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화. 남궁일영 >
2구역에 머무는 디에네를 찾아가자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장 고마워. 덕분에 편하네.”
“무슨 일 있었습니까?”
내 말에 담긴 함축적인 의미를 알아들은 디에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별일은 없었어. 근데 좀 질렸다고 해야 하나.”
천하의 디에네도 사람에게 질릴 때가 있구나.
무슨 일이 있었다기보다 자잘한 게 쌓인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소식은 들었어. 너네 대단하더라.”
“안 그래도 등반과 관련해서 디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뭔데?”
“저희는 지금 29층입니다. 지금까지는 괜찮았지만 점점 둘이서는 버겁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죠.”
“나도 끼워주려고?”
“혹시 가능할까요?”
내 권유에 디에네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야 좋지.”
“다행입니다. 그럼 당장 저희랑 같이 2층부터······.”
“아니 일단은 알아서 올라가 볼게. 정 힘들면 그때 내가 말하고.”
이왕이면 빠르게 진행하고 싶었으나 그녀를 강제할 수는 없겠지.
그래도 파티에 관한 건 긍정적인 답변을 얻었기에 목표는 달성했다.
“비비안은 오늘따라 꾸미고 나왔네? 생각해보니까 등반을 안했구나?”
“응. 놀러 나왔어.”
비비안이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디에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뭐야,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어이, 아드리아스. 너 애한테 뭔 짓을 한 거야?”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우리 비비안이 더 귀여워졌잖아!”
언제부터 그쪽 비비안이었습니까.
나는 꽁냥대는 두 여인을 놔두고 잠시 밖으로 나왔다.
그래도 디에네의 상태가 생각보다 괜찮으니 금방 탑을 등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 다른 곳도 좀 가볼까.’
게임 속 경험으로 탑의 거주민들 중 도움이 되었던 건 가넷밖에 없었다.
대부분 실력은 되지만 믿을 만하지 않거나, 애초에 실력이 미달인 경우가 많았는데 그래도 말을 걸어볼 만한 이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가자.”
어느새 디에네와 이야기를 마치고 나온 비비안이 내 옆에 나란히 섰다.
그래. 일단은 비비안과 나들이가 먼저다.
**
“예상 등반 층수가 벌써 29층이라고? 이건 완전 괴물이야.”
보고를 듣던 한 사내가 웃었다.
그 웃음에는 호기심과 흥미가 담겨 있었다.
“듣자하니 같은 세력과도 함께하지 않는다고 하던데······혹시 연락이 닿나?”
“몇 번 닿은 적은 있지만 무시당했습니다. 그리고 크라이슨이 필사적으로 막고 있습니다.”
“그 크라이슨이? 뭔가 있기는 있군. 지가 왕인줄 알고 유세를 떠는 녀석이 누군가의 편의를 봐줄 정도면 말이야.”
케이레스 대륙에서 온 이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것은 탑에 유배당한 황자였다.
검은 머리카락이 덥수룩한 렉시우스 황자는 꼬고 앉은 발끝을 까딱거리며 부하에게 물었다.
“그래서 다른 녀석들의 반응은?”
“케찰 측에서는 여전히 관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비쳤습니다. 아무래도 폐쇄적인 집단인지라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무시하겠다는 입장인 것 같습니다.”
“중원을 관리하는 녀석은 워낙 게으른 녀석이라 넘어가고 룬에서는 가넷이 함께하고 있다지?”
“그렇습니다. 조금 의외인 점이지만 룬의 내부에서는 의견이 엇갈린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 가넷이 웬일로 특이한 행동을 취하는군.”
황자는 생각을 정리하고는 말했다.
“폭탄과 같은 녀석이지만 아직까지 녀석으로 인해 세력 구도에 지장이 갈 만한 일은 없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애초에 탑 내부의 사정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눈치였습니다.”
“하루 종일 등반만 하는 걸 보면 그렇겠지. 아마 녀석의 목표는 최대한 빨리 한계까지 등반한 다음에 탑을 나가는 것일 거다.”
탑을 나가는 것은 언제든지 자유였다.
하지만 한 번 나가면 두 번 다시 들어올 수 없었기에 모두들 탑을 나갈 때는 신중했다.
한 층이라도 더 올라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나가는 것이 쉽지 않은 게 탑의 특징이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때는 그들의 등반이 멈췄을 때다.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게 된다면 다른 곳에 시선을 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항상 주의 깊게 살펴보겠습니다. 안 그래도 오늘은 등반하러 가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아무리 철인이라도 가끔은 쉬어 줘야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감시는 붙여둬라. 만약 다른 세력과 붙어먹기라도 하는 날에는 골치가 아파지니까.”
렉시우스 황자의 머릿속에 속내를 알 수 없는 남궁일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로들렌 자체의 힘은 그리 경계할 게 없었다.
그러나 새로 들어온 그들이 로들렌이 아닌 남궁일영과 힘을 합치면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세력도가 크게 변할 수도 있는 상황.
‘만약 그리 되면······.’
탑의 역사는 피로 점철되어 있었다.
탑 내부로 진입하는 세력은 크게 다섯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외에 다른 곳에서도 안 온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런 소수 세력들은 결국 다섯 개의 세력 중 한 곳에 붙어 노예처럼 부려지고 있는 상황.
만약 여기서 다시 세력이 개편된다면 다섯 개의 주 세력이 4개나 3개로 줄어들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주 세력이었던 곳이 언제 소수 세력이 되어 노예가 될 지 알 수가 없었다.
“긴장을 늦추면 안 돼.”
렉시우스의 중얼거림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
결국 등반 중에 얻은 장비들을 처분하지 못한 채 비비안과 놀러 다니기만 했다.
생각보다 볼만 한 곳도 많고 시간 소요도 많이 되었기에 장비는 나중에 처리하기로 했다.
당장 급한 것도 아니고 가끔은 이렇게 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어서 오십시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다음날이 되자마자 나와 비비안은 남궁일영이 말했던 홍월루로 향했다.
거대한 호수가 바로 옆에 있는 술집이었는데 동양풍의 목탑 구조로 지어진 높은 건물이었다.
나는 전생의 기억으로 어느 정도 눈에 익었지만 비비안은 처음 보는지 연신 주변을 둘러보고 홍월루를 살펴보며 좋아했다.
“예뻐.”
“그러네요. 호숫가 옆이라 더 운치가 좋아요.”
디에네는 오늘부터 탑의 등반을 시작했다.
그녀가 우리를 어느 정도 따라잡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기에 적어도 나흘 정도는 시간이 남지 않을까 싶었다.
홍월루에 도착해 입구로 들어서자 미리 언질을 받았는지 점원이 우리를 안내했다.
술집 안쪽에는 엘리베이터와 같은 역할을 하는 간이 텔레포트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우리는 그 덕분에 곧바로 꼭대기 층에 도달할 수 있었다.
“도련님, 손님들이 도착했습니다.”
“하아, 그래.”
특유의 한숨소리와 함께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가자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앉아 호수를 내려다보며 병나발을 불고 있는 남궁일영이 보였다.
뭔 화보 찍냐? 더럽게 분위기 있네.
“난 지금 후회하고 있다.”
돌연 인사 대신에 들려온 말에 내가 물었다.
“후회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가 왜 너희를 만나자고 했는지 후회하고 있어.”
하루 사이에 게으름 병이 도진 거냐.
남궁일영은 병나발을 다시 불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 적당히 앉아서 마시든 먹든 해. 그리고 배 좀 채웠으면 알아서 가고.”
“공자님.”
나는 나직하게 그를 부르며 말을 꺼냈다.
“전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이 아닙니다. 전 이곳에 밥을 먹으러 온 게 아니라 그 대단하다는 남궁세가의 검을 보러 온 겁니다.”
“대단? 남궁세가의 검?”
그는 여전히 호수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비웃듯 말했다.
“그래. 대단하다고 할 수도 있지. 거의 몇 백 년이나 이어지고 있는 고리타분한 검법이니 말이야.”
“비꼬는 겁니까?”
“내가 남궁세가의 혈손이라는 건 부정하지 않아. 하지만 우리 세가가 대단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물론 찌끄레기들이 보기에는 대단해보이겠지만. 하아.”
이래서 이 인간이랑은 먼저 상종하려 하지 않았던 거다.
게으름이 나태함으로 변질되어 뭔가가 삐뚤어진 듯한 인간.
그것이 그의 재능 때문인지 아니면 탑에 갇혀있는 신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대하는 나로서는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노력은 해봐야겠지.
“서로의 검을 확인하자고 하셨죠.”
“그랬었나? 그렇다면 미안하군. 난 지금 그럴 마음이 아니야.”
“목에 칼이 들어가도 그런 마음이 안 들까요?”
내 은은한 도발에 드디어 남궁일영의 시선이 내게 돌려졌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도발에 걸렸다기 보다 나를 비웃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온 그의 말이 단지 느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자네가? 나를? 하아······.”
한심하다는 감정이 진하게 느껴져 왔다.
결국 먼저 도발에 넘어간 건 비비안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
비비안이 중얼거리며 뚜벅뚜벅 남궁일영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뭘 하려는 거지 싶던 찰나에 그녀는 그대로 남궁일영을 난간에서 밀어버렸다.
“······어?”
아무리 나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웃긴 건 남궁일영도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밀려서 떨어졌다는 것.
일련의 모든 일들이 내 이해를 벗어났다.
첨벙!
다행히 남궁일영은 호수에 빠졌다.
애초에 그 정도 되는 실력자라면 호수가 아니었어도 멀쩡하기는 했겠지만.
나는 천천히 난간으로 다가가 몸을 밖으로 빼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남궁일영이 나른한 표정으로 호수 위에 둥둥 떠다니는 게 보였다.
“명분은 만들어졌다.”
떠다니던 남궁일영이 말했다.
명분? 무슨 명분?
곧이어 그가 말한 명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로들렌 세력이 남궁일영 도련님을 암살하려 했다!”
“모든 병력을 소집해라! 로들렌을 공격한다!”
홍월루 내부를 울리는 외침들이 우리의 귓가에 생생히 들려왔다.
마치 친절하게 알려주려는 듯하기까지 한 그 소리들에 나는 나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 약아빠진 새끼가······.”
나태한 척, 게으른 척 온갖 행세를 해왔으면서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웃긴 건 암살을 시도 당했다고 하면서 아무도 우리를 제지하러 오는 이들은 없다는 것.
곧바로 들려왔던 외침도 그렇고 사전에 미리 계획한 일이 틀림없었다.
“기분이 어떤가?”
남궁일영이 천천히 물 위에서 몸을 일으켜 수면 위를 걸었다.
감상을 물어보는 듯한 그의 물음이 마치 이 모든 상황이 연극처럼 느껴졌지만 내 오감은 실제로 바삐 뛰어다니는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우리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으면 어쩌려고 그랬습니까?”
“그러면 아무 일도 없었겠지. 이래도 상관없고 저래도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렇다면 이 다음 변수도 생각하고 계십니까?”
“물론.”
그는 뜨겁게 달군 마나로 옷을 순식간에 말리며 훌쩍 뛰어 우리가 있는 곳까지 몇 걸음 만에 올라왔다.
“지루했거든. 조금의 변화가 필요했어.”
“그러면 이제는 볼 수 있는 거겠지요?”
“뭘?”
“남궁세가의 검이요.”
“하아, 자네도 참 지독하군.”
로들렌 세력?
어차피 당장 어떻게 되지는 않을 거다.
애초에 소속감이 있는 것도 아니라 크게 신경 쓰지도 않았고 세력도 약한 게 아니라 단숨에 어떻게 되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로들렌이 공격당하는데 불안하진 않나?”
“어차피 공자님이 여기 계신 이상 상관없습니다.”
“그 말은 내가 없는 우리 세력은 별 볼일 없다는 건가?”
“그렇죠.”
“우리 세력에는 나 말고도 절정의 무인이 셋이나 더 있어.”
오러 마스터를 말하는 건가?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남궁일영이 가장 강하다는 건 확실하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스릉-
“그 잘난 몇 백 년의 검을 한 번 견식 시켜주십시오.”
“하아. 귀찮군, 귀찮아.”
“귀찮다는 양반이 이런 일을 꾸몄습니까? 그럼 사양 않고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갈락슈르가 번뜩이며 이빨을 드러냈다.
< 250화. 남궁일영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