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8화. 한빙지옥(寒氷地獄) >
[“나모라다나다라야야.”]
“나모라다나다라야야.”
[“라아미사미나사야.”]
“라아미사미나사야.”
[“나베사미사미나사야.”]
“나베사미사미나사야.”
아드리아스가 비치는 바닥을 보던 비비안은 슬쩍 고개를 돌려 눈을 감은 채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루나를 바라봤다.
루나는 어느 순간부터 허공에서 울리는 말을 따라하기 시작했는데 그녀가 따라하자 허공의 목소리는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괴로움이란 무릇 내 것이라 생각한 것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생긴다.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 것’과 ‘네 것’의 구분을 짓지 말고 모든 건 항상 변화함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오오오.”
어느새 아드리아스도 무사히 세 번째 관문에 도달하고 있는 상황이라 처음에 비하면 여유로웠지만 여전히 불편한 마음이 들었던 비비안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그렇다 치고 다른 사람들은 전부 어디 있지?”
[“이 자리에 없는 자들은 각자에게 맞는 인연에 따라 흘러가고 있지.”]
“이해할 수 없어. 넌 분명 아드리아스한테 용건이 있어서 이런 일을 벌인 거야, 그렇잖아.”
[“모든 것은 굴레에 따라 움직인다. 본인은 그저 그 굴레에 기름칠을 했을 뿐. 때가 되면 다 이해하게 될 것이다.”]
“굳이 직접 기름칠을 했다는 건 아드리아스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뜻?”
[“그 또한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결국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비비안은 다시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그들을 조마조마한 눈으로 보던 아가타는 무릎을 감싸고 앉은 채 중얼거렸다.
“여기서 다 죽는 건 아니겠죠.”
“아드리아스가 해낼 거야.”
“아드리아스 님께서 시험을 전부 통과해도 우리가 이 장소를 벗어난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아가타의 말에 합장을 하고 있던 루나가 만세를 했다.
“나갈 수 있어!”
“네?”
“나갈 수 있어. 걱정하지 마, 아가타.”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이는 루나를 보며 아가타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연자가 시험을 모두 통과하면 그대들은 반드시 나갈 수 있다. 애초에 그대들이 이곳에 있는 것 자체가 인과율에 어긋난 일. 그 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고 있어도 된다.”]
어쩌다 한 번씩 돌아와 말을 하고 가던 의지가 다시 희미해졌다.
[“이번에는 여기까지. 다시 오겠다.”]
“또 봐!”
루나가 어딘가를 향해 손을 저어주고 그렇게 의지는 사라졌다.
비비안은 한숨을 내쉬며 그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노아는 괜찮을까.”
“괜찮을 거야!”
루나가 확신을 가지고 대답하자 비비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자신들이나 노아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온몸이 얼어붙고 있어 덜덜 떨고 있는 아드리아스가 문제였다.
“아드리아스.”
자신이 저 자리에 대신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어야하는 게 너무나 비참하게 느껴졌다.
“친구는 괜찮아. 친구는 강해.”
“응.”
“그니까 우리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해야 돼.”
“응?”
갑작스런 루나의 말에 비비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나는 갑자기 가부좌를 틀고 앉더니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깨달음을 얻어서 나가는 거야.”
“깨달음?”
“명상의 시간.”
“명상의 시간?”
4차원적인 루나의 행동에 비비안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아가타를 바라봤다.
그러나 아가타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때 눈을 반개한 루나가 나직하게 비비안을 불렀다.
“비비안.”
“응.”
“오러 마스터가 돼야지.”
“······응.”
맥락을 알 수 없는 루나의 말에 비비안은 루나를 따라 앉았다.
루나의 말대로 여기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다고 아드리아스의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뜬금없고 맥락 없는 말이었지만 걱정을 할 시간에 강해지는 게 더 이로웠다.
‘다시는 아드리아스가 곤경에 처하지 않게.’
오러 마스터가 된다면······.
지금보다는 할 수 있는 게 많아지지 않을까.
비비안은 어느새 눈을 감고 명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 놀라운 집중력에 루나가 빙그레 미소 짓더니 아가타를 눈짓했다.
마치 넌 안하고 뭐하냐는 모습이었다.
“으, 응.”
결국 아가타도 루나의 압박에 못 이겨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핏빛 공터는 세 명의 여인이 눈을 감고 있는 기묘한 모습이 되었다.
**
휘이잉---!
한빙지옥의 대왕인 송제가 있는 곳은 거대한 협곡의 중턱이었다.
생불은 이 한기와 추위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지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고 오로지 나만 한걸음씩 힘겹게 발을 떼고 있었다.
쩌저적!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발이 땅에 얼어붙었다.
그리고 다시 발걸음을 떼면 생살이 뜯기는 고통과 함께 발이 떨어졌다.
“휘유, 고통에 대한 내성이 상당하시군요!”
날 놀리는 건 가 싶었지만 생불은 정말로 감탄한 기색이었다.
어떻게 표정도 없는 놈한테 그런 걸 느낄 수 있는지 아이러니할 뿐이었다.
“이제 거의 다 도착했으니 걱정 마십시오. 송제 대왕께서도 이런 야외의 환경을 싫어해 협곡 중턱에 동굴을 만들어놓고 지내시거든요.”
바람이 부는 건 조금 덜하다는 건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지금은 몰아치는 바람과 눈발로 인해 두 눈을 뜨기 힘들 지경이었으니까.
“저기 보입니다!”
새하얗게 쏟아지는 눈으로 인해 희미하게 보이는 호롱불이 아른거렸다.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이를 물고 그 호롱불만 따라서 걸어갔다.
터벅!
“하아.”
눈발로 인해 보이지도 않았던 동굴로 어느새 도착했다.
겨우 한발자국 차이로 아예 다른 세상이 되어버리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동굴 내부는 꽤나 화려했다.
동굴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반듯했으며 온통 금색으로 칠해져있었다.
추운 건 여전했지만 생불의 말대로 바깥에 비하면 선녀나 다름없었다.
“어떻습니까? 확실히 괜찮죠?”
끄덕.
나는 얼어붙은 입술로 말을 하는 것 대신에 고개만 끄덕였다.
“하하하! 그렇게 고개를 많이 끄덕이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눈은 없어도 볼 수는 있거든요!”
내가 추위로 벌벌 떠는 게 고개를 끄덕이는 거라 생각했나 보다.
놀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뭐라 하지도 못하겠네.
뚜벅-
생불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안쪽에서 누군가가 걸어왔다.
나타난 이의 모습은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사람, 아니 영혼이었다.
“생불 대왕님, 어서 오십시오.”
“오? 자네는 구호영이 아닌가? 어느새 송제 님의 시중을 드는 역할까지 올라선 모양이군.”
“예이, 그렇게 됐습죠.”
생불도 대왕이었어?
그런데 말을 하는 걸 보면 지옥들을 관리하는 대왕들보다 직책이 낮은 듯했다.
둘의 대화를 들으며 얼어붙은 몸을 녹이고 있자 구호영이라는 영혼이 나를 바라봤다.
“이 자가 그······?”
“그렇다네.”
구호영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영 못마땅한 눈빛으로 툴툴거렸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어 보이는 사내로군요.”
“어허. 호영, 그렇게 말하지 말게. 무려 도산지옥을 최단 시간으로 통과하고 초강 대왕님이 인정한 사내일세.”
구호영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시선을 보내왔지만 반응할 생각도 못했다.
한빙지옥의 한기란 언젠가 겪어봤던 북부의 추위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강했기에 상대가 뭐라 하던 신경도 안 쓰였다.
“흐음, 일단 가시죠. 송제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구호영이 둥둥 뜬 채 앞서 나아가기 시작했고 생불이 내게 호롱불을 비추며 손짓했다.
“가시죠.”
둘의 뒤를 따라 금색 일색인 동굴을 걸었다.
화려하게 꾸며진 곳인 만큼 여러 조각들이나 장식들도 곳곳에 눈에 띄었는데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대문이었다.
-으잉? 웬 녀석이냐.
거대한 얼굴이 달린 문.
그것은 일전에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마치 도깨비와 같이 두 개의 뿔이 달린 거대한 얼굴.
‘모네의 미로? 도깨비의 문?’
아카데미 평가로 들렀던 유적, 모네의 미로.
그 미로에서 만날 수 있는 함정 중 하나였다.
-얼마 만에 살아있는 자냐. 천 년은 넘은 것 같군!
“문이나 열어라, 동중영.”
-보채지 않아도 열거다. 시중이 되었다고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군.
투덜거리던 도깨비 문이 이내 반으로 갈라졌다.
얼굴도 반으로 갈라졌기에 그 모습이 사뭇 그로테스크했다.
-어서 들어가라.
문이 열리자 구호영이 먼저 들어가고 생불과 내가 차례로 들어섰다.
그때 도깨비의 문이 지나가는 나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흐흐. 맛있게 생겼군.
문 주제에 별 생각을 다하네.
가뿐하게 무시하고 앞을 보자 거대한 대전이 보였다.
대전 또한 온통 황금색과 붉은색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마치 중국의 사극에서나 볼 법한 모습이었다.
‘뭐가 많네.’
대전에서 왕좌가 있는 곳까지 난 길에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언데드들이 눈에 띄었다.
이들 또한 황금으로 된 갑주를 입고 투구까지 쓴 차림새였는데 화려함과 별개로 강해보이는 녀석들이었다.
“송제 전하! 신, 구호영이 시험을 치를 자를 데려왔나이다.”
기대했던 대로 대전의 끝에는 거대한 왕좌와 함께 누군가가 앉아있는 게 보였다.
긴 생머리를 한 성별을 알 수 없는 미묘한 느낌의 인물이었다.
“흐음.”
아직 그에게 닿으려면 한참의 거리가 남아있었지만 어째서인지 구호영은 더 다가가지 않았다. 그리고 송제도 그게 익숙한 듯 그 멀리에서 나를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이름이 무엇이었지?”
목소리도 중성적이네.
일단은 그의 물음에 대답해주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입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우리 쪽의 이름이 아니라 조금 어렵구나. 뭐, 좋다. 그런 것보다 일단 이야기나 좀 하도록 하지?”
송제가 멀리서 흥미롭다는 듯 턱을 되며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화탕지옥에서는 시험을 치르지 않은 게냐?”
“그냥 지나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초강이?”
송제의 반응을 보니 확실히 대왕마다 알고 있는 정보가 다른 모양이었다.
초강은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낌새였지만 송제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초강 그 녀석은 원체 아는 것도 많고 비밀도 많았던 아이라 그럴 수 있지. 혹시 뭐라고 하더냐?”
“본인의 시험은 제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필요하지 않다?”
내 말을 들은 송제가 천천히 곱씹었다.
그건 내 옆에 선 구호영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의문이 가득 담긴 표정이었다.
“호영아.”
“예이, 전하.”
“표정이 다 드러나는구나. 뭐가 그리 궁금하느냐?”
“송구하옵니다, 전하.”
“죄송할 필요 없다. 뭐가 궁금한지 말해보거라.”
구호영은 잠시 나를 보더니 이내 송제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지옥에 들어온 산 자가 많지는 않지만 몇몇 정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유독 이 자에게만 여러 전하들께서 관심이 많고 말이 많은지 의문이 들었사옵니다.”
“그 이유는 곧 알 수 있을 것이야.”
송제는 그리 말하더니 내게 미소 지어보였다.
“짐은 초강처럼 아는 게 많지는 않다. 모자람을 알고 있는 것도 곧 짐의 능력이겠지.”
송제는 그리 말하더니 좌석에서 일어났다.
“그러니 짐은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바라보려고 한다. 시험을 시작하지.”
쩌저저저적!
황금색의 방이 순식간에 얼어붙고 좌우에 정렬해있던 언데드들이 움직였다.
“짐이 진정한 지옥이 뭔지 그대에게 느끼게 해주마.”
**
푸득푸득-
뻐꾹!
새 울음소리가 울창한 대나무 숲을 가득 메웠다.
대나무 숲 한 가운데에는 하얀색의 안대로 눈을 가린 여인이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드문 일이군요. 당신께서 이곳까지 오시다니.”
조용히 새의 울음을 듣던 여인은 어딘가로 시선을 돌리며 나긋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마치 처음부터 있었다는 듯 붉은 피부에 오른쪽 이마에 외뿔이 달린 사내가 서있었다.
“염라.”
여인이 이름을 말하자 붉은 피부의 사내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머리카락이 불꽃으로 이루어진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대나무 숲이 고통에 찬 바람을 흘려보냈다.
“들었나? 산 자가 지옥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진광의 시험을 66일 만에 통과했다지요?”
“알고 있군. 조금 전에 들은 소식에 의하면 초강은 그냥 보냈다고 하더라고. 지금쯤 송제와 있겠지.”
염라는 입에서 거친 불길을 뿜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 여인, 오관대왕은 무표정하게 물었다.
“그래서. 이곳까지 오신 연유가 그 아이 때문입니까?”
“그래.”
염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촉이 왔거든. 그 녀석으로 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겠다는 촉이. 그러니 녀석은 내가 여기서 데려가야겠어.”
< 298화. 한빙지옥(寒氷地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