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9화. 개입과 사연, 그리고 뱀파이어 >
갑작스레 나타난 아드리아스의 존재는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그의 주변으로만 마치 다른 세상인 듯 검은 오러가 넘실거렸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제롬이 당황스러운 눈으로 아드리아스를 바라보았다. 분명 그의 등장을 기뻐해야 옳았지만 제롬은 아직 청기사로부터 들어야할 정보가 있었다.
“제롬,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제게 맡겨주십시오.”
[“아드리아스, 그게 아니라······.”]
제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렬한 마나의 폭풍이 터져 나왔다. 주변을 수놓은 수십 개의 푸른 낫이 동시에 아드리아스를 향해 쏘아졌다.
“니켈.”
서걱-!
어느새 소환된 니켈이 전방향으로 만변을 휘두르며 푸른 낫을 소멸시켰다.
[“오너라!”]
소년이 외쳤다.
그러자 아드리아스는 자신의 마나를 간섭하는 무언가를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상대의 언데드도 조종할 수 있군.’
다행히 제어권을 뺏기지는 않았으나 예상치 못했던 청기사의 능력은 아드리아스를 불안하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아드리아스는 용아병들이 주변을 정리한 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소환을 해제시켰다.
[“둘 다 멈춰라.”]
어느새 구속을 벗어난 제롬이 신체를 재생시키며 말했다.
[“난 아직 뭐가 뭔지 몰라. 들어야 한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청기사가 내 비밀을 알고 있다.”]
제롬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반드시 그 비밀을 들어야겠어.”]
그러나 그런 그의 말을 무시하듯 누군가가 움직였다. 이제는 아드리아스의 명령이 없어도 자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된 니켈이었다.
-주군의 위험을 그대로 둘 수는 없는 일.
성대가 생긴 니켈이 오랜만에 의견을 피력했다.
단숨에 청기사를 향해 달려간 니켈은 주변을 부식시키는 힘도 무시한 채 검을 휘둘렀다.
끼이이익-----!
청기사도 애초에 제롬의 말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는 듯 니켈의 공격을 막아내며 계속해서 유령들을 불러냈다.
[“오너라!”]
이내 지금까지 모인 모든 유령들이 뭉치며 거대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어둑시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오관이 중얼거렸다.
거대한 형상은 이내 3개의 삐뚤빼뚤한 뿔이 달린 반투명한 괴물이 되었다.
“니켈!”
아드리아스는 곧바로 니켈에게 어둑시니를 맡겼다.
‘그대로 놔두면 계속해서 어둑시니를 만든다. 한 마리만 해도 강력한 어둑시니를 끝도 없이 만들어내는 능력. 그러니 어둑시니가 더 생기기 전에 죽여야 한다.’
다행인 것은 원래였으면 시신이 많은 곳에 소환되어야 하는 청기사가 전혀 뜬금없는 장소에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도 어둑시니는 이제 고작 1개체였다.
[“청기사! 어서 말해라! 도대체 나는 뭐고, 너는 뭐지? 내가 정말로 너의 형인가!”]
특수기술의 사용도 염두에 두며 곧장 움직이려던 아드리아스는 제롬의 말에 제동이 걸렸다.
“형?”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던 아드리아스는 다시 한 번 제롬을 향해 물었다.
“형이라니요?”
[“청기사가 나를 형이라고 불렀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에 아드리아스도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콰앙!
그 순간에도 니켈과 어둑시니가 싸우는 소음으로 거리가 물들었다. 보스 몬스터나 마찬가지인 어둑시니를 상대로도 우위를 점하고 있는 니켈을 보며 아드리아스는 청기사를 향해 말을 걸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군. 적기사가 정말로 네 형인가?”
게임에서는 없던 설정.
아드리아스는 이번 묵시록의 기사 에피소드가 무언가 뒤틀렸다는 걸 눈치 챘다.
[“너한테 말하지 않을 거야. 어차피 이 세상만 멸망시키면, 형은 다시 돌아올 거야.”]
소년과 같은 외모 그대로의 인격이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서 뭔가가 정말로 숨겨져 있음을 직감한 아드리아스가 얼굴을 굳혔다.
“당신들, 처음부터 묵시록의 기사들이 아니었군요.”
[“······.”]
[“그게 무슨 소리지? 묵시록의 기사? 그건 또 뭐냐.”]
제롬이 마치 배신당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드리아스를 향해 외쳤다.
[“뭘 알고 있는 거냐! 왜 말해주지 않았던 거야!”]
“······고대 기록에서 읽었던 기억이 조금 전에 떠올랐습니다. 세상이 혼란스러워질 때 찾아온다는 4명의 말을 탄 기수들. 첫째는 정복의 백기사, 차례로 전쟁의 적기사, 기근의 흑기사, 죽음의 청기사. 딱 당신들 이야기지요.”
[“아아······. 그리고? 그 다음은? 우리는 왜 등장하는 거지?”]
“멸망을 위해 존재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4명의 기수가 모두 모여야 한다고 하죠. 그러니 이미 2명이 죽은 시점부터 멸망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아드리아스가 단정을 짓듯 청기사를 보며 말했다.
“이미 끝났다, 청기사.”
[“상관없어. 나 혼자라도 이 세상을 멸망시킬 거야.”]
“대체 왜 그렇게까지 멸망에 집착하는 거지. 네가 형이라 부르는 적기사도 이미 이곳의 생활을 만족해하는데······.”
[“달라!”]
청기사가 울부짖듯 소리 질렀다.
[“우리는 반드시 돌아갈 거야!”]
돌아간다고?
아드리아스는 청기사의 말을 되뇌며 그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돌아간다는 건 원래 있던 곳인가?”]
제롬이 물었다.
그러나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제 다 상관없어.”]
제롬은 비척비척 일어나며 말했다.
[“내 결심은 변하지 않는다. 난 이곳을 지키겠어. 궁금한 게 많지만 고작 내 호기심에 사람들이 죽는 건 안 되지.”]
[“어째서······.”]
비통한 소년의 음성이 파르르 떨렸다.
[“청기사, 내 동생일지도 모르는 자여. 미안하다.”]
제롬은 그 말을 끝으로 살기를 드러냈다.
이전처럼 그의 검에 불이 피어나며 마치 모든 번뇌를 태우듯 일렁였다.
콰작!
우우우------!
동시에 니켈이 상대하고 있던 어둑시니도 부서졌다. 산산조각 나서 흩어지는 영혼들이 귀곡성을 흘리며 퍼져나갔다.
[“형······.”]
청기사는 흐르지 못하는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항상 자신만을 지켜주던 사람.
언제나 곁에 있어주고 챙겨주었던 사람.
행복했던 과거들이 그의 뇌리를 스쳐지나가며 아련하게 흩어졌다.
[“내가······.”]
소년은 포기할 수 없었다.
[“내가 다시 모든 걸 되돌려놓을게.”]
소년은 자신의 형과 과거의 행복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미안해. 조금만 자고 있어줘.”]
후웅-!
스산한 기운이 소년을 중심으로 재차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아드리아스는 인상을 구기며 니켈을 조종했다.
‘폭주.’
원래 있었던 청기사의 능력으로 저 능력이 발동되기 전에 처리하는 게 사실 베스트였다.
하지만 아드리아스도 둘 사이에 있던 비사를 알고 싶은 마음에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제 끝이다.”
폭주까지 사용했으면 이제 앞뒤 잴 것이 없었다. 어쩌다 이들이 묵시록의 기사가 되어 이 세상에 왔는지 듣고 싶었지만 마치 제약이 있는 듯 속 시원하게 말하지 못하는 청기사를 보며 아드리아스가 움직였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낫이 하늘을 거릴 듯 우두커니 떠올랐다. 마치 초승달처럼 빛나는 그 낫은 달려오는 아드리아스를 향해 내리 찍어졌다.
콰아아앙------!
그러나 그런 낫의 움직임을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옆에 있던 니켈이 나타나 대신 막았다.
그 사이에 아드리아스는 극한으로 올라간 신체 능력치를 활용하며 청기사에게 다가갔다.
“사연 없는 사람은 없지.”
아드리아스는 청기사의 면전에 대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게 누군가를 헤칠 권한을 주지는 않아.”
[“오너라.”]
마치 아드리아스의 말을 무시하듯 나직하게 말한 청기사가 조랑말의 앞굽을 들었다.
캉!
불똥이 튀며 갈락슈르와 앞굽이 부딪혔다.
하지만 아드리아스는 무심하게 몸을 옆으로 돌리며 검을 비틀었다.
그의 천재급 검술 재능은 검 앞에 존재하는 그 어떤 방해도 용납하지 않았다.
콰직!
조랑말의 옆구리가 터져나가며 사기(死氣)가 튀어나왔다. 그러나 아드리아스는 전혀 개의치 않아하며 오히려 품으로 더욱 파고 들었다.
[“아아······.”]
마음을 다 잡았다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발걸음을 뗄 수 없었던 제롬은 그 광경을 망연자실하게 지켜보았다.
[“너도! 너도 결국 누군가를 헤치고 그 자리에 서있는 거잖아! 나는? 나는 왜 안 되는 건데!”]
푸슉!
어깨를 찔린 청기사가 발악했다.
그러자 아드리아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말이 맞아. 그래서 난 강해지려고 노력했지. 이 세상에서는 오직 힘만이 정의니까.”
[“궤변이야.”]
“뭐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난 살아남고······.”
콰직!
“넌 사라지면 그만이니까. 나한테는 내 주변 사람들이 최우선이거든.”
잔인한 아드리아스의 선고가 주변으로 울렸다.
어느새 성 밖의 일을 마무리 짓고 온 에반과 살렘이 조용히 지켜보았다.
[“형······.”]
몸이 꿰뚫린 청기사가 아련하게 제롬을 바라보았다.
[“같이 돌아가기로 했잖아. 약속대로 여기만 멸망시키면 우리 다시 행복하게 살 수 있었잖아.”]
[“청기사.”]
제롬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지만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형이라도 행복하게 살아줘.”]
아드리아스는 폭주를 했음에도 별다른 움직임 없이 반항하지 않는 청기사를 보며 이를 깨물었다.
저항 없는 상대를 공격한다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다.
서걱!
그때 말없이 나타난 니켈이 청기사의 수급을 갈랐다.
-주군의 고민을 해결하는 것이 본인의 소명.
그러더니 스스로 소환을 해제하며 사라졌다.
[“······뭐가 옳았던 거지.”]
제롬이 씁쓸한 목소리가 폐허가 된 풍경 사이로 아스라이 스쳐 지나갔다.
**
너무나 찝찝한 전투였다.
차라리 성 밖에서 토벌대를 상대하는 게 훨씬 나았을 정도.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었다.’
청기사의 마지막 말을 유추해보자면 누군가와의 거래를 통해 이곳을 멸망시키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듯했다.
아마 그 거래의 상대는 초월자겠지.
“아드리아스 크롬웰.”
루나의 목소리였지만 말투가 전혀 루나 같지 않은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오관인가.
“그대는 잘했다.”
“예.”
나도 알고 있다.
어떤 처절한 사연이 있었더라도 내 선택에는 변함이 없었을 거다.
내게는 여기 있는 사람들이 그런 사연들보다 훨씬 소중했으니까.
스스스스-
“또 손님이 찾아왔군.”
살렘이 주변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뱀파이어.”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주변에서 기척만 흘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쓰러져 있는 이자벨을 확인하고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이자벨이 부른 건가.’
아마 도움을 위해 부른 듯했는데 이미 청기사는 소멸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님.”
뱀파이어 중 하나가 슬쩍 모습을 드러내며 고개를 숙여왔다.
“이자벨 님의 요청을 맡고 찾아왔습니다.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 끝났습니다.”
“그래 보이는군요.”
뱀파이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자벨을 바라보더니 자리를 뜨지 않고 서있었다.
“용무가 남아 있습니까?”
“안젤라 님께서 언제쯤 방문하실지 확답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이자벨의 수하가 아니었습니까?”
“겸사겸사 안부 인사 정도는 전해주기도 하지요.”
루시펠 가문.
언젠가는 죄악 중 하나인 ‘색욕’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곳이었다.
“곧 가겠습니다.”
“곧 이라 하면······?”
“이곳이 정리가 되는대로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뱀파이어들은 이내 나타났을 때처럼 은밀하게 사라졌다.
찝찝하긴 하지만 묵시록의 기사들도 끝났으니 가볼 만한 시기였다.
‘결국 죄악을 모두 모아야 하니······.’
3년 동안 미뤄뒀던 일들을 처리해야 할 때였다.
다음 행선지는 루시펠이었다.
< 359화. 개입과 사연, 그리고 뱀파이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