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7화. 뱀파이어 퀸 >
조각상들이 움직였다.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모를 반투명한 검은빛을 띈 그것들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스릉-
안젤라가 당황한 안색으로 중얼거리고 비비안이 검을 뽑았다.
“초월자?”
그리고 아드리아스가 다시 입을 열자,
[“환영합니다, 우리의 구원자시여.”]
초월자가 의지를 보내왔다.
동시에 거대 조각상들이 아드리아스의 주변으로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여왔다.
“구원자?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당신은 누굽니까.”
[“제 이름은 엘리자베스 루시펠.”]
엘리자베스 루시펠.
초월자가 이름을 가진 경우, 아니 본명을 말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엄마?”
“뱀파이어 퀸?”
그 이름은 사라졌다고 전해지는 현 뱀파이어 퀸의 것이었다.
[“전 이제 퀸이 아닙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퀸이었지만 문이 열리고 당신이 이곳에 온 순간부터 벗어났죠.”]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구원자님께서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저는 영원히 이곳에서 봉인이 되어 있었을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의지를 가지고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것도 다 그 덕분이죠.”]
“아니 그러니까······.”
아드리아스는 애써 침착을 유지했다.
뭔가 생략된 말들이 많았지만 단순히 생각해보면 뱀파이어 퀸이 이전부터 자신을 예견하고 있었고, 준비를 해왔음을 알 수 있었다.
“절 적대하는 것만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감히 구원자님을 적대할 수는 없지요.”]
초월자를 상대하는 건 미친 짓이었다.
아드리아스는 제단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통해 엘리자베스가 아직 제단 속에 존재함을 느낄 수 있었다.
화신이 아닌 본신이 잠들어있는 제단.
게임에서는 한 번도 발견하지 못했던 숨겨진 요소였다.
“제가 왜 구원자인지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아쉽지만 저도 설명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습니다. 차라리 퀸이었을 때 더 많은 걸 말할 수 있었을 텐데······.”]
그때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안젤라가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나섰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네. 정말 엄마에요?”
[“안젤라, 고생이 많았구나. 넌 네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제 역할? 제 역할이 대체 뭔데요?”
[“구원자님을 이곳까지 데려온 일, 그게 네 역할이었단다.”]
“······삶이 부정당한 기분인데. 그게 정말 맞아요?”
쿠구궁!
안젤라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흑요석으로 만든 듯한 조각상이 몸을 일으켰다. 적대하지 않겠다는 말에 안심하고 있던 아드리아스는 직감적으로 불안을 느끼며 검을 뽑았다.
“물러나세요.”
“어?”
그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조각상이 거대한 검을 휘둘렀다. 풍압이 사방을 찢어발기며 위협적으로 몰아쳤다.
“적대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구원자님을 향한 공격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역할을 끝낸 제 아이를 돌려보내려고 했을 뿐.”]
“저를 비롯해서 이 둘을 공격하는 건 곧 저를 향한 공격이라고 판단하겠습니다.”
아드리아스는 다시 깨달았다.
지금의 엘리자베스는 초월자의 영역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그 말은 곧 평범한 생각과 판단으로 잣대를 들이댈 수 없음을 의미했다.
[“동정하는 건가요?”]
“그런 게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네요.”]
“이해를 바라는 게 아닙니다. 공격을 멈추세요.”
아드리아스가 강하게 말하자 조각상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 강력해보이지는 않았지만 결국 초월자의 의지로 행해진 공격인 만큼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구원자님의 말대로 일단은 멈추겠습니다.”]
“일단이 아니라 계속 멈춰주시면 좋겠습니다.”
안젤라는 뒤로 물러난 상태에서 당황한 기색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딱히 부모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 당황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뜬금없는 공격에 당황했다는 표현이 맞았다.
“역할이라니, 갑자기 뭔 헛소리야. 역할이 끝났다고 죽이려는 건 또 뭔 짓이고.”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지만 엘리자베스는 오직 아드리아스만을 상대했다.
[“색욕을 찾으러 온 거겠죠?”]
“맞습니다.”
[“가져가세요.”]
검은 불꽃이 피어오른 제단 위로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지팡이가 떠올랐다.
‘순결한 색욕.’
탐욕의 왕관이나 나태의 큐브처럼 아이템으로 존재하는 죄악이었다.
그러나 게임에서의 과정과 조금 달라졌기에 아드리아스는 신중해졌다.
‘원래는 그냥 놓여있는 아이템이라 주워가면 되는데······.’
지금은 마치 주인이 존재하는 것처럼 고동도 느껴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불길한 기운에 휩싸여있었다.
“그 전에 뭘 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물어보세요.”]
“제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당신도 존재하지 않았던 겁니까?”
[“말했다시피 영원히 잠든 채 이곳에 봉인되어 있었겠죠. 하지만 구원자님께서 오신 것만으로 저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습니다.”]
우웅-우웅-
허공에 떠다니는 색욕의 지팡이가 소음을 일으켰다.
[“자, 이제 가져가세요.”]
“아직 질문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 이해할 수 가 없어요. 제 존재가 뭐라고 당신을 봉인에서 풀어냈으며, 또 초월자로 만들 수 있었던 거죠?”
[“······초월을 행한 것은 제 의지. 구원자께서는 제 봉인만 풀어준 거랍니다. 이미 전 초월자가 된 이후죠.”]
“설명이 중간 중간 비어있습니다. 왜 제가 이곳에 다다른 것만으로 봉인이 풀릴 수 있었던 건지, 그리고 왜 구원자라 불리는지······.”
[“더 이상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 말했듯이 퀸이었으면 조금 더 설명이 가능했겠지만, 전 더 이상 퀸이 아닙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엘리자베스의 태도에서 이상함을 감지한 아드리아스는 쉽사리 지팡이에 다가가지 않았다.
“뭘 노리고 있는 겁니까?”
[“무슨 말씀이시죠?”]
게임에서의 경험으로 지금의 상황이 결코 평범하지 않음을 직감한 아드리아스는 언데드를 소환했다.
우우웅--
익숙한 소리와 함께 아공간이 드러나며 그가 소환할 수 있는 모든 언데드가 쏟아져 나왔다.
“엘리자베스, 저를 이용해서 초월자가 될 생각이십니까.”
[“전 이미 초월한 자입니다.”]
“비슷하지만 틀렸습니다. 전 이미 이곳에 오기 전까지 몇몇 초월자들을 만나보았죠.”
이윽고 검은 날개가 펼쳐지자 안젤라가 놀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루시펠의 날개?”
그러나 그 의문성은 곧 엘리자베스의 의지에 의해 지워졌다.
[“왜 절 의심하는 거지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티가 납니다.”
아드리아스는 자신의 날개를 확인했다.
초월자라면 강렬하게 반응해야할 그의 날개가 잠잠하기만 했다.
“다시 말하지만 전 이미 초월자들을 만나봤습니다. 한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의 숫자죠.”
[“······.”]
“초월자의 행세를 하면서 저를 현혹하는 이유가 뭡니까.”
쿠구구궁!
조각상들이 몸을 일으켰다.
10개의 조각상은 흉흉한 기세를 드러내며 동시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왠지 분위기가 안 좋더라.”
안젤라가 피를 만들어내며 혈마법을 준비했고, 비비안이 곧바로 튀어나가 조각상을 난도질했다.
콰가각!
조각상은 전투력이 약해보였지만 의외로 단단했다. 비비안의 오러가 외피를 뚫지 못하고 긁어지나가기만 하자 곧바로 반격이 날아왔다.
-그그그극!
콰아앙------!
난장판이 되어가는 상황을 아드리아스는 그저 지켜만 보았다. 아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아······.”
제단이 천천히 갈라지며 그 안에서 무언가의 기운이 새어나오자 아드리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뱀파이어 퀸을 상대하게 될 줄이야.”
[“그러게 얌전히 몸을 맡기셨어야죠, 구원자님.”]
탁!
색욕의 지팡이가 새하얀 손에 잡혔다.
어둡고 새빨간 기운을 줄줄 흘리던 지팡이는 더욱 강렬한 빛을 뿌리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콰아앙!
한쪽에서는 비비안과 안젤라가 조각상들을 상대하고 있었고, 아드리아스는 언데드에 둘러싸인 채 제단을 가르고 나오는 순백의 뱀파이어를 바라보았다.
[“아아······. 드디어 날개를 돌려받으셨네요. 정말 늠름하십니다. 하지만 아직 개수가 부족하군요.”]
“뭔 소리인지 모르겠군. 돌려받다니?”
[“이해하지 못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깨어난 엘리자베스가 새하얀 송곳니를 드러냈다.
[“어차피 제가 먹어치울 거니까요.”]
“가라.”
하루 동안 수없이 많은 뱀파이어를 사냥해오며 언데드를 늘린 아드리아스가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뱀파이어 언데드들이 엘리자베스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가엾은 아이들.”]
엘리자베스가 색욕을 휘둘렀다.
그러자 순식간에 복잡한 마법진이 허공에 새겨지며 혈마법이 발동되었다.
콰아아아악----!
피로 만들어진 거대한 늑대가 소환되며 언데드들을 물어뜯었다. 순식간에 부서져나가는 언데드를 보며 아드리아스가 안색을 굳혔다.
뱀파이어로 만든 언데드인 만큼 그 강함은 일반적인 스켈레톤이나 좀비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으나 엘리자베스는 뱀파이어 퀸에 걸맞은 무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으하하하하! 오히려 좋다.
그때 리치 킹이 된 하룬겔이 광소를 터트리며 부서진 언데드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시커먼 기운이 뽑혀 나오며 하룬겔에게 모이더니 곧바로 구슬 모양의 흑마법이 되었다.
-뱀파이어 퀸. 언젠가 한 번 언데드로 만들어보고 싶었지. 오늘이 바로 그 날이구나.
[“하찮은 것. 주제를 알아라.”]
-내가 할 소리다, 흡혈귀.
이내 피로 만든 거대 늑대들과 하룬겔의 검은 구슬이 부딪혔다.
콰아아아앙-------!
마력의 폭발이 일어나며 주변을 모두 휩쓸었다. 그러나 드러난 현장은 명백히 엘리자베스의 우위였다.
-골 때는 것들을 사역하는구나.
피로 이루어진 늑대들은 전신이 뜯겨 나간 채 바닥을 기고 있었지만 순식간에 재생하고 있었다.
[“이게 끝인 줄 아느냐.”]
엘리자베스의 다음 혈마법이 주위를 뒤덮기 시작했다. 핏빛 먹구름과 안개가 동시에 생성되며 주변에 깔리기 시작했다.
-너야말로 우습구나. 여기에 나밖에 없는 줄 아느냐?
하룬겔이 웃으며 자리를 비켰다. 그러자 뒤에서 기다리던 크리브마허가 아가리를 벌렸다.
-뒤져라, 요망한 것아.
“하룬겔, 꼭 네가 주인 같다?”
아드리아스가 갈락슈르를 뽑으며 핀잔을 줬다. 동시에 드래곤 브레스가 쏘아지며 핏빛 안개와 구름을 관통했다.
치이익!
블라디미르를 단번에 없애버렸던 괴랄한 브레스가 옥상을 뒤흔들었다.
-크하하하! 어떠냐! 이게 바로 본 드래곤의 브레스다!
“카오스 드래곤이다.”
먼지와 수증기가 자욱하게 끼었다.
하지만 아드리아스는 상대가 죽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긴, 블라디미르도 온전한 상태였으면 브레스로 죽일 수 없었겠지. 거기다 상대는 블라디미르보다 강한 뱀파이어 퀸.’
엘리자베스와의 전투에서 필요가 없을 듯한 루도와 미리내는 조각상들 쪽으로 보낸 아드리아스가 안개 너머를 경계했다.
촤르륵!
채앵!
곧바로 연기를 뚫고 나오는 핏빛 실선들을 검으로 막아내며 니켈과 티무르에게 명령했다.
“죽여라.”
-주군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크허어엉!
연기가 걷히며 서서히 드러나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은 너무도 멀쩡했다. 피부를 덮고 있는 은은한 붉은 빛의 막이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다.
[“용케 드래곤을 길들이셨군요. 역시 구원자님이십니다. 하지만 저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
스겅!
말을 하던 엘리자베스가 급하게 몸을 틀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타난 니켈의 검이 이미 그녀의 팔 한쪽을 가져간 이후였다.
[“······아?”]
동시에 아드리아스가 땅을 박차며 엘리자베스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초월자의 신호를 느끼지 못하는 날개가 펄럭였다.
[“잠시만······어째서 사도가······!”]
“사도를 알아?”
[“말도 안 돼. 사도라니······.”]
경악으로 물들어가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보며 아드리아스가 검을 휘둘렀다. 엘리자베스는 색욕을 이용해 간신히 자리를 피해내며 떨어진 팔을 주워들었다.
“들어야할 게 많아. 하지만 그 전에······.”
아드리아스의 검이 시퍼런 빛을 뿌렸다.
동시에 깊게 가라앉은 그의 눈이 넘실거렸다.
“대가는 치러야지.”
< 367화. 뱀파이어 퀸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