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7화. 탑 >
탑은 또 다른 세상이라 불려도 과언이 아니었다.
1층의 상주 인원만 1만 명 가까이 되고 등반 중인 인원까지 합하면 그 배가 넘어갔다.
“11층 파티입니다! 11층 등반자 1명 구합니다!”
“5층까지 운행하는 가이드 파티입니다. 2, 3층은 각각 500포인트. 4, 5층은 각각 1000포인트의 가격으로 모시겠습니다.”
탑의 등반을 위한 입구 앞에는 넓은 공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각종 호객 행위와 파티를 모집하는 사람들의 외침으로 정신이 없었다.
“우리는 둘이서 가?”
“예.”
애초에 탑의 입구 광장에서 파티를 구하는 사람들치고는 멀쩡한 부류가 적었다.
멀쩡한 사람이었으면 자신의 세력에서 파티를 구하지 굳이 모르는 사람들과 이곳에서 파티를 구할 리는 없으니까.
“어이, 형씨. 신입인가? 그럼 우리랑 함께하는 건 어때? 포인트도 받지 않고 그냥 3층까지 무료로 가이드해주지. 대신 전리품은 전부 우리 걸로. 응?”
“비켜.”
비비안이 삭막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온 사람을 노려봤다.
그 엄청난 압박감에 상대는 기가 질린 표정으로 물러났다.
가끔씩 저런 모습을 보면 게임 속 비비안이 조금 겹쳐 보이네.
“저런 사람들이 위험하다는 거지?”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 그렇죠.”
뭣 모르는 사람들을 유혹해서 탑 안으로 함께 끌어들여 범죄행위를 하는 이들.
등반할 때에는 함께 들어간 파티만 함께 할 수 있기에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함께한 파티만 알 수 있었다.
그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에 이곳에서 파티를 구하는 사람들의 질이 떨어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아, 여기입니다.”
저 멀리서 가넷이 손을 흔들며 우리를 반겼다.
입구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었는데 먼저 나와 있었군.
그녀가 손을 흔들자 주변의 시선들이 모여들었다.
가넷은 오랜 기간 탑에서 생활한 만큼 그 영향력이나 유명세가 꽤 대단했다.
“그럼 약속대로······.”
내가 백금 도장을 건네자 가넷이 주변에 보이지 않게 기술을 사용하며 받아냈다.
다시 보는 거지만 마법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원리에 학구심이 조금 불타오르네.
가넷은 기쁜 표정으로 백금 도장을 품안에 넣고 고개를 숙였다.
“만약 여러분들이 36층까지 올라오지 못하더라도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올라갈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사실 게임 속에서도 항상 동료로 삼아왔었지만 왜 100년 동안이나 탑을 탈출하지 않고 남아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는 굳이 알 필요도 없었고, 어차피 탑을 나가게 되면 헤어지게 될 인연이라 별 생각이 없었지.
그러나 막상 현실이 되고나니 궁금해졌다.
이 인형은 도대체 왜 자신의 몸을 수리까지 해가며 이곳에 남아있는 걸까.
“그럼 무운을 빕니다.”
가넷이 탑의 입구를 향해 들어가는 우리를 배웅했다.
투명하게 빛나는 피부와 붉게 반짝이는 긴 머리카락이 유독 도드라졌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가넷에 대해 알아볼까.
**
[2층 : 불온자들의 습격]
[남은 시간 : 240시간]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탑의 등반.
아마 우리와 함께 들어온 이들은 아직도 적응 기간이라며 잡일을 하고 있겠지.
일주일동안 적응 기간을 보내고 이후에는 각 세력으로 편입되어 세력별로 파티를 이루어 등반을 시작할 거다.
“비비안. 알아서 맡기겠습니다.”
“응.”
탑의 30층까지의 공략은 이미 바깥에서 모두들 배워왔다.
그동안 쌓여온 정보가 탑에 들어갔다가 나온 인물들로 인해 공유되어 정리 된 상태.
비비안에게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겠지.
-끼릭!
낮은 층들은 낮은 층에 걸맞게 질이 낮았다.
탑에 들어올 수 있을 정도의 인재면 혼자서도 깰 수 있는 정도.
퍼억!
우리가 소환된 곳은 평범해 보이는 숲.
흔히 우리가 아는 고블린 형태의 몬스터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0층보다 쉬워 보이는 구성.
“최대한 빨리 끝내겠습니다.”
오늘의 목표는 6에서 7층 쯤.
단기간에 치고 올라갈 예정이었다.
등반 중에는 시간의 흐름이 바뀐다.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은 1층보다 10배 느리다.
1층의 시간 흐름은 바깥세상과 같기에 헷갈릴 이유가 없었지만 등반 중에는 하루가 1층의 겨우 2.4시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빠르게만 진행한다면 7층도 무리는 아닐 거라 예상 하고 있었다.
‘10층까지는 별다른 편법이 없다.’
습격해온 고블린들을 모조리 처리하고 숲의 안쪽으로 들어가 녀석들의 부족까지 없앴다.
수많은 고블린들을 죽였지만 별 감흥은 없었다.
[2층 : 불온자들의 습격 클리어]
[100포인트 적립]
[출구가 닫히기까지 남은 시간 : 238시간 31분 23초]
[다음 층에 도전하시겠습니까?]
“바로 도전하겠습니다.”
“응.”
최대한 빠르게 달린다.
**
[알림! 최단 기록 갱신!]
[누군가가 10층 클리어 최단 기록을 갱신하였습니다!]
탑 안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에게 갑자기 터져 나온 두 줄의 메시지.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최단 기록 갱신이라고?”
“이런 메시지는 또 처음 보는군. 도대체 누가?”
“누구겠어! 이번에 새로 들어온 놈들 중 하나겠지!”
“그럴 리가······. 신입들이 온 건 고작 하루라고?”
주점, 아니 중원의 주루를 따와 만든 술집도 조금 전에 떠오른 메시지로 모두가 왁자지껄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제일 높은 층의 난간에서 나른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한 사내가 표정을 굳혔다.
“아드리아스 크롬웰이라고 했나.”
이미 상대의 강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경지에 들어선 남궁일영은 전날에 보았던 한 남자를 떠올렸다.
일견 차가워 보이지만 예의가 발랐던 그 청년은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한바탕 난리가 나겠군.”
귀찮은 일은 질색이었건만 또 뭔가가 벌어질 조짐이 보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예견은 틀리지 않았다는 듯 수하들이 급히 올라왔다.
“도련님! 털복숭이놈들, 아니 케찰 세력이 회의를 요청해왔습니다!”
“도련님! 케이레스 측에서 회담을 요청했습니다!”
갑작스런 소란에 결국 남궁일영의 표정에 금이 갔다.
“같은 ‘케’로 시작하는 놈들이 아주 난리가 났구나. 겁쟁이놈들.”
남궁일영은 마시던 술잔을 한입에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기랑 백나찰을 불러라. 그 외에는 각자 하던 일하고.”
“옙!”
남궁일영이 호명한 인원들을 찾으러 주루에서 우루루 사람들이 쏟아져 나갔다.
그리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던 남궁일영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크롬웰? 크롬웰이라······어디서 들었더라?”
문득 떠오른 기억을 더듬어보는 그였다.
남궁일영이 기억을 더듬고 있을 때쯤 다른 세력들도 떠들썩했다.
모두에게 메시지가 갈만한 업적은 곧 업적을 이룬 인물에게 그만한 어드밴티지를 부여했다는 것과 같은 내용이었기에 모두가 그 주인공을 찾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겠지요?”
다프란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가넷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가넷은 아무 동요도 없이 그녀의 미소를 맞받아주며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요?”
“에이, 잘 아시는 분이 그러시네. 그 인간이잖아요, 가넷이 데리고 갔던 인간.”
룬 세력의 영역.
그중에서도 회의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에는 몇몇의 이모탈이 집결해있었다.
모두 인형인 터라 개성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머리카락이 철사로 이루어진 한 이모탈이 물었다.
“아는 인간인가?”
“예, 안 그래도 제가 어제 말했죠? 0층의 보상을 얻은 로들렌 세력의 두 인간이 이탈했다고요. 아마 그들 일거에요.”
“가넷. 사실인가?”
철사가 빳빳하게 세워지자 마치 고슴도치가 가시를 세운 것과 같이 변한 이모탈의 물음에 가넷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 메시지의 주인이 그들이라고 장담은 못하죠?”
“말장난하지마세요, 가넷. 중요한 일입니다.”
결국 가만히 있던 파란 피부의 이모탈이 가넷을 나무랐다.
그럼에도 가넷은 아랑곳 않고 제 할 말을 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원하시는 게 뭐죠? 그분들이 만약 맞다면 어찌 하실 생각인데요?”
“마치 우리가 나쁜 짓이라도 할 것처럼 말하는구나.”
“그럼 아닌가요?”
가넷의 당돌한 대답에 철사가 더욱 빳빳해졌다.
“가넷. 우린 너무 오랫동안 여기 있었어. 바깥의 소식은 계속해서 전달받고 있지만 슬슬 나갈 준비를 해야지.”
“그럼 당장 나가시면 돼요. 탑을 탈출하는 데는 아무 제약도 없으니까요.”
“미르바도 말했지만 우린 지금 말장난을 하러 이곳에 모인 게 아니다.”
철사 이모탈이 분노를 억누르듯 말했다.
그리고는 의심쩍다는 눈초리로 가넷을 뚫어지게 노려봤다.
“가넷, 자네가 그 인간들을 안내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모양이군?”
“네, 맞아요.”
가넷은 숨기지 않고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자 오히려 함께 있던 다른 이모탈들의 표정이 좋지 않게 변했다.
“그건······참 드문 일이군. 어째 서지?”
“제가 필요해서 그랬을 뿐이에요.”
“그래? 하지만 도장이 필요한 일이라면 충분히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작년 황금 도장도 아직 마그레타에게 있으니 그대의 부탁이라면 충분히 들어줬을 터.”
“우리 이모탈들은 운명이라는 말을 참 좋아하죠. 불멸을 뜻하는 존재들이라 그럴까요?”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군.”
“뜬금없지 않아요. 그저 전 운명을 느꼈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니까요.”
가넷의 말에 좌중은 침묵했다.
그리고 한동안 서로의 생각을 가다듬던 와중에 미르바라는 이름의 파란 피부 이모탈이 입을 열었다.
“가넷. 당신의 선택을 존중하겠어요. 미리 말씀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건 아쉽습니다.”
“미안해요, 미르바. 그렇지만 저도 설마 저들이 이런 터무니 없는 일까지 저지를 줄은 몰랐네요.”
“거짓말이 티나요, 가넷. 어쨌든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가넷의 거래 대상을 건드릴 수는 없죠. 나머지 분들은 알아서 결정하길 바라요.”
미르바가 바람과 같이 사라졌다.
그러자 다프란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들었다.
“저도 포기요! 가넷이랑 대적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렇게 철사 이모탈만 남게 되자 그는 빳빳이 세운 머리카락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난 일단 확인이라도 하고 싶군. 만약 그들이 제 분수에 맞지 않은 물건을 얻었다면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네.”
“전 이미 그들의 동료에요.”
“나랑은 상관없어. 정 그러면 그들을 자네가 지키던가.”
그는 그 말을 끝으로 회의장을 나갔다.
결국 혼자 남게 된 가넷은 가만히 앉아서 자신의 붉은 보석과 같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설마 그 정도로 해낼 줄은 저도 짐작하지 못했네요.”
이미 백금 도장에서부터 범상치 않음을 느꼈었다.
그러나 이런 업적까지 세울 줄은 가넷조차 상상 못했었다.
사실 마법공학 상점에서 자신의 몸을 고친 이유는 그들과 함께 탑을 등반하기 위함이었다.
이미 그들과 마주쳤을 때부터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꼈던 가넷은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탑에 등반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끌림을 느끼게 한 상대가 이 정도로 뛰어날 줄이야······.
“제 끝은, 제가 결정하고 싶어요.”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린 가넷이 이내 탑에서 곧 나올 동료들을 마중하기 위해 일어섰다.
**
뒤룩!
-츄릅, 흐으.
깊고 어두운 탑 안의 어느 공간.
그곳에서 잠들어있던 어떤 존재가 이전에 맡았던 적이 있는 향기를 느끼며 눈을 떴다.
-관, 찰, 자?
수백 개의 눈동자가 뒤룩거리더니 이내 눈웃음을 지었다.
< 247화. 탑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