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6화. 감정을 가진 인형 >
가넷에게 막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자 비비안이 나서려했다.
“잠시만요.”
나는 그런 비비안을 막으며 가넷에게 물었다.
“저희에게 용무가 있으십니까?”
“갑자기 길을 막아서서 죄송합니다. 다프란이 도장을 가진 분이 나타났다고 하셔서 급한 마음에 무작정 붙잡았네요.”
가넷의 태도는 정중했다.
탑을 함께 등반하기 위해서 상대의 호의를 사야하는 나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가넷! 잘 하셨습니다.”
그때 뒤에서부터 우리를 쫓아온 다프란이 웃으며 다가왔다.
그러나 가넷은 다프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다프란, 전 이 분들을 핍박할 생각이 없습니다.”
“핍박?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단지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도장을 거래하려던 생각이었습니다.”
갑자기 두 인형들 사이에서 팽팽한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묘한 대치 상황에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로들렌 출신 아드리아스 크롬웰이라고 합니다.”
갑작스런 자기소개에 인형들이 살짝 당황한 눈치를 보였다.
그러나 이내 가넷이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전 가넷이라고 합니다. 마법공학도시 룬에서 온 1급 지원 요원이에요.”
그리고는 다프란을 눈짓하며 말을 이었다.
“저기 있는 분은 다프란. 저와 같은 출신이고 2급 전투 요원이죠.”
다프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가넷의 제지만 아니었으면 당장 우리를 공격해서 도장을 빼앗으려 했겠지만 자기소개를 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러기는 쉽지 않겠지.
“다프란은 도장 때문에 저희를 찾아 온 것 같고, 가넷은 어떤 용무이십니까?”
“저도 도장 때문에 왔어요. 도움을 받고 싶어서요.”
이미 가넷이 무슨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알고 있었다.
게임에서도 그 도움을 빌미로 탑을 함께 등반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내일 바로 찾아가려고 한 건데 예정보다 일찍 만나버렸다.
“도장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도장으로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해드리겠습니다.”
“저한테 도장을 파시는 건 어떤가요?”
다프란은 여전히 미련이 남은 눈초리로 흥정을 시도했다.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내 거절에 잠시 가넷의 눈치를 살핀 다프란은 이내 몸을 돌렸다.
그러나 여전히 눈길은 이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언뜻 스산했다.
“당신들은 운이 좋군요.”
그 말을 끝으로 다프란이 사라지자 도리어 가넷이 사과를 해왔다.
“죄송합니다. 다프란은 성격이 조금 거친 분이라 여러분께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이곳은 빨리 떠나야겠네요.”
다프란이 공격을 해왔어도 이길 자신은 있었다.
문제라면 이곳이 룬 세력의 영역이라는 것이고 소란이 벌어지면 우리가 도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더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을 뿐.
다행히 아무 일 없이 넘어갔지만 이미 다프란이 우리가 도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주변에 알린 이상 이왕이면 빨리 중앙 구역으로 넘어가고 싶었다.
“중앙 구역으로 가시는 도중이셨나요? 그렇다면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가넷은 도장을 노리지 않는 건가요?”
“원하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만 그 정도로 염치없진 않아요.”
살포시 미소 지으며 말하는 가넷을 보자 이게 정말 사람인지 인형인지 헷갈렸다.
일단은 가넷의 호의를 받아들이고 그녀의 안내에 따라 자리를 옮겼다.
우리는 그 뒤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1층의 중앙구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아.”
비비안이 감탄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중앙 구역은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었는데 그 광경만큼은 별천지처럼 느껴질 정도로 으리으리했다.
“우선은 숙소부터 잡으셔야겠죠? 그런데 황금 도장으로도 이곳에서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은 적어요. 일단 제가 알고 있는 곳으로 안내해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전 황금 도장이 아니거든요.”
내 말을 잠시 이해하지 못한 가넷이 곰곰이 의미를 파악하다가 이내 놀라움을 표현했다.
“백금 도장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예.”
“그건 정말 예상하지 못했네요. 벌써 100년 가까이 이곳에서 지낸 저도 두 번 밖에 못 본 물건이에요.”
100년이라는 말에 이번에는 비비안이 놀란 눈초리로 가넷을 바라봤다.
그 눈길을 눈치 챈 가넷이 어렴풋하게 웃었다.
“인간 분들에게는 무척 긴 시간이죠? 저희 이모탈에게는 그리 긴 시간은 아니랍니다.”
“응. 그래도 신기해. 그럼 안 죽는 거야?”
웬일인지 비비안이 관심을 표했다.
비비안의 질문에 가넷은 고개를 저었다.
“저희의 육신은 노화하지 않고 무한하게 지속돼요. 하지만 감정은 소모되죠.”
“감정?”
“네. 감정이요. 저희의 생명은 감정이에요.”
그녀는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조금 특이하죠? 감정이란 게 눈으로 보이는 것도 아니니. 하지만 저희는 인간 분들과 달리 감정의 소모나 남은 감정의 양을 측정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스스로의 수명도 알 수 있죠.”
나긋하게 말한 가넷이 손을 펼쳐보이자 화려한 빛이 쏟아지며 주위를 장식했다.
저게 바로 인형들, 아니 이모탈이 사용할 수 있는 특수한 기술.
마법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구동 방식으로 작동되는 감정의 발현이었다.
“저희의 기술에는 감정이 소모되죠. 스스로의 수명을 담보로 기술을 사용하는 셈이에요.”
“지금 사용해도 괜찮아?”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아요. 그리고 익숙해졌거든요. 감흥도 없고.”
아무래도 자신의 생명력을 소모해 기술을 사용한다는 게 비비안이 보기에는 영 껄끄러웠나보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참 아이러니한 기술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이모탈들의 감정은 쉽게 줄지 않았고 기술사용에 소모되는 감정의 양도 많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 차례 화려한 이펙트를 선보인 가넷은 이내 나를 보았다.
“조금 전에 그런 일을 겪으시고도 제게 솔직한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백금 도장을 지니셨다고 생각은 못했거든요. 말씀하시는데 부담 되지는 않으셨나요?”
“사실 전 가넷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아, 그런가요?”
“예, 바깥에서 들었거든요. 그래서 사실 들어오기 전부터 가넷을 동료로 영입하는 걸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상당히 계획적인 분이시네요. 설마 저와 함께 탑을 등반하실 생각을 하고 들어오신 분이 계실 줄이야.”
“그래서 가넷에게는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도장을 주는 것 이외에 웬만한 부탁은 다 들어줄 생각이고요.”
내 이야기를 들은 가넷은 약간의 고민을 하는 듯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일단 제 부탁도 있고 하니 어디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실까요?”
“그렇게 하시죠.”
우리는 자리를 옮겨 적당한 찻집에 들어갔다.
손님이라고는 우리 밖에 없는 찻집은 규모도 크고 온갖 식물들과 화초들이 마치 가구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삐융!
[백금 도장이 확인되었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외곽은 여기서 머무르게 된 증명자들이 직접 차린 가게들이 더 많았지만 중앙 지역은 대부분 탑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자리에 앉아 각자 시키고 싶은 걸 마음껏 시키고 이야기를 나눴다.
“아드리아스 크롬웰이라고 하셨죠? 혹시 목표가 어느 정도일지 물어봐도 될까요?”
“목표는 일단 꼭대기입니다.”
질문을 던진 후 마침 나온 차를 마시려던 가넷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찻잔을 내리며 다시 물었다.
“진심이세요?”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그녀는 잠시 찻잔을 어루만지다가 말했다.
“말했다시피 전 이곳에서 100년 가까이 지냈어요. 정확히는 98년이죠.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탑의 끝을 본 사람은 못 봤어요.”
“예.”
“저희 이모탈은 감정에 민감하기 때문에 당신이 하는 말에 거짓이 없음을 알고 있어요. 농담이 아님은 더더욱 와 닿죠.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만한 말을 할 만한 능력이 있나 싶어요.”
“이해합니다.”
탑은 복잡했다.
단체로 클리어 해야 하는 층도 있었고 혼자서 깨야하는 층도 있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혼자서 해결하는 층이 많아지지만 중간 중간 여러 명이 필요한 곳이 무조건 존재했기에 아무리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도 혼자서 정복하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그럼에도 개인의 기량이 중요함은 이루 말할 필요도 없지.
“일단 함께 등반을 해보시고 판단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전 36층 등반자에요. 저와 함께 하시려면 적어도 제가 있는 층까지는 올라와야 하는 걸 알고 계시죠?”
“예. 금방 올라가겠습니다.”
“정말 알기 힘든 분이네요. 일단 36층까지 올라오시면 그 뒤로 함께하는 걸로 알고 제 부탁을 얘기 해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녀로서는 손해 없는 거래일 거다.
내가 36층까지 올라가지 못해도 결국 도장을 이용할 수 있고, 만약 내가 36층까지 올라가면 본인도 막혀있던 36층을 나와 다시 도전해볼 수도 있는 노릇이니.
물론 고층으로 올라갈수록 도전에는 큰 위험부담이 따르지만 이모탈인 그녀라면 실패하면 실패했지 목숨이 위험한 상황은 없을 거다.
“사실 1층에는 숨겨진 공간이 있어요. 그리고 그 숨겨진 공간 중에서는 도장이 필수적인 곳이 몇 군데 있어요.”
숨겨진 공간.
일종의 히든 피스로 게임에서는 도장을 지닌 채 특정 인물들을 통한 퀘스트를 통해 갈 수 있는 장소였다.
가넷도 그 특정 인물들 중 하나였다.
“오직 도장을 들고 있는 인물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에요.”
“어떤 장소인지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숨겨진 장소는 여러 곳이 있지만 제가 원하는 건 마법공학 상점이에요. 아무래도 오랫동안 제 몸을 점검 받지 못하니 슬슬 삐걱대기 시작했거든요.”
가넷이 옷을 살짝 내려 어깨를 보여주었다.
그곳만 유독 다른 색으로 변질이 된 상태였는데 솔직히 인간인 내 눈에는 그냥 색이 변했구나 싶은 정도였다.
“그러니 마법공학 상점에 들를 동안만 도장을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도장을 제게 건넨다는 게 불안하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맹세코 가지고 도망가는 경우는 없을 거예요.”
“좋습니다.”
“네?”
“좋다고요.”
너무나 시원스런 대답이었는지 가넷의 반응이 볼만했다.
“일단 숙소를 잡으면 바로 빌려드리죠.”
“······괜찮으신 건가요? 무려 백금 도장이라고요.”
“이미 가넷은 제 동료입니다. 동료가 배신한다면 많이 슬프긴 하겠지만 동료를 믿지 못하면 등반할 때도 믿지 못하겠죠. 전 동료를 믿습니다.”
갑자기 적막이 흘렀다.
가넷은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설핏 웃음을 흘렸다.
“정말 특이하신 분이세요. 탑에 이제 막 입장하셨다는 게 믿기지 않는데 혹시 인생 2회차이신가요?”
“재밌는 농담이네요.”
2회차? 세어보지는 못했지만 10번은 넘게 탑을 등반해봤을 거다.
그럼에도 꼭대기까지 올라가 본적이 없으니 이번에는 부디 끝까지 오를 수 있기를 바란다.
“맛있어.”
그때 조용히 있던 비비안이 한 차례 존재감을 드러냈다.
생전 처음 보는 무슨 재료로 만들었는지 모를 조각 케이크를 먹는 그녀의 두 볼이 햄스터처럼 빵빵했다.
“전부 무제한이니 원하는 만큼 드세요. 탑은 내일부터 오를 겁니다.”
“응.”
고개를 끄덕이는 비비안이 귀여웠다.
가넷은 그런 우리를 보다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일부터 탑을 등반하시면 도장도 내일 빌리겠습니다. 탑에 등반 중일 때는 쓸모가 없으니까요.”
“그렇게 하시겠다면 그러셔도 좋습니다.”
“탑의 등반 시간은 정해져있으니 끝나실 때쯤 제 용무를 마치고 마중을 나와 있겠습니다.”
< 246화. 감정을 가진 인형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