스란히 담아냈다.
“씬을, 아니 우리 수인들을 위하여.”
**
동굴은 정적으로 휩싸였다.
하지만 오관의 말에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마왕이라 하심은······.”
“우리는 영혼을 볼 수 있다. 아마 루나, 이 아이도 계속 보아왔을 거야. 왜 내색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이 아이 때문에 지금껏 조용히 있었지.”
영혼을 보는 눈.
그녀가 지금 말하고 있는 마왕이란 원죄를 뜻하는 게 분명했다.
‘원죄가 마왕? 애초에 마왕이 뭐지?’
게임 클리어 조건인 죄악들로 인해 소환되는 라스트 보스가 그나마 마왕에 가까운 존재였다. 모이는 죄악의 개수에 따라 소환되는 보스도 매번 달랐는데, 그래서인지 오히려 원죄에 대한 의심이 없었다.
‘매번 다른 보스가 나오는데 그게 다 원죄일 리는 없잖아.’
조금 더 알고 싶었다. 정보가 부족했다.
하지만 원죄는 언제나 그렇듯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잠깐만. 지금 우리 형님의 몸속에 마왕이라는 존재가 있단 말이냐?”
그때 벤자민이 미간을 좁히며 오관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렇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형님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악행을 저지른 적 없는 분이시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
벤자민은 하여간 항상 날 좋게 보기만 하는 것 같았다.
“마왕의 영혼을 품고 있는 것과 그 인간의 심성은 별개다. 애초에 마왕이란 존재도 악하다고 생각하기 힘들지.”
“뭐? 그게 무슨 소리······.”
“선과 악의 개념은 결국 인간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 아니지. 그 시절에는 신들의 기준으로 만들어졌다고 해야 할까.”
오관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대의 몸속에 마왕의 영혼이 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그냥 평소대로 해왔던 것처럼 살아가면 돼. 내가 걱정하는 것은 마왕의 신체를 누군가 악용하는 것이었지.”
“마왕의 신체를 악용한다고요?”
“그래. 지금 찾고 있는 봉인의 돌이 마왕의 신체가 제대로 봉인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매개체야. 신체만 제대로 봉인되어 있으면 문제는 없어.”
잠시만······.
마왕의 신체? 그런 게 있는 줄 게임 플레이 12회나 겪은 나도 듣지 못했다.
‘······루나의 신의 혈족도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사실이니 놀랄 건 아닌가.’
하지만 왜 이리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는 것일까. 천천히 머리를 되짚어 보았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원래 마왕의 신체 때문이 아니었지. 그런데 황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처음에는 폭식 때문에 온 줄 알았지만 막상 씬을 방문해보니 황제는 이곳에 관심이 없어보였다. 관심이 있었으면 진즉에 나와 부딪혔겠지.
‘황제는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난 당연히 황제가 나부터 노릴 줄 알고 지금껏 모하임과 그렇게 연계를 구축해왔던 건데······.’
황제가 원죄를 포기할 수 있었던 이유.
원죄보다 더 중요하거나 대단한 무언가를 위해 이곳에 직접 방문했을 확률은?
“봉인의 돌, 빨리 확인해봐야겠습니다.”
“뭔가 짚이는 게 있나?”
“황제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아무래도 그 마왕의 신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서 확인해봐야겠구나.”
무표정했던 오관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이내 우리가 걸음을 빨리하자 영문을 모른 채 따라오던 토인족 수인이 말했다.
“제, 제가 함께 해도 괜찮은 일입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보아 우리의 이야기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모양이었다.
“확인해봐야겠다며. 지금이라도 돌아갈 거면 딱히 상관은 없다.”
“그럼 전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나도 같이 가지.”
벤자민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토인족 수인을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저 토인족 수인이 딴 짓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나보다.
보니까 벤자민도 나와 함께 가고 싶은 기색이지만 그보다 내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듯싶었다.
“어차피 안쪽은 두 분이서 확인하면 될 일이고. 난 그쪽이랑 같이 있지.”
“······그러시죠.”
내키지 않지만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수인과 함께 벤자민이 뒤돌아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형님.”
“그래. 고맙다.”
감사 인사를 전하자 벤자민이 씨익 웃어보였다. 여자들을 꽤나 울리겠는데.
오관과 둘만 남자 들어가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기사의 마나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되자 오관은 제약이 전부 사라진 듯 표홀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저것도 보법인가?’
어느새 오관의 걸음걸이를 베끼고 있는 내 재능이 살짝 거슬렸지만, 조금 있자 우리는 끝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동굴의 끝이었는데 마나의 민감한 나는 곧바로 이상을 감지할 수 있었다.
“마나의 흐름이······.”
“여기서 부터는 우리 혈족만의 피가 필요하다.”
오관이 가볍게 자신의 손끝을 딴 뒤 피를 허공에 흩뿌렸다. 그러자 감추어져 있던 동양풍의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가 봉인의 돌이 있는 곳입니까.”
“그래. 여기도 정말 오랜만이구나.”
오관이 여전히 피가 묻은 손으로 문을 건드리자 문에 기묘한 문양이 활성화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구궁!
우웅!
마나가 요동치며 문에 결속되어 있던 봉인이 해제되는 게 느껴졌다.
“들어가지.”
“예.”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가자 동양풍의 사당이 보였다. 그리고 위패가 놓여 있어야할 자리에 비석처럼 생긴 돌이 위치해 있었다.
그런데 저거······?
“깨져 있습니다만 괜찮은 겁니까?”
“······.”
오관은 대답 없이 돌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천천히 상태를 살피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알고 있었느냐.”
“역시 상태가 좋지 않은 거군요. 황제가 왜 굳이 이 사막까지 왔는지 생각해봤습니다.”
“그렇군.”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오관은 한동안 말없이 돌을 살피다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봉인은 깨졌다. 이미 손을 쓸 수가 없어. 마왕의 육체를 제대로 다룰 거라 생각되지는 않지만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질 것은 분명하다.”
“황제가 육체의 장소나 존재여부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미뤄두고 일단 물어봅시다. 그 마왕의 육체는 어디 있습니까?”
“이곳이 자카타이니······남동쪽으로 나흘 정도 거리에 있다.”
“바로 가야겠습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에피소드, 그것도 멸망급 에피소드임이 틀림없었다.
“그 전에 여기까지 왔으니 하나만 하고 가지.”
“예?”
“갈락슈르.”
그녀의 오팔색 눈이 내 허리춤에 매인 검을 응시했다.
“원래였으면 나도 이런 제안을 하지 않았겠지만 마왕의 신체는 평범한 힘으로 막아내지 못하겠지. 갈락슈르의 봉인을 해방하고 가거라.”
“갈락슈르?”
나도 모르게 갈락슈르를 내려다보았다.
1차 봉인이 풀린 것만으로 웬만한 네임드 검들을 압도하는 능력치였기에 딱히 2차 봉인을 풀 생각도 못했었는데······.
“가능합니까?”
“이곳에서라면, 가능하다. 마침 내가 제사를 담당한 무녀이기도 했으니.”
이건 생각지도 못한 상황인데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마왕의 신체로 뭔 짓을 꾸미고 있을지 모를 황제 생각을 하면 조금이라도 강해지는 게 이득이었다.
“나가서 마저 이야기하지. 일단······.”
오관은 사당에 놓인 봉인의 돌을 한 차례 더 돌아보며 말끝을 흐렸다.
“봉인은 이미 깨졌으니 말이야.”
사당 밖으로 나와 문을 다시 닫았다. 그러자 봉인 결계가 다시 작동되며 마나의 흐름이 바뀌었다.
“갈락슈르의 봉인을 푸는 방법은 간단하지. 하지만 아무나 풀지 못해. 그런 면에서 넌 운이 좋아.”
“방금 전에 말한 무녀라는 것과 연관된 겁니까?”
“맞다. 갈락슈르의 봉인은 오직 무녀만이 풀 수 있지. 지금 세상에서는 이 아이의 몸을 빌린 나를 빼면 풀 수 있는 자가 없을 거야.”
오관이 어깨를 으쓱이며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그 제스쳐와 말투에는 보이지 않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갈락슈르의 봉인을 풀기 위해서는 자카타 중앙으로 가야한다. 한 가지 애매한 점은 이곳이 지하에 빠졌다는 점인데 그건 일단 해보고 보자구나.”
오관과 함께 밖으로 나오자 토인족 수인을 붙잡고 있던 벤자민이 나를 반겼다.
“가셨던 일은 잘되셨나요?”
“망했다. 그러니까 빨리 움직여야해. 지금 바로 스렌달이 있는 곳으로 가서 황제가 있는 곳을 대충 짐작했다고 전해. 여기서 남동쪽으로 나흘 거리다.”
“알겠습니다, 형님.”
벤자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뛰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나는 오관과 함께 이 도시의 중앙으로 향했다.
꾸어어엉-------!
파스스스!
“뭐지?”
오관이 경계를 하며 검을 빼들었다.
자카타 전체가 지진이 난 듯 흔들리며 모래가 위에서 쏟아져 내렸다.
두근!
동시에 내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 반응에 대한 정답은······.
“폭식.”
이 미친 짐승 놈들이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사고를 치는구나.
“오히려 잘됐다.”
“뭐라?”
오관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녀는 원죄의 정체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죄악은 모르는 눈치였다.
뭐 일단 설명은 접어두고.
“갈락슈르의 봉인 해제는 먼저 저것부터 해결하고 가야겠습니다.”
어차피 해결해야 하는 일 중 하나였다.
이렇게 된 이상 두고 갈 수는 없으니 처리하고 황제를 잡아도 되겠지.
“으아아!”
“무슨 일이야! 이게 대체······!”
수인들이 건물 밖으로 나와 도망쳤다.
그 사이에 선 나와 오관은 점차 거대해지는 무언가의 기운을 느끼며 서있었다.
< 377화. 봉인 해제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