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6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
“황송하오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난 뻔뻔하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피차 원죄에 대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인정하는 건 별개의 이야기지.
“짐을 우롱하는 것이냐.”
“황송하옵니다, 폐하.”
내가 계속 모르쇠로 일관하자 황제가 좌석에서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짐을 속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면 그것은 오판이다. 제국의 모든 눈과 귀가 짐의 것.”
툭! 툭! 툭!
황제의 허리춤에 매인 검이 유난히 시끄럽게 소리를 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동생을 살리고 싶으면 어서 원죄의 행방을 불어라.”
동생?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비비안에게 부탁을 해놓은 것이 동생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소인은 원죄라는 것이 뭔지 정말 모릅니다. 그리고 동생이라니요?”
“크롬웰 공, 그대가 그렇게 시간을 끄는 동안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나만 무언가를 꾸미고 있던 게 아니었군.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황제가 검을 두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라, 아드리아스 크롬웰.”
내가 고개를 들자 오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황제가 보였다.
“아무래도 그대와의 알량한 기싸움은 짐의 승리인 것 같구나.”
말투를 보면 내 영지에 무슨 짓을 한 모양인데······.
나는 아무 표정 변화 없이 그의 턱을 바라봤다. 눈을 마주치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에 대충 그쯤에 시선을 둬야했다.
“정말 짐작이 가는 게 없군요. 제가 감히 폐하와 기싸움이라니요.”
“케인 크롬웰.”
황제가 아버지의 이름을 입에서 꺼냈다.
“네 아버지는 흑마법사였다. 그리고 짐에게서 원죄라 불리는 중요한 물건을 훔쳐서 숨겼지.”
“······.”
“그대는 흑마법사의 자식이라는 소리야. 이제 이야기가 좀 통하나?”
정말 작정을 했군.
하지만 흔들릴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저런 반응을 보이니 안심이었다.
‘내가 원죄를 가지고 있는 걸 모르고 있다.’
아버지가 남겼던 유언대로 황제는 원죄가 흡수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사실입니까?”
“연기가 능숙하군. 그러니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거겠지.”
황제가 속지 않겠다는 듯 비웃었다.
“지금쯤 그대의 영지는 불바다가 되어 있을 거다. 영지민들은 모두 죽고 그대의 여동생도 험한 꼴을 당하겠지. 하지만 걱정 말거라. 짐이 반드시 범인을 색출해줄 테니.”
“폐하, 아까부터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말할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이 자리는 그만 끝내야겠군.”
미리 수작을 해놓은 게 있어서 자신이 있다는 말투였다.
그는 그대로 뒤를 돌아 다시 황좌로 돌아갔다.
“자비에 경, 크롬웰 백작을 별궁으로 안내하게.”
“예, 폐하.”
“별궁이라니······.”
갑작스러운 별궁의 안내에 내가 슬쩍 얼굴을 굳히자 황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나뿐인 혈육이 위급하다는 말에도 그리 멀쩡한 걸 보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거나 짐의 말을 믿지 못하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직접 보여주어야지.”
“폐하! 도대체 무슨······!”
“이왕 황궁까지 온 김에 별궁에서 편히 쉬고 있게나, 백작.”
나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나지 않으려 했지만 이내 자비에가 내 팔을 잡아 끌었다.
“왜 저를 이리 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전 그저 초인 증명을 위해······.”
“초인 증명이라······. 애초에 그대는 초인도 아니지 않나.”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자비에에게 붙들려 대전 밖으로 끌려나왔다.
동시에 근위기사들이 같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크롬웰 백작, 무력을 사용하기는 귀찮으니 이왕이면 순순히 움직여주었으면 좋겠군.”
자비에가 무표정한 얼굴로 감정 없이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 속에 감춰진 사나운 기운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절 억류하시려는 셈입니까!”
“오러 마스터 행세도 끝이다, 백작.”
스릉! 스릉!
나를 에워싼 기사들이 동시에 검을 뽑아들었다.
“두 말 하지 않겠다. 따라와라.”
자비에는 툭 내뱉고는 별궁이 있는 방향으로 앞서 걸었다.
내가 그런 그를 보며 가만히 서있자 주변에서 날카로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역시 제국의 근위기사단. 하나하나가 강하네.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이 움직이는 티를 내며 걸었다.
황궁의 부지가 넓은 만큼 별궁도 굉장히 많았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황궁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안내됐다.
“혹시라도 빠져나가려고는 하지마라. 피를 보는 건 귀찮다.”
이내 안내를 마친 자비에가 사라지고 내 곁에는 근위기사들만이 남았다.
“하아.”
일부러 크게 한숨을 내쉰 나는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이며 주변을 서성였다.
“도대체 나한테 왜······.”
혼잣말도 이따금씩 중얼거리며 시간을 축 내고 있자 이내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누구냐.”
나를 감시하던 근위기사 중 하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미카엘라 전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밖에서 들려온 대답에 근위기사들이 단숨에 긴장하는 게 보였다.
“지금 이곳에 있는 자와는 아무도 대면할 수 없음을 알리는 바이오! 부디 공주전하를 잘 다독여 물러나게······.”
벌컥!
근위기사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그 얼굴은 3공주, 미카엘라였다.
“공주전하!”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네요.”
미카엘라는 근위기사들을 무시한 채 오로지 내게만 시선을 맞췄다.
“오랜만이에요, 크롬웰 공.”
“전하를 뵙습니다.”
일단 인사를 받기는 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이었다.
공주는 계획에 없던 건데······.
뭐, 상관없나.
“다들 나가 있거라. 크롬웰 공과 독대를 할 것이야.”
“공주전하, 지금은 크롬웰 백작과 대면하실 수······.”
“어명인가?”
미카엘라가 묻자 근위기사의 답변이 궁색해졌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러면 어서 자리를 비키거라. 잠깐이면 된다.”
“저, 전하.”
“내 말을 무시하는 것이냐?”
미카엘라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말하자 결국 근위기사들이 자리를 비키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힘이 좀 있어 보이는 모습에 황실 내부의 권력 구도가 변했나 의심이 들었다.
“하아, 설마 크롬웰 공이 제 발로 이곳에 올 줄은 몰랐네요.”
모두가 나가고 단 둘이 남자 미카엘라가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동안 나름 알아봤어요. 덕분에 당신의 가문과 황궁에 얽힌 비사를 알 수 있었죠.”
“무슨 말씀이신지······.”
“크롬웰 공, 저한테는 굳이 그렇게 숨기지 않아도 돼요. 일단은 살아남는 게 중요하잖아요? 이대로 있으면 크롬웰 공은 무조건 죽을 거예요.”
이것도 황제의 수작인가.
황궁은 복마전이었다.
저렇게 말해도 결국 함정일 수도 있는 노릇이지. 애초에 미카엘라가 나한테 잘 해줄 이유도 없고.
“모하임 공작에게 연락을 받고 온 거예요. 이 정도면 저를 믿으실 만할까요?”
“전하, 죄송합니다. 지금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따라가기도 벅차서······.”
“전 완전히 황제의 반대쪽 노선을 타기로 했어요. 모하임 공작이 말해주지 않았던가요?”
자기 아버지를 대놓고 황제라 부르며 적대하는 모습이 파격적이기는 했다.
“제가 당신의 편이라는 걸 믿을 수 있게끔 더 말해볼까요? 황제는 지금 미쳤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터무니없는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재상을 포섭한 덕분에 저는 그 정보들도 전부 파악하고 있죠.”
“그게 무슨······.”
“황제가 그 미친 계획에 따라 슬슬 움직이려 하고 있어요. 만약 그리 된다면 제국뿐 만아니라 온 대륙이 혼란에 빠질 거예요.”
그래, 알고 있는 거다.
사실 게임에서는 그 이유를 몰랐는데 이게 다 황제의 계획이었다는 게 이번 생을 통해 깨달았지.
“그 첫 걸음이 바로 당신이에요. 아마 당신이 어딘가에 숨기고 있는 원죄가 시발점이겠죠.”
“도대체 그 원죄라는 게 대체 뭡니까?”
“하아, 됐어요. 오히려 그렇게 철두철미한 모습이 더 보기 좋네요. 그런데 그렇게 철두철미한 사람이 왜 사지에 제 발로 걸어들어 온 거예요?”
미카엘라는 답답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흘겨보더니 이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몸짓으로 파악되는 무력은 전무.
경계할 필요는 없었다.
“귀 좀 대봐요.”
그녀는 내 귓가에 가까이 붙었다.
“일단은 제 힘으로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줄게요. 당장은 힘들어도 내일까지는 어떻게든 말이에요.”
간질거리는 목소리와 입김이 귓가에 울렸다.
“절 탈출시켜주시겠다는 겁니까?”
“그래요. 모하임 공작과 거래한 게 있으니 그를 배신할 게 아니라면 도와줘야겠죠.”
모하임이 내가 알려준 정보를 토대로 일처리를 잘한 모양이었다.
솔직히 정치적인 능력은 모자라서 충고를 한 게 거의 없는데 알아서 잘했네.
“일단 빠져나가기만 하면 아무 문제는 없을 거예요. 황제도 꼬투리를 잡을 수 없는 게, 초인 증명을 명분으로 불렀던 거라 일단 황궁에서 나가기만 한다면 왜 멋대로 빠져나갔냐는 추궁은 못할 겁니다.”
토도도독!
한참 미카엘라의 말이 이어지는 가운데 방 문을 두드리는 다급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미카엘라 전하! 자, 자비에 경이 이곳을 향해 급히 오고 있다고 합니다!”
“아!”
방으로 들어와 말을 하는 시녀를 보며 미카엘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확고하게 말했다.
“일단 처음에 말했던 대로 호위들을 시켜서 막아라.”
“그, 그것이······. 미리 전하께서 말씀하신대로 호, 호위 기사들 몇몇이 가서 막았는데······.”
몸을 떠는 시녀는 두려움에 가득 찬 표정으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저, 전부 죽였다고 합니다. 아니, 죽이면서 오고 있다고 합니다.”
“뭐?!”
아무래도 미카엘라가 나를 탈출시키려는 속셈을 눈치 챈 듯했다.
“······.”
미카엘라가 입술을 씹으며 고뇌에 빠졌다.
그런 그녀를 확인하며 나는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곧이군.
“제가 나섰다는 이야기에 이리 빠르게 손을 쓸 줄이야.”
미카엘라가 결국 자신의 패착을 인정하며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나 이내 내 표정을 확인하고는 의문에 가득 찬 얼굴로 내게 물었다.
“크롬웰 공?”
“예, 전하.”
“어째서 그렇게 여유로운 거죠? 당신은 이제 탈출할 가망이 없어졌어요. 죽는 수밖에 남지 않았다고요.”
“글쎄요.”
시간이 거의 다됐다.
때마침 흉포한 자비에의 기운도 점차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쿵!
“실례하겠습니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자비에의 평상복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가 들고 있는 검에도 온기가 느껴지는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자비에 경.”
사람을 죽였다고는 생각되지도 못할 무표정으로 우리를 보던 자비에가 자신의 옷에 피를 닦고는 검을 집어넣었다.
“그 피는 대체 뭐죠?”
“길을 막는 이들이 있어서 급하게 처리했습니다. 나중에 따로 사죄하겠습니다.”
“제 수하들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리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당당한 자비에의 말에 미카엘라가 분노를 표출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시선을 끌기위한 연기로만 보였다.
“감히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제 호위들을 다 죽였다고요?”
“그렇습니다.”
“하! 자비에 경, 아무리 당신이 근위기사단장이라지만 이건 도를 넘은······.”
“아직 무사히 있었군요. 미카엘라 전하께서 혹시 어디론가 데려가시는 건 아닌지 걱정했었습니다.”
미카엘라의 연기는 통하지 않았다.
자비에의 시선은 이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나를 향해있었다.
그것보다 미카엘라는 진심으로 나를 살리려는 것 같네. 함정이 아니었다는 걸 알아낸 것만으로 큰 수확이었다.
“시간이 됐군요.”
은근슬쩍 내가 끼어들며 말하자 미카엘라가 뒤를 돌아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두 분 모두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뵈죠.”
“네?”
“무슨 소리냐, 아드리아스 크롬웰.”
이곳은 마법의 사용이 엄격하게 통제된 황궁.
천하의 바하트 알븐도 공간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장소였다.
그렇지만 나한테는 마법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지.
띠링!
[메테네의 별빛이 호출합니다.]
[소환에 응하시겠습니까?]
네임드급 아이템, 메테네의 별빛.
마법조차 뛰어넘는 기적을 행하는 물건이지.
‘소환에 응한다.’
띠링!
[소환에 동의하셨습니다.]
[시전자‘에이미 크롬웰’의 곁으로 소환이 시작됩니다.]
비비안에게 건네준 메모에 적은 계획이 바로 이거였다. 통신 상점을 통해 크롬웰에 연락하여 시간을 정해놓고 메테네의 별빛을 사용하게 하는 것.
비비안은 그 통신을 끝마치자마자 바로 열차를 타고 크롬웰로 오라고 적어뒀지.
“그럼 안녕히······.”
사라지는 나를 보며 미카엘라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스릉!
서걱!
반대로 자비에는 전혀 당황하지 않은 채 곧바로 검을 뽑아 내게 휘둘렀다.
하지만 그런 정제되지 않은 공격에 당해줄 내가 아니지.
핏!
어? 못 피했네?
옅은 자상이 턱에 남았지만 결국 소환은 안정적으로 성공했다.
우우웅-----!
화아아아악!
“오빠!”
눈부셨던 시야가 되돌아오며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너넨 뭐냐?”
에이미와 나를 둘러싼 수인들이 흉흉한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 316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