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화. 신전 >
“뭐지?”
블라디미르가 의문이 가득 담긴 음성으로 사내를 보았다. 그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상황이었기에 판단이 늦어졌다.
“뭐긴 뭐야! 블라디미르, 네 모가지를 따러왔지!”
뒤늦게 나타난 안젤라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등장했다. 그녀는 이미 온몸에 피를 묻힌 채 무장을 갖춘 상태였다.
“하아······. 설마 나를 치러 올 줄이야.”
“네가 먼저 애들 보내놓고 뭔 소리래?”
“그렇군. 그걸 명분삼아 온 건가.”
블라디미르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는 전혀 긴장하거나 낭패를 본 기색이 없었다.
그저 한없이 귀찮다는 표정.
스스스-
뒤이어 안젤라가 복속시킨 바토리도 등장했지만 블라디미르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얼굴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소식이 진짜였군. 설마 네가 바토리를 이길 줄이야. 용케 인간을 이용할 생각을 했어.”
“쫄려?”
“그 경박한 말투는 여전히 인간 같구나, 동생아.”
블라디미르가 양손을 펼쳤다.
그러자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주변을 진공상태로 만들었다.
“어차피 이리 된 것, 모두 죽이고 내가 뱀파이어 킹이 되겠다. 직계는 그때 가서 새로 만들면 되겠지.”
“저······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아드리아스가 온갖 폼을 잡는 블라디미르를 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다른 놈들이 오기 전에 당신을 잡아야 해서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걸로 합시다. 안젤라의 수하가 돼도 수다는 많이 떨 수 있으니까.”
“건방진 인간이······.”
스겅!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칼날이 블라디미르의 몸을 꿰뚫었다. 그림자로 이루어진 그 칼날은 아드리아스가 손에 든 갈락슈르로부터 길게 이어져있었다.
“마법? 오러 비기?”
처음 보는 형태의 공격에 블라디미르가 신기하다는 눈길로 자신의 몸을 통과한 검날을 바라봤다.
그 순간 그림자로 이루어진 칼날이 여러 방향으로 퍼지며 솟구쳤다.
푸확!
“쿨럭.”
블라디미르는 온몸에서 가시가 튀어나온 듯한 모습으로 피를 토해냈다.
“좋아.”
안젤라가 블라디미르가 흘린 피를 보며 웃었다. 그녀는 흘린 피를 이용해 블라디미르를 꽁꽁 묶었다.
“내 것도 맛 좀 봐봐.”
블라디미르를 구속한 피의 끈에서 가시가 돋치며 다시 한 번 상대를 찔렀다.
‘최대한 빨리 끝낸다.’
아드리아스는 이미 수십 번을 상대해본 경험으로 블라디미르가 보통의 뱀파이어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아직 제 능력을 보이지 않는 지금, 그가 감을 되찾기 전에 끝내야했다.
“자, 준비하시고······.”
주먹을 뚜둑거리며 블라디미르를 향해 다가가는 안젤라에게 아드리아스가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음?”
아드리아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명음이 주변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우우웅--
-그으으으······.
시커먼 아공간이 열리며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서서히 드러나는 거대한 무언가의 신형을 안젤라가 멍하니 바라봤다.
“어······?”
이내 그 거대한 무언가는 콧김을 뿜으며 아가리를 벌렸다.
“한방에 끝내죠.”
콰아아아악------------!
짙은 산성 브레스가 속박이 된 블라디미르를 향해 쏟아졌다. 면전에서 쏘아진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강력한 마나의 파동이 주변을 휩쓸고 지나갔다.
쿠구구구궁!
루시펠 성의 일부가 무너졌다.
그리고 블라디미르가 서있던 곳에는 먼지 하나 남지 않고 모든 게 사라져버렸다.
“뭐야, 이게.”
“드래곤 브레스입니다. 전성기에 비하면 조금 약하겠지만 그럭저럭 쓸 만하죠.”
“허허······.”
그때 소음을 듣고 달려온 비비안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타났다.
“아드리아스?”
“아, 괜찮습니다. 바깥 정리는 끝났나요?”
“응.”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는 둘을 보던 안젤라는 이내 천천히 블라디미르가 있던 장소에 다가갔다.
그리고는 혈마법을 이용해 그의 흔적이 남아있는지 확인했다.
“시원하게 날려버렸네? 아무것도 안 남았어.”
블라디미르도 복속시키려 했지만 남아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깔끔하게 없앴는지 의문일 정도였다.
“너, 정말 뭐야?”
안젤라의 시선이 자연스레 아드리아스를 향했다. 그러나 아드리아스는 검을 집어넣으며 그저 사과를 할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흔적조차 남지 않을 줄은 몰랐네요.”
“말은 안했지만 바토리나 다른 녀석들을 잡았을 때도 뭐지 싶었어. 근데 무려 블라디미르를 이런 식으로 없애버린다고?”
브레스를 날렸던 기괴한 드래곤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하지만 드래곤이 만들어낸 참상은 두 눈앞에 톡톡히 펼쳐져있었다.
치이익-
아직도 녹아내리고 있는 건물을 보며 안젤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 참.”
“이제 곧 다른 녀석들도 올 겁니다. 이참에 다 복속시키죠.”
터무니없는 말이었지만 조금 전의 광경을 본 안젤라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놀랄 일도 없을 것 같았기에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잠시만······오늘 다?”
“기회가 될 때 다 정리하는 것도 좋죠.”
“하루만에?”
“예.”
고개를 끄덕이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묻는 안젤라를 향해 아드리아스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비비안이 검을 들어올렸다.
“잔말 말고 움직여, 흡혈귀.”
“뭐?”
“아직 남아있는 놈들이 있어. 네가 여기 있는 녀석을 부하로 못 만들어서 아직 돌아다니고 있을 거야.”
“그게 내 탓이니?”
안젤라는 아드리아스의 도움을 받고 강해진 이후로 지금껏 놀라본 경험도, 아니 그녀 자신보다 강한 생명체가 있다는 걸 생각지도 못했다.
‘그 능력을 본인한테도 사용한 건가?’
진화 능력을 구체적으로 알진 못하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추측이었다.
“이르면 오늘 당장 퀸이 될 수도 있겠네요.”
“······허.”
하늘 위의 하늘······이 아니라 괴물 위의 괴물이 있다는 걸 몸소 경험해버렸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안젤라였다.
**
사르르르-
끝없이 흐르는 모래들이 마치 바다처럼 펼쳐져있었다. 작열하는 태양과 함께 반짝이며 흩어지는 모습이 겉보기에는 아름다웠지만 미지의 위험을 품고 있었다.
터벅!
아무도 살지 않을 것 같은 사막.
그 가혹한 환경 한가운데를 작은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모래바람이 몸으로 파고드는 것을 막기 위해 긴 천으로 온몸을 감싼 일행들은 정체가 파악되지 않았다. 그들은 조금의 대화조차 없이 그저 묵묵히 걷기만 할뿐이었다.
“음.”
그때 가장 앞서 걷던 자가 천천히 걸음을 멈추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전에 지나왔던 사막들과 전혀 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지만 그는 마치 뭔가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유심히 살폈다.
“도착인가.”
뒤따르던 누군가가 물었다. 그러자 걸음을 멈췄던 길 안내인은 슬며시 얼굴을 가린 두건을 걷으며 말했다.
“잠시만 확인해보겠습니다.”
드러난 그의 얼굴은 태양에 그을린 피부였다. 마치 오랜 세월을 사막과 함께 해온 듯한 외형이었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행동이었다.
푹! 푹!
그는 들고 있던 막대기로 바닥을 몇 번 쑤셔보더니 이내 바닥에 엎드려 귀를 가져다댔다. 마치 땅 속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기라도 하겠다는 건지 유별난 행동이었으나 함께 하는 일행 중 그 누구도 그런 그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던 사람에게 말하며 다시 천으로 얼굴을 가렸다.
“정확히.”
“이 근방으로 보입니다. 아마 30분 안쪽에 위치한 것 같습니다.”
목표한 장소에 거의 다 도착했다는 말은 꽤나 반갑게 들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신나게 말을 한 남자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출발해라.”
“크흠, 예.”
길안내를 맡은 사내는 무안한 기색을 숨기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한참을 걷던 그들은 이내 길 안내인이 말한 대로 30분이 지나자 어느 허허벌판에 멈춰 섰다.
“여기가 맞는 것 같습니다.”
“······.”
모래언덕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멈춰선 안내인이 그리 말하자 싸늘한 정적이 감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일행 중 하나가 앞으로 나오더니 마법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으음.”
마력을 모으던 그는 이내 뒤를 돌아 일행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이 모이지 않습니다. 이 밑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지하로 내려가는 방법은?”
누군가의 물음에 안내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지하가 있을 법한 장소를 찾아달라는 의뢰만 받았지, 내려가는 방법은 저도 모릅니다.”
“그런가.”
말을 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런 그의 허리춤에는 요염한 빛을 뿌리는 검이 천에 가려진 채 언뜻 내비치고 있었다.
“사막의 일족이라 해서 기대를 했더니 별 것 없었군.”
“저야 뭐, 그냥 일개 길 안내인인 걸요.”
“혹시 마족에 대한 설화를 아나.”
뜬금없는 질문에 안내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고 말고요. 사막에 사는 부족들이라면 아마 대부분이 알 겁니다. 이 땅이 이런 사막이 된 것도 다 고대 시대의 마족 때문이지 않습니까.”
“틀렸다.”
즉답이 튀어나왔다.
안내인은 상대의 대답에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이건 구전된 설화라 맞고 틀리고는 저도 모릅니다. 그냥 어렸을 때부터 그리 듣고 자라왔기에 그런 갑다 하고 지내왔지요.”
“진실이 궁금한가.”
“진실 말씀이십니까? 뭐, 알면 모르는 것보다야 낫겠지요.”
안내인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하자 검을 찬 남자가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래, 어차피 죽을 테니 알고 죽어도 상관없겠지.”
“······예?”
“이 땅이 사막이 된 것에는 물론 이유가 있었지. 하지만 그 이유가 마족은 아니었다. 그건 단 하나의 존재 때문이었지.”
“아, 아니······.”
스릉-
검이 뽑혀 나오며 보랏빛의 기운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위대한 존재가 이 땅에서 봉인되었다. 모두가 두려워한 존재이자 모순적이게도 그렇기에 초월하지 못한 자.”
“으, 으악!”
안내인은 급하게 뒤를 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사람들이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바로 마왕(魔王). 그의 육체가 이곳에 잠들어 있지.”
서걱!
거대한 보랏빛 검기가 안내인을 두 동강 냈다. 허무하리만치 바닥에 엎어진 안내인의 시신은 이내 모래바람에 묻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웅! 웅! 웅!
사람을 벤 요염한 검이 공명음을 내기 시작했다. 마치 이 주변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처럼.
“여기가 맞군.”
“지, 지하를 파보겠습니다.”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장소임에도 검기를 날려 상대를 죽인 남자, 아니 황제를 보며 사람들이 긴장했다.
“필요 없다. 길은 이 녀석이 안내할 테니.”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알아들었다는 듯이 검에서 보랏빛 오러가 솟구쳤다.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와 같은 형상을 갖춘 오러는 기괴한 소음을 내었다.
-끄이이이익!
묘하게 음정과 박자가 존재하는 그 소리는 이내 주변의 모래바람을 멈추었다. 곧이어 바닥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점차 땅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유사(流砂)!”
모래지옥이라고도 불리는 현상이 그들의 주변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적지가 지하임을 깨닫고 감탄한 기색으로 황제를 보았다.
“드디어······.”
황제는 그런 시선조차 느끼지 못하고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점차 밑으로 빠지는 자신의 몸을 느꼈다.
푸스슥!
터억!
저항 없이 유사에 몸을 맡긴 그들은 자연스레 지하로 떨어졌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높은 위치에서 잘못 추락하여 목숨까지 잃었다.
“아아······!”
그러나 황제의 눈에는 그런 하찮은 일 따위 보이지 않았다. 오직 그는 눈앞에 웅장하게 서있는 거대한 건물만 눈에 들어올 따름이었다.
“드디어 찾았구나.”
황제가 원죄의 존재를 알고 있음에도 그리 욕심을 내지 않았던 이유.
“마왕이 봉인된 신전.”
그는 죄악의 주인이 봉인되어있는 장소를 알아냈다.
< 365화. 신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