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9화. 고백 >
스겅-!
안개와도 같은 무언가가 베였다.
안 그래도 강했던 니켈이 나태까지 사용하자 초월자에 근접한 엘리자베스조차 그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개 같은 사도가······!”]
처음으로 나온 욕지거리에 아드리아스는 니켈의 공격이 명중했음을 눈치 챘다. 그리고 끝나지 않은 탐욕의 시간을 이용하여 엘리자베스를 향해 결정타를 준비했다.
-흩어져라.
언령에 따라 아드리아스가 모은 마나가 허공에서 흩어졌다.
-뭉쳐라.
곧이어 다시 언령이 발동되자 흩어졌던 마나가 안개처럼 변한 엘리자베스에게 달라붙어 뭉치기 시작했다.
[“으극.”]
아드리아스의 마법이 발동되자 안개의 모습으로 사라졌던 엘리자베스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니켈이 여전히 활성화된 오러 비기를 이용하여 마무리를 지으려던 순간······.
콰직!
뱀파이어 퀸의 몸에서 기묘한 기파가 터져 나왔다.
[“탐욕, 나태. 하지만 제 색욕에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쏟아지던 피의 비가 갑자기 슬로우모션으로 떨어졌다. 갑작스런 초자연 현상에 아드리아스의 사고가 가속하며 사태를 파악하려 애썼다.
[“진정한 죄악의 힘을 보여드리죠.”]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보이는 모든 것이 빨갛게 변하며 현실을 뒤틀었다.
푸슉!
멈춰진 시간 속에서 아드리아스가 피를 뿜었다.
‘이건 또 뭔······.’
온몸이 무언가에 꿰뚫린 듯 구멍 났다.
탐욕의 효과인 육체 재생력 증가로 순식간에 회복이 되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죄악 덕분에 색욕의 효과를 받지 않는군요. 하지만 당신이 데려온 아이들은 어떨까요?”]
힘겹게 고개를 돌리자 비비안과 안젤라의 상태가 이상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눈이 풀려 있었고 비틀 비틀거리며 아드리아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8.7초.’
가속화된 사고가 탐욕의 남은 시간을 계산했다. 니켈의 나태로도 죽이지 못한 것은 의외였으나 천재급 통찰 재능은 다음 계획도 대비해두고 있었다.
엘리자베스와 잡담을 떨 시간조차 아까웠던 아드리아스는 곧바로 언데드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구원자님께서는 아무래도······초월자를 너무 얕보시는 것 같네요.”]
투웅!
세계가 흔들렸다.
붉게 변한 풍경이 마치 장식만은 아니라는 듯 물결치기 시작했다.
하룬겔의 마법과 크리브마허의 브레스가 세상의 흔들림과 함께 소멸했다. 티무르의 역동적인 움직임도 멈추고, 오로지 죄악을 사용한 아드리아스와 니켈만 자유로웠다.
타다다닥!
그 순간 다가오고 있던 비비안과 안젤라가 아드리아스를 습격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듯 행동하는 둘의 모습에 아드리아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비비안. 안젤라.”
[“색욕의 힘이란 굉장하답니다. 다른 어떤 죄악들보다 더 본능적인 힘을 건드리지요.”]
콰앙!
혼자서 공격을 감행한 니켈의 신형이 날아갔다. 색욕을 사용한 엘리자베스는 니켈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괴물이 되어버렸다.
덕분에 한결 여유로워진 엘리자베스는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붉은 달 아래에 뜬 그 모습은 초월자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았다.
[“전 이제 구원자님을 잡아먹고 진정한 초월자로 거듭 날 것입니다. 구원자님께서 지니고 계셨던 모든 전설과 신화는 곧 제 것이 될 거예요.”]
······탐욕의 시간이 끝나갔다.
불가항력으로 느껴질 정도로 아찔한 엘리자베스의 힘은 화신체조차 건드리지 못할 위력이었다.
‘이길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일단 이 둘을 무사히 다른 곳에 옮겨야하는데······.’
엘리자베스의 엄청난 힘을 확인하고서도 아드리아스는 마저 계산을 끝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방심하고 있는 한 아직 기회는 충분히 있었지만 그 기회를 활용하면 비비안과 안젤라도 위험했다.
“비비안! 안젤라!”
아직 나태가 끝나지 않은 니켈에게 엘리자베스를 맡기며 아드리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내가 왜······.’
비비안은 자신의 몸이 휘두르는 검을 느끼면서도 의아했다. 휘둘러지는 검의 목표는 다름 아닌 아드리아스.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는 이였다.
카가각!
비비안의 검이 아드리아스에게 막혔다.
이어지는 안젤라의 혈마법에 대응하는 아드리아스를 보며 비비안은 몽롱한 정신을 깨우려 노력했다.
‘아드리아스.’
마치 꿈을 꾸듯 드문드문 떠오르는 단어들과 기억들이 어지러웠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아드리아스만큼은 계속해서 피어나고 있었다.
[“하아.”]
그리고 그럴 때마다 알 수 없는 의지가 정신을 개입해왔다. 뭔가 아찔하고 끈적한, 그러면서도 달콤하기 짝이 없는 괴물 같은 무언가의 의지였다.
‘······안 돼. 멈춰.’
[“말을 잘 들어야지.”]
뇌가 녹을 것 같은 강렬한 쾌감이 비비안의 전신을 관통했다.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 이어지며 그녀의 몸은 의지를 벗어나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콰극-!
끼기기긱!
검과 검이 맞물리며 강렬한 기파를 터트렸다.
붙어있는 검 사이로 비비안의 몽롱한 시선이 아드리아스에게 닿았다.
“비비안, 정신 차리십시오.”
그런 비비안을 향해 아드리아스가 입을 열자 그녀는 짜릿한 감각을 느끼며 맞댄 검을 뿌리쳤다.
‘모르겠어. 뭐지. 어두운데. 붉은 달? 난 뭐하고 있었지? 아, 기분 좋아.’
콰앙!
속박 마법을 부수고 있는 안젤라로 인해 주변이 소란스러웠지만 비비안은 점점 자신을 침식해 들어가는 기분 좋은 쾌락에 몸을 맡겼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냥 이 알 수 없는 명령에 몸을 맡긴 채 영원을 살아가도 좋겠다는 생각만이······.
“비비안.”
“으으.”
그러나 그럴 때마다 들려오는 아드리아스의 목소리로 인해 가슴이 답답해졌다.
“비비안, 당신은 특별합니다.”
머리가 아팠다.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목소리와 말투.
“당신은 특별함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요.”
아아······.
분명, 어디서 들었던 내용이었다.
아주 오래된 기억 속에 남은 동화 같은 이야기.
······요정님?
“내가, 특별······?”
막혀있던 비비안의 입이 뜨문뜨문 열렸다.
그런 비비안을 보며 아드리아스가 천천히 검을 늘어뜨렸다.
“그럼요. 당신은 세상에서 둘도 없을 특별함을 지닌 사람입니다.”
“뭐가, 특별······.”
분명 여기서 이어지는 말이······.
······뛰어난 검술 재능이었나?
알고 있지만 다시 한 번 물어봤다.
정말로 내 요정님이 맞는······.
“비비안, 당신은 제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에요.”
“아······?”
“저한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특별함이죠.”
검술이 아니야? 내 특별함은 그게 아니야?
소중해? 누구한테? 넌 누구지?
“비비안.”
상대의 손이 천천히 뻗어졌다.
이내 볼에 느껴지는 따뜻한 손길에 비비안은 자신도 모르게 볼을 비볐다.
“좋아해요, 비비안.”
요정님, 아니 아드리아스?
아드리아스 크롬웰?
······아드리아스 크롬웰!
“비비안.”
“아아······.”
“제가 누군지 알아보겠어요?”
“미안, 요정님.”
나의 요정님.
아드리아스 크롬웰.
내 가장 소중한 사람.
“나, 약속을 못 지킬 것 같아.”
“약속이요?”
“비비안 벨로칸만의 길을 찾는다고 했잖아. 그거, 지키지 못할 것 같아.”
비비안은 자신의 뺨에 올려진 아드리아스의 손을 양손으로 부드럽게 잡았다. 어느새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달콤한 숨결도 사라진지 오래였다.
“괜찮아요. 지키지 못해도 상관없어요.”
“이유 물어봐 줘.”
“······왜 지키지 못할까요?”
아드리아스의 물음에 비비안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더 이상 벨로칸이 아니게 될 거거든.”
“예?”
의문에 가득 찬 아드리아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비비안은 어느새 떨어트렸던 검을 다시 주워들고 있었다.
“성을 바꿀 거야.”
“무슨 말씀인지······.”
“바뀌게 될 성은 크롬웰이 좋겠어.”
머리가 맑아진 그녀는 무언가 한 꺼풀 걷어낸 느낌이었다. 지금이라면 그동안 하지 못했던 어떠한 형태의 검술도 사용 가능하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나도 좋아해, 아드리아스.”
비비안이 미소 지으며 검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검에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특이한 형태의 오러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내 꿈은, 곧 현실이고.”
비비안이 검을 휘두르자 이내 그 오러는 붉게 물들은 세상을 덮어가기 시작했다.
“현실은 곧 내 꿈이다.”
눈이 감겨왔다.
비비안은 자신의 오러 비기를 위해 끝없는 잠에 빠졌다.
**
“비비안!”
쓰러지는 비비안을 붙잡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죄악인 분노를 사용하기 전에 비비안과 안젤라를 안전한 곳에 옮겨두려고 했는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오러 비기?”
붉었던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니, 자세히 보니 또 다른 형태로 변한 상태였다.
마치 수채화로 만들어진 듯 흐릿한 풍경이 주변을 감쌌다.
‘시전자가 정신을 잃는 오러 비기라니······.’
이런 정신 나간 오러 비기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그만한 리스크를 지고 있으니 그 위력은 보통의 오러 비기보다 상당할 터.
실제로 초월자에 근접한 엘리자베스의 붉은 세상이 비비안의 수채화 같은 오러로 인해 대부분 지워진 상태였다. 드문드문 남아있는 부분도 있었지만 강력했던 엘리자베스의 영향력은 상당히 감소됐다.
“미친.”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도대체 비비안의 오러 비기가 무슨 능력인지 모르겠지만 탐욕의 부작용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이라면······.
‘한 번 더 사용이 가능하다고?’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마치 탐욕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처럼 탐욕의 쿨타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을 알아차린 건 당연히 나뿐만이 아니었다.
“이건 또 무슨······.”
엘리자베스가 황당하다는 기색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위압적으로 들리던 그녀의 목소리도 이제는 평범하게 느껴졌다.
“말도 안 돼. 고작 인간 하나의 힘이 죄악을 사용한 나를 뛰어넘는다고?”
어이없지만 그녀의 말에 나도 동의했다.
그냥 뱀파이어 퀸도 오러 마스터 혼자서는 잡아낼 수 없는 괴물인데 색욕을 사용했던 그녀는 잠시나마 화신체도 씹어 먹을 존재가 됐었다. 그런 그녀를 비비안 혼자만의 힘으로 억제하다니······.
스윽-
나는 비비안을 한 손으로 품에 안았다.
잠들어있는 그녀는 새근새근 호흡을 내뱉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내가 지금 할일은 정해졌다.’
비비안을 지키고, 뱀파이어 퀸을 잡는다.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흡혈귀 따위한테 체면이 말이 아니었군. 이제 내 차례다.
속박에서 풀려난 하룬겔이 마법을 난사하는 게 느껴졌다. 곧이어 나머지 언데드들도 합세해서 엘리자베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고작 언데드 따위가······!”
고결했던 모습이 전부 사라진 엘리자베스가 고함을 지르며 혈마법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혈마법들도 니켈의 검 앞에서는 바스러질 뿐이었다.
서걱!
“커헉!”
결국 검에 베인 엘리자베스가 피를 토해내며 뒤로 물러났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끝이다.”
나는 검을 집어넣고 머리에 쓰인 왕관을 만지며 말했다.
-꿇어라, 엘리자베스
탐욕의 기운이 무력해진 상대를 옭아맸다.
결국 두 무릎을 꿇은 엘리자베스가 표독한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
“이 모든 이야기의 끝은 아직입니다. 당신은 아직 자격이 없어요.”
-알고 있는 걸 전부 말해라.
언령 마법이 떨어진 순간 갑자기 엘리자베스의 입에서 피분수가 터져 나왔다.
자살?
“끄윽, 억.”
심장을 움켜쥔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입가에는 선혈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꽤나 공포스러웠다.
“구원자······.”
툭-
초월자를 노렸던 뱀파이어 퀸은 그렇게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보여줬던 힘에 비해 어이없을 정도의 최후라 조금 찝찝했지만 곧이어 가루가 되어 소멸하는 그녀를 보며 죽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색욕.”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는 지팡이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색욕을 챙긴 나는 뒤를 돌아 안젤라를 살폈다. 그녀는 내 그림자 속박에 묶인 채 저항 없이 구경하고 있었는데 별 문제는 없어 보여 안심이었다.
“비비안.”
이제는 비비안을 깨울 차례.
사실상 뱀파이어 퀸을 잡는데 가장 큰 공로를 세웠다고 볼 수도 있는 그녀였다. 이 오러 비기는 앞으로 두고두고 연구해야겠는데?
“······비비안?”
뭔가 이상했다.
비비안이 깨어나지를 못했다.
수채화 같은 풍경이 사라져가는 가운데 여전히 비비안은 잠들어 있었다.
“비비안!”
[“소용없어.”]
“원죄?”
네가 갑자기 왜 나와?
[“그 녀석은 곧 죽을 거다.”]
“뭔 개소리야.”
믿기지 않았다.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말은 어느새 떨리고 있었다.
[“너도 알고 있을 텐데.”]
“개소리 하지 마!”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힘을 이끌어냈어. 오히려 놀라울 정도지. 고작 한 생명의 희생으로 이만한 결과물을 냈다는 게. 성장을 계속했으면, 어쩌면 초월자의 재목이었을 수도 있겠어.”]
“닥쳐.”
나는 품에 안은 비비안을 흔들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적어도, 적어도 그 기술이 이런 반동이 온다는 걸 알았으면 그냥 뱀파이어 퀸이든 색욕이든 다 버리고······.
[“이미 지나간 일을 돌이킬 수는 없다. 이 세상은 네가 즐기던 게임이 아니야.”]
“······다시 말 안 한다. 닥쳐라.”
[“······.”]
이제야 기껏 솔직하게 말했는데.
어째서, 왜, 하필이면······.
“비비안.”
눈을 감은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녀를 깨워야했다.
띠링!
그동안 감춰왔던 메시지창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나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사용하지 않겠다고 남몰래 다짐했던,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어준 그 능력이 등장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진화가 가능한 개체가 탐색되었습니다.]
“하아, 후우, 후우.”
식은땀으로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심장을 조이는 고통이 전신을 짓눌렀다.
[비비안 크롬웰의 진화 가능성 50%]
[진화를 할 경우 1 가지의 분기가 존재합니다.]
[진화를 하시겠습니까?]
< 369화. 고백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