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8화. 최연소 교수 그리고 탑을 위한 준비 >
“흐음. 그렇게 나오시는 건가요.”
베리얼이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이 왠지 소름 돋았지만 난 배짱을 내밀 수 있었다.
베리얼은 황궁과의 거래를 통해 나를 이용한 상황.
내가 죽거나 다치면 곤란한 건 베리얼이었다.
“아드리아스 학생에게도 충분히 좋은 제의라고 생각했습니다만.”
“학부장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요즘 저를 원하는 곳이 굉장히 많습니다. 물론 교수라는 직함도 좋지만 선택지가 많은 저로서는 굳이 응할 이유가 없지요.”
“최연소 교수의 지위입니다. 게다가 자유롭기까지 하죠. 제가 알기로 아드리아스 학생은 벌여놓은 일이 많아 개인적인 사정으로 바쁘실 텐데요?”
이 양반은 그동안 내 뒤만 캐왔나.
하여간 상대가 기분 나빠할 건 생각도 안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절 설득하지 않으시겠다는 겁니까?”
“흐음. 고민이 되는군요. 어떻게 해야 제가 당신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그건 네가 알아봐야지.
난 그저 침묵했다.
더 이상 말을 꺼내봤자 그에게 휘둘리기나 할 테니 입을 다물고 있어야지.
“제가 당장 무언가를 해드릴 수 있는 게 없군요. 뭔가 바라시는 게 있습니까?”
베리얼에게 뜯어낼 수 있는 것.
그는 모르겠지만 나는 베리얼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었다.
“내년까지는 계신다고 했지요? 그 1년 동안 제게 마법 회로 문신을 알려주십시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요. 어차피 제 기술도 아닌데.”
“그 마법 회로 문신 중에는 반드시 역천의 회로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베리얼이 웃는 낯으로 굳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들이밀며 살기가 느껴지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역천의 회로.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학부장님께서 저에 대해 잘 알 듯이 저도 학부장님을 잘 알고 있을 뿐입니다. 알려주실 겁니까?”
잠시 적막이 흘렀다.
솔직히 그냥 질러본 건데 상대의 표정을 보니 의외로 꽤 고민하는 듯 보였다.
내가 말한 역천의 회로는 사실상 그의 오리지널 마법이라고 봐도 될 마법 회로 문신이었다.
애초에 몸에 새기는 마법진인 마법 회로 문신은 그도 살렘에게 배운 거겠지만 그것을 가공하여 자신만의 기술로 변형시킨 케이스였다.
“잠시 둘이서만 대화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드디어 입을 연 베리얼은 데오스를 향해 물었다.
그때까지도 자리를 지키고 있던 데오스는 태연하게 말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만으로도 꽤 아슬아슬한 내용이 많았는데 그것보다 더 심각한 이야기입니까?”
“아니요. 그냥 제 치부를 타인에게 알리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베리얼의 말투가 변했다.
시종일관 장난스럽던 그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분위기가 바뀌었다.
“자리를 비워주실 수 있습니까.”
다시 한 번 묻는 베리얼의 태도는 그다지 공손하지 못했다.
약간은 억압적인 느낌을 풍기는 베리얼을 보며 데오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시지 않을 거라 믿지만 혹여나 허튼 짓은 하지 않길 바랍니다.”
“물론이죠.”
“그럼 전 바로 옆방에서 기다리죠.”
그제야 다시 미소 짓는 베리얼을 보며 데오스가 나갔다.
데오스는 떠나기 전에 내게 눈짓을 보냈는데 무슨 일이 생기면 부르라는 의미 같았다.
데오스가 떠나자마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고민은 끝나셨습니까.”
“하하. 아드리아스 학생은 정말 겁대가리가 없군요. 지금까지 승승장구만 해 와서 그런 걸까요?”
“승승장구······. 제가 무슨 일을 겪어왔는지 아신다면 그런 말씀은 못하실 겁니다.”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데오스를 내보낸 것도 사실 별 의미 없는 일종의 시위겠지.
어지간히도 알려주기 싫은 모양이군.
“역천의 회로를 도대체 어떻게 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제가 틀리게 알려주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제가 어쩔 도리가 있나요. 그냥 배워야죠.”
“허술하군요. 좋습니다. 그럼 당신에게 잘못된 역천의 회로를 알려드리도록 하지요.”
대놓고 틀리게 알려주겠다고 말하는 게 확실히 또라이가 맞았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오히려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렇게 하시죠.”
애초에 그가 제대로 알려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내가 원했던 건 그저 그가 내게 역천의 회로를 알려주었다는 사실 그 자체.
내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잠시 베리얼의 표정이 벙쪘다.
그리고는 천천히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푸하하하! 역시 아드리아스 학생은 재밌습니다. 이거 제가 한 방 먹었군요.”
“한 방 먹다니요? 원하시는 대로 해드렸습니다만.”
“그렇죠, 그렇죠. 으음, 저는 좀 더 아드리아스 학생이 저를 몰아붙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사실 아드리아스 학생이 더 우위에 있는 거래였으니까요.”
“그래서. 결론은 가르쳐주겠다는 거겠죠?”
“물론입니다. 가르쳐드리죠. 그게 과연 올바른 내용인지는 당신이 판단해야할 문제지만.”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베리얼을 더 이상 상대하기 싫었다.
마치 폭탄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랄까.
지금의 나니까 몸을 지킬 정도는 되니 이렇게 말을 하지 1년 전이었으면 반항할 생각도 못하고 끌려 다녔을 거다.
“이야기가 끝났으니 교장 선생님을 부르죠.”
“잠시만요. 이왕 이렇게 둘만 남았으니 한 마디면 더 하죠.”
“더 할 말이 있습니까?”
“페이드를 조심하십시오.”
“······예?”
뜬금없는 말을 한 베리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는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강한 존재입니다. 절대, 절대로 얕보면 안 돼요.”
“영문 모를 말씀을 하는군요.”
“혹시라도 당신이 부나방처럼 달려들까 봐 미리 말린 겁니다. 당신이 갑자기 죽어버리면 제게도 손해거든요. 재차 경고합니다. 집회에서 가장 강한 인물을 꼽으라면 제 기준에서는 페이드이니 부디 상대를 잘못 보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언젠가 페이드를 상대해야겠다는 내 마음을 안 건가?
도대체 베리얼이 어디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베리얼은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섰다.
그러자 옆방에다 대화가 끝났다고 전했는지 곧이어 데오스가 다시 들어왔다.
“대화는 잘 마치셨습니까?”
“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별 말씀을. 그보다 교수 제의는 받아들이신 건지······?”
“예.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거 참 잘됐군요! 사실 아드리아스 학생은 다른 곳에서도 인기가 많아 아카데미 교수 직함 따위는 눈에 차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럴 리가요.”
“아무튼 제의를 받아들이셨으니 내년이면 아카데미 최연소 교수가 탄생하겠군요. 아마 모두들 놀랄 겁니다.”
데오스가 기쁜 듯 만면에 화색을 띠며 주절댔다.
한동안 그의 말을 듣고 교장실을 나오자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페이드······.’
그가 그렇게까지 강한 마법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워록인 만큼 웬만한 마법사보다는 강하겠지만 에반에게서 도망친 것도 그렇고 딱히 제대로 싸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과소평가한 감이 없진 않았다.
생각해보니 게임 속에서도 제대로 싸우는 모습을 못 보고 어느 순간부터 증발해버린다.
플레이어와 싸우게 될 에피소드 보스도 아니고 말 그대로 갑자기 등장 자체가 없어지는 행적이 묘연한 인물.
“에반한테도 미리 말해둬야겠군.”
그의 무력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천하의 베리얼이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주의해서 나쁠 건 없지.
살렘이나 바하트에게조차 맞붙어볼 생각으로 가득한 전투광이 베리얼인데 그런 베리얼이 저 정도까지 말했다면 뭔가가 있는 거겠지.
‘일단 지금은······.’
집회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보다 급한 일이 코앞에 들이닥쳤기에.
나는 내 안에 잠들고 있는 언데드들을 확인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미리 진화를 끝내놓은 티무르와 크리브마허가 느껴졌다.
‘다 삼켜주마.’
황궁에 있는 탑이 기다리고 있었다.
**
제국의 상업도시인 누아벨라.
새로운 기원에 대한 논문 강연으로 인해 보기 드문 마법사들과 학계의 지식인들이 모인 참이었다.
마침 모든 시연이 끝나고 단상에서 내려가는 디에네와 루시아를 향해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실제로 보니 기가 막히는군. 저런 게 가능할 줄이야.”
“혁명이야. 저 정도면 혁명이라고!”
첫 논문 발표는 외부인의 입장이 제한되는 아카데미 안에서 만의 행사였기에 수많은 학계 관계자들이 손톱을 깨물며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외부에서 펼쳐진 첫 강연은 성공적이었다.
그야말로 폭발적인 반응.
몇몇 이들은 여전히 의구심을 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번 논문에 대해 열렬한 갈채를 보냈다.
“이 대단한 걸 고작 학생이 만들었다니 믿기지가 않는군. 혹시 바하트 알븐이 도와준 게 아닐까?”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지금은 어서 저 논문을 연구해보고 싶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군! 한 가지 아쉽다면 제 1저자인 아드리아스 크롬웰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야.”
강연이 끝나고 이어진 질의응답에서도 디에네가 완벽한 대처를 했기에 사람들은 그녀의 아버지인 바하트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디에네와 루시아의 호위 명목으로 따라온 이들은 로들렌 마탑의 마법사들이었다.
“그나저나 논문의 등급이 등급 외인 것이 다행이군. 아니었으면 어마어마한 값을 치렀을 거야.”
“조금 아쉽기도 하겠군. 등급 외 판정은 명예로운 일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금전적으로는 이득이 없으니······.”
등급 외의 논문이 나온 건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금까지의 논문은 논문 작성자에게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열람하는 방식이었지만 등급 외의 경우 보편적 향상을 위한 지식이라는 명제 하에 무료로 풀리고 있었다.
물론 무료로 풀리는 것은 로들렌 아카데미가 가진 논문의 독점권으로 인해 몇 년 뒤에나 있을 일이었다.
그때까지는 엄청난 가격에 역서들이 팔릴 것은 자명한 일.
당장 연구하고 싶어 하는 마법사들로서는 그 누구도 무료로 풀릴 때까지 기다리지는 않을 거다.
“그런 걱정을 할 처지입니까? 당장 내일이라도 역서가 풀리면 구입하실 분이.”
“하하. 그것도 그렇군.”
강연장은 그대로 연회장으로 변모했다.
삼삼오오 모여서 먹고 마실 것을 즐기며 이번 강연에 대해 토론하는 학계 관계자들은 오랜만에 생긴 즐거운 주제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했다.
“아! 디에네 양. 드디어 우리에게도 말을 걸 시간이 왔군.”
디에네와 루시아도 예의상 연회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들을 향해 수많은 사람들이 미처 못 다한 질문을 하느라 온통 소란스러웠다.
“바그너 학회장님. 오랜만이시네요.”
“전하께서는 강녕하신가?”
“네. 안 그래도 아버지께서도 바그너 학회장님이 참석하실 거라고 안부를 대신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하하. 그거 참 감사한 일이군. 나도 대신해서 안부 좀 부탁하네.”
학계에서도 명성이 있는 바그너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루시아에게도 인사를 건넨 뒤 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 제 1저자인 크롬웰 백작은 참가하지 않으신 건가?”
“네. 아시다시피 이 논문은 아직 연구할 논제가 많은 주제라서 아직도 연구하고 있어요. 논문 발표가 끝났는데도 연구실에서 살다시피 하더라고요.”
“오호. 아주 대단하신 분이군. 우리랑 말이 잘 통하겠어.”
“연구도 연구지만 또 저희가 졸업이 다가오니 아무래도 대비를 해야 하는 것도 있어서······.”
“아! 탑을 준비하는 건가!”
탑.
황궁에 있는 고대 시대의 유적.
신의 힘이 온전히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유적으로 황궁 내부에 위치한 돌기둥이었다.
아카데미에 존재하는 모드라스의 탑이 진짜 탑의 모의평가를 위해 만들어졌을 정도.
“올해는 기대가 되는군. 디에네 양 뿐만 아니라 크롬웰 백작도 참가할 테니.”
“그저 무사히 돌아오기만 바랄 뿐이에요.”
“아니. 내 직감이 말하고 있네. 올해는 탑의 기록이 갱신될 거라고 말이야. 하하하!”
“그랬으면 좋겠네요.”
디에네가 살풋 미소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황궁이 있는 방향.
묘한 긴장이 그녀의 전신을 휘감았다.
< 238화. 최연소 교수 그리고 탑을 위한 준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