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6화. 하룬겔과 알-구르드 그리고 갈락슈르 >
후우후우······.
사방을 언데드들로 둘러싸인 비비안이 호흡을 조절하며 잠시 전황을 살폈다.
콰각!
저 멀리서 동생의 죽음으로 광분한 무토가 날뛰는 게 보였다.
하지만 저렇게 날뛰다간 얼마 못가서 방전이 될 터.
쿠궁!
그나마 라고라는 이름의 흑마법사와 파이시가 소환한 언데드로 상황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었다.
“루나.”
비비안은 어느 순간부터 눈을 감은 채 조용히 공포검을 잡고 있는 루나를 지키기 바빴다.
루나가 아니었으면 당장 아드리아스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을 테지만 그쪽은 세 명의 오러 마스터가 있었기에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훌륭한 기사군.
데스나이트 한 구가 검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지금껏 비비안과 검을 맞댄 녀석이자 비범한 실력의 언데드.
“······.”
비비안은 그저 말없이 검을 치켜들 뿐이었다.
콰아앙----------!
“그아아아!”
저 멀리서 라고의 괴성이 들려왔다.
그가 상대하고 있던 언데드는 처음 보는 형태의 검은 기사.
파이시가 말하길 둠 브링어라 불리던 녀석이었는데 그 강함이 오러 마스터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어보였다.
‘이대로는······.’
비비안은 눈앞에 데스나이트를 빨리 처리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오는 건가? 와라.
비비안의 기세를 느낀 데스나이트가 다른 언데드들을 물리며 앞으로 나섰다.
“흐읍!”
폭발적인 탄력으로 뛰쳐나간 비비안이 광폭하게 검을 휘둘렀다.
그 특유의 난도질에 데스나이트가 수비를 하며 외쳤다.
-좋군!
이미 다섯 구가 넘는 데스나이트를 쓰러트렸지만 지금 상대하는 데스나이트는 격이 달랐다.
비비안은 이를 악물며 검을 더 빠르게 휘둘렀다.
‘더 강하게, 더 빠르게.’
벽을 뚫고 아드리아스에게로!
콰직!
그녀의 강렬한 염원은 곧 힘이 되었다.
그간 아드리아스와 남궁일영에게 익혀오고 배워온 검의 무리가 자연스레 그녀의 검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카가가가강-------!
-끌끌끌.
데스나이트가 즐겁다는 듯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맞받아쳤다.
전투가 길어질수록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음은 커져만 갔고 데스나이트와 비비안은 성한 곳이 사라져갔다.
촤아악!
비비안의 흉갑이 강력한 힘에 의해 찢겨졌다.
강철로 만든 흉갑이 찢어질 정도의 검술 실력.
그러나 상대의 외견도 만만치 않았다.
콰직!
데스나이트의 상징인 검은 갑주가 모두 허물어진 모습.
오히려 비비안보다 심하면 심했지, 도저히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젊은 나이에 대단한 성취다, 훌륭한 기사여! 부디 내 주군을 쓰러트리고 계속 나아가길 바란다!
자신의 소환자를 오히려 쓰러트리길 염원하는 데스나이트가 마침내 쓰러졌다.
“허억, 허억······.”
수분이 증발하며 비비안의 주변으로 뜨거운 증기가 피어올랐다.
언데드가 개체마다 다르다고는 해도 예상 외로 강대한 적을 만나 잠시 고전하고 말았다.
-그으으.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는 혼 크러셔와 데스나이트가 거칠게 숨을 고르는 비비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큰일이야.’
비비안의 고운 아미가 찌푸려졌다.
이미 조금 전의 데스나이트와 싸우며 대부분의 마나와 체력을 소진한 상태.
비록 방금과 같이 강한 녀석은 없을 지라도 숫자가 너무 많았다.
‘다른 사람들도······.’
이제 보니 아가타와 노아 쪽은 자신보다 힘겨워보였다.
라고는 여전히 둠 브링어와 일대일로 겨루고 있었으며 파이시는 누구보다 많은 언데드를 상대로 고전하고 있었다.
무토는······.
“큰일.”
비비안이 예상했던 대로 무토는 오러 비기의 사용도 멈춘 채 위태롭게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나마 여유가 있어 보이는 건 북부인들이었지만 그들도 둠 브링어를 상대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아드리아스를 지키고 있었기에 도움을 요청할 수가 없었다.
“하아.”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혼자서 해결하는 것 뿐.
-그어어어어!
-그르륵!
언데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비비안은 무거워진 몸을 애써 움직이며 차근차근 하나씩 처리해나갔다.
‘루나······.’
그 와중에 루나도 지켜야했기에 공간을 넓게 사용할 수도 없었다.
“루나.”
루나, 제발 눈을 떠주렴.
키이잉---!
그때 마침 비비안의 염원을 들었다는 듯 루나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루나?”
사아아아아-----
밝은 빛에 휩싸인 루나의 곁에서 알 수 없는 소음이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 나뭇잎들이 부딪히는 소리.
자세히 들어보면 대나무 숲 한가운데에 있는 듯한 소리였다.
철컥.
이어서 자그마한 손이 검의 손잡이를 잡더니,
촤캉!
공포검이 깔끔하게 뽑혔다.
“루나!”
비비안은 루나의 등 뒤에 나타난 그림자를 바라봤다.
루나와 비슷한 백발에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여인이 희미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다시 고향 땅을 밟게 될 줄은 몰랐구나.”
루나의 입에서 나지막한 말이 흘러나왔다.
곧이어 그녀의 손에 들린 검이 춤추기 시작했다.
**
[“넌 항상 이렇게 될 걸 알면서 사용하냐.”]
원죄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의식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주변의 모든 정보가 머릿속에 들어왔다.
콰강! 콰직!
챙! 쿵! 콰드드득!
모두가 힘들어보였다.
하지만 저 멀리 보이는 루나의 모습으로 인해 놀라움과 안도가 동시에 느껴졌다.
‘오관.’
설마 오관을 강림시킬 줄이야.
[“야, 내 말 듣고 있냐?”]
원죄가 내 의식을 툭툭 건드렸다.
[“지금 다른 거 보고 있을 때냐? 네 거나 해결하지?”]
나보다 다른 이들이 먼저였을 뿐이다.
확인은 끝났으니 이제 해결해야겠지.
울렁-
나태로 인해 증폭된 마력이 강하게 상대를 밀어냈다.
-뭐냐.
리치킹이 생각보다 담담한 음색으로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대답하기 귀찮아.
그냥 빨리 끝내버려야지.
난 단숨에 끝낼 생각으로 간도 보지 않고 모든 마력을 쏟아 부었다.
갑작스레 쏟아낸 마력으로 인해 몸에 과부하가 걸렸지만 알 게 뭐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냔 말이다!
리치킹의 어조가 드디어 다급해졌다.
그러나 일일이 그의 감상을 들어줄 마음은 없었기에 속전속결로 결투를 진행했다.
꾸득!
몸에 핏줄이 솟고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눈가의 실핏줄이 터진 듯했지만 그냥 만사가 귀찮았다.
-끄어억.
리치킹이 고통에 겨운 신음을 냈다.
그렇게 순식간에 상황을 역전시켜 결투가 끝나려할 때,
-난 이제 자유다!
-아아? 아아아아? 이게 무슨 크라하?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들이 내가 흘려보내는 마력을 타고 리치킹으로 흘러들어갔다.
방금 뭐였지?
[“지랄 났네.”]
원죄가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의미 없고 빨리 끝내기나 하자.
파악!
결투가 끝났다.
나와 리치킹의 연결이 끊기며 동시에 상대가 무너져 내렸다.
[마법 결투 승리]
당연한 시스템 문구가 뜨고 나는 갈락슈르를 꼬나 쥐며 쓰러진 리치킹에게 다가갔다.
근데.
검을 내려치는 게 귀찮군.
-흐윽, 흐억, 도대체 짐에게 뭔 짓을 한 거냐.
뭔 짓이라니.
마력 결투에서 내가 이긴 것뿐인데.
-도대체 지, 짐의 육체에 뭘 집어넣은 것이냐!
집어넣어?
아, 몰라. 귀찮아.
“그냥 죽어라.”
갈락슈르가 내리쳐졌다.
카앙!
너무 대충 휘둘렀나.
리치킹이 왕홀을 들어 내 공격을 막아냈다.
“음?”
그런데 조금 다르다.
왕홀을 들어 막는 그 짧은 사이에 리치킹의 눈빛이나 태도가 묘하게 달라졌다.
-흐흐흐, 흐하하하하하하!
갑작스레 웃음소리를 내는 리치킹은 확실히 달랐다.
“뭐냐.”
귀찮아, 귀찮아.
또 뭔데. 아, 귀찮아. 그냥 내가 죽어버릴까.
-이 몸은 불변의 하룬겔.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 하하하하하!
이건 또 뭔······.
-크라하! 응? 뭐야 넌 또? 음? 어찌된 일이지? 자랑스러운 바야트라의 대전사인 이 몸이 어째서······. 아니, 너 왜 나랑 같이 있는 거냐고!
상황은 더 복잡해져갔다.
아무래도 내 안에 있던 하룬겔과 알-구르드가 동시에 리치킹으로 흘러들어간 모양이다.
-이 새끼! 당장 나가! 이건 내 몸이야······나도 나가고 싶다! 이런 해골 뼈다귀에 들어오다니 대전사의 수치다!
이제야 원죄가 했던 말이 이해가 갔다.
“지랄 났네.”
아무래도 원래 있던 리치킹의 인격은 나와의 마력 결투로 인해 소멸된 듯싶었다.
그런데 리치킹의 육체는 여전하니 그의 언데드들은 여전히 소환해제가 되고 있지 않았다.
‘죽여야······.’
검을 다시 휘두르려는 그때, 문득 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태로 사고 전환이 빨라져서 그런가, 별 특이한 발상이 다 떠오르네. 일단 가능한지 사용해보고······.
‘불완전한 사령 지배.’
[불완전한 사령 지배가 발동됩니다.]
[파악되는 개체 수 1구 – 리치킹]
[불완전한 효과로 마나 소모가 두 배로 듭니다.]
통한다.
리치킹의 원래 인격이 남아있을 때도 통하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어쨌든 사용이 가능했다.
‘주인이 없는 거긴 하니까.’
우웅!
마력 결투를 마치고도 남아도는 웅대한 마력이 들끓었다.
확실히 수준이 높은 언데드라 그런지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가 소모되기 시작했다.
-으어어?
하룬겔인지 알-구르드인지 모를 녀석이 당황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이내 불완전한 사령 지배가 성공적으로 끝났다.
[특수 기술 ‘나태’의 지속시간이 끝납니다.]
[반동이 닥칩니다.]
“크흡.”
아프다.
하지만 운이 좋았어.
‘딱 맞춰서 끝났다.’
사령 지배를 사용하기 전이나 사용하는 도중에 나태가 끝났으면 굉장히 곤란했을 처지였다.
나태로 인해 비상해진 머리가 특수 기술의 남은 시간까지 정확히 예측한 모양이었다.
-어어? 이게 아닌데?
리치킹의 조금 어벙한 말소리를 들으며 나는 주저앉았다.
[밑바닥에 떨어진 자]
-??
-죄악의 부작용이 줄어든다.
역시 이 특성이 있어도 반동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푸흐.”
역류하는 피를 뱉어내며 하룬겔인지 알-구르드인지 모를 리치킹에게 명령했다.
“당장 언데드들 다 거둬.”
-미친! 네가 날 구속하는 바람에 어차피 싸그리 소멸했다! 내 아까운 언데드들!
뭔 소리인가 하며 뒤를 보자 정말로 리치킹의 언데드들이 모두 소멸하고 있었다.
리치킹의 소유권을 내가 가졌는데 왜 저 녀석들이 소멸하는 거지?
‘으아, 고민하기 싫어.’
지금은 너무 힘들었다.
당장 쓰러져 눈을 감고 싶은 마음이 한 가득일 뿐.
나는 당장 문제가 될 여지가 있는 리치킹을 소환 해제시키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 안 돼!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아공간에 들어가는 리치킹의 모습이 조금 웃겼다.
“후우.”
이대로 쓰러져버리고 싶지만······.
나는 애써 고개를 돌려 일행들을 살폈다.
제발, 아무도 죽지 않았기를.
“아······.”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 눈에 봐도 치명상을 입은 인원이 보였다.
‘아가타.’
그녀의 팔 한 쪽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질 않았다.
“아드리아스!”
키네인 용병단은 무토를 제외하면 전멸.
무토의 상태도 심각해보였다.
멀쩡해 보이는 건 오직 루나와 비비안, 그리고 파이시뿐.
“그대를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대가 했던 말이 거짓은 아니었군.”
루나가 여전히 오관을 강림한 상태로 내게 다가왔다.
난 비비안의 무릎에 누운 채 그녀를 바라봤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관.”
“나야말로 고맙군. 이제 가끔씩 지옥을 벗어날 수 있게 됐어.”
오관이 공포검을 흔들며 말했다.
그러더니 시선이 내 손에 들린 검으로 향했다.
“······갈락슈르?”
“예?”
어떻게 안 거지?
“그 검이 어째서 그대 손에 있는 거지? 봉인도 한 차례 풀린 상태로?”
오관이 당황했는지 말의 어순이 뒤바뀌었다.
그나저나 나도 놀랐는데? 설마 오관이 갈락슈르를 알아볼 줄이야.
“아!”
예전에 만났던 마장, 트라울러가 말해준 적이 있었다.
갈락슈르는 어느 신을 기리기 위한 제사용 검.
‘설마 그 신이······.’
닉스?
루나와 이브 밀레니엄, 그리고 오관은 신을 섬기던 사제 혈통이다.
그리고 ‘반복되는 악몽’에서 그들의 외모가 닉스의 사제들과 비슷하다고 했지.
“이건 우리 일족의 검이면서도 동시에 아니다.”
오관이 내 의문에 대한 답을 속 시원히 대답했다.
“이건 신들을 기리는 검.”
“신들?”
왜 복수형이지?
“신들이 실존하던 시대, 모든 신들의 기운이 조금씩 들어갔다고 전해지는 검이지.”
"허어."
내 예상보다 너무 큰 스케일에 그대로 눈을 감았다.
< 306화. 하룬겔과 알-구르드 그리고 갈락슈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