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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 특성으로 최강 네크로맨서-349화 (349/415)

< 349화. 정복의 백기사 >

팔레스코 평원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제국의 남부는 온통 전쟁의 기운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지나가는 곳곳마다 피난 중인 행렬이 보였고 도시였을 장소가 요새가 된 풍경은 삭막하기 그지 없었다.

“이상해.”

피난 행렬과 멀찍이 떨어져서 걷던 도중 비비안이 중얼거렸다.

“병사들도 도망치고 있어.”

“그러네요.”

안 좋은 예감은 어째서 항상 빗나가지 않는 걸까. 귀족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이 나부끼는 게 보였지만 그들이 향하는 곳은 전방이 아닌 후방 쪽이었다.

“페리스코 평원 근처에 있는 도시에서 에반의 수하와 만나기로 했으니 무슨 일이 생긴 건지는 그때 듣도록 하죠.”

뭐, 들으나 마나 저 꼬라지들을 보아하니 묵시록의 기사가 이미 나온 듯했지만.

‘서둘러야겠다.’

첫 번째 묵시록의 기사가 나타나는 팔레스코 평원은 그저 평범한 평원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그 근처의 가문들이 특별했다.

제국 남부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들, 바로 세레나와 크리스의 가문들이었다. 게임에서는 그 둘의 가문 근처에서 일어난 멸망급 에피소드의 전초가 당연하게 느껴졌지만 현실이 된 지금은 너무 공교롭다고 해야 할까.

“조금만 더 빨리 가죠.”

나는 타고 있던 말을 빠르게 몰며 달렸다.

루나는 내 뒤에 타고 있었고 비비안은 별 말 없이 내 속도에 따랐다.

“친구! 누가 오는데?”

피난 행렬과 반대 방향으로 가다보니 일부러 멀찍이 떨어져서 이동하고 있었는데 루나의 말대로 누군가가 말을 타고 다가오고 있었다.

“멈춰라! 어디로 향하는 거지?”

귀족가의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기사였다. 워낙 귀족 가문이 많았기에 어디 가문인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굳이 알 필요는 없겠지.

“팔레스코 평원으로 가고 있습니다.”

“팔레스코! 용병들인가?”

“그렇습니다.”

“그러면 다시 되돌아가는 게 좋네. 어차피 그쪽에서는 더 이상 용병을 모집하지 않을 거야.”

오지랖이 넓은 기사군.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 같은데 에반의 수하를 만나기도 전에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괴물이 나타났네. 그런데 전혀 평범한 괴물이 아니야.”

기사는 실제로 본 적은 없고 자신도 이야기만 들었다며 대충 괴물의 특징을 설명해주었다.

“거대한 활로 정체불명의 화살을 쏘아대는데 그 크기가 궁전의 기둥만 하다고 들었어. 그 육신은 칼과 마법도 들지 않고 독까지 퍼트리는데 외형은 하얀 말을 탄 거인 기사라네.”

정확히는 독이 아니라 역병이었다.

역병을 퍼트리는 정복의 하얀 기사.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등장해주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제 막 소환이 되었다는 것일까. 포트리온에서 나오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손 쓸 도리조차 없었을 거다.

“처음 들어보는 괴물이군요.”

“상부에 보고를 올린 결과 초인들이 직접 나선다고 하니 전쟁은 잠시 멈추고 모두 후퇴를 하는 중이네. 그러니 자네들도 이만 돌아가게나.”

“충고 감사드립니다.”

기사는 내 감사 인사에 손을 흔들며 다시 행렬에 따라붙었다. 어찌됐든 묵시록의 기사가 소환된 건 확실하니 얼른 가서 처리해야겠다.

“어떻게 할 거야?”

내 목적을 헤이겔로 알고 있는 비비안과 루나가 나를 바라봤다.

‘헤이겔도 문제군. 생각해보니까 이미 묵시록의 기사가 소환됐다면 헤이겔이 평원에 남아있을까?’

헤이겔도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지는 네임드 캐릭터 중 하나였다. 게임을 처음 플레이했을 당시에는 챕터 보스로 나올 줄 알았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인물.

어쩌면 묵시록의 기사를 소환하고 사라지는 인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내 목표는 묵시록의 기사다.’

묵시록의 기사들은 하나하나가 보스급 몬스터로 4마리가 모두 소환되면 세상이 멸망한다. 다행이도 녀석들은 차례대로 소환되기에 4마리가 모이기 전에 먼저 소환된 녀석들을 하나씩 처리하기만 하면 되었다.

“일단 가겠습니다. 어쩌면 나타났다는 그 괴물이 헤이겔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겠군요.”

“확실해! 분명 헤이겔이 만들거나 불러낸 괴물일 거야!”

루나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위험을 느꼈다기보다 오히려 기대하고 있는 듯한 눈치에 포트리온에서 겪은 일을 잊은 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우선은 에레스티얼로 가겠습니다.”

루이스에게 듣기로 세레나와 크리스 모두 가문에 있다고 들었다. 어쩌면 둘을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

“난 남겠다.”

“아버지!”

고성이 오가는 방 안에는 에레스티얼 가문의 모든 혈족들이 모여 있었다. 유서 깊은 검술가문답게 방계 혈족도 많은 가문이라 방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다시 말하지만 난 에레스티얼의 가주로서 이 땅을 저버릴 수 없다. 실랑이는 그만하고 어서 떠나라.”

“숙부님, 아버지 좀 제발 설득해주십시오. 이러다가 다 죽습니다.”

조카의 부탁에 곤란한 표정을 지은 에레스티얼 후작의 동생이자 기사단장인 드루 에레스티얼은 자신의 형을 바라봤다.

“형님······.”

“누가 형님이냐! 어서 이놈들을 데리고 떠나라고 말했다. 가주의 명을 어길 셈이냐?”

“영지는 나중에 와서 다시 수복하면 됩니다. 고작 몬스터 하나입니다. 곧 초인들이 모여 토벌을 할 것이니 그때까지만 잠깐 휴식을 취하고 온다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은 어떤 시기인지 모르나? 며칠 전까지만 해도 피가 튀기는 전장이 한 치 앞에 있었다. 우리가 자리를 떠나고 나면 남부 연합 측에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겠나?”

“그 남부 연합도 지금 저 괴물 때문에 물러나지 않았습니까! 이제 그만 고집을 내려놓으십시오.”

“감히 가주인 내게 명령을 하는 것이냐!”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다툼에 사람들의 얼굴이 점점 썩어 들어갔다. 당장 도망쳐도 급한 상황에서 시간만 점차 타들어가고 있었다.

쾅!

“각하! 괴물이 영지를 향해 북상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들었느냐? 어서 나는 놔두고 떠나거라! 그리고 내가 죽게 되면 후계는 첫째인 토미가 물려 받거라.”

“형님!”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기에 드루는 결정을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데리고 떠나죠.”

“숙부님!”

드루는 조카들의 말을 무시하며 곧바로 함께 있던 기사들에게 명했다.

“가주님의 혈육들을 최우선으로 호위한다. 바로 떠나지.”

“예!”

그의 명령에 드디어 떠날 명분이 생긴 방계혈족들은 화색을 띄운 채 부랴부랴 방을 나서기 시작했다.

“자, 어서 가자.”

“숙부님, 안됩니다. 아버지를 두고 갈 수 없습니다!”

“그럼 너도 남아서 개죽음을 당하겠다는 소리냐?”

“······.”

“수백, 수천의 병사들을 혼자서 죽여 버린 괴물이다. 그런 괴물을 남아서 감당할 수 있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드루의 말에 계속해서 애원하던 장남이 말을 잇지 못했다. 이미 요 며칠 동안 갑자기 나타난 괴물을 죽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지만 무리였다.

여기 있는 인원 중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저도 남을게요.”

그때 지금까지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던 세레나가 나섰다.

“세레나, 지금은 그런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다.”

“고집이 아니라 죽음을 각오한 거예요.”

세레나의 말에 드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에레스티얼 후작과 가장 닮은 성격을 지닌 막내딸, 세레나는 그로서도 설득하기 버거운 상대였다.

“그렇다면 저도 남겠습니다.”

“저도······!”

이내 후작의 자식들이 그녀의 뒤를 따라 전부 남겠다고 말하자 드루는 울분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멍청한 놈들이! 그냥 있다가는 개죽음이라는 말이 우습게 들린 거냐!”

드루의 말에 세레나가 차분히 대응했다.

“우리는 에레스티얼의 후손들입니다. 감히 적을 앞에 두고 등을 내보일 수는 없지요. 한 번이라도 도망치면 그건 씻을 수 없는 오욕으로 남을 겁니다.”

“그 오욕도 살아남아야 느낄 수 있는 거다. 죽고 나서 명예가 지켜지면 그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명예가 없는 귀족은 귀족이 아닙니다.”

명문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굳게 묻어나는 말에 드루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이 멍청하기 짝이 없는 녀석들을 봤나. 부단장!”

“예, 단장님.”

“우리는 두고 너희들끼리 가라.”

“예?”

“두 번 말하지 않겠다. 너희는 여기서 빠져나가는 인원들을 호위해라. 명심해라. 이건 도망치는 게 아닌 임무다.”

드루의 말에 기사단의 부단장은 황망한 얼굴을 해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에레스티얼 각하, 드루 단장님. 반드시 임무를 수행하고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돌아올 때는 초인들을 대동하고 와라. 너도 개죽음 당할 생각이냐?”

드루는 빈정거리더니 이내 부단장의 등을 거세게 밀어냈다.

“어서 꺼져라!”

이내 방 안에는 에레스티얼 후작과 그의 동생인 드루, 그리고 자식들만이 남았다.

“하여간 이놈의 집안은 대가리까지 근육으로 가득 차서······.”

“너까지 죽을 필요는 없다, 드루.”

“그 입 좀 다무소. 이제 와서까지 가주 노릇을 할 생각이오?”

드루의 말에 에레스티얼 후작은 화를 내기 보다는 처량하게 웃어 보였다.

“미안하네. 모두 미안해.”

“미안한 줄 알면 고집 좀 꺾지 굳이 죽겠다고 하니, 원.

드루의 비꼼에 결국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곧 마지막이 될 걸 알았지만 비참한 마음으로 죽고 싶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세레나, 네가 이 오라버니들을 전부 죽이는구나.”

“그럼 구차하게 살아가려고 했어?”

“에휴, 넌 인마 말을 해도 예쁘게 할 수 있는 걸 마지막까지 그리 말하냐. 이 오라버니가 많이 섭섭하다.”

“됐고, 검이나 준비해. 여기서 그냥 죽을 생각은 아니지?”

세레나는 검을 들어 보인 뒤 이내 힘차게 방을 나섰다. 그녀가 성벽으로 향한다는 걸 눈치 챈 사람들은 이내 무장을 주섬주섬 챙기며 따라나섰다.

날이 밝고 있었다.

왼쪽에서부터 떠오르는 태양이 성벽 위에 선 세레나를 눈부시게 비추고 있었다.

‘이렇게 마지막을 맞이할 줄이야.’

세레나는 저도 모르게 피식하며 웃었다.

이렇게 끝날 줄 알았으면 루이스, 아니 하다못해 바로 근처에 있는 크리스에게라도 인사를 하면 좋았을 걸 싶었다.

“선배님도 돌아오셨다는데 아쉽네.”

떠오르는 얼굴들 중에서 문득 3년이나 못 본 은인의 모습도 생각났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짐작했지만 갑자기 돌아온 이 시대의 풍운아. 비록 제국과 척을 진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감사인사라도 했어야 했는데······.”

후우웅-

저 멀리서 거대한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듣던 대로 거인의 형상을 한 새하얀 기사가 백마를 타고 나타났다.

아직 형체만 간신히 보일 정도로 멀었지만 피부가 저릿할 정도로 느껴지는 기운에 소름이 돋았다.

“초인들을 부른 이유가 있구나.”

마침 세레나의 곁에 선 에레스티얼 후작이 중얼거렸다.

“그렇네요.”

“후회되지 않느냐?”

“아버지를 가장 닮았다는 자식이 바로 저예요. 그런 제가 후회를 하겠어요?”

세레나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주변으로 나머지 사람들도 도착하며 여명이 트는 모습을 보았다.

“죽기 딱 좋은 시간이네.”

“그런 시간이 어디 있냐, 바보야.”

“뭐? 너 형한테 말꼬라지가 그게 뭐야.”

“죽는 상황에 형 대접을 받고 싶어?”

“이 바보 오라버니들아, 여기까지 와서 싸우고 싶어?”

“푸하하하!”

한 차례 웃음을 터트린 에레스티얼 가족은 이내 진지해진 눈빛으로 다가오는 기사를 바라봤다.

“와라!”

“오오오!”

동이 완전히 텄다.

그와 동시에 기합을 내지르며 전의를 불태운 그들의 시야에 무언가 이상한 게 잡혔다.

“저게 뭐지?”

그리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검은 색의 날개가 세상을 덮었다.

쿵!

“어?”

“뭐야······.”

순식간에 벌어진 일.

갑자기 나타난 검은 날개를 단 자와 특이한 외형의 검사가 검을 휘두르자 거인이 쓰러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모두가 당황하고 있을 때, 세레나는 놀라움으로 굳은 얼굴을 한 채 입을 틀어막았다.

‘설마······.’

검은 날개가 사라지고 거인을 쓰러트린 자가 성벽을 돌아보았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인물.

아드리아스 크롬웰이었다.

< 349화. 정복의 백기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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