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5화. 이미 시작된 혼란 >
잠시 정적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미누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황제가 내게 서신을 보냈다.”
나는 말없이 경청했다.
“곧 남부 왕국 연합과 전쟁을 치를 테니 가문의 재산 4할과 병력의 7할을 요구했지. 둘 중 하나만 요구했어도 미쳤냐는 소리가 나올 판국에 둘 모두를 요구했다.”
미누스가 사납게 미소 지었다.
“한 번 뒈져보라는 거지, 이건. 흐흐.”
“생각보다 말도 안 되는 조건과 이유로 시비를 걸었군요.”
“이유야 어찌됐든 우리 가문은 그딴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 서신을 받아들이는 순간 병신이 되겠지. 오히려 그 무리한 요구 덕분에 서부의 다른 가문들을 설득할 명분이 생겼다.”
미누스의 주먹에서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이르지만, 전쟁이다.”
“제국은 강합니다.”
“그래. 네가 누누이 말했던 거지. 그래서 나도 준비는 꽤 해뒀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있는지 여유 있게 웃어보였다.
“그것보다 황제도 자기가 보낸 서신이 터무니없는 요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을 거야. 아마 너를 급하게 부른 것도 황궁의 계획 중 일부겠지.”
“저를 불렀다는 황명에 무언가 숨겨져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황명을 이유 없이 거스를 수는 없죠.”
“넌 가면 무조건 죽는다. 내가 괜히 너랑 친한 척 해온 줄 알아? 넌 이미 나랑 같은 배를 탔다고 동네방네 광고가 됐다고.”
내가 처음에 했던 예상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황제는 지금 대혼란 에피소드를 진행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그리고 미누스에게 보낸 서신이 사실이라면 나를 황궁에 부른 저의도 미누스의 짐작대로겠지.
“괜찮습니다.”
“뭐가 괜찮다는 거냐. 가면 죽는다니까?”
“전 죽지 않아요.”
이미 내가 초인 증명을 위해 황궁에 간 사실은 아카데미의 학생들을 통해 순식간에 소문이 퍼질 게 뻔했다. 그러니 아무리 황제라도 나를 대놓고 죽일 수는 없었다.
“아니, 넌 무조건 죽는다.”
“모하임 전하.”
미누스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는 알고 있다.
대놓고 죽이지는 않더라도 급하게 황궁으로 부른 걸 보면 무슨 방법을 써서든 죽이려고 들겠지.
“전 정말 괜찮습니다. 그러니 저보다는 다른 곳에 집중해주십시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생각해둔 게 있다는 거겠지.”
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서신에 대해서는 최대한 답변을 미뤄서 시간을 끄십시오. 마지막엔 답변 대신에 서신의 내용을 제국 전역으로 폭로해서 동정을 사시고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그 외에 제가 이전에 말해두었던 것들도 다시 한 번 점검해주시고요.”
나는 그 말을 끝으로 품에서 종이를 꺼내 무언가를 메모했다. 잠시 그렇게 무언가의 메모를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자비에 경이 기다리겠군요.”
“언제든 곤란해지면 우리 가문으로 와라.”
“확인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나 홀로 찻집에서 나왔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비비안이 내게 다가왔다.
“비비안, 부탁이 있습니다.”
“응.”
“어차피 황궁에는 저밖에 들어가지 못하니 이 메모대로 행동해주시겠습니까?”
내가 건넨 종이를 받은 비비안은 안의 내용은 확인하지 않고 나를 바라만 봤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괜찮습니다.”
“응.”
그제야 비비안은 종이에 쓰인 내용을 읽었다.
“이거······.”
“저를 살리는 방법입니다. 지금은 부탁할 만한 사람이 비비안 밖에 없네요.”
비비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메모를 모두 확인한 그녀는 어느새 재촉하려 다가오는 자비에의 모습을 슬쩍 확인하더니 이를 악물었다.
“······함정이었구나.”
“부탁드립니다, 비비안.”
“정말 이대로만 하면 아드리아스는 무사한 거지?”
“물론이죠.”
어느새 자비에가 근처까지 다가왔다.
“이야기는 끝났나?”
“예.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지.”
곧바로 앞장서서 나아가는 자비에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비비안은 다른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호위 기사는?”
“황궁에는 저 혼자만 들어갈 수 있으니 근처에서 쉬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자비에는 별다른 기색 없이 걸어서 이내 마차를 한 대 잡았다.
“황궁으로.”
**
초인이라는 단어는 원래 제국에서 오러 마스터를 부를 때 지칭하던 말이었다.
‘그래서 오러 마스터를 시험하는 행사를 초인 증명이라고 불렀지.’
제국의 오러 마스터라면 누구나 치르게 되는 일종의 행사.
‘게임에서는 하나의 이벤트로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날 죽이려는 함정이 돼버렸군.’
초인 증명은 제국의 오러 마스터만 받을 수 있는 시험으로 증명에 성공할 시 선택할 수 있는 여러 혜택 중 하나를 가질 수 있었다.
그 혜택이 가볍지는 않았기에 꽤 유용하게 썼었는데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바로 입장하시면 됩니다.”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황제가 있는 대전으로 안내받았다.
자비에와 함께 대전으로 입장하게 된 나는 최대한 표정을 숨기며 걸어갔다.
처걱!
대전의 끝에는 황제가 앉아있었고 주변은 그 유명한 황실근위기사들이 나열해있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크롬웰 백작.”
내가 먼발치에서 한쪽 무릎을 꿇자 황제가 입을 열었다.
“예, 폐하.”
“그대가 올해로 나이가 몇이지?”
“스물다섯이옵니다.”
분위기가 묘했다.
애초에 내가 게임에서 겪었던 초인 증명은 황제뿐만 아니라 여러 대신들 앞에서 치러졌었다.
“대단하군. 그 나이에 오러 마스터라니.”
“과찬이십니다.”
“지금 시연해볼 수 있겠나?”
“예, 가능합니다.”
나는 허락이 떨어진 걸로 알아듣고 곧바로 날개를 사용했다.
화아악--!
눈부신 빛과 함께 한 쌍의 날개가 생성되었다.
원래는 일익이었지만 지옥을 경험하며 하나가 늘어난 모습이었다.
“허허.”
황제가 흥미롭다는 시선을 보였고, 의외의 반응이었지만 자비에도 사뭇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그대의 오러 비기인가?”
“그렇습니다.”
“짐이 듣기로 하나라고만 들었는데 이제 보니 한 쌍이군.”
“원래 한 쌍이었습니다.”
굳이 성장했다고 말할 필요는 없겠지.
이걸로 증명은 끝인가.
사실 초인 증명 자체는 일종의 행사일 뿐, 오러 비기의 진위여부를 가리는 자리가 아니었다.
오러 비기를 한 번 보여주고 끝나는 것이 의례적인 일.
“어떻게 생각하나, 자비에 경.”
“놀랐습니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 그러고 보니 자비에는 나한테 오러 마스터가 아니라고 했었지.
“오러 비기가 아님에도 저런 특수한 능력을 지녔다는 게 놀랍습니다.”
······뭐?
“흐음, 그렇다는군.”
황제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건 오러 비기가 아닌, 마법인가?”
“······황송하오나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건 마법이 절대 아닙니다.”
“당황할 수도 있겠지. 짐이 친절히 설명해주겠다.”
퉁!
황제가 주의를 집중시키려는 듯 오묘한 빛깔의 검을 바닥에 찍었다.
“자비에 경은 오러 마스터다. 그리고 자비에 경의 오러 비기는 흉내내기.”
흉내내기?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하나의 가정이 떠올랐다.
자비에가 나를 보고 오러 마스터가 아니라고 바로 확신했던 이유.
그리고 내 날개를 보고도 오러 비기가 아니라고 할 수 있었던 이유.
“자비에 경은 강강약약이지. 왜냐하면 상대의 오러 비기에 따라 강해지거나 약해지기 때문이다.”
자비에의 오러 비기.
황제의 말을 추측해본다면 그건 분명 상대의 오러 비기를 똑같이 사용하는 것이었다.
“더 설명이 필요하나, 크롬웰 백작?”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보고 단숨에 오러 마스터가 아님을 깨달았구나.
“자,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해보지.”
퉁!
황제가 다시 검을 찍었다.
“감히 오러 마스터라고 속인 건 그렇다 치지. 어차피 오러 마스터였어도 그대를 부른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으니까.”
긴장감이 대전을 감쌌다.
정렬해있던 근위기사들의 기세가 순식간에 나를 향해 집중되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황제의 눈에 광기가 번들거렸다.
“원죄는 어디 있지?”
**
스스스스-
시커먼 기운이 은밀히 바닥을 기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영지 내부를 제멋대로 휘젓고 다녔지만 아무도 그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는 듯 이상함을 감지하지 못했다.
이내 그 기운은 어디론가 향하더니 자연스레 누군가에게 흡수되었다.
“아무 이상 없군.”
기운을 흡수한 독특한 복장의 인물, 제스터 르반이었다.
스스슥-
그런 그의 주위로 은밀히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제스터의 파벌에 속한 그의 수하들이었다.
“드디어 치욕을 되갚을 때가 왔다. 무려 보수까지 받으면서 말이지.”
제스터가 만족스러운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런 그의 시야에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영지가 들어왔다.
“크롬웰.”
제국의 영지를 향한 테러.
그것은 미친 짓이라 봐도 좋았지만 제스터는 이미 황궁으로부터 대가를 약속받았다.
“영지 내부에 모른 드왈스키와 루나 펜드래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마주치게 된다면 맞서지 말고 물러서라.”
“예.”
“어차피 그 둘은 정체를 숨겨야하니 우리처럼 대놓고 흑마법을 사용할 수 없을 거다.”
모른과 루나가 있다는 건 이미 파이시를 통해 전달받았었다.
그러나 그 둘이 계획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둘 중 하나라도 흑마법을 사용하는 순간 이 테러의 원흉으로 덤터기 씌울 수도 있었다.
“우리의 목적은 영지의 파괴와 아드리아스 크롬웰의 유일한 혈육인 에이미 크롬웰이다.”
말을 하던 제스터가 자신의 수하 중 몇몇을 가리켰다.
“에이미 크롬웰은 반드시 생포해라. 그 녀석이 황궁과 맺은 거래의 일부니까.”
“알겠습니다, 주인님.”
제스터가 가리킨 이들.
그들은 다름 아닌 수인들이었다.
안 그래도 인간보다 뛰어난 신체를 흑마법으로 강화시킨 그들은 노예의 인장이 신체에 새겨져있었다.
“나머지는 원거리에서 마법만 사용해라. 얼마를 죽이든 상관없다. 오히려 많이 죽일수록 좋다.”
제스터의 말이 계속 될수록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그동안 억눌려왔던 흑마법사들의 파괴적인 본능이 광기와 함께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자, 이제 자리에 위치해라. 가장 첫 번째 마법은 내가 시전하겠다.”
말이 끝나자 그림자들이 흩어졌다.
“드디어 이 녀석을 사용할 때가 왔구나.”
모두가 사라지자 혼자 남은 제스터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정육각형 모양의 검은 큐브.
이 모든 악연의 시발점이었다.
“나태.”
죄악의 사용은 다른 수장들의 동의가 필요했지만 제스터는 참을 수가 없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네놈이 줬던 나태로 네가 이루어놓은 모든 게 파괴되는 모습을 잘 보거라.”
아드리아스로 인해 당해왔던 것을 생각하면 견디기가 힘들었다.
“살렘 예디디아, 헤이겔, 모른 드왈스키, 이들의 도움만 없었으면 진즉에 죽었을 녀석이 목숨도 질겼었지.”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었다.
정확히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황제는 크롬웰을 정리하려하고 있었다.
자신은 거기에 살짝 숟가락만 얹을 뿐.
“그전에 절망이란 절망은 모두 겪게 해주마.”
제스터의 손에 들린 나태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네임드 아이템으로서의 주인 각인까지 끝내버린 뒤.
후에 다른 파벌들이 뭐라 할 것이 분명했지만 상관없었다.
철컥-철컥-철컥-
큐브가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 315화. 이미 시작된 혼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