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화. 포트리온의 주인 >
“네 녀석이 여긴 웬일이냐.”
바하트가 책상에 놓인 종이를 확인하며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그러자 바하트의 방에 들어온 베리얼은 태연하게 아무 자리에 앉으며 그런 바하트를 바라보았다.
“그거, 논문입니까?”
“포트리온을 불러들인 건 네놈 짓이냐?”
질문을 간단히 무시하고 제 할 말을 하는 바하트를 향해 베리얼이 웃어보였다.
“어감이 좋지 않군요. 제가 꼭 못된 행동을 했다는 듯이 말합니다?”
“베리얼, 넌 항상 네놈의 이득만을 위해 행동해왔다. 설마 아무 생각 없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 건 아니겠지?”
“아까부터 제 물음에는 반문만 하시는군요.”
“우리가 평범하게 대화를 나눌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지.”
쌀쌀한 바하트의 대답에 베리얼은 쌓여있는 책들 위에 다리를 꼬았다.
“그렇게 대화가 싫으시다니 용건을 말하겠습니다. 피차 그게 편하겠지요.”
바하트는 여전히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읽고 있던 걸 마저 읽으며 무언가를 메모했다.
하지만 그가 듣고 있다는 걸 알기에 베리얼은 자신이 찾아온 이유에 대해 말했다.
“마탑주님. 전 내년까지만 이곳에 있을 겁니다.”
“······허락은.”
“제가 누굽니까. 이미 다 해결했지요.”
“너 같은 놈을 세상 밖으로 풀다니 황궁도 제정신이 아니군.”
“먹음직스러운 왕국들이 눈앞에서 깐죽대고 있으니 말이죠. 덕분에 쉽게 해결했습니다, 하하.”
베리얼은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방안을 한 바퀴 돌더니 마침내 바하트가 앉은 책상 앞까지 도착했다.
“탑주님. 아시다시피 제가 제자를 하나 두고 있습니다.”
“······.”
“마법적인 재능은 몰라도 특이한 발상과 그 발상을 실천하는 행동력이 대단한 친구지요.”
“웃기는군. 최근에는 네놈 할일 바빠서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는 주제에 제자라 칭해?”
“그건 절 탓하시면 안 됩니다. 애초에 저와 그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 그런 계약이니까요.”
생글거리며 말하는 베리얼의 얼굴을 쳐다본 바하트는 주먹을 들었다가 내려놨다.
충동적으로 그의 얼굴을 때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바하트였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이번 논문으로 인해 제 제자의 명성은 학계에 널리 퍼질 겁니다. 대륙에서 제일이라고 자부하는 로들렌 마탑의 탑주시라면 이를 조금 더 가속시키는데 일조하실 수 있으시겠죠?”
“뭘 꾸미고 있는 거지.”
“뭘 꾸미다뇨? 전 그저 제자가 잘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탑주님께서도 그에게 진 빚이 있으실 텐데요? 이번 기회에 제대로 은혜를 갚으시죠.”
“네놈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감히 내게 명령하는 것이냐?”
심상치 않은 마력의 기운이 안 그래도 어지럽혀져있던 바하트의 방 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베리얼은 자신의 주변으로 얇은 마나막을 펼치며 태연하게 서있을 뿐이었다.
“제 말이 언짢으셨습니까? 어느 부분입니까? 제가 아카데미를 나간다는 게 불편한 건지, 아니면 아드리아스를 좀 도와달라는 게 불편하셨던 건지 말해 주십시오.”
“네 말투와 제스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자식아. 아드리아스에 대한 건은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당장 여기서 꺼져!”
“긍정이라고 여기고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1년만 더 보면 될 사이인데 조금이라도 좋게, 좋게 지내보죠, 탑주님.”
바하트의 호통에 베리얼은 만족스러운 답변을 들었다는 듯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여전히 마나막을 두른 채 유유히 방을 나갔다.
“후우.”
잠깐 흥분했던 탓에 혈압이 올라오는 것을 느낀 바하트는 심호흡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베리얼이 나간 문을 한 차례 노려보고는 통신 아티팩트를 들었다.
-통신 받았습니다, 탑주님.
“딕슨인가? 아무튼 앞으로 베리얼이 찾아오면 무조건 내 방으로 못 오게 해.”
-예, 예? 예······알겠습니다.
당황한 목소리가 전해져왔지만 바하트는 그대로 아티팩트를 껐다.
그도 사실 베리얼이 마탑의 경비를 뚫고 몰래 찾아왔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속을 풀어야했다.
아마 마탑 내의 다른 이들은 베리얼이 왔었다는 사실도 모를 터.
“고얀 놈.”
바하트는 뛰어난 마법사답게 금세 냉정을 되찾았다.
욱하는 성질은 있지만 언제든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것이 대마법사의 소양이었다.
바하트는 잠시 책상 위에 놓인 아드리아스와 디에네가 합작한 논문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그들이 있을 방향을 바라봤다.
“하필 불러도 괴물 같은 놈을 불렀군.”
딸과 관련된 일인 만큼 평범한 디바우러가 왔다면 아마 지금쯤 그도 교장실로 달려가 유세를 부렸을 거다.
하지만 지금 도착한 이는 절대로 평범한 이가 아니었다.
이미 강력한 경고의 파장이 여기까지 전해져 오는 바, 아마 이곳에 온 디바우러는 포트리온의 주인인 맥스웰이 분명했다.
그는 바하트조차 승부를 점칠 수 없는 강력한 워록.
게다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그만의 성질 때문에 만약 바하트가 찾아갔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쯧.”
지금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없음을 짐작한 바하트는 혀를 차며 다시 논문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무언가를 열심히 메모해나가기 시작했다.
**
“포트리온의 주인이 이곳까지 직접 오실 줄은 몰랐군요.”
당황한 우리를 대신해 입을 연 인물은 데오스였다.
말을 들어보니 그도 맥스웰이 온다는 건 몰랐었나보다.
“아무래도 내 움직임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니 말이야.”
맥스웰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다시 내게 시선을 맞추었다.
“사실 내가 여기까지 직접 온 건 논문도 논문이지만 그대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야.”
“그렇습니까.”
그는 이미 나를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했다.
맥스웰과의 연결고리는 생각해보면 금방 나와 고민할 필요도 없지.
‘루나 펜드래곤.’
시기상 원작에서는 이미 죽었어야 할 그녀가 내가 어쩌다 뒤틀어버린 미래로 인해 아직도 살아있었다.
지금에 있어서는 내 소중한 사람 중 하나로 자리한 그녀는 맥스웰의 딸이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의 딸을 직접 마주한 적이 없는 비정한 맥스웰이라도 그녀에게 약간의 관심은 있겠지.
“호칭을 성주님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성주? 마음대로 하게.”
“성주님께서는 오리지널 마법으로 굳이 사람을 직접 찾아가지 않아도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마법적 특성으로 워록을 발표하는 걸로도 알고 있고요.”
“왜 그대를 굳이 보러 왔냐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당돌하군.”
마치 다른 이들이라면 본인이 와준 것만으로도 영광이라 할 텐데 가소롭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분도 잠시였고, 이내 맥스웰이 입을 열었다.
“마법사들은 대체로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지. 육체가 무뎌지면 약해지는 검사들과는 달리 말이야.”
글쎄.
우리 데슈른 스승님을 보면 그런 생각은 안 들지만 그렇다고 해두지.
“고로 내 마법도 계속 발전하고 있어. 애초에 그를 위해서 나도 포트리온에 있는 거니 말이야.”
“그렇습니까.”
“난 마침내 운명을 엿보기 시작했다네.”
맥스웰의 말에 모두들 숨을 죽였다.
다른 사람이 뱉은 말이었으면 비유나 농담으로 들었을 테지만 맥스웰이 말하니 그 무게가 남달랐다.
“운명을 엿본 지 5년 정도 됐나. 모두의 운명을 볼 수 있는 건 아니고 여러 조건들이 우연의 일치라고 불릴 정도로 합쳐져야 볼 수 있는 거지만 최근까지는 단 한 번도 엇나간 적이 없었네.”
“그 말씀은 최근에 엇나간 적이 있다는 말씀처럼 들리는군요.”
“정확하네.”
사실 나도 맥스웰의 능력은 정확히 몰랐다.
자유도가 높은 게임이었으니 만큼 그를 공략할 생각도 해보았지만 애초에 만날 수도 없는 인물이었던 탓에 무리였다.
그는 말 그대로 디바우러에 가장 어울리는 남자.
나쁘게 말하면 그저 방구석 찐따였다. 마법을 잘 쓴다는 전제가 붙는.
그러니 그가 워록을 공표한다는 것과 정보와 관련된 마법을 부린다는 것 밖에 몰랐다.
그래서 내가 처음에 알아보지 못했던 거기도 하고.
“설마 그 엇나간 운명이 저와 관련된 겁니까?”
“그렇다네. 그래서 직접 마주하면 뭔가가 느껴질까 싶어 왔지.”
“느껴집니까?”
“전혀.”
실망이군.
뭐라도 느끼고 감탄했으면 좋았을 텐데.
“오히려 그래서 놀라는 중이야. 그대는······.”
뭔가 더 말하려던 맥스웰이 거기서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일단 여기까지 해야겠군. 그대와는 더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조금만 더 깊숙이 들어가면 너무 사적인 대화야.”
그가 말을 마치려하자 오히려 주변에서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맥스웰이 하는 말이라면 한 마디라도 더 듣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건 나머지 두 디바우러도 마찬가지였다.
“용건을 마쳤으니 일어나볼까.”
“논문에 관한 건······.”
“난 더 이상 묻고 싶은 게 없네. 사실 어떻게 그 논문을 쓰게 된 건지 짐작 가는 게 있거든.”
짐작 가는 게 있다고?
하지만 맥스웰이라면 충분히 알만했다.
사실 그가 본격적으로 입을 열면 내가 흑마법사인 게 탄로 나는 건 물론이고 집회 소속인 것까지 드러나겠지.
다행히 그는 중립적인 마법사로 흑마법사들과 교류를 하는 걸로 유명했다.
애초에 흑마법사가 가장 배척받는 곳은 제국과 성국뿐이었으니.
“다음에는 포트리온에서 보도록 하지. 내가 초대장을 보낼 테니 그때는 길게 대화를 나눠보세.”
“허어!”
맥스웰의 말에 모두가 놀랐다.
심지어 카르멘은 탄성까지 터트릴 정도.
맥스웰의 말은 가벼워보였지만 절대 가볍지 않았다.
“난 먼저 가볼 테니 자네들은 논문과 관련해서 더 말을 나누고 싶은 게 있으면 하게나.”
“알겠습니다.”
비앙테가 공손하게 대답하자 맥스웰은 데오스에게 마저 인사하고 디에네에게 마지막으로 말을 전했다.
“바하트에게는 안부를 전해주거라.”
“네.”
“그럼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즐거웠네.”
맥스웰은 인사만 남긴 채 그 울림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모습을 감추었다.
마나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는 게 소름이 돋을만한 마법 실력이었다.
“그럼 저희끼리 더 대화를 나누어 볼까요.”
비앙테가 정리하며 말했다.
그러나 조금 전에 있었던 맥스웰이라는 인물 자체가 지닌 영향력 때문에 모두 정신이 없어보였다.
실제로 만난 사람이 10년 동안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고 봐도 될 위대한 마법사였으니······.
‘포트리온.’
안 그래도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맥스웰의 초대라니 금상첨화다.
축제가 열리는 건 9월이니 시간은 많았다.
그때까지 미리 준비를 해둬야겠군.
**
포트리온의 마법사들이 왔다갔다는 소식은 금세 전국각지로 퍼져나갔다.
덕분에 나와 디에네, 그리고 점차 도움이 커져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루시아의 이름도 저자로 올린 논문은 엄청난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등급도 이미 공개되어 논문 주제도 밝혀진 상태.
‘마나의 근원이란 무엇인가.’
뭔 개똥같은 근원론인가 싶겠지만 사실 제목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정말 중요한 건 내용.
포트리온의 마법사들이 찾아온 것도 결국 그 내용 때문이었으니까.
“이제 곧 발표.”
논문 때문에 며칠 만에 만난 비비안이 내 연구실을 청소해줬다.
나도 꽤 깔끔한 편이라 생각했지만 연구를 하다 보니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요즘이었다.
“예. 발표네요.”
“잘 할 수 있을 거야.”
사실 두 천재의 도움을 받은 덕분에 논문의 완성도는 완벽에 가까웠다.
디에네와 루시아가 오류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마 그 누구도 못 찾을 거다.
재능 자체로는 현 대륙의 그 어느 마법사보다 뛰어난 두 사람이니까.
“비비안은 필수 과제는 다 끝냈죠?”
“응. 이제 졸업 평가만 남았어.”
“시간이 꽤 많이 남으셨네요.”
“그래서 보러 왔어.”
솔직하네.
뭐, 나도 논문 때문에 그녀를 챙겨주지 못했으니까 남 말할 처지는 아니다.
그래도 비비안이 찾아와준 덕분에 조금 리프레쉬되는 느낌이라 좋았다.
“자신 있지?”
“물론이죠.”
디에네와 루시아를 등에 업은 내가 두려울 게 있겠나.
나는 방향만을 제시했고 둘이서 거의 다 작성한 거나 마찬가지다.
물론 방향을 잡아준 내 역할이 제일 컸지만.
띵!
태블릿에 메세지가 도착했다.
확인해보니 슬슬 나갈 시간이었다.
“발표?”
“예. 같이 가실래요?”
“응.”
나는 준비한 자료들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재 외부로 유출된 논문들은 모두 일부분만 발췌한 것들.
포트리온의 마법사들에게조차 논문의 전문을 보여주진 않았다.
‘가볼까.’
세상을 변하게 할 정도는 아니다.
그저 마법학계에 공부를 해야 할 필수 과목을 늘리는 정도?
“어차피 곧바로 써먹을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겠지만.”
내가 이토록 자신 있어 하는 이유.
이 논문으로 발표할 것은 다름 아닌 새로운 기원이었다.
< 235화. 포트리온의 주인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