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0화. 구덩이에 도사리는 것 >
후우웅--
서늘한 바람이 주변을 휘감았다.
심층부 앞에 도착한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육망성 모양의 구덩이.
[포트리온 심층부]
저 낭떠러지와도 같은 구덩이가 바로 니바스 축제가 개최되는 심층부였다.
“와아······.”
“이건 상상 이상인데요.”
심층부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된 루나와 루시아는 도시 한 가운데에 위치한 심층부를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전 심층부라고 하길래 그냥 도시 안쪽에 있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정말로 이런 절벽이었네요. 모양도 육망성이라니 포트리온답네.”
“니바스 축제에 간다고 했을 때 조사 정도는 하지 그랬냐.”
포트리온의 심층부가 나름 유명한데도 모르는 걸 보면 확실히 루시아는 자신의 관심사 이외에는 전혀 흥미가 없는 듯했다.
“친구! 저기로 내려가는 거야?”
“예. 초대된 장소는 지하 3층의 ‘원탁’이네요.”
원탁, 쉽게 말하면 둥근 탁자였다.
하지만 그 크기가 평범한 탁자보다 훨씬 컸기에 전국에서 모여드는 워록들이 전부 둘러앉아도 좌석이 넉넉했다.
“선배.”
그때 루시아가 날 부르며 뒤를 눈짓했다.
“워록이에요.”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은 기감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루시아가 단숨에 알 정도의 워록이라면······.
“흐음?”
상대가 우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회색의 머리카락이 마치 양털과 같이 복실 거렸는데 가발을 쓴 중세 유럽 귀족을 보는 듯했다.
‘비센 마다르.’
신생 마탑인 마다르 마탑의 탑주이자 전날 마주쳤던 그레이베어 학파의 수장이었다.
“구경꾼들인가······.”
비센은 우리를 훑어보더니 루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루나 펜드래곤, 그대가 올 줄은 몰랐군. 설마 니바스 축제에 참가하려는 건가?”
"누구야?"
“허, 이 몸은 비센 마다르다. 나를 모르는 건가?”
비센이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은 뒤 이내 나와 루시아를 살폈다.
“난 그대가 워록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지만 참가 자격을 논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충고를 하나 하자면 조교는 1명만 동반 할 수 있다.”
“난 조교 없어.”
루나가 고개를 저은 뒤 나를 가리켰다.
“친구 조교야.”
“친구?”
비센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더니 이내 내 허리춤에 매인 검을 확인하고는 손뼉을 쳤다.
“아드리아스 크롬웰이로군!”
그래도 워록이라 단숨에 내가 누군지 짐작하네. 아니면 당연한 건가?
“이거, 이거. 이번 축제의 주인공을 내가 몰라봤군. 실례했네.”
“아닙니다. 저도 인사를 미처 하지 못했는데 피차일반이죠.”
“실제로 보니 더욱 젊군. 어떻게 그 나이에 워록이 된 건지 모르겠어. 아주 대단해.”
루나를 대하는 태도로 인해 첫 인상이 좋지 않았는데 내 얼굴에 금칠을 해준다. 어쩌면 이게 평범한 마법사들의 반응일 지도 모르겠다.
“저······비센 님.”
그때 비센의 옆에 있던 조교가 그의 귀에 뭐라고 소곤댔다.
“으음?”
조교의 말을 들은 비센의 눈이 찌푸려지며 이내 나를 바라봤다.
“전날에 우리 쪽의 멍청한 녀석 하나가 못 알아보고 실례를 저질렀다고?”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기에 최상급자인 비센에게는 보고가 되지 않았지만 그의 조교 역할로 따라온 마법사에게까지는 보고가 됐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편지를 보낼 거라고 협박했었으니 조금이라도 덜 혼나려고 미리 선수를 친 거겠지.
“우선 사과부터 하지. 설마 그대의 외견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바보가 우리 학파에 있을 줄은 몰랐군.”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편지는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진짜 쓸 생각이었지만 큰일은 아니었다. 그냥 기분이 좀 나빴던 것뿐이지.
“젊어서 그런지 다른 늙은이들과는 달리 시원한 성격이군. 이해해줘서 고맙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니 괜찮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훈훈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비센은 골똘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니바스 축제에는 그럼 처음 참가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가지. 심층부는 생각보다 복잡해서 초행길이면 조금 헤맬 거야.”
비센의 뜻밖의 제의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확실히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처음에 루나를 대하던 그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부담스러워하지 말게. 그대는 괜찮다고 했지만 내가 마음에 걸려서 말이야.”
거절하기 곤란했지만 그래도 따로 가기로 결정했다. 와중에 슬쩍 루나의 표정을 살펴봤지만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죄송하지만······.”
우우웅---
마나가 흔들렸다.
갑자기 느껴지는 마법의 기운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긴장을 끌어올리는 가운데, 누군가가 허공에서 나타났다.
“여기 있었군.”
“마탑주님?”
“그래, 나다.”
뜬금없이 나타난 바하트 알븐으로 인해 비센이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로들렌 마탑주님을 뵙습니다.”
“응? 비센 아니냐? 3년만인가?”
이번에는 또 무슨 수련인지 귀마개를 하고 나타난 바하트가 반갑다는 듯 말했다.
“그렇습니다.”
“잘 됐네. 다 같이 가면 되겠어.”
바하트는 워낙 괴짜라 니바스 축제도 잘 참여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의외였다.
“축제에 참여하시는 겁니까?”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게냐? 워록이 되어도 멍청한 건 변함이 없군.”
언제나와 같은 신랄한 말투가 튀어나오자 비로소 실감이 났다.
“너도 몰랐어?”
“알았으면 말했겠죠?”
로들렌 마탑 소속인 루시아라면 바하트의 참가 여부를 알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생각해보면 알지 못한 게 이해가 갔다.
“내가 누군가한테 말하고 다녀야 하나? 그것보다 이건 또 무슨 조합이야.”
바하트의 시선이 루나에게 닿았다.
“루나 펜드래곤.”
“응, 내가 루나 펜드래곤이야.”
루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바하트가 인상을 구겼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군. 그런데 어째서 함께하고 있는 거지?”
바하트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다시 내게로 향했다. 묘한 긴장감이 묻어났지만 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친구입니다.”
“친구? 치인구우?”
그래, 뭐. 어쩔 건데.
어차피 제국과는 척을 지게 되었으니 이제는 무서울 것도 없었다. 물론 아직은 명목상 제국에 걸쳐있었지만 저번 영지 습격을 이후로 제국, 아니 황궁은 완전한 적이 되었다.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아는 게냐?”
“예.”
“그 책임도 질 수 있는 거겠지?”
“물론이죠.”
내 대답에 막힘은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본 바하트는 다시 한 번 루나를 보더니 피식하고 웃었다.
“일단은 포트리온이라 봐주마. 제국의 영토였으면 넌 즉결 사살이었다.”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말만 살벌하게 하네.
나름 경고를 하는 거겠지. 밖에서는 티를 내고 다니지 말라고.
‘막시민하고 같이 있을 때는 조용하더니 신이 나셨군.’
에반과 막시민하고 북부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지. 그때는 그냥 넘어가놓고 굳이 루나에게만 뭐라하는 게 웃겼다.
“그럼 가볼까. 원탁에서 모이는 거였나?”
“그렇습니다, 로들렌 마탑주님.”
비센이 깍듯하게 바하트를 대했다.
대륙 10인에 이름을 올린 워록 중 하나라 그런지 바하트의 위상이 대단하긴 했다.
“친구······.”
심층부에 본격적으로 입장하려 할 때 루나가 내 옷소매를 잡았다.
“내가 친구한테 민폐야?”
“예?”
“어제부터 계속, 나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겼어.”
시무룩한 표정의 루나가 안쓰러웠다.
그 모습을 보니 루나도 나름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 때문에 친구가 힘들면, 나랑 친구 안 해도 돼.”
힘겹게 말을 떼는 루나를 향해 난 고개를 저었다.
“전 루나랑 억지로 친구를 하는 게 아니에요.”
“정말?”
“물론이죠. 오히려 전 루나랑 친구가 된 걸 너무나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걸요.”
나는 루나의 은백색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때 친구가 되자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으응······.”
마치 표정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푹 숙인 루나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러더니 눈가를 스윽스윽 비비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가자! 친구! 앞에 벌써 저기까지 갔어!”
눈가가 붉은 루나였지만 난 조용히 모르는 척 했다.
**
“이야, 이게 무슨 일이래! 바하트 알븐이 첫날부터 참석하다니!”
포트리온 심층부 3층.
육망성 모양의 구덩이는 다행히 입구가 존재했다. 우리는 자주 와 본 듯한 비센의 안내를 받아 무사히 원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원탁에는 이미 몇몇의 마법사들이 도착해있었는데 대부분은 이 심층부에 거주하는 디바우러들이었다.
“주둥아리 닫아라, 바이슨.”
“어이쿠, 무셔라!”
과장되게 제스쳐를 취하는 저 디바우러는 악명 높은 마법사인 바이슨 슈타인이었다.
흑마법사는 아니지만 오히려 흑마법사보다 악질인 인물이었으며 온갖 범죄와 사고를 치다 결국 포트리온으로 도망친 인물 중 하나였다.
“이야, 이거 루나 펜드래곤도 왔잖아. 오늘은 특별 손님들이 많이도 왔군.”
루나한테는 관심을 꺼줬으면 좋겠는데.
그때 디바우러 중 한 명이 나를 아는 척했다.
“오랜만이네요. 설마 이런 식으로 재회할 줄은 몰랐어요.”
말려 죽이는 비앙테.
나이가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외모는 30대 중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마녀였다.
“저도 비앙테 님을 아카데미에서 뵈었을 때만 해도 이런 식으로 포트리온에 방문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당연히 심층부에 오실 줄 알았어요. 이렇게 일찍 오실 줄은 몰랐지만. 논문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못하겠네요.”
“과찬이십니다.”
축제 시작의 알림은 정확히 정오에 이루어진다. 그 전에 미리 도착했기에 나는 주변으로부터 상당한 관심을 받았는데 바하트가 옆에 없었으면 꽤 피곤한 일이 생겼을 것 같았다.
‘디바우러도 바하트는 함부로 하지 못하니까.’
굳이 견줄 수 있는 워록이라면 아마 맥스웰뿐이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바하트에게 견줄 마법사라고 하자 루나를 불렀던 헤이겔도 떠올랐다. 실제로 둘이 붙으면 바하트가 이길 것 같았지만 워낙 감춘 게 많은 인물이라 속단할 수가 없었다.
“루나.”
“응?”
나는 루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헤이겔이 따로 말은 전하지 않았나요? 그냥 오라고만 한 거예요?”
“응!”
해맑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냥 오라고 해서 무턱대고 온 거냐.
“아, 헤이겔은 안 온대.”
“예?”
“친구가 여기 오니까 나도 가보는 게 어때? 라고 해서 온 거야. 헤이겔은 안 올 거라고 했어.”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헤이겔 본인은 참가하지 않으면서 굳이 루나를 이곳에 보냈다. 그것도 내 이름을 팔면서.
‘거기다 헤이겔은 내가 축제에 참가할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어?’
뭔가가 얽혀있음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직감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까지 느껴온 모든 찝찝함이 퍼즐로 맞춰지는 기분.
‘니바스의 선택도 예정보다 빠르게 발표했다. 그래서 원래는 이번 축제에 참여할 수 없었던 내가 참여하게 됐지.’
루나에게 내가 올 거라는 사실을 전한 헤이겔은 니바스의 선택이 축제보다 먼저 발표된다는 걸 미리 알았다는 소리다. 니바스의 선택은 맥스웰이 주관하니 둘 사이에서 이야기가 오고 간 건가?
불길했다.
맥스웰과 헤이겔의 합작이라니······함정?
“아! 아드리아스 형님!”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도중에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돌려보자 이제 막 원탁에 입장한 어느 워록의 곁에 선 푸른 머리의 젊은 마법사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케슈른?”
“이게 몇 년 만이죠? 게다가 무려 워록이라니!”
상황이 복잡해진다.
설마 플레이어블인 케슈른이 조수로 니바스 축제에 참가할 줄이야.
어느새 훤칠하게 자란 케슈른은 내가 그레이스 왕국의 암 덩어리를 처리해준 덕분인지 잘 성장한 듯했다.
‘지금이라도 축제를 벗어나려 했는데······.’
이 모든 게 함정이라면 케슈른도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함정인 걸 미리 짐작하고 있는 나만이 혹시 모를 일에 케슈른을 지킬 수 있었다.
그렇다면 최선의 선택은······.
“루시아.”
“네?”
“지금 당장 루나를 데리고 포트리온을 벗어나라.”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에요?”
“설명할 시간이 없어. 일단 루나를 데리고 나가.”
나만 이곳에 남아서 케슈른을 지킨다.
그게 내가 내린 최선의 방법.
케슈른은 다른 워록을 따라왔으니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가 없었다.
“알겠어요.”
다행히 루시아는 별다른 이견 없이 내 말을 따라줬다.
“친구, 왜?”
루나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말 그대로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정오까지 10분도 안 남았다.’
그래도 짧게 힌트가 될 만한 말은 할 수 있었기에 루나에게 설명했다.
“헤이겔이 함정을 판 것 같습니다.”
“헤이겔이?”
루나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금세 냉정해지는 그 표정을 보자 그녀도 마냥 어린애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친구는?”
“전 남아있어야 해요. 저까지 움직이면 상대가 눈치를 챌 겁니다.”
사실은 케슈른을 지키기 위함이었지만 그런 것까지 설명할 수는 없지.
“······같이 가.”
“전 괜찮습니다. 그러니 어서······.”
쿵!
심층부에 갑자기 거대한 진동이 울렸다.
“뭐지?”
“맥스웰이 꽤나 화려한 이벤트를 준비 했나 본데?”
“맞습니다, 여러분.”
원탁이라 불리는 공동에 거대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가 이벤트를 하나 준비했죠.”
맥스웰의 목소리였다.
< 330화. 구덩이에 도사리는 것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