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화. 에반, 복귀 그리고 졸업논문 >
“제파르 교단?”
에반이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오토를 바라봤다.
“이단?
“그,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제파르 교단이라니요? 전 그게 뭔지도 모릅니다.”
연기를 잘하는 녀석답게 시치미를 떼는 게 일품이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시치미를 떼도 이미 게임을 통해 정체를 알고 있는 나를 속일 수는 없었다.
“오토 무조노프, 제파르 교단의 숨겨진 밤이라는 이명을 지닌 암살조장. 조금 전에는 에반에게 연락한 것뿐만 아니라 교단에도 내가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렸겠지. 마침 근처에 제레드도 있으니 말이야.”
“······.”
오토의 표정이 웃는 그대로 굳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그렇게 멍하니 서있었고, 에반은 천천히 검을 뽑으며 가까이 다가섰다.
“미리 알고 오신 거군요, 크롬웰 각하.”
“그렇다고 해두지.”
“정말 무서우신 분입니다. 왜 에반과 같은 자가 당신의 수하를 자처했는지 궁금했는데 조금은 알 것도 같군요.”
사실을 실토하는 듯한 그의 뉘앙스에 비비안도 검을 들고 내 사선을 지켰다.
제파르 교단이 뭔지는 몰라도 돌아가는 분위기를 눈치 챌 수밖에 없겠지.
“깔끔하게 인정하는군. 마지막으로 할 말은?”
“살려주십시오. 알고 있는 정보를 다 불겠습니다.”
오토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순순히 항복하는 모습에 난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물었다.
“제파르 교단은 점조직으로 알고 있는데 정보를 주겠다고? 그래봤자 이미 내가 다 아는 내용일 텐데.”
“당신의 수하가 되겠습니다. 전 생각보다 쓸모가 많은 놈입니다.”
비록 무릎을 꿇었지만 두 눈빛만은 자신감이 가득했다.
본인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넘쳐났다.
“제파르 교단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할 수 있는 일 자체가 많습니다. 온갖 음지의 일들은 다해왔고 첩보부터 암살까지 못하는 게 없습니다.”
“그런가. 대단하군.”
확실히 제파르 교단의 간부급이었던 오토의 능력은 출중했다.
정면 대결에서는 내가 질 리 없겠지만 그의 특기는 암살.
누구나 방심할 때는 있기 마련이고 암살자인 그는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노린다.
그래, 녀석은 내가 방심하기만을 기다릴 거다.
“그렇게까지 하겠다니 이중첩자로 써먹으면 좋겠네. 에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으음······. 이단은 영 꺼리지만 주군께서 그리 하시겠다면 따르겠습니다.”
에반의 대답에 표정이 환해진 오토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살려주신 은혜······.”
은밀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쇄앵-
말을 하는 상대의 호흡과 호흡 틈새를 노리고 갈락슈르가 뽑혀나갔다.
순식간에 발도된 검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고개를 숙인 오토를 훑고 지나갔다.
털썩!
방안으로 짙은 혈향이 풍겼다.
붉은 액체가 웅덩이를 만들어내고 에반과 비비안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광신도는 믿을 만한 종자들이 못 됩니다. 그냥 상대의 방심을 노린 것뿐이에요.”
“역시 주군이십니다.”
에반이 감탄한 기색으로 박수를 쳤다.
사람을 죽인 일이 박수 받을 만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오토를 살려둘 생각은 없었다.
에반이라는 보험을 위해 시기를 기다린 것뿐.
“광신도?”
“예. 제파르라는 악마를 믿는 광신도들이 있습니다. 비비안도 조심하셔야 해요.”
“응.”
에반이 사람을 불러 방을 치우게 했다.
그 사이 다른 방으로 옮긴 우리는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제파르 교단은 적입니다. 제가 예전에 있었던 아카데미의 테러를 막은 일 때문에 저를 암살하려고 했었죠.”
“이단놈들이 미쳤군요.”
“아마 저 사람 이외에도 숨은 광신도들이 많을 겁니다. 제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은 이미 오토가 죽기 전에 알렸을 테니 확실히 정리하는 게 좋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한 번 제대로 물갈이를 하죠.”
“그리고 비비안. 비비안도 저와 같이 테러를 막았기 때문에 제파르 쪽에서 노리고 있을 수도 있어요. 항상 조심하세요.”
“연말 축제?”
“예, 그때 막은 테러요.”
“응.”
뜻밖의 인물의 등장으로 이야기가 조금 샜지만 나는 이곳에 온 이유를 확실하게 말했다.
“에반, 페이드는 잡았습니까?”
“그때 마주친 이후로 아주 바퀴벌레처럼 숨어버렸습니다. 그래도 흔적을 추격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잡을 수 있다고 봅니다.”
“저도 나중에 알게 되는 것이 있으면 말해주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근데 주군, 여기 계신 분도 이런 내용을 알아도 되는 겁니까?”
에반이 비비안을 가리키며 말하자 그녀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떠졌다.
“예, 비비안은 제 동료입니다. 믿을 만해요.”
“다 알고 있는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내가 말을 흐리자 비비안의 눈초리가 이내 나를 향했다.
마치 자신에게만 숨기고 있냐는 듯한 그 눈빛에 식은땀이 조금 배어나왔다.
“언젠가 전부 말해줄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확실한 동료군요. 주군 곁에 믿을 만하고 뛰어난 검사라면 언제나 환영이죠.”
역시 대륙 10인이라는 칭호가 어색하지 않게 비비안의 실력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그러나 비비안이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당신은 누군데 아드리아스를 주군이라고 불러?”
“전 에반이라고 합니다.”
“이름이 에반인 건 이미 들었어. 아드리아스의 기사야?”
뭔가 말하는 핀트가 어긋난 느낌이 들었다.
“비비안, 설마 에반이 누군지 모르시는 겁니까?”
“처음 본 사람인데.”
아, 대륙 10인인만큼 이름만 들어도 당연히 알 거라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다.
에반이라는 이름이 한 명만 있는 것도 아니니 당연한 이야기인데 그동안 에반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서 착각했다.
“대륙 10인 중 한 명인 에반 폰 오를레옹, 지금은 그냥 에반이죠. 성국의 성기사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구나.”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마치 설명을 해주니까 알겠다는 것 같았다.
그 반응이 대륙 10인이라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나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닌지 에반이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세간의 소문과 명성에 대해 관심이 그리 많지 않은 분이시군요. 오히려 믿음이 갑니다.”
“소문? 명성? 당신 대단한 사람이야?”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검을 좀 휘두를 줄 아는 구질구질한 사내지요. 그보다 주군, 저를 찾아온 이유가 제파르 교단 때문이었습니까?”
가끔 보면 에반은 대륙 10인이라는 호칭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지금도 굳이 화제를 돌리는 걸 보면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도 에반이 싫다면 딱히 계속 말할 생각도 없지만.
“이번에 황제 폐하께서 제게 영지를 하사하셨습니다.”
“예, 이미 전해들었습니다. 고향을 되찾으신 걸 축하드립니다, 주군.”
“감사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크롬웰을 조금 살펴봐 주시지 않겠습니까?”
“주군의 영지이니 당연한 일이죠.”
“에반.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전 황제 폐하와 사이가 그리 좋지 못합니다. 아니, 안 좋다기보다 제가 일방적으로 폐하의 계략에 휘말리는 입장이죠. 아마 이번 영지 수여도 폐하께서 다른 의도가 있을 것 같아 에반에게 부탁하는 겁니다.”
내 말이 끝나자 에반의 두 눈이 빛났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한동안 말없이 탁자를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황제의 계략이라······. 역시 주군께서는 왕이 되실 운명인가 봅니다.”
“예?”
“아닙니다. 그냥 혼잣말이었습니다. 일단 주군의 명은 잘 알겠습니다. 조직을 이용해 철저히 조사를 하도록 하지요.”
“하나 더 말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이왕이면 본거지를 크롬웰로 옮기는 게 어떻습니까?”
“으음. 그건 좀 시간이 지난 뒤에 해도 되겠습니까? 일단은 수도만큼 저희가 활동하기 편한 곳도 없어서 당장에 모든 기반을 옮기는 건 힘들어 보입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옮기긴 하지만 일단은 페이드를 잡고, 제국의 암흑가를 모두 평정한 뒤에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아, 제파르 교단의 일도 처리하고요.”
에반이 웃는 얼굴로 두 눈에 흐릿한 살기를 띄었다.
그 모습이 히든 던전에서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게 했다.
“감히 이단놈들이 주군을 노리다니 간덩이가 단단히 부었군요.”
“그들의 세력은 생각보다 넓고 강합니다. 게다가 기반이 제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뿌리 뽑을 수는 없을 거예요.”
“적어도 주군을 건드리지는 못하게 단단히 경고를 해야겠습니다. 제레드 테이슨 백작이 간부라고 했지요? 거대 상단을 운영하는 만큼 약점이 반드시 있을 겁니다. 주군의 정체는 들키지 않게 뒤에서 제가 철저히 공략하지요.”
“에반이 나서준다니 걱정이 없네요.”
“전 그저 행동할 뿐입니다. 오히려 주군께서 갖고 계신 정보가 아니었으면 크게 당할 뻔했습니다. 전 오토가 광신도인 줄은 전혀 예상도 못했거든요.”
그는 진심으로 감탄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역시 주군이십니다.”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이만 이야기가 끝났으니 일어나보죠.”
“알겠습니다.”
용무만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은 더 회포를 풀어도 되겠지만 오토가 내 위치를 제파르 교단에게 말했을 게 뻔했기에 같은 장소에서 오래 머무르고 싶지는 않았다.
내게 있어서 가장 안전한 장소는 아카데미였다.
일행들과 함께 방 밖으로 나오자 고아원의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원장을 다시 구해야겠군요.”
“맡을 사람은 많습니다. 조직 내에서도 꽤 높은 직책이라 모두들 원하지요.”
“부족한 건 없습니까?”
“제가 돈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건 아니어서 암흑가를 차지하며 얻게 되는 수익은 대부분 수하들과 이런 빈민 구제 사업에 씁니다. 그러다 보니 딱히 부족한 건 없습니다. 돈이면 대부분 해결이 되더군요.”
에반이 어쩐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생각해보면 성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새 신앙에 대한 가치는 물질적 가치를 뛰어넘지 못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전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저 눈 뜬 장님이었지요. 그러나 주군을 뵙고 성국에서 파면당하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더군요.”
“에반. 그래도 에반에게는 여전히 신앙적 가치가 최우선이겠지요?”
“이제는 신앙이라 말하기는 뭣하고, 진리라고 하지요. 저만의 진리.”
“꽃은 말라도 색을 잃지 않죠. 단어가 달라졌어도 달라진 건 없어요.”
뛰노는 아이들의 순수한 미소가 유독 눈에 밟혔다.
“꽃은 말라도 색을 잃지 않는다라······.
“에반의 숭고한 의지는 시간이 지나도 이어질 겁니다.”
에반에게 하는 말이자 나 자신에게도 하는 말.
우리는 모두 불멸을 기록하는 저만의 방식이 있을 뿐.
그러니 더욱 방심할 수 없었다.
나의 심장을 겨눈 적들도 모두 그러할 지니.
“위로가 되는군요.”
“위로가 됐다니 다행입니다.”
에반이 아이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
아카데미에 복귀하고 비비안과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에 우물쭈물하며 크롬웰 가문에는 에반과 같은 기사들이 많냐고 물어보는 그녀가 의아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그 사람은 아드리아스의 비밀도 알고 있지?”
“불가항력이었습니다. 어쩌다 알게 됐죠.”
이제는 비비안에게 딱히 숨길 생각도 없었다.
이미 다 짐작하고 있는데 굳이 모르는 척해서 사이가 나빠지고 싶지는 않으니.
“나도 언젠가······.”
“예. 다 말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나도 크롬웰······.”
그녀는 말끝을 흐리더니 얼굴을 붉히며 그대로 사라졌다.
마지막 말이 뭐였는지 궁금했지만 순식간에 달려가 버리는 그녀를 굳이 쫓아가 묻기에는 곤란했다.
주변을 둘러보자 벌써 단풍이 들려 하고 있었다.
아카데미는 방학을 당겨 쓴 덕분에 일정이 헬이 됐다.
겨울 방학 없이 진행이 되는 일정은 빡빡한 스케쥴로 가득 차 있었다.
‘그나마 전쟁에 참여한 덕분에 학점은 챙겼다.’
그리고 토너먼트 우승까지 합쳐지자 꽤 여유로운 학점이 모였다.
이제 연말에 있을, 아니 일정이 바뀌어 내년 초에 있을 졸업 시험만 무사히 통과하면 문제가 없었다.
“졸업 시험이라······.”
말이 좋아 시험이지 논문을 작성하고 심사받아야하는 일이었다.
차라리 기사학부였으면 무력만으로도 통과가 되는데 마법학부는 무력보다 연구 성과가 우선시 되었다.
그도 그럴 게 워록의 상징인 오리지널 마법도 결국 강한 마법이 아니라 연구를 통해 만든 본인만의 마법을 뜻하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이제 방학도 없으니 반년동안은 족히 아카데미에 있어야했기에 그동안 뭐라도 구상해야했다.
'어차피 아는 건 많으니까.'
마법 학계나 한 번 발칵 뒤집어 볼까.
영향력도 넓힐 겸 재밌겠네.
< 231화. 에반, 복귀 그리고 졸업논문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