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6화. 추락한 자들 >
퍼억!
짧은 타격음과 함께 주위가 잠잠해졌다.
안젤라는 마지막 남은 직계 뱀파이어마저 복속시킨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달그락!
언데드들이 사방에 들끓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안젤라는 어쩌면 언데드야말로 뱀파이어의 천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끝이야.”
“수고하셨습니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안젤라는 자신이 복속시킨 직계 뱀파이어들을 쭈욱 나열했다. 그들은 아직 복속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 감정 없는 인형처럼 움직였다.
“블라디미르를 빼면 진짜 다 먹어버렸네. 이제 어떻게 해?”
“성의 중앙에 위치한 제단으로 가보죠.”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아드리아스를 안젤라가 게슴츠레 바라봤다.
“나도 모르는 걸 대체 넌 어떻게 아는 거야?”
“무려 루시펠 성인데 제가 아무 생각 없이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나름 조사를 했지요.”
그의 대답에도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치를 했지만 결국 안젤라는 얌전히 따랐다.
“그래, 뭐.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둬. 난 나를 배신한 녀석을 절대 용서하지 않아.”
“물론이죠.”
아드리아스가 언데드를 거둬들이며 태평하게 말했다.
자신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한 걸까 의문스러운 가운데 비비안이 다가와 나열한 뱀파이어를 살펴보았다.
“이건 명령대로 따르는 거야?”
“응? 그렇지. 반대로 졌으면 내가 그 꼴이 됐겠지. 하나 줄까?”
“줄 수도 있어?”
“마음에 드는 거 골라봐.”
둘 사이에 태평한 대화를 듣고 있던 아드리아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일단은 제단으로 갑시다.”
“아니 근데, 그 제단이라는 게 뭐야? 난 듣도 보도 못했는데.”
“지금부터 찾아봐야죠. 저도 문서로 확인만 했지 실제로 본 건 아니니까요.”
자연스레 거짓말을 늘어놓은 아드리아스가 이내 먼저 출발했다. 그런 그의 뒤를 따라 비비안이 뱀파이어를 살치던 걸 멈추고 새끼 오리처럼 따라갔다.
“도대체가······.”
자신이 알던 사람이 맞나?
알면 알수록 아드리아스의 정체가 궁금해져가는 가운데 우선은 뒤를 따랐다.
그들은 루시펠 성 내부에서도 정 가운데에 위치하는 거대한 마천루로 향했다. 그 건물은 내부를 뚫고 외부로 돌출된, 성안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확실히 여기에 뭔가 있을 법하네. 근데 여긴 알 수 없는 저주로 잠겨있는 걸로 아는데?”
“그래요?”
“어, 내가 어렸을 적에 몇 번 와본 곳이거든. 그때는 엄마도 있었으니까······.”
문득 안젤라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직 뱀파이어 퀸이 자취를 감추기 전의 일이었다.
“그때 분명히······.”
거대한 건물 내부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고 여러 조각상들이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안젤라?”
“어, 가고 있어.”
사위가 적적했다.
루시펠 성 내부의 모든 직계 뱀파이어가 복속되자 그 밑으로 딸린 일반 뱀파이어들도 조용해졌다. 이제는 모두 안젤라의 권속이 되어버린 그들은 적어도 며칠, 아니 어쩌면 몇 년 동안은 자아를 잃은 채 행동해야 했다.
“여기 맞네.”
안젤라가 거대한 마천루의 입구 앞에 서며 말했다. 마천루가 컸던 만큼 그 입구도 웅장했는데, 자물쇠와 같은 무언가로 잠겨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하는 말인데 정말 이게 끝이야? 퀸이 되는 게 이렇게 쉽다고?”
“그 쉬워 보이는 일을 지금까지 왜 아무도 하지 못했을까요.”
“음, 도움이 없었으면 분명 나도 불가능했던 일이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운도 따라줬습니다. 적들이 너무 방심한데다 시기가 좋았죠.”
아드리아스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게임 속의 뱀파이어들은 정해진 행동대로 움직이는 반면, 실제로는 방심투성이에 게으르기까지 하니 훨씬 손쉽게 끝낼 수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
문 앞에 다가선 안젤라가 슬쩍 문을 밀어보았다. 그러나 문은 예상했던 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눈치 채셨을지 모르겠지만 전 워록입니다.”
“어.”
“지금부터 연구해봐야죠. 저주가 걸려있다고요?”
“나도 듣기만 했어. 뭐, 저주인지 봉인인지 마법인지 알 게 뭐냐만.”
아드리아스가 문에 다가갔다.
그리고 마력을 흘리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혈마법에 반응하지 않겠어? 명색이 루시펠 성인데.”
“음······.”
이미 게임 속 경험으로 이 문을 어떻게 여는지 알고 있던 아드리아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 누군가가 열었겠죠.”
“그것도 그러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아드리아스가 용아병 하나를 불러내며 공간 확장 가방을 꺼냈다. 그리고는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뭘 또 준비한 거야?”
몇 수 앞을 내다본 건지 모를 준비성에 안젤라가 기가 찬 표정을 짓고 있을 때쯤, 아드리아스가 드디어 준비한 모든 물건들을 꺼냈다.
“이거······.”
그리고 그 물건들이 낯익었던 비비안은 조심스레 손짓하며 아드리아스를 바라봤다.
“예. 집회에서 가져온 것들입니다.”
집회는 이미 루시펠 가문에 대한 준비를 어느 정도 끝마쳐놓은 상태였다. 온갖 음모의 발상지인 곳답게 계획해놓은 것들이 많았는데 결국 아드리아스로 인해 펼쳐보지도 못한 채 져버리고 말았다.
‘결국 내가 이렇게 써먹으니까 그게 그건가.’
생각해보면 집회가 할 행동을 자신이 하는 것이니 마치 악의 축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낀 아드리아스가 서서히 준비를 시작했다.
“이건, 이렇게······이거는 안젤라가 도와주셔야합니다.”
“이거? 아, 혈마법이 필요한 물건이네. 용케 이런 걸 구해왔어.”
준비해온 시약들과 아티팩트들을 이리저리 만진 끝에 무언가를 만들어낸 아드리아스는 이내 안젤라의 혈마법을 사용해 붉은 분필을 만들어냈다.
“이걸 이제 조사해온 대로 마법진을 만들면······.”
아드리아스가 완성된 분필로 문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온갖 문양과 함께 고대 문자들도 섞인 마법진은 그려지는 것만으로 알 수 없는 기운을 내뿜었다.
“루시펠의 문장들?”
“예, 그냥 단순한 문양이 아니라 다 의미가 있고 힘이 내포된 문양들입니다.”
“몰랐어. 난 그냥 그럴 듯한 그림인 줄 알았지.”
이내 마법진이 완성되어 갈수록 기다리는 안젤라와 비비안의 눈에도 호기심이 가득 피어났다.
위이잉---
“완성입니다.”
거의 문을 빼곡하게 덮은 마법진을 보며 아드리아스가 말했다.
“이 문을 여는데 든 시간이 직계들 상대한 것보다 오래 걸렸겠는데?”
“그만큼 운 좋게 직계들을 정리한 거죠.”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
“피.”
아드리아스가 안젤라를 가리켰다.
“당신의 피가 필요합니다.”
“으음, 수상한데.”
“문만 여는 건데 수상할게 있나요?”
“그래, 뭐. 속으면 속는 거지 별 거 있겠어.”
안젤라가 퇴폐적인 미소를 뿜으며 그대로 손바닥을 갈랐다. 그러자 피가 터져 나오며 금세 바닥을 적셨다.
“속이는 일 없습니다. 이제 그 피를 마법진을 따라 움직여주세요.”
“그래.”
이내 그녀의 피가 뱀처럼 움직이며 스멀스멀 벽을 타고 올라갔다. 곧이어 문에 그려진 복잡하고도 거대한 마법진을 따라 움직이자 문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오?”
쿠구구구궁!
문이 움직였다.
마치 거대한 기계장치가 퍼즐처럼 맞춰서 돌아가는 것처럼 굉음을 일으킨 거대한 문은 한참동안 시끄럽게 굴었다.
텅!
그 소음의 끝은 문에 걸려있던 자물쇠였다.
그간 들린 소음과는 달리 가벼운 소리를 내며 풀린 자물쇠는 그대로 공기 중에 흩어졌다.
“아니 정말 이해가 안 가네. 우리 가문 애들도 모를 법한 일을 대체 어떻게 알고 준비해온 거야?”
“글쎄요. 아마 루시펠 일족 중의 누군가가 흑마법사와 내통한 게 아닐까요. 저도 이건 빼앗아 온 거라 말이죠.”
“바토리겠네. 흑마법사하면 걔밖에 없으니까.”
끼이익-
말을 하며 안젤라가 문을 밀었다.
그러자 이전과 달리 저항 없이 밀리며 그 안을 드러냈다.
“이랬었나?”
안젤라가 먼저 들어가며 기억을 더듬었다.
너무나 오래된 기억이라 가물가물한 상태로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는 위로 올라가게 설계된 계단을 보며 말했다.
“올라가야겠지?”
계단은 나선형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가운데 공간은 뚫려있는 형태의 건물이었다.
“편하게 가죠.”
“편하게?”
아드리아스가 곧바로 크리브마허를 소환했다.
-이 몸이 이동 수단인가. 난 말 따위가 아니다.
“부탁 좀 할게.”
블라디미르를 해치웠던 장본인이 등장하자 안젤라는 감탄을 토해냈다. 실로 거대한 크기였는데 마천루도 그에 못지않게 컸던 덕분에 온전히 소환이 될 수 있었다.
“두 분 다 타세요.”
“응.”
비비안이 익숙하다는 듯 드래곤의 등에 올라타고 안젤라도 조심히 올라섰다.
-루시펠인가.
크리브마허가 자신의 등을 올라타는 안젤라에게 물었다.
“나한테 말한 거야?”
-여기에 뱀파이어는 그대 밖에 없다.
“맞아. 근데 왜?”
-루시펠은 아직도 이 성에서 지내고 있는 건가. 저주받은 영원의 일족, 끝없는 겨울을 지새워야하는 자들.
“뭐래.”
-알고 지내던 녀석이 있었다. 녀석의 이름은 체페슈, 당시의 킹이었지.
모두를 등에 태운 크리브마허가 날았다. 곧바로 끝을 향해 나는 크리브마허를 향해 아드리아스가 물었다.
“저주받은 영원의 일족이 무슨 뜻이지?”
-그들은 버려졌다. 가장 고귀했던 존재들이었으나 그들의 수장이 추락하자 수장의 뒤를 밟아 다 같은 처지가 되었지. 정확히 말하면 저주가 아닌 몰락이라고 해야겠군.
처음 듣게 된 내용이라 아드리아스가 흥미롭게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수장이라면 킹이나 퀸을 말하는 건가?”
-아니다. 내가 하는 이야기는 루시펠의 태초다. 아직 신들이 우리 곁에 있을 당시의 이야기지.
후웅-
쿵!
어느새 꼭대기에 도착한 그들은 바깥 전경이 드러난 옥상에 내려섰다.
“아!”
그리고 옥상에는 거대한 조각상들과 제단처럼 보이는 건축물이 세워져있었다.
“맞아, 여기야. 와본 적이 있어. 옥상이었는지 몰랐는데······잠시만.”
안젤라는 익숙한 광경들이 눈에 들어오자 갑자기 떠오른 기억에 안색을 굳혔다.
“안젤라?”
“허······.”
“왜 그러십니까.”
안젤라가 당황한 기색으로 생각을 더듬고 있는 사이 크리브마허가 마지막 말을 남기며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아드리아스 크롬웰. 그대에게도 검은 날개들이 있었군.
“뭐?”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르겠어.
맥락 없는 말을 남기며 사라진 크리브마허를 다시 소환할까 고민하던 아드리아스는 이내 무섭게 다가오는 안젤라를 마주했다.
“멈춰.”
그 기색을 파악한 비비안이 앞을 가로 막았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어째서?”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이에요?”
“넌 알고 있었어?”
“뭘요?”
안젤라와 크리브마허의 이상한 발언과 행동에 아드리아스가 당황하고 있을 때, 안젤라가 다시 말했다.
“넌 일이 이렇게 될 걸 다 알고 있었냐고.”
“무슨 일이요?”
“네가 루시펠에 오고 모든 직계를 쓰러트린 후에, 이렇게 옥상으로 올라오게 되는 거.”
“그런 걸 어떻게 다 예상합니까.”
“근데 어째서 우리 엄마는 알고 있었던 거지?”
“······예?”
뱀파이어 퀸이 예상을 하고 있었다고?
아드리아스는 기묘한 직감을 감지했다. 마치 경종이 울리듯 위기감이 엄습했다.
“제대로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엄마랑 이곳을 와본 적이 있어. 단 둘이서 올라왔었지. 그리고 그때 분명 엄마가 나한테 말했어.”
안젤라는 흔들리는 눈초리로 아드리아스를 보았다.
“잊혀진 자가 돌아올 거다. 그 자는 13번째이자 곧 첫 번째이고, 검은 날개와 죄악들을 품에 안은 자. 멸망으로 내몰았으나 끝내 구원을 바라는 자.”
검은 날개와 죄악이라는 단어에 흠칫했지만 이내 아드리아스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뜬구름 잡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루시펠을 다시 지어 올리리. 너는 그 분을 통해서 퀸이 될 거다.”
“······그 말까지 퀸이 해줬다는 이야깁니까?”
“어.”
안젤라가 당황한 이유를 짐작한 아드리아스는 잠시 시선을 돌린 채 생각에 빠졌다.
“나도 여기에 올라와서 떠올랐어. 왜 지금까지 잊었는지 모를 정도야.”
“아마 퀸이 뭔가를 해두었겠죠.”
화르륵!
그때 제단에 검은 불이 스스로 피어올랐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피어오른 검은색의 불꽃을 보며 모두가 경계했다.
“함정?”
아드리아스가 그리 의심할 때,
[“기다렸습니다.”]
초월자의 의지가 울려 퍼졌다.
< 366화. 추락한 자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