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0화. 마지막을 향하여 >
고민의 시간이 길어졌다.
성공 확률은 단 50%.
실패한다면 어찌될 지 전혀 예상을 할 수 없었기에 손이 떨려왔다.
[“흐흐, 시간이 없어. 어서 결정해야 할 거야.”]
원죄가 뭐라 말하는 게 들려왔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내 신경은 온통 비비안에게 향한 상태였다.
‘실패를 하면 패널티를 얻었었지. 하지만 비비안도 같을까······.’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의 내가 그녀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이 방법 밖에 없었다.
하지만 잘못 된다면?
[“모든 걸 다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냐? 네가 사는 곳이 동화 속인 줄 알아? 지금껏 네 손에 죽어간 녀석들도 다 각자의 삶과 인생이 있었던 놈들이다. 목숨을 밟고 올라선 주제에 너무 욕심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아?”]
“네 말이 맞아.”
난, 전생에서도 지금 여기서도 항상 누군가의 생명을 희생시켜서 연명했다.
“근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과거로 돌아가 같은 상황이 온다고 해도, 아니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도 내 선택은 변하지 않을 거다.
이기적이라고 욕하려면 욕을 해도 상관없었다.
난 성인(聖人)이 아니었고 그리 거창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 모든 일들의 결과가 비비안을 잃는 거라면 견디지 못하겠지만······.’
선택의 시간이었다.
난 잠든 비비안의 얼굴 앞에 뜬 메시지를 수락했다.
[비비안 크롬웰]
[진화 중······.]
[남은 시간 : 715시간 41분 03초]
주사위는 던져졌다.
대략 720시간이 나왔는데 일수로 따지면 30일 정도였다.
[“그래, 삶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지. 그래도 넌 지금까지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을 해왔어. 솔직히 잃은 게 없잖아.”]
“이름이 뭐지.”
[“뭐?”]
“이제 슬슬 이름 정도는 알려줄 때가 되지 않았나. 네 이름이 원죄는 아니잖아.”
비비안을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진화로 인한 고통 따위는 없는지 새근새근 잠든 모습이었다.
[“난 관찰자라고 불렸지. 이름 비슷한 게 있었지만 잊은 지 오래됐어.”]
사실 이름 따위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어떻게든 대화를 할 상대가 필요해서 꺼내본 이야기였을 뿐, 알아봤자 의미도 없었다.
“끝난 거야?”
속박에서 벗어난 안젤라가 다가와 비비안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죽은 건 아니지?”
“예.”
“어머니는?”
“소멸했습니다. 이제 퀸의 자리를 계승할 수 있을 거예요.”
그 난리가 났음에도 제단은 멀쩡했다.
안젤라는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했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길안내를 붙여줄게. 그리고 계승이 끝나면 이번에는 내가 보러갈게.”
“예.”
안젤라와 대화하고 있음에도 내 정신은 온통 비비안을 향해 있었다.
과연 내가 선택을 잘한 걸까.
색욕은 얻었지만 비비안을 혼수상태에 빠뜨리고 말았다. 만약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난 과연 색욕을 포기했을까.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자.
가족들이 그리웠다.
**
크롬웰에 어떻게 돌아왔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덕분에 내가 이렇게 약한 인간이었나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 됐다.
“비비안 언니?”
처음 마주한 이는 루시아였다.
홀링턴은 대부분의 가솔과 식솔들을 이끌고 우리 영지로 피난을 온 상태였다.
“자고 있는 거죠?”
“······어.”
루시아의 눈이 흔들렸다.
내 대답에 담긴 불안을 읽은 건가.
“그냥 자는 게 아니네요. 어떻게 된 거죠?”
“일단 방으로 가자.”
나는 비비안을 업은 채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언제나 나를 호위해야 한다고 그녀의 방도 내 옆으로 배정받았기에 더욱 가슴이 미어졌다.
비비안을 침대에 눕히자 어느새 소식을 듣고 온 사람들이 방문했다.
“오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항상 영지의 일로 바쁠 에이미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내게 물었다.
뭐라고 대답해야하지.
뱀파이어 퀸을 상대하다가 이렇게 됐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죄악을 얻고 싶은 내 욕심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해야 하나.
“숨은 고르게 쉬고 있는데······.”
디에네가 비비안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설마 그녀가 아직도 여기에 남아 있을 줄은 몰랐는데 비비안을 살펴주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무리했습니다.”
“무리했다니?”
“생각보다 강한 적을 만났어요. 저 혼자로도 충분할 줄 알았는데 결국 비비안의 도움을 받고 말았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두서가 없는 말이었지만 디에네는 자세히 묻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잠이 든 원인이 뭐야?”
“오러 비기를 사용했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잠에 빠졌고요.”
“오러 비기?!”
방 안에 있던 모두가 놀란 얼굴로 비비안을 바라봤다. 그렇게 바라봐도 정작 본인은 모르겠지만.
“마법적인 것도 아니고, 병으로 인한 것도 아니네. 문제가 골치 아파졌어.”
“한 달 뒤에 깨어날 겁니다.”
“한 달?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진화의 성공 가능성이 고작 50%인 것도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무조건 깨어난다. 비비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날 거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똑똑!
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에이미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곳에는 얼굴 보기가 힘들었던 에반이 서있었다.
“에반.”
“복귀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왔습니다, 주군.”
그는 슬쩍 방 안의 분위기와 상황을 살피는 듯하더니 조용히 물러났다.
“바쁘신 듯하니 조금 있다가 다시 오겠습니다.”
“아닙니다. 얘기하시죠.”
어차피 비비안의 곁에 있다고 변하는 건 없었다.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걸 미루지 않고 해야 할 때였다.
사람들을 두고 밖으로 나온 나는 에반과 함께 잠시 걸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모양이군요.”
“저 때문에 비비안이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그 호위 기사 말입니까. 살렘 예디디아에게 맡겨보시죠.”
“괜찮습니다. 이미 제가 조치를 취해둬서······.”
나는 말끝을 흐리며 바닥을 보고 걸었다.
그러자 에반이 갑자기 내 어깨를 잡았다.
“에반?”
“주군. 모든 짐을 혼자만 지고 가려 하지 마십시오. 비비안 경도 주군의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했을 겁니다.”
“······.”
나름 위로한다고 해주는 말이겠지만 와 닿지는 않았다.
비비안이 오러 비기를 펼치기 전에 보였던 그 마지막 모습을, 그 프러포즈를, 난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다.
“에반이 여기 있는 걸 보면 무슨 일이 있는 거겠죠?”
“황제의 위치를 특정했습니다.”
아, 황제.
비비안에 온통 신경이 쏠린 탓에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역시 에반에게 믿고 맡기길 잘했습니다.”
“황제는 지금 샤이야 사막에 있는 걸로 파악됩니다. 가장 마지막 종적이 그곳으로 이어지고 있죠.”
“샤이야 사막.”
언젠가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장소였다.
근데 하필이면 그곳에 황제가 갔다는 게 과연 우연일까?
‘샤이야 사막에는 죄악 중 하나인 폭식이 살고 있다. 세계수의 뿌리를 물어뜯던 녀석들이 폭식의 새끼들이었지.’
내가 얻은 죄악은 나태, 탐욕, 분노, 색욕까지 총 4개였다. 나머지 세 개 중 하나인 질투는 집회의 은밀한 장소에 숨겨져 있는데 이미 모른에게 가져와달라고 부탁해놓은 상황이었다.
그러면 5개는 이미 수중에 있는 걸로 치면 남은 2개, 오만과 폭식만이 남았다.
‘오만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네.’
하지만 폭식까지 해결하면 오만 하나 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쩌면 그 오만을 황제가 가지고 있을 확률도 높았고.
“샤이야 사막으로 가야겠습니다.”
“황제를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겸사겸사.”
내 말에 에반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겸사겸사······라면 다른 목적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샤이야 사막에는 원래 가볼 생각이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샤이야 사막에는 여러 일들이 얽혀있었다.
죄악인 폭식이 있었고 내 애검인 갈락슈르도 따지고 보면 샤이야 사막에서 나왔지.
‘오관에게 듣기로 루나의 혈족도 샤이야 사막이 있던 장소에 있었다고 했지. 사막이 되기 전에······.’
또한 아가타와 데슈른하고 연관이 된 이종족 조직인 씬도 샤이야 사막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다.
이제는 황제까지 그곳에 있다니 여러모로 다양한 정황들과 인연들이 엮인 땅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황제가 사막에 간 이유를 짐작하시는 게 있으신 겁니까?”
“그건 저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죄악 때문이지 않을까.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아있었다.
정말 죄악 때문에 샤이야 사막에 간 것이라면 오히려 나를 노렸어야하지 않나?
눈 가리고 아웅 했을 뿐이지 이미 황제는 내가 원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을 거다.
‘근데 왜 나를 먼저 노리지 않고 사막에 간 거냐.’
폭식을 노리는 게 아니라면 그가 왜 거기까지 갔는지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에반.”
“부르셨습니까.”
“같이 가줄 수 있습니까?”
“당연합니다. 오히려 영광입니다.”
황제만 막는다면 사실상 모든 멸망급 에피소드를 막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굳이 전력을 아낄 필요는 없겠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동원할 겁니다.”
“제가 다른 인원들에게도 주군의 명을 하달해놓겠습니다.”
“모른이 도착하는 대로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부탁할게요.”
“확인했습니다.”
에반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더니 곧바로 움직였다. 아마 살렘이나 막시민에게 가는 거겠지.
‘비비안.’
그녀가 깨어나기 전까지 모든 일을 마무리 지어 놓는 게 내 목표였다. 더 이상 위험한 일 없이 그녀와, 그리고 모두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원죄, 그리고 초월자들. 나한테서 뭘 원하는지 몰라도 난 내 인생을 살 거다.’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었다.
난 곧바로 샤이야 사막으로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며칠 뒤.
모른이 질투를 가지고 복귀했다.
“황제를 치러 가신다고요?”
“예.”
“허허허! 좋습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사람들이 모인 자리라 내게 존대를 사용하는 모른의 주름진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늙으니 주책이군요.”
“아닙니다. 그보다 대부님이 황제를 그리 싫어하는지 몰랐습니다. 이렇게 기뻐하실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빨리 치러 갈 걸 그랬군요.”
내가 가볍게 농담식으로 말하자 그가 미소를 지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조금 실례지만 제게 주군의 아버지이신 케인 크롬웰은 자식과도 같았습니다. 그런 케인을 배신한 게 바로 황제지요.”
모른이 내 아버지를 각별히 생각하고 있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사실 그 이전에 아버지를 제외하고서라도 우리 가문과 엮인 무언가가 있다는 어렴풋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
“제가 흙이 되기 전에 복수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너무나 만족합니다.”
“저도 대부님께서 도와주시니 너무나 든든합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이번 샤이야 사막 원정을 함께하는 나머지 인원들도 확인했다.
살렘, 막시민, 에반, 모른, 루나.
사실 이자벨과 루이스나 아가타, 노아, 루시아, 드미트리까지 더 많은 인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영지를 위해 남아있기로 했다.
“이곳은 제게 맡겨두세요. 저번에는 허무하게 당했지만 그럴 일은 또 없을 거예요.”
마침 이자벨이 내게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그녀는 죽음의 청기사에게 당했던 게 마음에 남아있었는지 그 뒤로 항상 내게 미안해했다.
“믿고 있습니다. 모두.”
내가 이들을 믿지 않는다면 동생인 에이미와 잠들어있는 비비안을 맡기지도 못했겠지. 그리고 그걸 이들도 알고 있는지 책임감이 막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출발할까요.”
“가즈아아아!”
루나가 힘차게 외치며 먼저 저택 밖으로 나갔다.
황제와의 오랜 악연을 끝낼 때가 되었다.
< 370화. 마지막을 향하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