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화. 나비 효과 >
5년 만에 보는 것 같은, 그러나 전혀 반갑지 않은 얼굴이 익숙한 미소를 띤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소식은 들었습니다. 고생하셨네요. 역시 제 제자님이십니다.”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제 밥줄이라 알려드릴 수는 없군요. 하하.”
태연한 낯짝으로 말하니 할 말을 잃게 만든다.
하여간 음흉하기 짝이 없는 사이코패스였다.
“공격하지 않는 걸 보면 절 죽이러 오신 것 같지는 않고······.”
“죽이다니요! 제가 제자님을 왜 죽입니까.”
그때 가만히 지켜보던 비비안이 검을 뽑았다.
“빨리 용건을 말해라.”
“어이쿠. 이거, 이거 무서워서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겠군요. 알겠습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베리얼의 시선이 루나에게 슬쩍 닿았다가 떨어졌다. 설마 루나한테 용건이 있었던 건가?
“최근, 아니 꽤 오래 전부터 제가 개인적으로 연구를 하던 주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마법사들이 관심을 가졌던 주제죠.”
그의 시선이 이제는 대놓고 루나에게 향해 있었다.
“맥스웰도 그 중 하나죠.”
“그 주제가 초월자입니까?”
“그렇습니다.”
베리얼이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황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무인이라면 그 누구보다 강한 신체와 무력을, 마법사라면 세상의 진리에 닿을 지식과 마법을······.”
“루나를 노리시는 거면 잘못된 선택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베리얼과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단순히 강하기만 한 게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생각과 움직임을 보이기에 적이 된다면 상당히 까다로운 인물이었다.
“아닙니다. 물론 관심이 없다면 거짓이겠지만 굳이 제자님과 척을 질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거든요.”
“그렇다면?”
“헤이겔을 찾고 있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건 또 어떻게 안 거야.
하여간 기분 나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놀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전 이미 맥스웰과 헤이겔이 공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제자님의 다음 목표가 헤이겔이라는 걸 자연스레 깨달은 것뿐이니까요.”
“숨길 것 없겠죠. 맞습니다. 헤이겔을 찾을 생각이었습니다.”
“헤이겔의 위치, 제가 알고 있습니다.”
베리얼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목표도 맥스웰과 그리 다르지 않았죠. 결국 초월에 관한 연구니까요.”
“그래서 제게 원하는 게 뭡니까?”
“위치를 알려주는 대신 헤이겔을 죽여주셨으면 합니다. 어차피 그럴 생각이셨겠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왜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건지, 그리고 굳이 헤이겔을 내가 처치했으면 하는지.
“당신은 제 예상보다 강했습니다. 아니, 강해졌다고 하는 표현이 올바를까요? 어찌됐든 맥스웰까지 이긴 당신이기에 헤이겔도 처리하실 수 있겠죠.”
“직접 나서지 않는 겁니까?”
“굳이요? 헤이겔 정도의 고위 마법사와 싸우는 것은 저로서도 큰 위험부담이 있습니다. 대신 싸워줄 사람이 있는데 그럴 필요는 없죠.”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솔직히 헤이겔의 위치를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일 뿐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베리얼의 말대로 헤이겔은 어차피 쓰러트려야하는 대상이었지만······.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네.’
헤이겔의 계획은 이미 알고 있었다.
묵시록의 4기사를 소환해내는 게 그의 역할이겠지.
그렇다면 베리얼은?
“헤이겔이 죽으면 학부장님한테도 이득이 있는 겁니까?”
“하하, 전 이제 학부장이 아닙니다. 질문에 답해드리자면 글쎄요. 뭉뚱그려서 말하자면 그의 연구를 훔칠 생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죽어주는 편이 제게 이롭겠죠.”
역시 사이코패스 같은 발상이었다.
이제는 강해져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이번 베리얼과의 만남이 전혀 다른 형태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위치만 말해주시는 겁니까?”
“뭣하면 같이 가줄 수도 있죠. 우리 제자님께서 바라신다면.”
나는 베리얼의 속내를 조금이라도 파악하기 위해 그를 살폈으나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냥 위치만 알려주시죠.”
“좋습니다. 잘 생각하셨어요.”
그가 뭘 꾸미고 있는지는 솔직히 묵시록의 기사들보다는 중요치 않았다. 당장은 급한 불부터 끄고 생각해볼 문제지.
“헤이겔은 지금 제국 남부에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치열한 전장인 팔레스코 평원에 있죠.”
팔레스코 평원?
어쩌면 이미 늦은 걸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팔레스코 평원은 첫 번째 묵시록의 기사인 ‘정복의 하얀 기사’가 등장하는 장소였으니까.
‘등장 시기를 특정하지 못해서 일단 헤이겔의 위치부터 찾으려고 한 건데······.’
일단은 가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헤이겔이 위치한 장소를 특정하는 걸 보니 베리얼의 능력이 점점 더 의심스러워졌다.
“팔레스코 평원에 있다는 확신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셔야 의심 없이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한 번 떠보자 베리얼의 미소가 어쩐지 서늘하게 느껴졌다. 슬슬 한계인가?
“증거라······. 죄송하지만 그런 건 없습니다. 믿지 않으셔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요. 다만 확실한 것은 헤이겔의 죽음을 그 누구보다 바라는 게 저라는 사실입니다.”
베리얼을 그 말을 끝으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더 이상 알려드릴 정보도 없고, 오랜만에 제자님의 얼굴도 보았으니 전 이만 물러나보겠습니다.”
“이렇게 가시는 겁니까.”
“당신이 제 말을 믿고 팔레스코 평원에 갈 거라는 걸 전 확신합니다.”
베리얼이 씨익 웃어보였다.
“의심이 많으니 오히려 직접 가서 확인해보겠죠.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요.”
“묘하게 누군가가 떠오르는 말을 하네요. 혹시 베리얼, 당신도 맥스웰 중 일부입니까?”
“맥스웰 중 일부? 그건 또 뭐죠?”
베리얼은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눈초리로 내게 되물었다. 하도 행동거지가 수상하니 베리얼도 맥스웰 중의 하나가 아닐까하는 의심이 생겼었다.
잠시 그의 호흡이나 맥박, 흘리는 땀의 양과 동공의 수축 등을 살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맥스웰을 쓰러트린 활약상을 언젠가 꼭 듣고 싶군요. 지금은 바빠서 가보지만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는 부디 들려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베리얼은 새겨진 회로를 운용해 순식간에 늪지대 밖으로 벗어났다.
‘뭘 노리고 있는 걸까.’
게임 속에서는 아카데미에 묶여 있었던 인물이라 크게 신경 써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신경이 쓰이게 만드네.
안 그래도 생각할 게 많은 시기인데 말이야.
“아드리아스, 갈 거야?”
비비안이 검을 다시 집어넣으며 물어왔다.
베리얼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기분이었지만 실제로 첫 번째 묵시록의 기사가 등장하는 장소가 팔레스코 평원이라 안 갈 수도 없었다.
“예. 갈 겁니다.”
“알았어.”
비비안은 딱히 의견을 내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됐으니 이제 루나를 어떻게 하느냐인데······.
“루나, 영지에는 언제 돌아올 거예요?”
“크롬웰?”
“예.”
루나는 팔짱을 끼더니 이내 내 주위를 서성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시선을 돌리자 비비안이 홀린 듯 루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나도 친구 따라가면 안 돼?”
“놀러가는 게 아닙니다.”
“알아. 헤이겔을 잡으러 가는 거잖아.”
순간 루나의 표정에 살기가 드리워졌다.
“헤이겔이 함정에 빠트려서 엄마도 잃고 친구도 죽을 뻔했어. 복수를 해야지.”
생각해보니 나는 멸망급 에피소드를 막기 위해 움직이는 거지만 루나로서는 확실한 명분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루나가 안전한 곳에서 얌전히 있기를 바라지만 강제할 수는 없겠지.
“루나가 바란다면······.”
“그래도 친구가 말린다면······.”
말이 겹친 우리는 서로를 멍하니 바라봤다.
“안 말려?”
“말리고 싶죠. 루나도 저를 잃을 뻔했지만 반대로 제가 루나를 잃을 뻔도 했으니까요. 헤이겔을 잡는 일은 위험할 겁니다.”
그때 비비안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내가 둘 다 지킬게. 그러니까 괜찮아.”
“오오? 비비안~ 멋있는데에?”
루나가 장난스레 말했지만 그 모습도 귀여웠는지 비비안의 눈동자가 루나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럼 나는 비비안을 믿을게!”
“따라온다는 뜻이죠?”
“응!”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묵시록의 기사들이 가진 약점은 모두 파악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강해진 내 힘을 믿었다.
‘타락한 날개랑 진화한 니켈이면 충분하다.’
게다가 첫 번째 장소인 팔레스코 평원은 격렬했던 전쟁으로 인해 시산혈해가 이루어진 곳.
네크로맨서의 진가를 드러낼 수 있는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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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습니다, 폐하.”
“······드디어.”
기계 같은 표정의 자비에가 보고를 올리자 황제의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스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그는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재상을 불러라.”
“예.”
이내 자비에가 사라지고 옥좌에 혼자 남은 황제가 습관처럼 검을 두드렸다.
“자, 헤이겔. 네가 원하는 대로 판을 벌려주었다. 잘 받아먹고 있느냐.”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는 이내 자비에가 찾았다는 무언가를 떠올렸다. 애초에 그것에 대한 정보 때문에 그가 지금껏 조급해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인내심은 아드리아스와도 연관이 있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녀석의 소식이 포트리온에서 끊겼을 때까지만 해도 황궁에 남아나는 물건이 없을 정도로 분풀이를 했다. 그로 인해 죽어나간 시종들과 피붙이들만 수십.
“하지만 이제 너도 필요 없다.”
기분 좋은 날이었다.
일말의 가능성으로 인해 마음을 졸여왔던 것도 이제는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다.
물론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안심하기에 일렀지만.
“폐하! 헥토르 카자프 공작이 도착했습니다!”
“들어와라.”
얼마 있지 않아 곧바로 도착한 헥토르가 고개를 조아리며 황제의 앞에 섰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계획을 실행할 때가 됐다.”
“계획······말씀이십니까?”
헥토르가 말을 하면서도 무슨 계획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씬에 연락을 넣어라. 루시펠에도 정보를 흘리고.”
“버, 벌써 말입니······.”
스겅!
보랏빛의 검기가 헥토르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헥토르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도 못하다가 이내 느껴지는 통증에 이를 물었다.
“끄윽!”
바닥에는 떨어져 내린 그의 귀 한쪽이 처량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짐이, 하라면, 하는 거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헥토르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런 헥토르를 보며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왔다.
“헥토르, 짐이 아무것도 모를 줄 알았나?”
“예?”
“그대가 불경한 마음을 한 쪽으로는 품고 있었음을 짐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요새 1황자 쪽과 사이가 좋더군.”
“아, 아닙니다. 폐하.”
헥토르는 귀가 잘려나간 고통도 잊은 채 고개를 젓다가 다시 푹 숙였다. 그러나 그걸로도 모자라다고 느꼈는지 이내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신, 헥토르 카자프! 감히 폐하께 불충한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옵니다!”
“헥토르, 짐은 이제 이곳이 어찌되든 상관이 없다.”
황제는 여전히 검을 뽑아든 채 헥토르의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짐은 곧 신이 될 거다.”
꿀꺽-
헥토르는 차마 대답조차 못하고 마른침을 삼키기만 했다.
철퍽!
황제가 이내 바닥에 떨어진 헥토르의 귀를 밟아 뭉개며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헥토르, 감히 짐의 마음을 상하게는 만들면 안 되지 않느냐.”
“송구하옵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황제가 헥토르의 머리채를 잡고 들어올렸다. 그러자 헥토르는 황제와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광기에 휩싸인 그 눈은 결코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드디어 신전을 발견했다. 내가 곧 신으로 모셔질 신전 말이다.”
그는,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 348화. 나비 효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