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9화. 히든 피스 그리고 진화 >
왕궁 부지 밖으로 나온 나와 비비안은 그대로 북쪽을 향했다.
우리가 남쪽에서부터 올라왔으니 왕궁 북쪽으로는 미지의 땅이었다.
미지의 땅이라고 해도 풍경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아기자기한 주택 건물들과 여러 중세 양식의 건물들이 솟아있었고 거리를 배회하는 언데드가 즐비해있었다.
빠각!
비비안은 내가 움직이기도 전에 한 시도 쉴 틈 없이 길을 만들었다.
내가 마법이라도 사용해서 도와주려고 해도 고개를 저으며 막았다.
“내가 호위 기사.”
그게 도대체 지금 상황이랑 무슨 상관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원하니 그냥 놔두기로 했다. 적어도 웨이브로 인한 물량빨이 아니라면 이상 그녀를 위험하게 할 적은 이 근처에 없었으니까.
‘저기 있군.’
북쪽을 향해 계속 걸어가자 드디어 내가 찾던 건물이 나타났다.
한 눈에 봐도 특이해 보이는 그 건물은 긴 원통형의 탑이었다.
아마 감옥이지 않았을까 싶은 외형과 분위기였는데 품 안에 넣어둔 조각상을 의식하며 비비안에게 말했다.
“생각해보니 건물 내부를 수색해본 적은 없군요.”
“응. 뒤져볼까?”
“저 건물이 좀 신경 쓰이는데 어떻습니까?”
내가 가리킨 건물을 본 비비안은 대수롭지 않게 끄덕였다.
“응. 가자.”
크기도 크기지만 다른 건물들과 달리 회색 일색이라 더욱 수상한 건물.
메쥬르에게서 구한 이 조각상이 없더라도 언데드가 많은 일종의 꿀 사냥터 중 하나였다.
-콰르륵.
건물 앞에 다다르자 다른 곳과는 달리 입구를 지키고 선 정예 언데드들이 보였다.
스켈레톤 워리어로 보이는 두 마리의 언데드들은 생전에 이곳의 경비였는지 창을 치켜 든 모습이었다.
‘그래도 비비안한테는······.’
내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비비안이 달려 나가 스켈레톤 워리어를 난도질했다.
쾌검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하고 환검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검.
광검(狂劍)이라고 해야 할까?
콰르르륵-
순식간에 스켈레톤 워리어들을 처리한 비비안이 돌조각을 주워들었다.
그리고는 총총걸음으로 다가와 내게 건넸다.
“많이 나왔어.”
“예.”
내 지금의 역할은 그저 짐꾼.
용아병이 들고 있던 공간 확장 가방을 어느새 꺼내서 등에 매고 있었다.
“들어가죠.”
“응.”
굳게 닫힌 문은 힘으로 부쉈다.
그러자 안에 있던 언데드들이 일시에 우리를 쳐다봤다.
소름 돋는 연출이네.
“많네. 많이 모을 수 있겠어.”
비비안은 그런 언데드를 보며 오히려 잘됐다는 느낌으로 말하며 튀어나갔다.
이내 한 차례 칼춤이 불고 입구 안쪽에 있던 언데드들은 순식간에 정리가 되었다.
1층은 넓은 홀처럼 생겼는데 주위를 둘러보면 동그랗게 감싼 철창들이 즐비했다.
철창 안쪽에도 언데드가 발작하고 있었는데 우리를 보며 손을 뻗는 모습들이 인상적이었다.
“올라갈까?”
돌조각을 수집한 뒤 비비안이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높이 솟은 건물인 만큼 누구나 위로 올라가려는 생각을 하겠지만 우리의 목적지는 위가 아니었다.
“잠시만요.”
나는 마치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어딘가로 다가갔다.
그곳은 이 홀의 중앙이었는데 내 가슴까지 오는 얇은 기둥이 두 개가 존재했다.
그리고 한쪽에는 익숙한 조각상이 올려져있었고 나머지 한쪽은 비어있는 상태였다.
“이거······.”
비비안도 눈치 챘는지 조각상을 가리키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품에서 메쥬르에게서 구입한 조각상을 꺼내 자연스레 기둥 위에 올려놓았다.
쿠구구궁!
기계장치가 작동하는 소음이 울려 퍼지며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내 조각상이 올려져있던 기둥들이 땅 밑으로 내려가더니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연이네요.”
“······.”
비비안이 말없이 계단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내가 뭘 하든 크게 놀라지 않는 모습이랄까.
‘위에도 싹 다 털어주면 좋은데······.’
위로 가도 이득 볼 건 많았다.
언데드가 많은 건 물론이고 가져다 팔만한 고대 시대의 골동품도 이곳저곳에 있었지만 12시간이라는 약속 시간을 정해놓은 탓에 빠르게 내려가기로 했다.
“내려가 볼까요?”
“응. 내가 먼저 갈게.”
스멀스멀 올라오는 끈적한 기운에 비비안의 얼굴이 굳는 게 보였다.
그녀는 나를 호위해줄 수 있는 자세와 위치를 선정하고 천천히 앞으로 먼저 나아갔다.
번쩍!
내가 라이트 마법을 시전하자 주위가 환해졌다.
계단은 원통형 건물을 따라 빙 둘러서 이어져있었는데 워낙 큰 건물인 만큼 계단의 옆은 낭떠러지처럼 느껴지는 길이었다.
그리고 내 강력한 라이트 마법으로도 바닥까지는 빛이 닿지 못했다.
그만큼 넓고 깊다는 뜻이겠지.
-히히히히······.
중간쯤에 내려오자 드디어 신호가 왔다.
섬뜩한 웃음소리에 앞서 걷는 비비안의 팔에 닭살이 돋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괜찮아요. 아마 벤시일 겁니다.”
뒤에서 차분히 말해주자 어느새 멈췄었던 비비안이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냥 경계했어.”
“예?”
“무서웠던 게 아니라 그냥 좀 살핀 거야. 그래서 멈췄었어.”
내려가던 도중 갑작스런 비비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방금 멈췄던 거에 대한 변명을 한 건가?
“······아무것도 아니야. 잊어줘.”
본인도 변명을 했다고 느꼈던 모양인지 다시 말을 돌렸다.
의외의 모습에 나는 비비안이 귀신을 무서워하나 싶었다.
그러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특히나 나와 나태의 결계에서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그녀는 유령 같은 존재를 겁내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비비안?”
“응?”
비비안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돋았던 닭살은 여전했고 몸도 살짝 떨려오는 게 느껴졌다.
이건 아무래도······.
‘섬의 부작용인가.’
감정이 증폭되는 마나 이상 현상.
그를 방지하기 위해 목걸이 형태의 아티팩트도 제작했는데 온전히 막아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비비안은 어느새 식은땀까지 흘리며 안색이 파랗게 질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내 앞을 막아서며 걷고 있었다.
“비비안, 멈춰 봐요.”
“응.”
그녀는 고분고분 내 말을 들으며 멈췄다.
식은땀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이상이 있으면 바로 저한테 말씀해주셔야 돼요. 아시겠죠?”
“응.”
“일단 이 약부터 드세요.”
나는 미리 만들어왔던 손톱 크기의 포션을 건넸다.
안 그래도 아가타를 플레이했을 당시에 가장 성가셨던 게 언데드나 웨이브도 아닌 이 이상 현상이었다.
나는 비비안이 느끼고 있을 공포의 감정이 얼마나 클지 짐작이 되기에 오히려 대단하게 느껴졌다.
‘저 상태로도 나를 위해 티내지 않고 앞장 선 건가.’
가슴이 저릿한데.
비비안은 내가 건넨 포션을 들이키더니 이내 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 것 같았지만 언제 또 이상 현상이 발현될지 모르니 미리 포션을 여러 개 건넸다.
“가지고 계세요. 만약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면 바로 드시고요.”
“고마워.”
덤덤하게 말하는 비비안이었지만 표정이 좋지 않았다.
짐이 됐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오히려 그런 그녀를 향해 웃어보였다.
“항상 감사해요, 비비안.”
“응?”
“비비안이 아니었으면 전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예요.”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하자 왠지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물드는 게 보였다.
이미 나를 향한 그녀의 감정이 뭔지 알기에 붉어진 비비안의 얼굴을 보며 나도 괜히 쑥스러워져서 손을 놓았다.
“······더······.”
“예?”
“더 잡아줘.”
망설이는 듯하다가 확실히 말하는 비비안이 먼저 내 손을 잡았다.
“더 고맙다고 해줘. 내가 필요하다고 해줘.”
“예, 많이 해줄게요.”
비비안의 어리광 부리는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신선했다.
몰랐던 그녀의 면모를 보게 된 것 같아 괜히 기쁘기도 했고.
“제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요. 비비안은 제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사람 중 한 명이에요.”
“응.”
말로 하니까 괜히 부끄러웠지만 아무렴 어때.
비비안이 행복하다면 그걸로 오케이다.
그렇게 우리는 잠시 가만히 서서 대화의 시간을 보냈다.
**
마침내 바닥까지 내려온 우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나가며 주변을 확인했다.
빛이 없는 공간인 만큼 내 라이트 마법이 필수였는데 흐릿하게 날아다니는 벤시들이 눈에 띄었다.
‘벤시는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지.’
돌조각도 떨구지 않고 건드리면 괜히 피곤하기만 한 몬스터였다.
그리고 앞으로 가야할 길이 꽤 남아있는 만큼 초반부터 힘을 뺄 필요도 없었다.
“희한해.”
우리가 걷는 공간은 기다란 굴이었다.
바닥까지 내려오자 발견하게 된 건 이 굴이었고 길이 여기밖에 없는 이상 가야할 곳도 이곳뿐이었다.
“아!”
“준비하겠습니다.”
거대한 굴을 따라 걷던 우리는 갑자기 양옆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인기척에 즉시 전투 준비를 했다.
그리고 내가 원래 예상했던 대로 굴의 양쪽에서 언데드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구와아아악!
-그르륵.
그 하나하나가 정예 언데드들.
게다가 물량도 굉장히 많았다.
“언데드를 소환하겠습니다.”
“응.”
이미 내가 흑마법사인 사실을 탑에서 나온 이후 고백했기에 거리낄 게 없었다.
비비안은 오히려 내 비밀을 알게 됐다는 사실에 기뻐했었지.
‘실제로 보니까 박력이 대단하네.’
쏟아져 나오는 언데드들은 징그러울 정도로 많았다.
아무리 비비안과 나라고 해도 아무 손해 없이 이만한 숫자를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아가타를 플레이했을 때는 모든 인원들을 데리고 와도 사상자가 생길 정도였으니 당연한 이야기.
우웅---
칠흑의 아공간이 열리며 내 언데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따다닥!
-따각!
모습을 드러낸 건 백 마리가 조금 넘는 용아병.
북부 전쟁에서 손해를 입은 것도 다시 모두 거둬들여 수리가 끝난 상태였다.
“물량 싸움이라면 자신 있지.”
용아병도 일종의 정예 언데드.
그 숫자가 백이 넘으니 그 위용이 대단했다.
뒤를 이어서 니켈과 티무르, 그리고 미리내까지 소환이 되었다.
-크허엉!
딱딱!
-헤헤.
루도랑 크리브마허는 지하라서 소환하지 않았다.
천장이라도 무너지면 큰일이지.
“전부 부숴라.”
내 명령에 언데드들이 순식간에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콰득!
꽈아앙--!
꽈지지직!
이게 다 아이템이란 말이지. 좋다, 좋아.
히든 피스인 이 지하 공간을 모두 클리어하면 네임드 아이템 두 개 씩은 얻을 수 있을 정도의 돌이 모일 거다.
물론 메쥬르가 교환을 해주지 않을 거지만.
‘네임드 아이템은 개인당 하나씩 밖에 구입을 못하게 해놨지.’
난 그저 게임 상의 밸런스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어떨지 모르겠군.
콰직!
나도 가만히 있기에는 근질거렸기에 열심히 언데드를 때려 부수자 얼마 가지 않아 적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역시 물량에는 물량이라고, 백 마리의 용아병은 엄청난 전력이었다.
빠각!
“끝.”
마지막 남은 녀석을 처리한 비비안이 중얼거렸다.
나는 그 모습을 확인하고 곧바로 마법을 사용해 돌조각을 모아 가방에 넣었다.
“아드리아스, 대단해.”
“별 거 아닙니다.”
여전히 느끼는 거지만 나는 혼자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일인 전력으로는 그 어느 플레이어블보다 강한 상태였다.
‘오히려 세계관 최강자들하고 비교를 할 수준인가.’
띠링!
그때 익숙한 시스템음이 들려왔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진화가 가능한 개체가 탐색되었습니다.]
뭐야, 이번에는 또 어떤 놈이냐.
근데 시스템음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순식간에 시야를 가득 채우는 시스템창을 보며 인상을 굳혔다.
지금 보니까 이거······.
[용아병(정예)의 진화 가능성 38%]
[진화를 할 경우 3 가지의 분기가 존재합니다.]
[진화를 하시겠습니까?]
총 합해서 103마리의 용아병.
그 모두의 진화 가능 메세지가 출력이 되었다.
급한 전투 상황이었으면 크게 곤란했을 상황이었다.
‘진화 가능성이 꽤 빨리 올랐네.’
진화창이 30%에서 나타난다는 걸 알고 있기에 조금 전의 전투로 30% 미만에서 단번에 38%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물론 개체별로 다 달랐지만 대충 35에서 40사이였다.
“좋아, 좋아.”
“뭐가?”
“아, 돌이 많이 모여서 좋다는 뜻이었습니다.”
“응. 좋네.”
아직 사냥할 언데드는 안쪽에 많았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는 히든 피스의 주인인 보스몹이 존재했다.
‘용아병을 소환한 채로 다 쓸어버리면 진화 경험치도 전부 채우겠는데?’
그동안 용아병을 대량으로 소환할 만한 상황이 없었는데 좋은 기회였다.
돌조각도 모으고 히든 피스도 깨고 용아병도 진화시키고, 일석삼조!
< 289화. 히든 피스 그리고 진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