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0화. 그 이후 >
콰가각!
소름끼치는 쇠의 충돌과 함께 맞부딪힌 두 인물이 물러났다.
“흐으······.”
길게 숨을 내뱉은 싱클레어가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막시민을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여유를 부릴 셈이냐.”
“여유?”
막시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오러 비기를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게 여유를 부리는 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싱클레어가 모욕을 당했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막시민은 여전히 고요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볼 뿐이었다.
“딱히 여유를 부리는 건 아니다만, 그대가 그리 원한다면 사용해줄 수도 있지.”
“막시민-!”
대검이 날아왔다.
막시민은 싱클레어가 던진 검을 피했지만 그 대검 뒤에 가려져 함께 달려오던 싱클레어는 피하지 못했다.
쑤웅!
바닥에는 싱클레어의 오러 비기로 인해 수많은 대검이 꽂혀있었다. 그 중 하나를 뽑아 든 싱클레어가 맹렬한 기세를 품고 휘둘렀다.
후아아아앙----!
세상을 개벽하는 기세가 천지를 진동했다.
그러나 막시민은 배신 처형자를 들어 마치 솜털에 닿은 것 마냥 가볍게 막아냈다.
툭!
그저 한 발자국.
밀려나기만 한 막시민은 몸을 튕겨 뒤로 물러났다.
“날 가지고 노는 거냐.”
“그럴 리가.”
막시민의 말투는 진심인 듯했지만 오러 비기를 끝까지 사용하지 않는 그 모습을 보며 싱클레어는 열이 올랐다.
“그대와 내 상성은 좋지 않아. 느끼고 있을 텐데.”
“······.”
싱클레어는 괴력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엄청난 체력을 지닌 무인이었다.
그의 오러 비기도 그런 그의 육체적 특성을 극대화시켜주는 능력을 지녔다.
하지만 그런 그의 모든 능력들은 일대 다수의 전투에 적합했다.
“무안공.”
막시민이 싱클레어의 호칭을 불렀다.
“좋게 말하면 다수의 전투에 강하지만, 나 같은 강자와의 일대일은 약하지.”
“닥쳐라.”
둘은 구면이었다.
막시민이 아직 오러 비기를 깨우치기 전, 이자벨을 데리고 도망 다니며 테라핀 사변을 일으켰을 때의 일이었다.
“그대는 날 이기지 못한다.”
“막시민 크로넬······.”
으득!
이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싱클레어가 다시 땅을 박찼다. 그 충격만으로 그가 서있던 대지가 갈라졌지만 그런 상대를 향해 막시민은 가볍게 검을 뿌려냈다.
퍼어어억-------!
쏘아진 오러가 다가오는 싱클레어를 거칠게 밀어냈다. 싱클레어가 대검을 들어 한쪽 면으로 막아냈지만 처음과 같은 폭발력은 많이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기어코 막시민에게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오러 비기를 사용해라!”
“그렇게 원한다면······.”
퍼억!
싱클레어는 뒤통수에서 갑자기 느껴지는 충격에 몸이 고꾸라졌다.
“못해줄 것도 없지.”
성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시민은 이자벨을 비롯한 다른 인원들을 믿고 싱클레어를 상대하는 중이었다.
“내가 오러 비기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내 나름의 예의였다.”
“크윽.”
싱클레어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런 그의 목 위로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시퍼런 날이 예기를 뿜으며 목에 닿았다.
“이런 식으로 이기기는 싫었거든.”
싱클레어는 자신의 몸을 밟고 선 또 하나의 막시민을 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네 오러 비기가 분신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설마 같은 힘을 가졌을 줄이야······.”
분신이라고 약해지지 않았다.
그것이 막시민의 오러 비기.
그 사실을 몰랐던 싱클레어는 헛웃음을 흘렸다.
“분신도 없이 나를 가지고 놀았던 그대가, 사실은 둘이라니······.”
“······.”
막시민은 말없이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죽여라.”
“그건 내가 정할 게 아니다.”
어느새 성 안에서 일어난 소란이 끝난 걸 느낀 막시민은 검을 거둬들이며 말했다.
“그대의 처우는 아드리아스에게 맡기지.”
“흐흐. 마음대로 해라.”
패자는 말이 없다.
싱클레어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설마 이런 꼴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이 또한 운명이리.
**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디에네는 자신에게 배정된 방 안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옆에는 루나와 루시아가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과자를 먹고 있었다.
“이제 뭐 딱히 감출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보이는 그대로를 믿으세요, 언니.”
“언니?”
루나가 과자를 집어먹다 갸웃하며 루시아를 바라봤다.
“아, 디에네 언니라고 불러야겠네요. 언니가 둘이라니, 참······.”
“난 루나 언니?”
“네, 네.”
둘의 시답잖은 대화를 본 디에네는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약간은 짐작하고 있었어.”
“뭘요?”
“언데드.”
디에네는 탑에서 자신을 구해주었던 언데드 기사를 떠올리며 말했다.
“애초에 음침하게 뭘 숨기고 다니는 걸 좋아했으니까. 넌 언제부터 안 거야?”
“전 포트리온이요. 워낙 난리도 아니었으니까 아드리아스 선배가 감추지 못하고 결국 드러내더라고요.”
과자를 한 입 집어먹으며 태평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니 디에네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애초에 흑마법사라고 해도 제국이나 성국만 아니면 딱히 문제될 건 없잖아요. 그리고 지금은 아예 제국하고 척을 진 상황이고.”
“그래서 더 문제야. 제국이 아드리아스를 공격할 더 확실한 빌미를 주니까.”
“클로슈 공작도 인질로 잡았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아마 크롬웰은 아무도 못 뚫는 난공불락의 요새일 걸요?”
그건······맞다.
디에네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낮에 보았던 그 광경으로 인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크롬웰에 빛의 기사라 불리는 에반과 대륙 최강의 검사인 막시민, 그리고 방랑자 살렘 예디디아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까.
‘그 사람들이 없어도······.’
아드리아스의 힘을 느낀 디에네는 지금의 그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자신의 마법과 루시아의 오리지널 마법으로도 못 죽였던 괴물을 그는 홀로 잡아냈다.
‘정확히는 아드리아스랑 그 언데드였지만.’
언데드도 곧 아드리아스의 전력이니 제외시킬 필요는 없겠지.
그리고 그의 언데드가 얼마나 더 있을지를 생각한다면 아직 전력을 본 것도 아니었다.
“기가 막히네.”
“뭐가요?”
“아드리아스가 설마 그렇게까지 강할 줄은 몰랐어. 어느 정도 강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아까 그건······.”
“그렇긴 하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루시아를 보며 디에네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갈수록 늘어나는 건 한숨밖에 없는 것 같았다.
“디에네! 한숨 그만 쉬고 여기 앉아.”
루나가 자신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디에네를 불렀다.
“맛있는 걸 먹으면 행복해져!”
디에네는 속 편한 루나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네. 고민해봤자 뭐가 되는 것도 아니겠죠.”
순진한 루나의 모습과 지금까지 보아온 아드리아스를 생각하자 그동안 그녀가 가졌던 흑마법사에 대한 편견이 깨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이제는 아예 흑마법사임을 생각하는 것보다 이들이 어떻게 제국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자신을 느끼며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똑똑!
“아드리아스입니다.”
“들어와.”
한참 아드리아스에 대해 생각하던 와중에 본인이 직접 나타나자 디에네는 근질거리는 입을 참을 수 없었다.
“너······!”
“루나, 괜찮으신가요?”
말이 겹친 둘은 서로를 한 차례 바라보며 손을 저었다.
“먼저 말씀하세요.”
“먼저 말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시아가 아주 놀고 있다는 표정을 하며 과자를 집어먹었다.
“루나, 괜찮으십니까?”
“뭐가?”
“제롬이 떠나서 상심한 줄 알았습니다.”
아드리아스의 말에 루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 과자를 보다가 이내 묵묵히 입에 넣었다.
“이 과자······맛있는데.”
“루나.”
“과자를 더 챙겨줄 걸 그랬어.”
덤덤하게 말하는 루나의 모습을 보니 더욱 안쓰러워진 사람들은 침묵을 유지했다.
“다시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괜찮아.”
“예, 반드시 돌아온다고 했죠.”
청기사가 죽은 직후, 제롬은 세상을 더 알고 싶다며 크롬웰을 떠나기로 했다. 비록 외모 때문에 험난한 여정이 될 것 같았지만 그게 자신을 위해서 좋을 것 같다는 말을 했기에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그······제롬이라고 했던 사람은 오늘 쓰러트린 아이랑 연관이 있는 거지?”
“······글쎄요.”
디에네의 물음에 아드리아스는 말을 아꼈다.
“하아, 그래. 그것보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어떤 거 말씀이십니까?”
“어떤 거냐니. 지금 제국의 공적이 되었는데 태평하다?”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뭐······?!”
당황한 디에네가 말을 잇지 못하자 루시아가 흐흐흐 하고 웃으며 옆에서 지켜보았다.
“전 아마 잠시 자리를 비울 것 같습니다.”
“자리를 비우다니? 이 시국에?”
“볼 일이 생겨서요.”
아드리아스에게 있어서 이런 전쟁보다 훨씬 중요한 일들이 산재해있다는 걸 모르는 디에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렇겠죠, 뭐. 공사가 다망하신 우리 선배님이신데.”
“말을 또 섭섭하게 하네.”
아드리아스는 슬쩍 웃으면서 디에네와 루시아를 향해 말했다.
“언제든지, 그리고 얼마든지 여기 계셔도 됩니다. 저도 아마 금방 다녀올 듯하니 기다려주시면 더 좋고요.”
“뭐야, 지금 가는 거야?”
“예, 이왕이면 빨리 가서 일을 끝내야죠.”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만한 일을 겪고도 바로 나가겠다는 걸까.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는 디에네와 루시아였다.
“나도 갈래!”
“이번에는 저 혼자 가겠습니다. 루나는 여기서 디에네랑 루시아와 놀아주세요. 언니잖아요?”
“응!”
단숨에 루나를 설득한 아드리아스는 웃으며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나는 그런 아드리아스의 팔을 과자 묻은 손으로 잡으며 시시덕댔다.
“난 가문에 돌아가 봐야 돼.”
“예.”
“······혹시 무슨 일이 있어도 크롬웰을 공격할 일은 절대 없게 할 거니까.”
“감사합니다. 믿을게요, 디에네.”
할 말을 마친 아드리아스는 이내 손을 흔들며 방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 묘한 침묵이 방 안을 맴돌았다.
“아!”
“왜 그래요?”
“못 물어봤어. 물어볼 게 많았는데.”
“디에네 언니, 그거 하나는 확실해요.”
“뭐?”
루시아는 과자 묻은 손을 빨더니 이내 배시시 웃었다.
“선배가 절대로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거요. 뭐, 흑마법사에다가 숨기는 것도 많지만. 적어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거야.”
“디에네 언니는 선배를 못 믿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말끝을 흐린 디에네는 이내 손을 내저었다.
“으아, 정신없어. 나 혼자서 좀 생각할게.”
“알았어요. 루나 언니, 제 방으로 가실래요?”
“응? 응!”
이내 둘마저 나가자 정말로 조용해진 방에서 디에네는 침대에 널브러졌다.
“몰라.”
정말로 모르겠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저 눈을 감아버렸다.
뒤늦게 알게 된 아드리아스의 정체는 너무나 복잡했지만 결국 말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아드리아스 본인 밖에 없었다.
복잡한 심경이 오고 가는 밤이었다.
< 360화. 그 이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