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5화. 도산지옥(刀山地獄) >
붉은색으로 점철된 공간.
바닥은 얇은 피 웅덩이로 이루어져 있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당장 아드리아스를 돌려줘.”
분노로 인해 귀기어린 눈빛을 보이는 비비안이 허공에 대고 스산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는 그 어떠한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듣고 있는 거 다 알아. 대답해.”
비비안이 다시 한 번 말하자 아무것도 없었던 허공에서 무언가의 의지가 전해져왔다.
[“그대는 나의 의지가 괴롭지 않은 건가.”]
“아드리아스가 사라진 게 더 괴로워. 그니까 빨리 돌려줘.”
[“연자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그대들은 무궁한 세월동안 이곳에서 지내야한다. 그가 시험을 치르는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
“그 시험, 굳이 아드리아스한테 시키려던 거 다 들켰어.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비비안이 검을 뽑아들며 사납게 부르짖었다.
“도대체 아드리아스한테 왜 그러는 거야!”
[“······그대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 또한 이치에 맞는 일이다. 그대들이 나를 찾아오게 된 것도, 또한 연자가 시험을 치르게 된 것도 모두 그러한 맥락이지.”]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던 관세음보살이 처음으로 암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 감정에서 비비안과 루나도 불가항력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거야?”
루나가 오팔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물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러하다. 내 의지로도 어찌할 수 없는 흐름이야.”]
“그럼 우리는 계속 이렇게 기다리기 만해?”
[“내 힘으로 연자의 상황을 보여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대들이 과연 그걸 원할까.”]
“보여줘!”
루나가 소리쳤고 비비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알아야겠어. 아드리아스가 어떤 상황인지.”
[“이 공간에는 연자와 가장 밀접한 이들만 함께 들어온 상황이다. 그 이야기는 곧 그대들에게 있어서 연자는 소중한 존재겠지.”]
관세음보살의 안타까움이 짙게 묻어져 나왔다.
그 감정이 마치 냄새로 맡아지는 듯했는데 향을 피운 것과 비슷했다.
[“그런 연자가 고통 속에서 시험을 치르는 것을 굳이 보는 건 추천하지 않는다.”]
“아니, 볼 거야.”
비비안이 굳게 말했다.
그 강렬한 의지에 결국 관세음보살이 탄복했다.
[“시험은 하루 이틀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한 번 연자의 상황을 보여주기 시작하면 그대들은 멈추지 않고 그가 고통 받는 모습을 지켜봐야해.”]
“여기서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보다 차라리 그게 나아.”
“으으······.”
그때 마지막까지 정신을 잃고 있던 아가타가 서서히 눈을 떴다.
그녀의 후드는 벗겨져 있는 상태였는데 주변을 확인하더니 놀란 얼굴로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
“여긴, 어디!”
[“좋다. 보여주마. 그대들이 원한 결과다.”]
아가타의 반응에도 그 누구 하나 관심을 가지지 않는 가운데, 핏물이 일렁이던 바닥의 수면에 어떤 화면이 비춰지기 시작했다.
“아! 친구!”
루나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였다.
퍼버버버벅!
순식간에 고슴도치처럼 변해버린 아드리아스를 보며 비비안이 절규했다.
“아드리아스!”
빈틈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하게 칼이 박힌 아드리아스의 모습은 산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 끔찍한 모습을 지켜본 루나는 다리를 떨더니 이내 주저앉아 아드리아스가 비친 수면을 만졌다.
“치, 친구?”
[“그대들이 선택한 일에 책임을 지고 그의 고통을 지켜보길 바란다.”]
관세음보살은 그 말을 끝으로 존재감이 흐려졌다.
하지만 비비안과 루나는 보살이 사라지든 말든 수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참상에 비명만 지를 뿐이었다.
“어째서······어째서.”
입술을 떠는 비비안이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루나는 여전히 주저앉은 채 고통에 몸을 떨고 있는 아드리아스의 얼굴을 만지려 노력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
공허한 아가타의 물음이 대답을 구하지 못하고 흩어졌다.
**
“프읍.”
“다시.”
어떻게 된 일인지 고통을 견딜 수가 없었다.
지옥이라 그런 건가. 사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이제 그 자신감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한심해. 고작해야 한 시진도 견디지 못했어. 아마 넌 나랑 이곳에서 영원히 함께 해야 할 팔자인 모양이다.”
진광의 말에 반박할 힘도 없었다.
실제로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기에 나는 몸에서 뽑혀나가는 칼들의 감촉을 느끼며 숨을 고를 뿐이었다.
‘시험을 통과할 방법.’
분명 존재할 거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좌절감에 몸이 쓰러질 것만 같았다.
“너 그거 알아? 벌써 6일이나 지났다는 거. 처음부터 쭉 버텼으면 벌써 내일 통과였을 텐데, 하하.”
진광은 칼들을 조종하며 별다른 행동 없이 입만 털었는데 저 입만 터는 게 은근히 내상을 입혔다.
‘벌써 6일······.’
지옥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이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는 정말 영원히 이곳에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어렴풋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짝!
“뭐해?”
내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뺨을 강하게 치자 진광이 비웃었다.
“그런다고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으면 여기가 괜히 지옥이라고 불리지 않았겠지. 하하하!”
“어차피 처음부터 시작이니까 한 마디만 하자.”
나는 진광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 입을 조금만 다물어주면 통과할 것 같거든. 좀 조용히 해주라.”
“뭐? 하하하하하!”
진광이 폭소를 터트리며 허공에서 굴렀다.
그리고는 손을 휘저었다.
“그래, 그럼 한 번 조용히 있어볼게. 시작.”
이내 그의 손짓에 따라 칼들이 비상하자 나는 온몸을 긴장시키며 두 눈을 부릅떴다.
‘관건은 결국 저 칼들을 피하는 거야. 저 칼을 맞고도 버틸 자신이 있으면 상관없겠지만······.’
무려 일주일이나 되는 시간을 저 칼들에 박히면서 버틸 자신은 없었다.
그러니 최대한 피하는 수밖에······.
“일주일동안 피할 수 있을까?”
저 새끼가 조용히 한다고 해놓고······.
그새 이죽거리는 진광을 무시하며 칼날의 폭풍우만 주시했다.
콰가가가각!
이내 엄청난 소음을 내며 연무장 바닥에 박히는 칼들을 보며 급히 몸을 놀렸다.
벌써 6일이라는 시간이 흐른 만큼 조금 익숙해졌지만 역시 너무나 많은 숫자였다.
‘속도도 빨라.’
마나를 사용할 수 없는 몸으로는 저 칼들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도망치는 날 따라잡은 것들은 피해야하는데 이것도 만만치가 않았다.
‘방법을······.’
퍼버버벅!
결국 피하지 못한 몇 개의 칼이 몸에 꽂혔다.
나는 불편해진 몸을 절뚝거리며 포기하지 않고 몸을 놀렸다.
“뭐야, 이번에는 겨우 반 시진이네? 에휴, 넌 답이 없다.”
그새 입을 터는 진광이었지만 그 말이 전해지지는 않았다.
비록 네 군데에 칼이 박혔지만 내 집중력은 최고조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슥-
종잇장과 같은 차이로 날아드는 칼을 피해냈다.
그리고 그것이 우연이 아님을 증명하듯 차례로 칼들을 피해나가기 시작했다.
“호오.”
아슬아슬한 간격.
처음에는 실패해서 몇 개가 몸에 박혔지만 이제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마구잡이가 아니야.’
진광이 부리는 칼들은 일정한 움직임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자 검법이었다.
스윽-
발을 뒤로 빼며 옆으로 회전하자 수십 개의 칼날이 낸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내 쉴 틈 없이 다시 앞으로 나가고 회전을 하며 좌우로 몸을 움직였다.
퍽!
‘음······.’
처음에 박혔던 칼이 방해가 되었다.
다시 허용해버린 공격에 인상을 굳혔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집중이 살짝 흐트러졌다는 점.
‘아직이야.’
이제 슬슬 실마리가 보이는 시점에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몸에 박힌 검을 빼냈다.
쑤욱-
더럽게 아프네.
캉!
빼낸 칼로 날아드는 것들을 막았다.
생각해보니까 이런 방법도 있었군. 6일 동안 난 뭐한 거지?
‘뭐하기는 이렇게 적게 박힌 적이 처음이니까 그렇지.’
나는 마저 다른 칼도 뽑아내며 몸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그 중 하나만 손에 쥔 채 사방을 감싼 칼의 폭풍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촤르르륵----!
콰가가가가강!
한 자루의 검과 폭풍이 격돌했다.
**
진광은 바로 앞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지켜보며 소름이 돋는 팔을 쓸었다.
어느새 비웃듯이 말하던 입도 멈춘 상태.
‘인간이 맞나?’
이곳은 지옥.
분명 녀석은 기, 아니 마나를 사용하지 못할 게 자명했다.
그렇다면 현재 그의 신체는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 없다는 소리.
“도대체 어떻게······.
진광이 중얼거리는 사이에도 한 자루의 검을 든 아드리아스는 미친 듯이 검의 폭풍에 맞서 싸웠다.
카가가가가각---------!
그의 움직임은 빨랐다.
하지만 마나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 그저 훈련으로 쌓아올린 노련한 검사 정도의 빠르기.
‘그래, 놀라운 건 빠르기가 아니야.’
아드리아스가 검의 폭풍을 상대로 버티고 있을 수 있는 이유.
그것은 바로 미쳤다고 밖에 표현이 안 되는 감각이었다.
촤라랑-----
그의 몸이 리듬을 타듯 움직였다.
분명 칼날이 그의 몸에 틀어박혔어야 할 타이밍에 기가 막힌 동작으로 회피하고 막아냈다.
가히 천재적이라고 불릴 움직임들.
“천재.”
그렇다.
그는 천재였다.
진광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나 그동안 수많은 천재들을 보아왔기에 단숨에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진광이 이리 놀란 이유는 다름 아닌 시간에 있었다.
‘고작 6일. 고작 6일이라고.’
그 어떤 인물도 진광의 시험을 6일 만에 파훼한 적은 없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결과를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만큼의 진전을 이토록 빠른 시간 내에 달성한 건 아드리아스가 처음이었다.
‘아니군. 녀석이 있었어.’
문득 떠오른 한 인물이 있었지만 그는 예외로 두기로 했다.
그를 제외한다면 아드리아스가 독보적인 건 사실이었으니까.
쾅!
퍼버버버벅!
아드리아스가 들고 있던 검이 견디지 못하고 날아갔다.
곧이어 다시 고슴도치처럼 변한 아드리아스가 무릎을 꿇었다.
“······.”
그러나 그는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고 떨리는 손을 들어 천천히 몸에 박힌 검들을 뽑아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진광이 허공을 유영하며 나직하게 혼잣말을 했다.
“간만에 재밌는 장난감이 들어왔어.”
어쩌면······.
갑자기 떠오르는 한 생각을 뒤로 하고 진광이 미소 지었다.
지금은 그런 복잡한 사정보다 이 순간을 즐겨야지.
“고작 그것밖에 안 되냐! 아직 세 시진 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이미 제자리에 멈춘 이상 아드리아스의 패배였다.
검을 뽑아도 아직 허공에 떠있는 수천 개의 칼들이 차례로 박혔고 이내 아드리아스의 입에서 헛기침이 나왔다.
“크흠.”
“아이고, 다시 처음부터!”
지옥의 칼날은 평범하지 않았다.
살짝이라도 베이면 극심한 통증을 유발하는 게 바로 진광이 가진 검들의 정체였다.
그런 검들을 온몸에 박고도 침묵을 유지했던 아드리아스가 정상의 범주를 넘어선 인간이라는 반증이었다.
‘흐흐흐.’
진광은 지우려고 했지만 자꾸 떠오르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어쩌면 아드리아스 크롬웰은······.
‘나의 진전을 이을 수도 있겠군.’
도산지옥의 대왕, 진광(秦廣).
그는 속세에 후계자를 두려는 발칙한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 295화. 도산지옥(刀山地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