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6화. 시체들의 왕국, 첫 번째 시련 >
띠링!
[히든 던전 ‘시체들의 왕국’에 입장하셨습니다.]
성문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앞선 그룹이 한 차례 날뛰고 간 흔적들이 보였다.
말단으로 보이는 용병만 두 명 정도가 남아서 열심히 돌조각을 줍고 있는 중이었다.
“생각이 있으니까 그렇게 여유로운 거겠지?”
그 모습을 본 노아가 살짝 초조해졌는지 내게 물었고 난 그저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일단은 왕궁이라는 곳까지 길을 뚫어보죠.”
“나! 내가 먼저!”
루나가 신난 표정으로 강림을 사용했다.
그러자 예전에 본 적이 있는 반투명한 낫이 소환되며 그녀의 손에 들렸다.
“가자아아아!”
도도도 달려 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이중으로 된 성문을 지나고 드러난 널찍한 거리에 루나는 갈피를 못 잡고 망부석이 되었다.
“친구! 어디로 가야 돼?”
길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나란히 움직이던 메쥬르를 가리켰다.
“메쥬르가 길을 알고 있을 테니 길안내를 받읍시다.”
“좋아! 어서 길 안내해!”
루나가 닦달하자 메쥬르가 허공에서 스르르 움직이더니 앞장서기 시작했다.
이미 키네인과 파이시 쪽은 사냥에 물이 올랐는지 시야에 보이지도 않았고 샤히 샤마드의 사람들만 저 멀리서 깔짝대고 있었다.
처음에 약속했던 함께하자는 말은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먼저 들어가 버렸는데 괜찮을까요.”
오랜만에 입을 연 아가타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중얼거렸다.
어차피 돌조각을 교환하려면 메쥬르가 있는 곳으로 와야 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우선은 길을 뚫겠습니다.”
나는 북부인들을 앞세우고 출발하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 일행의 전력 중에서 가장 큰 축을 담당하는 북부인들은 앞을 가로막는 언데드가 나타나면 시원시원하게 쳐부숴버렸다.
“돌조각은 본인들이 처리한 몫을 알아서 가져가는 걸로 하겠습니다. 혹시 공동분배를 원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우리야 괜찮다만 그러면 그쪽에 손해가 아닌가?”
북부인 중 하나가 돌조각을 주워들며 물었다.
이타야라는 이름의 대머리에 있는 문신이 유독 눈에 띄는 자였다.
“전 괜찮습니다. 나머지 분들은 어떻습니까?”
“나도 좋아.”
“다 내 거!”
“상관없어.”
비비안부터 루나, 노아가 차례로 대답했고 아가타도 고개를 끄덕였다.
“불만 없습니다.”
“그럼 저희 일행은 그렇게 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사실 공동 분배가 계산하기 편했지만 그렇게 되면 불만이 나올 수도 있었기에 우선은 개별 분배로 정했다.
나중에 가면 돌조각이 누구 소유인지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없어질 텐데 그때 가서 분배 방식을 다시 바꿔봐야지.
왕궁까지 가는 길은 순탄했다.
성 안은 넓고 복잡했지만 대체로 왕궁이란 중앙에 있는 경우가 많아서 일직선으로 가면 되기에 단순했다.
“고대 유적이라고 들었는데 그다지 다를 것도 없네?”
노아가 거리의 모습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집이나 건물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제국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가끔씩 독특한 양식의 건물들도 종종 보였지만 그건 제국이나 다른 왕국도 마찬가지였다.
퍼걱!
화살이 날아들며 파란 스켈레톤의 미간을 꿰뚫었다.
역시 아가타의 궁술은 용병치고는 강했지만 내 예상보다 너무 평범했다.
플레이어블이 아닌 그저 스쳐지나가는 캐릭터로 느껴질 정도.
‘실력을 숨기고 있을 수도 있겠어.’
하필 씬과 엮인 게 확실해진 상황이라 내 마음은 복잡했다.
플레이어블을 적대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와! 왕궁!”
안개로 인해 보이지 않았던 왕궁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왠지 음침하게 생겼는데······.”
노아의 말대로 왕궁은 날카롭고 음침한 생김새였다.
색깔도 성벽과 같이 짙은 파란색이라 그런 느낌이 더욱 강조되었다.
“여기까지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관문이 있습니다.”
메쥬르가 앞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왕궁으로 향하는 입구를 지키는 거대한 덩치의 철제갑옷이 보였다.
“리빙아머.”
흔히 알던 성인 크기의 리빙아머가 아닌 거의 집채만 한 무식한 크기였다.
거대한 철퇴를 양손에 쥐고 있는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보스급은 아닌 정예 언데드였기에 크게 걱정할 건 없었다.
나는 곧바로 마법을 사용하며 검을 뽑아들었다.
“단숨에 부수겠습니다.”
이내 마법이 발동되며 리빙아머의 두 다리가 얼어붙었다.
갑작스러운 마법에 리빙아머가 휘정거릴 때 이타야를 필두로 한 북부인들이 달려갔다.
콰아앙!
북부인 중 하나인 마탐의 도끼가 리빙아머의 철퇴에 막혔다.
하지만 이어지는 나머지 두 명의 후속 공격은 그대로 리빙아머의 목과 명치에 틀어박혔다.
쿠웅!
“단단하군!”
리빙아머의 특성상 공격력은 낮지만 방어력이 높은 만큼 견고함을 유지했다.
그런 북부인들의 공격 뒤로 루나와 노아가 합세했다.
“하하하!”
루나의 낫질이 리빙아머의 정수리에 떨어지고 검게 물든 노아의 팔이 괴력을 발휘하며 리빙아머를 후려쳤다.
비비안은 나를 호위하겠다며 옆에 있었고 아가타도 자신의 화살이 통하지 않음을 짐작하고 가만히 서있었다.
다구리당하는 모습도 불쌍하니까 이쯤에서 끝내줄까.
치이익!
갈락슈르가 붉게 물들었다.
마법을 융합한 오러가 흉흉하게 온도를 높여가기 시작했다.
쿠우웅!
리빙아머의 몸 이곳저곳이 깊게 패였다.
예리함보다는 무식하게 두들겨 팬 흔적이 보이는 리빙아머를 향해 나는 그대로 달려갔다.
“거 더럽게 단단하네.”
노아의 음성이 스쳐지나가고 나는 곧바로 리빙아머의 핵이 있는 부분으로 검을 휘둘렀다.
아무리 단단한 갑주라고 해도 세계수도 갈랐던 무결이 창천일검의 궁뇌일우의 요결을 따라 휘둘러졌다.
콰르릉!
순식간에 검이 6갈래로 갈라져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내리꽂힌 곳은 오직 한 점, 핵이 있는 위치였다.
투둑-
쨍그랑!
-구으으으.
처음으로 소리를 낸 리빙아머가 그대로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북부 용병들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대단하군!”
“그대는 위대한 주술사이면서 동시에 대전사인 건가?”
자기들도 오러 비기를 아껴둔 주제에 놀라기는.
단순 오러 비기를 제외하고 본다면 내 검술의 파괴력과 힘은 오러 마스터라도 따라오지 못하긴 할 거다.
난 마법의 융합과 초월자가 남긴 검술, 그리고 무림에서도 이름 높은 무공을 동시에 사용하니.
“훌륭하십니다. 덕분에 길이 열렸군요.”
그때까지 지켜보고만 있던 메쥬르가 나섰다.
그리고는 리빙아머가 쓰러진 곳에서 열쇠를 하나 주워들었다.
“이게 입구를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열쇠를 구한 것은 여러분들이니 이에 대한 보상도 따로 치르겠습니다.”
“좋군!”
드디어 제대로 된 전투를 치른 탓에 북부 용병들의 기세가 좋았다.
루나는 아직 모자란 눈치였는지 낫을 빙빙 돌리고 있는 게 조금 섬뜩했다.
“들어가죠.”
이내 열쇠를 이용해 왕궁으로 향하는 입구를 열었다.
저 멀리 어렴풋하게 보이는 왕궁 건물을 보면 왕궁의 부지도 더럽게 넓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어?”
먼저 들어간 루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거 봐봐! 멀쩡해!”
그녀가 손으로 가리킨 것은 다름 아닌 언데드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았던 녀석들과는 달리 얌전한 모습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론다! 무사했군요.”
메쥬르가 그 언데드를 보며 아는 척을 했다.
상대는 스켈레톤이었기에 성별을 알 수 없었는데 아무래도 여자였던 모양이다.
딱딱딱!
뭔가 되게 익숙한 소리인데.
“예, 저도 무사했습니다. 혹시 안쪽에도 멀쩡한 이들이 많습니까?”
딱딱!
도대체 어떻게 대화가 통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루나가 중얼거렸다.
“불쌍해.”
“예?”
“이 애들도 아직 본인들이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루나도 저 대화가 들리는 건가?
영혼을 다루는 강령술사인 만큼 알아듣는 게 가능한가 보다.
그러면 니켈하고 대화도 가능하겠는데.
“명심하겠습니다. 혹시 같이 가시겠습니까?”
딱!
“알겠습니다. 부디 미친 자들을 조심해주십시오.”
메쥬르가 공손히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우리를 재촉했다.
“어서 갑시다. 아직 안쪽에 멀쩡한 분들이 많다더군요.”
실제로 이 왕궁 내부에는 언데드 NPC가 몇몇 있었다.
게임에서는 그런 NPC들에게서 퀘스트를 받거나 편의 기능을 이용하기도 했는데 현실에서도 비슷한가 보네.
“처음에 말했던 근무지는 어디입니까?”
“저쪽에 있는 건물입니다.”
그리 멀지 않은 위치였다.
이미 알고 있지만 확인 차 물어본 나는 메쥬르에게 말했다.
“일단 근무지까지 먼저 가죠.”
“아아, 알겠습니다.”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메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제정신인 언데드들을 구하러 온 게 아니라 그저 메쥬르가 우리에게 제대로 된 상점 역할을 하길 바랄뿐이었다.
다행히도 왕궁의 안쪽은 적대적인 언데드가 적었다.
덕분에 순식간에 메쥬르의 근무지 건물로 들어온 우리는 건물 내부의 조금 남아있던 언데드들을 소탕했다.
콰직!
“이걸로 끝입니다.”
아가타가 보고를 올리며 돌조각을 주워들었다.
주변이 깨끗하게 정리된 상태에서 메쥬르가 우리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감사합니다. 여러분들 덕택에 이곳까지 돌아왔군요. 하지만 바깥에는 아직도 미친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처리해서 돌조각을 가져오시면 제가 그에 맞는 보상으로 바꿔드리죠.”
드디어 공훈 상점이 열렸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사냥을 시작하면 될 터.
다른 그룹은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을 거니 큰 걱정은 없었다.
“지금부터 사냥을 하러 가죠.”
“드디어 움직이는 건가! 기다렸다네!”
고용된 처지일 텐데 오히려 나보다 더 즐거워 보이는 이타야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선은 제가 짜겠습니다. 말했던 대로 돌조각의 분배는 각자가 판단해서 가져가세요. 분쟁은 절대 금지입니다.”
“그렇게 하지.”
그때 우리를 보고만 있던 메쥬르가 은근히 말했다.
“혹시 왕궁 부지에서 활동하실 의향은 없으십니까?”
“최대한 적이 많은 곳으로 가려고 합니다. 아무래도 이곳보다는 바깥이 많아 보이는군요.”
“······조심하십시오.”
물론 조심하고말고.
나는 이 던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은 별 것 아닌 듯 보이지만 곧 미친 듯한 난이도로 변한다는 것도.
“금방 다시 오겠습니다.”
“예.”
메쥬르를 일별하고 우리는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목적한 장소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걸음이 급하군. 느긋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이왕이면 빨리 움직이는 게 좋아보여서요.”
메쥬르의 상점을 열기까지는 여유가 있었지만 지금부터는 빨리 움직이는 게 좋았다.
시간을 대략적으로 확인한 나는 곧바로 일행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걸었다.
콰직!
콰득!
길거리에서 언데드들이 어슬렁거리다 우리를 발견하면 달려드는 일이 반복됐다.
그 수가 처음 왕국으로 진입했을 때보다는 적었기에 북부인들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용하네.”
“다른 일행들도 사냥 중인가? 어째 소음이 없군.”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이제 슬슬 시간이 되었다.
목표한 장소까지 거의 다다른 나는 이내 느껴지기 시작하는 기운에 경고했다.
“준비하세요.”
“음!”
다른 이들도 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점점 말도 안 될 만큼 많아지는 기운에 안색이 변해가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 느끼고 있는 건가?”
“아니야, 이건······.”
두두두두두!
-크와악! 크웩!
-구워어어어!
시체들의 왕국의 시련,
그 첫 번째 웨이브가 시작됐다.
< 286화. 시체들의 왕국, 첫 번째 시련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