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4화. 크롬웰 >
다그닥- 다그닥-
마나 부상 열차의 발명 이후로 귀족가의 전유물로 전락한 말 한마리가 전쟁에 힘입어 빠르게 숲길을 누볐다.
그 갈색의 명마 위에 앉은 루이스는 거의 다 도착해가는 목적지를 생각하며 고삐를 느슨하게 잡았다.
“옳지, 옳지.”
속도를 늦춘 그는 드디어 숲에서 벗어나 저 멀리 보이는 성채를 발견했다.
서부 반란군들을 견제하기 위해 마법으로 지어올린 가시 돋친 건물이 험난한 전쟁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듯했다.
“정지!”
마침 주변 정찰을 나서고 있던 병사들이 루이스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난 루이스 아트만이다. 예리치 각하의 명을 듣고 왔다.”
“충성! 예리치 각하 휘하 제 3 레인저 병단 소속 카디널입니다. 저희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부탁하지.”
말에서 내린 루이스는 병사 하나에게 고삐를 건네주며 성채로 걸어갔다. 성채에 다다르자 곧바로 내부로 소식이 전해지며 예리치 백작이 뛰어나왔다.
“허허! 예상보다 빨리 왔군! 환영하네, 루이스 경!”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고작 1년의 전쟁 경험이었지만 어엿한 기사의 분위기를 풍기는 루이스였다. 예리치 백작은 그 모습에 만족한 기색을 띠며 그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이미 그대의 명성은 아카데미 시절부터 익히 알고 있었지만 최근 들리는 소문은 대단하다는 감상을 넘어 놀랍기까지 할 정도일세.”
“과찬이십니다. 그것보다 각하, 혹 제가 이곳에서 맡게 될 임무가 무엇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거 성격이 참 급하군. 안 그래도 자네가 한 이야기 때문에 생각을 좀 해보았네.”
예리치 백작은 빠르게 걸어가면서도 시선은 루이스에게 향한 채 말했다.
“그대의 임무는 단순해. 그저 내 호위를 맡아주었으면 하네. 전장에 나설 일은 없을 걸세.”
“알겠습니다.”
예리치 백작의 말대로 걱정한 만큼의 임무는 아니었기에 루이스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부라······.’
사실 그에게 있어서 서부는 큰 의미가 없었다. 그가 반란군을 꺼리는 이유는 다른 무엇도 아닌 크롬웰의 존재 때문이었다.
약 2년 전에 서부 반란군으로 합류한 크롬웰은 서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알 사람은 다 알 듯 그것은 단지 명분일 뿐이고 모하임과의 친분은 유명했기에 당연한 수순처럼 보였다.
“근데······한 가지 물어봐도 되나?”
“성심껏 답하겠습니다.”
“어째서 그리 반란군과 상대를 하기 싫어하는 거지? 혹시 친분 있는 자라도 있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혹시 크롬웰 때문에 그런가?”
예리치 백작의 예리한 질문에 루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속내를 잘 숨기지 못하고 드러나는 루이스의 얼굴에 예리치 백작이 웃음을 흘렸다.
“어차피 그곳은 아드리아스 크롬웰의 행방이 묘연해진 이후로 별 신경도 쓰지 않는 곳일세. 모하임에 비하면 굳이 공격할 이유도, 가치도 없는 곳이야.”
“······.”
루이스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포트리온의 차원 분리는 아직까지도 수많은 워록들이 해결하려 달라붙고 있는 사건이었지만 이미 대부분의 이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뭐, 그래도 후환은 남겨둬서 좋을 건 없지.”
“그 말씀은······?”
“내일 크롬웰로 진격할 생각이네. 위치가 위치인 만큼 아무 생각 없이 서부 반란군과 싸웠다가는 크롬웰의 후방 공격이 위험해서 말일세.”
탁-
루이스는 자연스레 예리치 백작을 따라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나.”
“전······크롬웰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했지 않았나. 자네는 그저 내 호위만 하면 돼. 그뿐이야.”
예리치 백작은 기다려주지 않겠다는 듯 다시 걷기 시작했다. 루이스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결국 그 뒤를 따랐다.
**
날이 밝자마자 요새의 병력들이 성문을 열고 나왔다. 루이스는 그 모습을 예리치 백작의 옆에서 지켜보며 여전히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차피 자네가 할 일은 없네. 그리 걱정할 필요 없어. 애초에 크롬웰은 힘도 약하니 전투 자체도 금방 끝날 걸세.”
“전부 죽이실 생각이십니까.”
“반란군이지 않나.”
간단하게 답해버리는 예리치 백작을 보며 루이스는 점점 더 복잡해져가는 속을 억눌렀다.
“적어도 영지민들은 아무 잘못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 병사들은 죄가 있어서 전쟁에 참가하고 목숨을 잃나? 그렇게 따지면 한도 끝도 없어.”
냉정하게 응대한 예리치 백작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루이스 경. 자네가 아직 정치의 비정함을 겪어보지 못해서 순수한 감도 없지 않아 있지만 이제는 좀 깨달았으면 좋겠군. 우리는 이상향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살아간다네. 만약 그대의 말대로 우리가 아량을 베풀어 저들을 살린다고 하지. 그러면 어찌 되는지 아나?”
“살려준 영지민들이 뒤통수를 칩니까?”
“아니, 그게 아니야.”
예리치 백작이 손가락을 들어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은 수도 로들렌이 있는 방향이었다.
“폐하께서 날 죽일 걸세. 감히 반란군을 살려줬다는 명목으로 말이야. 그리고 내 자리는 다른 이가 대체하겠지.”
“······.”
“그리고 다른 귀족들은 그 일을 오히려 좋아할 걸세. 나눠야할 몫이 늘어나는 셈이니까. 아마 폐하께서 나서지 않아도 이곳저곳에서 날 끌어내리려 성화를 부리겠지.”
루이스는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동시에 인정했다.
자신이 아직 무지하다는 사실을.
“그렇게 상심하지 말게. 오히려 나는 그대가 더욱 마음에 드는군. 그런 순수한 마음을 가진 젊은이는 요 근래에 찾아보기 힘드니 말이야. 하하하!”
예리치 백작의 웃음과 함께 병사들이 진군을 시작했다. 목표는 앞서 말했던 크롬웰, 요새에서 고작 이틀거리였다.
백작은 이틀간의 여행 중에도 루이스의 마음을 사려 부단히 애를 썼다. 평민 출신이자 소속된 가문도 없는 유망한 기사는 그 어떤 귀족이라도 품을 들일 가치가 있었다.
“도착했군.”
크롬웰 성이 내려다보이는 민둥산에 선 예리치 백작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함께 보는 루이스도 나름의 감흥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도 마음이 불편한가?”
“그렇습니다.”
루이스는 숨김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어쩔 수 없지. 허나 공과 사는 구별해야함을 명심하게. 내가 자네에게 직접 출전하라고는 하지 않지만 맡은 바 임무는 다해야 할 걸세.”
“물론입니다.”
“어차피 자네가 나설 일도 없을 걸세. 가주도 실종된 마당에 크롬웰의 병력 자체도 별 볼 일없는 수준이니 말이야.”
땡땡땡땡--!
병력들이 코앞에 드러나자 크롬웰 영지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모습이 보이자 루이스는 시선을 살짝 내렸다.
“직시하게. 이게 전쟁일세.”
예리치 백작은 그런 루이스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루이스가 무슨 행동을 하든 전부 예뻐 보이는 백작이었다.
“각하, 준비가 전부 끝났습니다.”
마침 부장이 다가와 모든 준비가 마쳐졌음을 알려왔다.
“그래, 시작하지. 성벽부터 공략하게.”
명령이 떨어지자 그동안 편히 쉬기만 했던 마법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대부분 귀족가의 자제들이었기에 귀한 대접을 받는 이들이었다.
우웅--
휘이잉-!
마법이 하늘을 수놓았다.
10명 남짓한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광경은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어쩌면 이 마법 한 방으로 끝날 수도 있겠······.”
피피피핑!
백작의 말이 무색해지게 성벽 위로 보이지 않는 보호막이 마법들을 막아냈다.
“마법사? 크롬웰에 마법사라고?”
믿기지 않는다는 말이 나왔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은 백작은 인상을 찌푸리며 명령했다.
“어차피 물리적인 힘 앞에서는 굴복할 수밖에 없지. 쓸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마법사들은 공성병기나 제작해라. 나머지는 모두 진격!”
백작이 다시 명령하자 드디어 병력들이 이동을 시작했다. 수천 명의 병력이 민둥산에서 우르르 내려가는 모습은 위협적이었다.
“각하, 조금 이상합니다.”
“음?”
아무 의심 없이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예리치 백작은 부장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들이 겁을 먹은 기색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도 그렇지만 애초에 사람이 너무 없어 보이는군. 전부 집안에 틀어박힌 건가?”
유심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참모진은 이내 누군가를 성벽 위에서 발견했다.
“저기 에이미 크롬웰의 모습이 포착됩니다!”
“흥, 내 알기로 아무 무력이 없는 자라고 들었다. 협상이라도 하려는 건가?”
“그런 것치고는 행동이······.”
루이스는 처음 보게 되는 아드리아스의 여동생의 모습에 생각이 복잡해졌다. 에이미 크롬웰은 성벽 위에서 마치 올 테면 와보라는 듯 당당하게 서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지?’
비록 자의로 참가한 전쟁은 아니었지만 책임감은 있었다. 루이스의 갈등은 곧 책임과 은혜에 대한 갈등으로 번졌다.
스윽-
“루이스 경? 어디 가나?”
“죄송합니다, 각하.”
루이스는 도저히 못 본 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은혜를 먼저 생각하기로 했다.
‘죗값은 따로 치르더라도 선배님의 여동생만큼은······.’
그는 강화된 안력으로 볼 수 있었다.
에이미 크롬웰이 당당하게 서있는 듯하지만 어렴풋이 몸을 떨고 있다는 사실을.
무력도 없는 일반인이 대군 앞에서 저리 서있는 게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군이 살기까지 드러내고 있다면 두 말할 것도 없는 일.
“루이스 아트만! 당장 제자리로 돌아오게!”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하자 검이 날아왔다.
캉!
“루이스 아트만, 귀라도 먹은 건가. 돌아오라는 각하의 명령이 들리지 않나?”
예리치 백작 휘하의 기사가 싸늘하게 말했다.
“만약 벌을 받는다면 그건 갔다 온 이후에 받겠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기사가 강하게 오러를 뿜자 루이스의 검에도 오러가 서리기 시작했다. 찬란한 금빛 오러가 세상에 드러나자 소리를 지르던 예리치 백작도 황홀한 눈빛으로 그 황금색을 바라보았다.
“정말 이런 식으로 할 건가?”
“죄송합니다.”
루이스는 가볍게 검을 떨쳤다.
이어서 부드럽게 움직여 자신을 막은 기사를 걷어찼다.
퍼억!
“컥!”
루이스는 일수에 기사를 제압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그 모습에 다른 기사들은 그를 막을 생각조차 못하고 길을 터주었다.
“헨리 기사단장님이 한 방에······.”
“이야기로는 들었지만 정말 괴물 같은 실력이군.”
수군거리는 주변의 소음을 무시하고 이내 달려 나가려던 루이스는 갑자기 느껴지는 이상한 기운에 덜컥 몸을 멈췄다.
‘뭐지?’
목울대가 저도 모르게 넘어갔다.
식은땀이 등 뒤로 흐르기 시작하며 이 알 수 없는 기운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시선을 움직였다.
“으아아아!”
크롬웰의 외성벽을 향해 돌진하던 병사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뭐, 뭐야! 무슨 일이냐!”
“누군가가 성문 앞에 서있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듯한데······.”
누군가의 말대로 크롬웰의 외성문 앞에는 빛바랜 후드를 뒤집어 쓴 인물이 서있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난 그 인물은 그저 서있기만 할 뿐인데도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아······!”
루이스는 깨달았다.
멀리서도 느껴지는 이 기운의 주인을 이전에도 겪어봤던 사실을.
동시에 성벽 위에 있던 에이미 크롬웰도 등장한 인물을 바라보며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였다.
“서, 설마······.”
그 모습을 확인한 예리치 백작도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곳에 있던 모두가 그 인물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 344화. 크롬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