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1화. 갈등 그리고 기선 제압 >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파이시가 안내하는 길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경로였다.
이미 게임 플레이를 통해 위치를 알고 있는 나조차 이런 식으로 갈 수 있구나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그때는 아가타가 우연히 휘말리는 에피소드였으니까.’
아가타를 떠올리자 문득 그녀에게 시선이 갔다.
아가타는 후드를 뒤집어 쓴 탓에 우리 쪽 일행이라기보다 파이시의 일행 같았다.
이제 곧 씬이나 다른 세력들도 만나게 될 텐데 반응이 궁금하네.
‘만약 씬에 합류한 상태라면······.’
스윽-
고민하던 찰나에 노아가 내 옷깃을 잡았다.
그녀를 내려다보자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이었다.
“아드리아스.”
“왜.”
노아가 까치발을 들며 슬쩍 귓가에 속삭였다.
“저 파이시라는 흑마법사, 익숙해.”
“······나중에 얘기하지.”
“어.”
길을 걷는 중인 지금은 대화가 곤란했다.
만약 노아가 꺼내려는 이야기가 본인의 생체실험에 대한 이야기라면 이 원정 자체를 다시 생각해야했다.
노아가 내게 의탁하기로 한 이상, 그녀도 내 사람이다.
‘만약 노아의 짐작이 맞다면······.’
난 서슴없이 그녀의 복수를 해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은 내가 아이비에게 듣기로 이미 주동자인 흑마법사는 직접 죽였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니 섣불리 행동하지 말고 일단은 지켜봐야지.
나와 노아가 서로 속닥거리자 어느새 비비안이 내 곁에 바싹 붙었다.
그러자 노아는 손을 내저으며 물러났다.
“안 건드려요.”
노아가 유일하게 경어를 사용하는 인물.
비비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와 노아를 보더니 다시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안 건드린다는 게 대체 뭔 소리냐.
뭔가 오해의 소지가 있는 억양이다.
그렇게 한동안 산의 잔도를 따라 걷다가 어느새 라고의 등에 업힌 루나가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걸어가?”
파이시는 의외로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이틀. 다른 녀석들을 만나는 건 내일 한 번, 그리고 도착하기 직전에 한 번.”
“파이시.”
“또 왜.”
“저 사람들은 언제 소개해?”
루나가 손끝을 들어 지금까지 말 한 번 꺼내지 않은 인물들을 가리켰다.
“궁금해!”
“야영할 때 말하지.”
“나 지금 궁금한데?”
“참아.”
나도 슬슬 저들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아마 내가 알고 있는 인물들일 가능성이 높았는데 이번 원정에는 신분을 숨기지 않고 온 이상 경계는 해두고 있어야했다.
‘여차하면 죽여야 할 수도 있으니까.’
지피지기면 백전불패.
상대를 알면 그에 따른 대처가 수월해진다.
언제나 긴장을 늦출 수는 없는 노릇이지.
“어두워진다! 이제 야영하자!”
산 속이라 그런지 해가 금방 지기 시작했다.
루나의 신난 목소리와 함께 우리는 적당한 장소를 골라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군대에 있었을 때처럼 야영을 준비하려 하자 아가타가 다가와 내 일을 뺏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넌지시 말했다.
“그 후드는 계속 쓰고 있을 생각입니까?”
“······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각하께서 거슬리신다면 벗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편한 대로 하세요.”
“각하께서도 이미 저에 대해 들었다고 하시니 제가 혼혈이라는 걸 알고 계시겠죠?”
“예, 알고 있습니다.”
아가타는 잠시 후드를 움켜쥔 채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걷어내기 시작했다.
갈색의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이내 짐승의 귀가 보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묘족.
그 앙증맞은 짐승의 귀는 고양이의 그것이었다.
“의뢰주님께 모습을 숨기는 것도 무례가 되겠죠.”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원한 건 당신의 실력이니까요. 오히려 그 모습이 신경 쓰여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곤란합니다.”
아가타는 플레이어블 중 유일한 궁수 캐릭터였다.
묘족의 혼혈로서 뛰어난 신체능력과 감각을 지닌 그녀는 원래였으면 여러 기연을 만나 강력한 궁수로 성장해야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아가타는 내가 괜찮다고 거듭 말하자 다시 후드를 썼다.
내가 보기에는 귀엽기만 한 외형이었는데 그게 당사자에게는 아닌 모양이었다.
물론 아가타의 스토리를 알고 있으니 이해가 가니까 나도 배려해주는 거였지만.
사실 그녀의 말대로 용병이 의뢰주에게 모습을 숨기는 건 썩 좋은 태도가 아니었다.
“아드리아스! 나무!”
야영지에서 나를 기다리던 루나가 쫄래쫄래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가타와 장작더미를 나눠들고 돌아왔다.
스릉-
근데 이건 또 뭔 상황이냐.
“말 한 마디 했다고 성질은······.”
야영지로 삼은 공터의 한 가운데에서 비비안이 차갑게 굳은 얼굴로 검을 뽑아들고 서있었다.
그런 그녀의 곁으로 노아도 적개심 어린 표정으로 말을 한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마침 북부인들은 가볍게 사냥을 하러 갔고 파이시도 잠깐 자리를 비웠기에 이 자리에는 파이시의 일행들과 우리밖에 없었다.
내가 등장하자 투덜거리던 파이시의 일행은 아무 말도 없이 뒤돌아 걸어갔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돌아가는 상대에게 묻자 비비안이 대신 대답했다.
그녀는 검을 집어넣고는 내게 다가와 장작을 대신 들어줬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
“무슨 일이 있었죠?”
“그냥 치근댔어.”
비비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며 장작을 공터에 내려놓았다.
이내 루나가 마법으로 불을 붙이자 금세 타오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얼굴이나 이름이 궁금했는데 잘 됐네요.”
나는 곧바로 움직여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파이시의 일행들에게 다가갔다.
“이제 슬슬 통성명을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름을 알려주고 얼굴을 좀 보여주시지 않겠습니까?”
“흐흐. 이거, 이거. 크롬웰 각하께서 우리 같은 용병 나부랭이들한테 관심을 가질 줄 몰랐군요.”
비꼬듯 말을 한 인물은 비비안이 치근댔다고 말한 그 사람이었다.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오는데.
“절 알고 계시다니 말이 편하군요. 이제 말은 그만 돌리고 이름이나 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음, 글쎄 말입니다.”
“글쎄 말입니다?”
“저는 왜 제가 통성명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흐흐, 솔직히 파이시와 같은 흑마법사와 계약한 건 숨기고 싶거든요.”
“······말하기 싫다는 겁니까.”
“그렇죠. 그것보다 각하께서는 괜찮겠습니까? 저런 흑마법사와 같이 유적 원저이라니, 이 사실이 퍼지면 조금 곤란해지실 것 같은······.
“파이시.”
나는 마침 도착한 인기척을 느끼며 나직하게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이름이 불린 파이시가 내 뒤에서 말했다.
“왜? 무슨 일이야.”
“파이시, 제가 알기로 대부님의 자리를 대신해서 내가 이번 원정에 참가한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근데? 갑자기 그 말은 왜 꺼내는데?”
“둘 중 하나를 선택하십쇼. 접니까, 아니면 이 용병입니까.”
갑작스런 말에 파이시가 내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뭔데? 갑자기 뭔 선택?”
“아이쿠, 무서워라! 각하, 제가 잘못했습니다요. 그러니 부디 노여움을 풀어주십시오.”
때마침 눈앞의 용병이 깐족거리자 상황을 눈치 챈 파이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용병에게 손짓했다.
“발란, 왜 굳이 일을 이렇게 만드는 거야.”
“응? 내가 뭘?”
누군가 했더니 찢어 죽이는 발란이었군.
깐족거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어.
하지만 넌 상대를 잘못 골랐다.
꾸드득!
갑자기 발동된 마법에 발란의 발이 바닥으로 빠졌다.
파이시와의 대화 도중 호흡을 뺏는 갑작스런 마법이었기에 반응도 못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드리아스!”
파이시가 뒤늦게 소리치며 내게 마법을 사용하려했지만 이미 준비 중이있던 내 공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서걱!
“끄윽!”
팔 한 쪽이 잘린 발란이 핏줄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잘 참는 걸 보니 확실히 이름난 빌런이긴 하네.
일부러 살려둔 건데 그 틈에 파이시의 마법이 나와 발란 사이를 막았다.
파이시는 그렇게 생긴 틈을 타 내 앞을 막으며 살기를 드러냈다.
“아드리아스, 이건 날 무시한 처사다.”
“무시?”
무시라······.
거기다 감히 내 앞에서 살기를 드러내?
어차피 파이시의 기세를 한 번 잡아야겠다는 생각은 했었다.
차라리 잘됐지.
‘파이시가 고용한 용병들은 빌런들일 거라 짐작했었다.’
그렇기에 정체를 파악한 후 유적에서 처리할 생각이었다.
발란의 무례함으로 그 계획이 조금 앞당겨졌을 뿐.
“파이시, 파이시, 파이시. 이 답답한 놈아.”
“······.”
“무시? 무시라고? 내가 널? 아니면 네가 날?”
난 갈락슈르를 손에 든 채 천천히 날개를 소환했다.
새하얀 일익의 날개가 펼쳐지며 모든 능력치가 상승하는 게 느껴졌다.
“난 장난하는 게 아니야, 파이시. 널 존중해주는 것도 끝이다. 그러니 어서 골라라.”
만인지적의 기세가 거대한 살기가 되어 파이시를 덮쳤다.
“나냐, 아니면 저 녀석이냐. 고르지 않으면 둘 다 갈라주지.”
“아드리아스 크롬웰. 넌 지금 선을 넘고 있어.”
“아니지,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으며 강한 기운을 폭사했다.
날개로 인해 더욱 증폭된 기운은 우리가 있는 산 전체를 뒤덮을 정도였다.
“파이시. 다시 말하지만 난 대부님의 대리인이야. 거기다 집회의 한 축을 담당하는 수장이지.”
“웃기는군. 모른이 널 아낀다고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넌 그냥 애송이야.”
“파이시, 그래서 네가 지금까지 그 모양인 거다.”
어느새 발란이 지혈을 끝내고 땅에 파묻힌 다리를 꺼내는 게 보였다.
나는 그런 발란의 옆에 니켈을 소환했다.
퍼억!
순식간에 나타난 니켈은 한 쪽 팔이 없는 발란을 그대로 참살했다.
동시에 파이시도 본격적으로 언데드들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내가 왜 수장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파이시······.”
검은 아공간을 통해 소환되는 파이시의 언데드들을 보며 나는 미소 지었다.
“넌 실수한 거야.”
우웅----
콰작!
소환되던 파이시의 언데드들 위로 거대한 발이 나타나 짓밟았다.
파이시가 당황한 기색을 띄며 그 다리를 바라봤다.
“골렘? 아니야, 이건······.”
말을 하면서도 부서진 언데드들을 대신하여 새로운 정예 언데드가 계속 소환됐다.
언데드의 끝판왕격인 데스나이트도 두 구나 보이고 역시 파이시군.
하지만 그런 파이시도 두렵지가 않았다.
애초에 네크로맨서가 날 이길 수는 없었다.
특히나 파이시는······.
-쓰러져라.
제어의 기원이 내 입을 타고 실체화했다.
곧이어 파이시의 언데드들이 모두 쓰러지기 시작했다.
“아?”
당황스럽겠지.
하지만 당연한 결과다.
자신의 의지 없이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언데드의 경우 내 언령 마법에 훨씬 취약하니까.
대언데드 전용 마법이라고 봐도 무관할 정도였다.
“비케른! 일어나라!”
파이시의 외침에 데스나이트 한 구가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지.
스윽-
어느새 다가간 니켈이 파이시에게 검을 들이댔다.
“파이시.”
정신이 드니?
“······도대체 어떻게······.”
-역소환.
내 말에 실린 의지가 쓰러져있는 언데드들에게 향했다.
그러자 언데드들은 마치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 때와 같은 반응을 보이며 소환이 해제되기 시작했다.
‘이건 좀 무리였군.’
마나가 미친 듯이 소모됐다.
하지만 굳이 티는 내지 말아야지.
“아드리아스 크롬웰. 너, 넌 대체······.”
파이시의 두려움에 싸인 감정이 여실히 느껴졌다.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그녀의 두 눈은 미지에 대한 공포로 가득했다.
“내가 왜 파벌의 수장인지, 대부님이 왜 날 대리인으로 삼으셨는지······.”
우습게 보였겠지.
고작 20대 중반 밖에 안 된 애송이로 보였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의 난 충분히 자리에 걸맞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이해가 가나?”
파이시는 대답을 못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나는 똑똑히 말해주었다.
“난 워록이다.”
< 281화. 갈등 그리고 기선 제압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