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7화. 전후 처리 그리고 보물방 >
토독!
가볍게 느껴지는 두드림에 정신이 들었다.
난 잠이 들었었다는 사실에 놀라며 살며시 눈을 떴다.
“어? 일어났다!”
오팔색의 큼지막한 눈.
내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루나의 이마가 내 이마에 닿을 듯 가까웠다.
“괜찮아?”
그 위에서 비비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보니 내가 베고 자던 건 비비안의 무릎이었다.
나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며 둘에게 물었다.
“깜빡 잠들었군요. 얼마나 지났죠?”
“한······2시간?”
루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대충 그 정도라는 소리네.
주변을 살피자 여전히 리치킹이 있던 대전이었다. 전투로 인한 흔적이 여실했고 무엇보다 한 쪽에 쌓인 키네인 용병단의 시신들이 눈에 띄었다.
“두 분은 괜찮습니까?”
“난 괜찮아.”
“나도 괜찮아!”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는 분명 아가타와 무토가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었다.
노아의 상태도 걱정되는데 비비안과 루나의 분위기를 보니 노아는 무사한 모양이었다.
“그 뒤로 아무 일도 없었어. 아드리아스가 리치를 쓰러트린 거지?”
“예.”
리치킹.
얼떨결에 내 소유물로 만들어버린 최상위 언데드.
이것도 어찌 해결해야 할지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온다.
‘하룬겔하고 알-구르드가 들어갈 줄이야.’
마력 결투의 부작용이었나?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지만 일단은 현 상황부터 해결해야 했다.
뚜둑!
몸을 일으키자 뼛소리가 나며 온몸이 통증으로 화답했다.
그러나 애써 내색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살피러 갔다.
“아! 아드리아스.”
노아가 여기저기 자잘한 상처가 새겨진 모습으로 아가타를 돌보고 있었다.
아가타는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부상을 입은 부위에 옷을 찢어 만든 천을 감싸고 있었다.
‘아······.’
그녀는 뜯긴 자신의 팔을 나머지 한 손에 쥐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나는 곧바로 아공간 속 용아병이 들고 있는 확장 가방을 꺼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동작이라 그냥 아공간 마법으로 가방만 꺼낸 듯한 연출이었다.
“여기 포션이 있습니다.”
“어. 그런데 일단 무토 키네인부터 살펴봐봐. 아가타는 적어도 죽지는 않겠지만 걔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넉넉할 정도의 포션을 넘겨준 채 무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바로 근처에 있던 무토는 북부인들이 살펴주고 있었다. 쓰러진 무토의 곁에는 상처투성이의 라고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덕분에 모두 살았다.”
북부인 중에서 리더격인 이타야가 내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아니었으면 리치도 처치하지 못했겠죠.”
나는 겸양을 한 번 떨어주고 무토를 살폈다.
“무토는 어떻습니까?”
“숨만 붙어있다. 아마 이대로 오늘을 넘기기는 힘들 거야.”
용병왕이 이렇게 허무하게 갈 줄이야.
일단은 무토에게 포션을 사용하기로 했다.
살려보려는 시도는 해봐야지.
“그건?”
“포션입니다.”
회복과 재생 포션을 만들고 난 이후로는 포션 제조에 소홀했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생기니 포션 제조에도 조금 더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네.
‘만약 여기 쓰러진 게 무토가 아니라 비비안이었으면······.’
끔찍했다.
혹시 모르니 엘릭서 종류의 포션이 숨겨진 던전도 한 번 들러놔야겠군.
엘릭서는 이 세계에서 여분의 목숨이나 다름없으니 그동안 미뤄왔던 보물찾기를······.
‘다른 사람을 시켜야겠다. 에반이면 되겠지. 살렘한테 말해줘도 좋아할 것 같고.’
이미 이곳에 온다고 연차를 무분별하게 사용했다.
평판이 꽤 중요한 세상이라 너무 내 멋대로 하는 건 지양해야겠지.
치이익--
우선 회복 포션을 먹이고 눈에 보이는 심각한 외상에는 재생 포션을 부었다.
“흐음······.”
이건 좀 심각하다.
꽤 고통스러운 과정일 텐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무토를 보자 이타야의 말대로 오늘을 넘기기가 힘들어보였다.
“무토와 라고는 제가 살피겠습니다. 이건 세 분이서 나눠서 복용하세요.”
나는 가방에서 여분의 포션을 꺼내며 북부인들에게 주었다.
주는 김에 나도 한잔 해야지.
꿀꺽.
‘그러고 보니 반동이 그리 크지 않네.’
역시 탑에서 얻은 특성 때문일까.
원래였으면 며칠은 눈을 못 뜨거나 골골댔을 텐데 포션을 먹을 생각도 안 들 정도로 이번에는 상태가 양호했다.
물론 특수 기술이 끝난 직후에는 여전히 위험했지만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다.
“라고.”
나는 자고 있던 라고를 흔들었다.
그러자 라고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일어났다.
“라고, 일어났다? 라고, 왜 부르냐. 라고, 졸리다.”
“이거 드시고 주무세요. 제가 만든 회복 포션입니다.”
내가 포션을 건네자 상처투성이의 라고는 한 차례 포션을 훑어보다 이내 가져갔다.
“라고, 고맙다.”
“덕분에 모두가 살았는데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
“아니다. 아드리아스, 리치킹 쓰러트렸다. 아드리아스, 포션 줬다. 라고, 은혜 갚는다.”
으적!
라고는 그리 말하더니 포션을 병째로 씹어 먹었다.
보는 내가 아찔한 모습이었는데 라고는 아무렇지 않은지 입맛을 다시며 내 손에 들린 가방을 보았다.
“배고프십니까?”
“라고, 배고프다.”
“잠시만요.”
애초에 조난을 상정하고 준비한 가방이라 비상식량도 수두룩했다.
혼자서 2달 동안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식량이 있었는데 라고의 먹성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에 한 달 치 식량을 꺼내주었다.
“먹을 거 많다! 라고, 행복하다!”
솔직히 어눌한 라고를 보면 어떻게 저런 사람이 워록이 되었지 싶은데 아무래도 서번트 증후군이 아닐까 싶었다.
평소에는 어눌하지만 특정 분야에 있어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
“맛있다! 라고, 맛있다!”
순식간에 음식을 흡입하는 라고를 보다가 나는 무토의 자리를 살짝 옮겼다.
자칫하다간 옆에 있던 무토도 먹어버릴 기세다.
“아! 아드리아스.”
“예, 말씀하세요.”
“수인 동료 팔이 찢어졌다. 라고, 고칠 수 있다.”
아가타를 치료할 수 있다는 건가?
사실 라고가 말을 꺼내지 않았어도 난 아가타를 살렘에게 보낼 생각이었다.
‘분명 또 투덜대겠지.’
아가타를 치료하는 건데 잔소리쯤이야.
그런데 여기서 라고가 도와준다고 말할 줄은 몰랐다.
“사실 살렘에게 맡기려고 했습니다.”
“살렘? 살렘 예디디아, 대단하다. 하지만 라고, 신체 개조는 자신 있다.”
이거 고민되네.
솔직히 살렘의 실력이 더 위라고 보지만 그 지랄 맞은 성격이 조금 걸리고, 라고는 허튼 짓은 안 할 것 같지만 살렘에 비해 실력이 떨어질 것 같았다.
“라고, 혹시 살렘이랑 같이 해볼래요?”
“라고, 살렘이랑 같이?”
그리고 난 이 기회를 틈타서 라고까지 포섭하고.
“라고, 알겠다. 라고, 은혜를 갚는다.”
의외로 순순히 대답하는 라고 덕분에 일이 쉽게 풀렸다.
이 소식을 아가타에게도 알려야겠군.
우선은 본인의 의사도 중요했으니까.
‘거절해도 억지로 설득할 생각이지만.’
그렇게 라고와 대화하다 문득 누군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라고, 파이시는 어디 있죠?”
“라고, 자느라 모른다.”
이 하프리치가 또 어디서 뭔 사고를 치는 건 아니겠지.
괜히 불안한 마음이 생긴 나는 일단 아가타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비비안과 루나도 그곳에 있었는데 파이시에 대해 묻자 모두들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파이시가 보물을 독차지하러 간 거 아니야! 안 돼, 내 보물!”
루나가 발을 동동 구르더니 이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돌?”
그건 메쥬르에게서 처음에 샀던 3,000개짜리 돌이었다. 그러고 보니 메쥬르도 스리슬쩍 사라졌네.
“이게 보물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준데!”
루나가 우쭐대며 말했다.
저 돌이 설마 그런 역할을 할 줄이야.
“가즈아!”
“잠시만요, 루나. 그 전에 아가타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아가타의 고양이 귀가 쫑긋 섰다.
“아가타, 팔을 다시 붙일 수 있게 시술해줄 수 있는 사람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팔을 다시······?”
“예, 뭐. 마법으로 어떻게든 말이죠.”
“그 사람을 소개 받으려면 제가 뭘 해야 하죠?”
아가타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마치 모든 걸 바쳐서라도 팔을 붙이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좋은데?
“일단 그 분은 제 영지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가타, 전 당신을 원해요.”
“제 몸을 원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게 왜 그런 얘기로······.”
당연히 가신이 되라는 소리지 갑자기 이야기가 왜 그리로 새냐.
사아아······.
갑자기 등 뒤가 서늘해졌다.
뭔가 알 수 없는 압력이 느껴지는 사이, 나는 급하게 정정했다.
“크롬웰 가의 가신이 되어 주십시오. 당신을 고용하겠습니다.”
스르르르-
서늘한 기운이 사라졌다.
나는 티가 나지 않게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
“어떻습니까?”
“······정말 그거면 됩니까? 오히려 그건 제게 이로운 조건인 것 같습니다.”
“아가타는 용병 출신인 만큼 실컷 굴려질 겁니다. 아마 외부 원정이 잦을 거예요. 물론 성과급은 따로 보장하죠.”
네임드 활이 있는 곳으로 보내버려야지.
실컷 굴리다 보면 플레이어블답게 성장해 있을 거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좋아요. 일단 그 팔은 제가 관리하겠습니다.”
네크로맨서인 만큼, 그리고 카론의 조수로 일했던 경력으로 인해 사체나 육신의 보존 능력은 일류였다.
나는 곧바로 아가타의 팔에 보존 마법을 걸고 이런 저런 처리들을 했다.
“이제 가자! 늦으면 파이시가 혼자 다 가져갈 거야!”
루나가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재촉했다.
나는 아가타의 보존 처리된 팔을 확장 가방에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 북부인들이랑 같이 부상자들을 지키고 있어줘.”
“예이, 예이. 대신 보물 가져오면 나도 한 몫.”
나는 루나와 비비안만 대동하고 곧바로 움직였다.
파이시가 정말로 보물을 가지러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곳을 탐색 중인 건 맞을 거다.
“저기!”
루나가 돌을 한 손에 든 채 앞장을 섰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대전에 왕좌가 있는 곳 뒤쪽이었는데 이미 그곳에는 비밀스러운 통로가 열려 누군가가 지나간 듯했다.
“파이시인가. 저 안에 있는 건 왕가의 보물?”
“안 돼!”
루나가 양 주먹을 흔들며 급한 몸짓을 취했다.
“일단 천천히 가보죠. 함정이 있을 지도 몰라요.”
“응.”
비비안이 자처해서 앞장서고 루나가 가운데, 그리고 후미는 내가 맡았다.
들어간 통로는 좁기도 좁았지만 미로처럼 꼬여있었는데,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루나가 방향을 지시했다.
“오른쪽!”
아마 파이시는 여기서 해매고 있지 않을까?
우리는 루나 덕분에 단 번에 미로를 통과하며 멈춤 없이 나아갔다.
“어지간히 숨길 게 많았나봐요.”
생각보다 긴 미로에 내가 중얼거리자 루나가 대답했다.
“거의 다 왔대. 힘내자!”
귀여운 응원을 들으며 나아가자 길이 조금씩 넓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사람이 둘 정도 지나갈 크기의 작은 문을 발견했다.
“도착이래!”
여기가 보물이 숨겨진 방인가.
미로를 제외하고는 생각보다 허술했다.
그때 루나가 앞서 가더니 문에 있는 작은 홈에 돌을 끼워 넣었다.
“짜잔! 완성~”
쿠구구구구---
마법이 발동되며 마치 거대한 태엽이 맞물리는 듯한 소음이 일어났다.
루나가 저 돌을 사자고 하지 않았으면 보물 구경은 못했을 것 같군.
철컹!
드디어 소음이 끝나더니 문의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울렸다.
“수고했어. 이제 자유야.”
루나는 문에 박힌 돌을 마나를 담은 손으로 비비더니 기도를 하듯 눈을 감았다.
스으으-
돌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듯했다.
영혼을 제령한 건가.
‘사제 같기는 하네.’
역시 혈통은 못 속이는군.
기도가 끝난 루나는 이내 방긋 웃으며 문을 두드렸다.
“내가 열게?”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친구가 열어!”
가볍게 나한테 넘기는 루나를 보고 미소 짓고 있자 비비안이 나섰다.
“내가 열게.”
그녀는 루나를 뒤로 물리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끼이익-
평범하게 열리는 문을 보며 우리는 안쪽의 풍경을 살폈다.
“와아! 예뻐!”
“신기하네. 저 조각은 뭐지?”
루나와 비비안의 감상이 들렸다.
하지만 난 그들과 같이 말할 수가 없었다.
“이건 또 뭔······.”
눈앞에는 마치 지구의 절에서나 볼법한 대불상이 놓여있었다.
< 307화. 전후 처리 그리고 보물방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