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화. 운명을 바꾸기 위해 >
황국의 상공에 떠있는 인공 부유섬.
황제는 여느 때와 같이 그곳에서 식물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더니 무슨 연유로 모습을 드러냈나?”
황제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어 보이는 그 장소에서 황제의 말이 공허하게 울렸다.
“망극합니다, 폐하.”
“망극이고 자시고 이유를 설명하라는 말일세.”
“포트리온에서 급한 용무가 있었습니다.”
“그게 짐이나 죄악보다 중요한 일이었나?”
“죄악보다는 중요했지만 감히 폐하와는 견줄 수 없지요.”
황제는 나른한 눈으로 모습을 드러낸 헤이겔을 바라봤다.
“일이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나?”
“설마요. 하지만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희 집회는 하나의 의견으로 통일되기 힘든 조직이라 통제가 불가능했습니다.”
“그건 변명이 되지 않아.”
황제가 앉아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곧이어 허리춤에 매어있던 검에서부터 온몸으로 기운이 퍼져나가며 보랏빛 오러가 전신을 덮어가기 시작했다.
“전쟁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애초에 야만족 놈들과 조금 치고 박고 싸운 것을 전쟁이라 생각하지도 않아. 그것보다 분노, 분노는 지금 어디 있지?”
“제가 나중에 무조건 다시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에? 지금 있는 왕국들의 반기도 몇몇 흑마법사들의 수작이라는 것을 짐은 알고 있다. 아주 바쁘더군, 그래.”
헤이겔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집회가 주인이 없는 단체인 만큼 각 파벌들은 개별적인 행동을 했다.
그만큼 자유롭고 여러 일들이 동시에 가능했지만 이번과 같이 통제 불능인 경우가 많았다.
“난 그런 말뿐인 약속보다 행동으로 보여주길 바라네.”
“반드시 그리 하겠습니다.”
“이만 가보게. 밑에서 재롱을 떠는 왕국들 때문에 처리해야 할들이 밀려있군.”
헤이겔은 중절모를 벗어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그대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여전히 보라색의 오러를 내뿜던 황제는 혀를 찼다.
“쯧. 이제 버릴 때가 됐나.”
오만의 힘이 극에 치다루고 있었다.
**
“바하트 알븐. 네가 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눈썰미가 좋군.”
막시민은 태연하게 말을 걸어왔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의 정체가 드러나면 곤란한 건 나뿐이었고 막시민은 당당할 따름이었다.
“저번에 아카데미에 방문한 뒤로 계속 교류를 하고 있었다고 봐도 되는 건가?”
“글쎄.”
막시민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무슈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자 무슈는 카이락을 향해 뛰어나갔다.
“아버지!”
카이락은 무슈를 품에 안으며 주변을 경계했다.
다시는 자식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확인했으면 우린 이만 물러나겠다. 우리가 떠나는 즉시 각지의 부대들을 후퇴시키고 물러났으면 좋겠군.”
“알겠다.”
“그리고 거래 내용은 굳이 계약서 따위를 만들지 않아도 되겠지? 명예를 아는 전사들이라면 약속을 지키리라 믿는다.”
“그래.”
야만족은 이걸로 마무리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막시민을 바라보고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그에게 걸어갔다.
“가시죠.”
“아드리아스. 아직 나와의 얘기가 끝나지 않았을 텐데.”
바하트가 싱글거리며 말하는 게 뒤통수에서 느껴졌다.
내가 슬쩍 머리를 돌려 그를 보자, 바하트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눈감아 준 것과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군.”
“일단 여기서 벗어난 뒤에 말해드리겠습니다. 여기서 더 머물렀다가 괜한 일에 휘말리기는 싫군요.”
“알겠네.”
말을 둘러대는 거야 특기라고 할 수 있어 크게 걱정은 안됐다.
애초에 막시민이나 내 멋대로 전쟁을 끝내려 한 것에 대해 뭐라 할 거였으면 진즉에 뭔가 일어났겠지.
우리는 통곡의 협곡에서 그대로 벗어나 가장 가까운 영지인 보르기옌으로 돌아왔다.
보르기옌에는 영주인 히크샴 보르기옌이 돌아와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바하트의 방문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렇게 오실 줄 알았으면 미리 준비를 해뒀을 텐데······.”
“필요 없다. 그보다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소에 안내해줬으면 좋겠군.”
히크샴은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아마 꽤 곤욕을 치를 거다.
전쟁 중에 영지를 버리고 도망쳤으니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래도 이 세상은 귀족에게 한없이 관대한 덕분에 영지를 뺏기지는 않겠지.
히크샴이 안내한 방에는 총 4명이 들어갔다.
나와 바하트, 그리고 막시민과 에반이었다.
‘호화롭군.’
무슨 올스타 멤버도 아니고 대륙 10인 중 3명이 함께 있는 모습이라니.
바하트는 막시민의 정체는 알아챈 모양이지만 에반은 모르는 눈치였다.
“네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군.”
먼저 입을 연 건 막시민이었다.
그는 에반을 향해 말을 걸고 있었는데 에반은 그저 여유롭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게 아드리아스를 추천한 것도 너였지.”
“빛의 인도에 따른 것이지요.”
갑작스런 둘의 대화에 바하트가 이건 또 뭐냐는 눈빛으로 내게 시선을 보냈다.
굳이 숨길 수 있는 일도 아니었기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 분은 에반 경입니다. 성국에서 활동했었죠.”
“에반 폰 오를레옹?”
바하트가 놀란 눈치로 에반을 바라봤다.
그러자 에반은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이더니 바하트의 말을 정정했다.
“이제 오를레옹이라는 성은 없습니다. 편하게 에반이라고 불러주십시오.”
“허, 참. 어째서 에반 경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이냐? 막시민 크로넬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설명이 필요한 게 많군.”
설명이 필요할까?
나는 간단히 대답했다.
“에반 경은 제 가신이 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막시민도 저번에 있었던 제 도움으로 이번 일을 도와줬지요.”
“허허. 대답이 꽤 많이 생략된 것 같다만 그 연유까지 내가 물을 수는 없겠지.”
바하트는 우리의 면면을 둘러보며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규칙적인 소리가 방 안을 울리고 이내 바하트가 다시 말을 걸었다.
“대륙 10인 중 둘을 부리다니 대륙 정복이라도 할 셈인가?”
“그럴까요?”
“흥. 능글맞은 녀석. 그보다 궁금한 게 있다. 너는 왜 전쟁을 끝내려고 한 게지?”
능글맞다고 하니 다시 능글맞게 대답해볼까.
“말했듯이 대의를 위해서입니다. 불필요한 일로 피를 흘리면 아까우니까요.”
“지금의 질문은 농담이 아니다. 이미 네 가문 명의의 상단이 이번 전쟁으로 얻은 수익을 파악하고 있어. 게다가 모하임과의 거래도 이미 눈치 채고 있다.”
“마탑주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제 의견을 뒷받침해주는군요.”
“······정말로 대의를 위해 전쟁을 막았다고?”
“말씀하신 것에 따르면 전쟁이 지속될수록 제게 이득입니다. 그런데 전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을 끝내려고 했죠. 이 사실이 다른 귀족이나 황가에게 알려졌으면 전 꽤나 곤란한 상황에 빠졌을 겁니다.”
“이해할 수 없군. 왜 굳이 사서 고생을 하고 손해를 보지?”
에반과 막시민도 우리의 대화를 듣고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들에게 굳이 죄악이나 황제에 대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우습게 들렸다는 걸압니다. 근데 정말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였어요.”
멸망급 시나리오를 막은 거니까 대의를 지킨 건 맞다.
틀린 말은 아니니 나는 떳떳하게 낯 간지러운 말을 뱉을 수 있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넌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군.”
“이미 제 몫은 챙길 만큼 챙겼습니다. 따로 안 챙긴 것도 아니니 이상하게 안 보셔도 돼요.”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사람들은 각자 생각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상황을 잘 넘긴 것 같아 안도할 수 있었다.
“원래는 이번에 도움을 주는 대가로 뭔가를 요구할 생각이었다. 그만큼 너는 이번 전쟁에 최대 수혜자라고 할 수도 있지. 하지만 생각을 바꿨다.”
바하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쟁을 끝내는 대가로 네게 이득이 될 만한 게 없어. 오히려 손해지. 게다가 엄청난 위험부담까지 안고서 홀로 적진에 들어가는 미친 짓까지 벌이다니······.”
“에반 경이 계신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그래. 대륙 10인의 명성이 어디 가는 건 아니지.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내가 아닌 다른 이가 이 사실을 알았으면 넌 정치적으로 매장 당했을 거야.”
“마탑주님께는 언제나 감사할 따름입니다.”
“난 이만 가봐야겠다. 후퇴하는 적들을 고이 보내려면 내가 나서서 우리 부대를 방해 해야겠지.”
그는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막시민과 에반에게 눈짓하고는 미소 지었다.
“막시민 크로넬과 에반 폰 오를레옹이라니······재밌군, 재밌어.”
마법을 사용해 사라진 그의 빈자리는 공허했다.
잠시 적막이 흐르고 에반이 입을 열었다.
“주군께서는 애초에 저와 만나는 걸 상정하지 않으셨잖습니까?”
“예? 예, 그렇죠.”
“그렇다면 혼자서 적진에 들어갈 생각이셨던 겁니까?”
에반의 물음은 늦은 감이 있었다.
바하트의 물음 때문에 이제야 깨달은 건가.
“어차피 제게는 언데드들이 있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무모하다 싶을 정도군요. 역시 주군이라고 해야 할까요.”
에반이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탁자에 놓인 차를 마셨다.
그런 에반을 지켜보던 막시민이 뒤를 이어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놀랍군. 속물인줄 알았던 네가 대의를 운운하다니.”
“저도 사람입니다.”
“누가 아니라고 했나? 오히려 속물인 편이 더 사람 같아. 대의를 말하는 건 반대로 인간 같지 않지.”
막시민의 메마른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그가 웃는 건 또 처음 본 것 같아 약간 어색했다.
“솔직히 말해라. 나와 에반은 어차피 네 편이야. 전쟁을 끝내려 한 진짜 이유가 뭐지?”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요.”
“뭐?”
나는 어이없어하는 막시민을 향해 웃어보였다.
“단 한 명도 포기 못해서 욕심 좀 내보려고요.”
**
야만족은 신속히 물러났다.
바하트 덕분인지 제국의 병력들은 생각보다 미적지근했고, 야만족들은 무사히 물러날 수 있었다.
애초에 제국의 온 신경은 남서부의 왕국 연합에 쏠려있는 덕분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남서부 왕국 연합은 제국이 생각보다 큰 피해 없이 야만족들을 물러나게 하자 조심스러워 하는 눈치였고, 그 때문에 본격적인 전쟁으로 번지지 않아 약간의 도발만 오고 가는 상황이었다.
“오빠, 여기 옷 준비 됐어, 들어가도 돼?”
방 문 밖에서 들려오는 에이미의 목소리에 나는 문을 열어주었다.
“이거야. 어때?”
“어. 괜찮네.”
연회용으로 준비한 복장을 들어 보이는 에이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에도 워낙 바빴던 탓에 피곤에 절어 있었던 그녀인 만큼 이번 연회는 약간의 휴식이 되겠지.
“네 옷은?”
“당연히 준비됐지! 오빠 것보다 먼저 준비했어.”
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녀를 보자 나도 덩달아 기뻤다.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는 연회이긴 하다.
야만족과의 전쟁이 끝난 기념으로 논공행상과 연회를 동시에 여는 자리였으니까.
‘모하임이 꽤 화려하게 날뛰어줬어.’
모하임 공작가는 내 예상보다 훨씬 훌륭하게 싸워줬다.
덕분에 에이미는 내가 메이튼에서 세운 공과 합쳐 작은 영지 하나쯤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하며 행복회로를 돌리고 있었다.
만약 영지를 얻어도 에이미가 관리할 거라 내 생활에 변하는 건 없었지만 묘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각하, 손님이 오셨습니다.”
“응접실로 안내해주세요.”
그리고 이번 연회에는 전쟁에 참여한 아카데미 학생들도 초대되었다.
이왕 가게 될 연회이니 함께 가기 위해 이쪽으로 불렀는데 마침 도착한 모양이었다.
“난 그럼 마저 준비하러 갈게.”
“그래.”
에이미가 떠나고 나는 그대로 응접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영지라······.’
나도 기대가 되는 연회였다.
< 224화. 운명을 바꾸기 위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