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화. 시작된 암투 >
“와아······.”
“저 분들 봐봐.”
“어쩜 저리 아름다우시지?”
저택 입구가 소란스러워 2층에서 슬쩍 내려다보자 메이드들과 하인들이 도착한 손님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님들은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곧바로 올려다보았다.
“거기서 뭐하세요? 계속 보고만 있을 거예요?”
머리색과 깔 맞춤을 했는지 화려한 연분홍빛 드레스를 입은 루시아가 졸린 눈으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런 그녀의 옆에는 남청색의 단정한 드레스를 입은 비비안이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손님들은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모두 돌아가세요.”
나는 하인들을 물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내가 그들의 앞에 도착하자 루시아는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연회 복장은 아니죠?”
“어. 조금 있다가 출발하기 전에 갈아입어야지. 그보다 인사가 먼저 아니냐?”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아니, 하루하루가 힘들다. 비비안, 이쪽으로 오시죠.”
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어쩔 줄 몰라하는 비비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옷이 잘 어울리시는군요.”
그녀는 내 손을 보고는 얼굴을 붉히며 다소곳하게 본인의 손을 얹었다.
“응.”
그때의 일 이후 나도 조금 낯이 간지러웠으나 그녀를 향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잠시 서있자 옆에서 루시아가 끼어들었다.
“우리 가문에서 준비한 거예요. 당연히 예쁠 수밖에 없죠.”
“홀링턴에서 같이 온 거야?”
“네.”
응접실로 들어서자 한창 상단의 일로 소란스러운 바깥의 소음이 사라지고 조용해졌다.
루시아가 제 집인 양 소파 한쪽에 앉으며 비비안에게 손짓했다.
“언니, 여기 앉아요.”
“응.”
나는 응접실의 하인에게 라스틸리아 차를 부탁하며 그들의 맞은편에 앉았다.
“전쟁 이후로 처음이네.”
“그러게요. 보니까 꽤 바쁘셨을 것 같은데?”
“말했잖아, 하루하루가 힘들었다고. 에버라스트 상단주께서는 평안하신가?”
“안 그래도 요즘 너무 바쁘셔서 저까지 부리고 계세요. 그래도 말하는 걸 들어보니 크롬웰이 더 바쁘면 바빴지, 저희보다 못하지는 않았을 것 같네요.”
그녀의 말대로 야만족과의 전쟁이 끝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나고 있었지만 여전히 정신없는 하루하루였다.
아카데미가 전쟁의 여파로 인해 방학 일정을 당긴 게 아니었다면 에이미는 내 도움이 없어 꽤 곤욕을 치렀을 거다.
“비비안도 이번에 공훈을 세워 훈장을 수여받을 예정이시죠?”
“응.”
“잘 됐군요. 졸업 후의 진로는 걱정할 필요가 없으시겠습니다.”
내 말에 그녀는 그저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던 루시아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에휴.”
“갑자기 웬 한숨?”
“아니에요. 그냥 누가 좀 답답해서.”
누구를 말하는 거지?
비비안 보고 한 말인가?
의문을 가지며 그녀에게 물어보려고 할 때, 에이미가 방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두 분 다 어서 오세요. 루시아님은 오랜만이네요. 옆에 계신 분이 비비안님인가요? 전 에이미 크롬웰이라고 합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비비안 벨로칸. 잘 부탁해.”
생각보다 빠른 에이미의 등장에 나는 곧바로 물어봤다.
“벌써 준비가 끝난 거야?”
“어, 오빠도 빨리 갈아입고 와. 내가 손님들 모시고 있을게.”
에이미에게 접객을 맡기고 나는 다시 방으로 올라와 환복을 했다.
보통의 귀족이 그러하듯 원래는 옷도 하인이 입혀주지만 전생의 기억이 남아있는 난 혼자서 끙끙 싸매며 간신히 옷을 입을 수 있었다.
다음부터는 그냥 도와달라고 해야지.
“이제 출발할까.”
응접실로 다시 내려온 내가 말하자 모두 날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묘한 침묵이 흐르자 나는 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말했다.
“출발하자.”
“어, 어.”
에이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와 어깨를 때렸다.
“갑자기 왜 그래?”
“역시 내가 보는 눈은 있구나 싶어서. 등빨 죽이네? 그동안 몰라봤어.”
“이 옷? 입느라고 고생했는데 고생한 보람은 있나보네.”
내 기준에서는 조금 화려한 자수 장식이 옷 전체에 박힌 검은 정장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자수도 조금 더 진하기만 할 뿐, 같은 검정색이어서 크게 티가 안 났기에 부담은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옷은 에이미가 맞춤 주문을 했다.
나는 패션 따위에 전혀 문외한이었기에 치수를 재는 것 이외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지.
“정말 깜짝 놀랐어요. 맨날 마법사처럼 펑퍼짐한 로브만 입었을 때는 전혀 몰랐었는데.”
루시아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웃었다.
“마법사처럼이 아니라 마법사니까 로브를 입은 거야.”
“아, 그렇네요. 선배, 마법사셨죠?”
그녀는 이내 나를 멍하니 바라보는 비비안의 손을 붙잡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옷에 새겨진 자수를 만져보며 재잘댔다.
“언니, 이것 좀 봐요. 왜 아깝게 동색으로 했을까. 이렇게 예쁘게 박은 건데.”
“저희 오빠가 부끄럼이 많아서 일부러 그렇게 했어요. 제가 속이 싶은 동생이라······.”
그런 비하인드가 숨겨져 있는 줄은 몰랐군.
하지만 나를 정확히 파악한 그녀의 안목에 역시 내 동생은 동생이구나 싶었다.
“비비안 언니?”
“으, 응?”
“어때요? 선배가 정장을 입은 모습?”
이제 보니 루시아, 이 녀석······.
아무래도 비비안의 고백을 아는 눈치였다.
일부러 비비안을 곤란하게 만드는 모습이 그녀가 처음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모습과 겹쳐보였다.
“출발 준비 끝났습니다.”
타이밍 좋게 에이미의 비서인 마리아가 우리를 찾아와 말했다.
그녀도 비서의 자격으로 함께 참가하는 만큼 드레스는 아니어도 한껏 멋을 부린 모습이었다.
“오랜만의 마차 여행이 되겠네요. 자, 자. 가시죠.”
에이미가 루시아와 비비안을 재촉하며 먼저 밖으로 내보냈다.
그녀의 자연스러운 손길에 마리아에게로 떠밀려간 둘을 바라보고 있자 에이미가 내 곁에 다가와 귓속말을 속삭였다.
“뭐야?”
“갑자기 뭐가? 그리고 왜 속삭여?”
“비비안 벨로칸, 오빠랑 그렇고 그런 사이?”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특유의 표정 유지를 하며 에이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 거 아니야. 어서 가기나 하자.”
“아니야? 정말? 맞는 거 같은데······.”
“혹시라도 무례는 저지르지 마. 진짜로 아니니까.”
“알았어. 오빠가 그렇다니까 그런 줄 알고 있을게.”
배시시 웃음을 흘리며 일행들의 뒤를 따라가는 에이미가 왠지 못 미더웠다.
**
황궁에서 개최되는 이번 연회는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열차를 타는 게 당연히 훨씬 빠르고 편했지만 황궁에서 개최되는 연회의 경우 수많은 귀족들이 몰려오기에 품위 유지를 위해 각자의 마차를 타고 가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덕분에 뜻하지 않은 노숙을 며칠씩하며 간신히 도착한 황궁에는 화려한 마차행렬이 줄을 잇고 있었다.
“조금 일찍 온다고 온 건데 다들 부지런하시네.”
에이미가 황궁 앞으로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중얼거렸다.
여기서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작위가 높은 귀족은 프리 패스지만 우리 같이 별 볼일 없는 귀족들은 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사서 고생하는군. 연미복을 입고 며칠씩 노숙을 한 것도 모자라 이렇게 기다린다니······.”
“그게 예의니까. 뭐, 어쩔 수 없지.”
가끔 보면 배경이 중세라 그런지 쓰잘데 없는 격식이 존재했다.
열차를 옆에 두고 마차를 탄 것도 그렇지만 가장 답답했던 건 환복 문제.
누가 확인하는 것도 아니건만 당연하다는 듯이 드레스 차림으로 며칠이나 버티는 여자들을 보며 기가 질렸다.
물론 마법으로 간단한 세탁이 가능하니 몇날며칠을 제자리에서 대소변까지 해결하며 지냈던 전생의 경험보다는 낫지만 그건 피치 못한 사정인 것에 반해, 이건 그냥 비효율적인 행위라 답답했다.
‘익숙해져야겠지.’
생각해보면 처음 이곳에 왔을 때도 다른 모든 것들이 불편했었다.
이런 일들도 차차 괜찮아지겠지.
똑똑.
그때 마부가 앞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크롬웰 각하. 황궁 수문 기사가 찾아왔습니다.”
마부의 말에 나는 마차의 창을 열었다.
“크롬웰 각하를 뵙습니다. 황궁 경비단 소속 바이어 몽테뉴입니다.”
“반갑습니다, 바이어 경.”
신분 확인 차 온 건가 싶었지만 다른 마차들은 방문하지 않고 이쪽으로 바로 온 느낌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크롬웰 가문은 바로 입장이 가능하다는 윗분들의 연락이 있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그렇습니까.”
기사의 말에 마차 내부에 있던 사람들의 분위기가 밝아지는 게 느껴졌다.
“이번 전쟁에서 공을 많이 세워서 그런가? 오빠 덕 좀 보네.”
“빨리 가서 쉬고 싶네요.”
나는 잠시 망설였다.
이곳은 황궁.
내게 있어서는 호랑이굴과 같은 장소였으며 절대 방심하면 안 되는 곳.
이미 황궁은 내 정체를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고, 또한 내가 아버지의 일로 적의를 품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다.
실제로 기억에도 거의 없는 이곳의 아버지를 위해 복수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결국 이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황제가 큰 걸림돌인 건 마찬가지였기에 황궁 입장에서 내가 적인 것은 변하지 않았다.
“혹시 그 윗분들이라 하심은······.”
“제가 감히 입에 담지 못하는 분들이십니다.”
황궁에서 일하는 기사답게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황족을 함부로 입에 담지 못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황족의 일원이나 황제 본인이 직접 명령했다는 건데······.
‘이걸 안 받아도 곤란하고 받아도 곤란하군.’
과연 계산을 하고 명령을 내린 건지는 몰라도 제대로 걸렸군.
만약 황제가 명령을 내린 거면 나를 곤란하게 만들려는 속셈이 확실했고, 그게 아닌 다른 황족이 내린 명령이면 멋모르고 한 행동이겠지만.
“알겠습니다. 가시죠.”
크롬웰은 백작가이긴 하지만 그 위세가 약했다.
이렇게 프리 패스로 들어가는 것을 분명 다른 가문들이 아니 꼽게 볼 게 뻔했다.
그렇다고 황궁의 제의를 거절하는 것은 큰 결례가 될 수도 있었기에 결국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선빵을 날리는군.’
황궁은 복마전이었다.
귀족 사회, 그 안에서도 또 다른 세상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온갖 암투가 벌어지는 장소.
그 손길이 벌써부터 뻗치고 있다고 생각되자 나도 모르게 고양되었다.
“그렇게 좋았어?”
“어?”
“오빠 지금 웃고 있잖아.”
나는 에이미의 말에 내가 미소 짓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깨닫자 마자 더욱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 그것보다 뭔가 기대가 돼서.”
“······그래?
눈치 빠른 에이미가 뭔가를 눈치 챘는지 살짝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생각에 잠겼다.
그런 우리를 두고 루시아가 속없이 중얼거렸다.
“기대가 되시겠죠. 엄청난 전공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렇지.”
전공?
분명 있으면 좋았다.
그러나 내게는 뭔가를 행함에 있어서 손해 보기 싫으니 겸사겸사 얻은 것일 뿐, 주목적은 아니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루시아와 같이 생각하겠지.
“정말 기대가 돼.”
황궁에서는 겸사겸사 또 뭘 얻을 수 있을까?
< 225화. 시작된 암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