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화. 결착 >
계획에 없던 인물이었다.
나는 갑자기 나타난 바하트를 바라보며 소환된 언데드가 더 이상 없는지 확인하고 말을 걸었다.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고얀 놈. 아주 멋대로 행동하는 구나.”
바하트의 말투를 보니 최악의 상황은 벗어난 것 같았다.
그다지 적의가 보이지 않는 바하트의 말에 속으로 한숨을 한 번 내쉬며 태연하게 양손을 펼쳐보였다.
“전 대의를 위해 움직인 것뿐입니다.”
“대의? 웃기고 있군. 그것보다 상황을 보니 네 뜻대로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인데?”
“제가 뭘 하고 있었던 건지 아시는 겁니까?”
“전쟁을 끝내려고 온 것 아니냐?”
누구한테 들은 거지.
내 계획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그 중에서 바하트에게 연결이 될 인물이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군.’
피오네겠지.
어쩌다 들킨 건지는 몰라도 일단 지켜봐야겠다.
바하트는 피식하고 웃으며 고개를 돌려 카이락을 보았다.
“딱 보니 그쪽이 이 무리의 대장 같은데 이야기가 어찌 됐는지 들어볼까?”
“제국의 공작이라고 했나. 일단 충분히 알았으니 위협은 그만하지.”
카이락의 말에 바하트가 마법을 풀자 주변 풍경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바하트는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그대로 허공에 앉았다.
“자, 이제 말해보게.”
“그쪽도 전쟁을 끝내고 싶은 건가.”
“그렇다고 해두지.”
아직까지는 다행이었다.
하지만 바하트도 워낙 돌발행동을 많이 하는 인물이니 안심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명예로운 전사들이다. 명예가 더럽혀진 이상 명예를 회복하기 전까지 물러날 수 없다는 게 우리의 의견이다.”
“우리의 의견이라······. 그대 개인의 의견이 아니란 말이군.”
“······.”
역시 카이락은 그냥 자신의 아들이 무사히 돌아온다면 그냥 물러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대족장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다른 부족들을 강하게 통제하지 못하나 보다.
“명예, 명예라······. 우리 귀족 사회에서도 명예는 매우 중요하지. 이견의 여지가 없군.”
바하트가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말했다.
나는 한숨을 한 번 뱉어내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도와주러 온 거 아니었습니까?”
“그렇다면 어쩐단 말이냐? 저들이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막을 만한 이유가 없지 않나.”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날 쳐다보는 바하트가 마치 내가 숨긴 패를 꺼내라는 듯했다.
하여간 저 노인네는 속을 모르겠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앞으로 나섰다.
그 와중에 바하트가 에반을 훑어보는 게 신경 쓰이는군.
“명예를 말하니 나도 한마디 하지.”
“말해라.”
카이락은 부디 내가 설득시켜줬으면 하는 눈치였다.
나는 여전히 도끼를 든 막둘에게 물었다.
“치우의 율법에 따르면 전사의 명예를 실추시킨 자는 복수를 당할 책임이 있다고 하지, 내 말이 맞나?”
“네놈이 어찌 율법을 알고 있는지 몰라도 맞는 말이다.”
“자, 이제 생각해보자. 명예를 잃은 자는 누구지?”
“우리! 설경의 대지를 다스리는 치우의 일족들이다!”
“그렇다면 명예를 실추시킨 자는?”
“당연히 너희, 제국놈들이지!”
“왜 제국이지?”
내가 계속 반문하자 막둘의 이마에 혈관이 두드러졌다.
“말장난 하나? 네놈들이 우리의 영역까지 들어와 카이락의 아이를 납치했으니 당연히 네놈들이 복수의 대상이지!”
“우리가, 그니까 제국이 너희 대족장의 아이를 납치했다는 거지?”
“그렇다!”
나는 고개를 돌려 바하트를 보았다.
“저희가 언제 대족장의 아이를 납치한 적이 있습니까?”
“나도 듣다보니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아이를 납치하다니?”
바하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응을 보면 진짜 모르는 모양이네.
공작인만큼 혹시나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다행이었다.
제국이 납치한 건 아니지만 명령은 황제가 내렸으니까.
“지금 우리를 놀리는 건가?”
카이락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놀리다니 그럴 리가. 여기 계신 로들렌 마탑주님은 공작가의 가주시다. 그런 분이 이런 중대 사항을 몰랐을 거라 생각하나?”
“그니까 하는 소리다. 이미 제국에서 납치했다는 증거가 있는데······.”
“그 증거, 확실한가?”
나는 카이락과 막둘, 그리고 다른 야만인들을 한명씩 바라봤다.
“정리해보자. 그니까 너희는 우리가 갑자기 미친놈마냥 뺏어먹을 것도 없는 너희 영역에 들어가 대족장의 아이를 납치했다는 거지? 자, 여기서 질문. 우리가 대체 왜 그런 수고를 들이지?”
“그야······.”
막둘의 눈알이 핑핑 돌았다.
내 말에 정신 없어하는 그를 보며 나는 다시 야만족들에게 물었다.
“도대체 우리가 대족장의 아이를 납치할 이유가 어디 있냐고.”
“그렇다면 반대로 묻지. 그럼 누가 납치를 했다는 건가? 애초에 무슈가 사라진 장소에는 제국의 증표를 새긴 병사들이 죽어있었다. 그게 단서였지.”
“단서는 만들어내면 그만. 오히려 이상하지 않아? 대족장의 아이를 납치하는 일이라면 신분을 감추는 게 정상이야. 근데 대놓고 제국의 증표를 달고 있었다고?”
“으음······.”
“너희 치우의 일족과 우리 제국을 이간질시킬 이유가 있는 놈들을 생각하면 답은 간단하지. 그리고 그 녀석들은 꽤 의심스러운 행동들도 하고 있거든.”
“푸하하하하!”
내 말이 끝나자마자 바하트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눈가에 눈물까지 매달며 배 아파했다.
“그렇군. 생각해보니 이 전쟁의 원인을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어! 우리가 멍청했지.”
“멍청한 게 아니라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오만했던 거죠. 우리는 제국이니까요.”
“그래, 그 말도 맞다고 해두마.”
바하트가 폭소를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전히 입가에 웃음이 번진 상태로 카이락에게 물었다.
“범인이 누군지 짐작하겠느냐?”
“······우리가 당했군.”
카이락은 아무래도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른 야만족들은 무슨 소리인가 하며 카이락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복수해야할 대상은 제국이 아닌 흑마법사들이었다.”
“아아!”
막둘도 드디어 깨달았는지 시뻘게진 얼굴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까지 전쟁에서 도와주겠다며 달콤한 말로 빌붙었던 흑마법사들에게 분노한 모양이다.
“이제 알겠나? 애초에 치우의 일족은 이용당한 거야.”
물론 이 사건에는 무슈가 죄악 중 하나인 ‘분노’라는 직접적인 원인도 있었지만 그건 말해봤자 도움이 되지 않겠지.
오히려 이렇게 오해해주는 게 목적을 이루는데 용이했다.
“자, 여기서 문제는 심각해진다. 제국의 입장에서는 가만히 있다가 코털이 뽑힌 상황이야. 이런 상황에서 평소에 무시하던 너희들을 괘씸해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제국의 위상과 명예가 떨어졌으니 보복을 가하는 건 당연하고.”
“그니까 네가 우리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다는 말인가?”
“그래.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지금 제국은 바빠. 설명했던 대로 아래쪽이 조금 소란스럽지.”
내 말에 바하트가 요놈 봐라하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사실 이 정보는 극비였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내가 모를 수 없었다.
“지금이라면 네 아들을 데리고 돌아갈 수 있다.”
“후에 보복이 올 가능성은?”
“없다고 할 수는 없지.”
만약 여기서 야만족들이 전부 죽게 되면 북부에 신경 쓸 만한 일이 하나 발생하긴 한다.
하지만 이들이 무사히 돌아간다면 오히려 제국이 북부에 신경 쓸 틈은 없을 거다.
‘내가 이들을 굳이 살려서 돌려보내려는 이유.’
북부에는 멸망급 에피소드 중 하나인 신의 잔해가 잠들어있다.
이름도 물음표로 뜨는 그 보스는 절망에 가까운 난이도를 지녀 세이브 로드가 아니면 깰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하지만 야만족들이 돌아간다면 무사하다.’
이들은 신의 잔해를 관리하는 일족들이었다.
신의 잔해가 깨어나는 이유도 관리하던 이들이 사라지자 일어나게 되는 일.
이 전쟁이 시나리오의 전조라는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지.
“하지만 적어도 이 전쟁만큼은 내가 시간을 끌어줄 수 있다. 그 사이에 북부로 다시 돌아가라. 후의 일은 돌아간 뒤에 생각해.”
“허허.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구나.”
바하트가 흥미롭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왠지 불안한데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무슨 생각인지 먼저 물어봐야 하나.
“나도 도와주마. 내 힘이면 아마 무사히 후퇴할 수 있을 거다.”
이건 정말 뜻밖의 선물인데.
솔직히 또 제국을 상대로 입을 털 생각을 하면 머리가 아팠는데 바하트가 나서준다면 걱정이 없었다.
근데 도와주겠다는 이유를 모르겠네.
한 순간의 변덕일 수도 있었기에 조금 걱정되었다.
“제국의 공작이 도와준다면 거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군.”
“내 요구사항은 그게 끝이 아닌데?”
“······말해라.”
“너희들이 무사히 돌아간 후에 대전사를 고용할 수 있는 권한을 얻고 싶다.”
“용병을 말하는 건가?”
“그렇지.”
가장 큰 목표는 이들이 돌아감으로서 멸망급 에피소드를 막는 것.
하지만 이 고생을 해놓고 아무것도 못 얻는 건 억울하니 오러 마스터라도 뜯어가야지.
용병이라고는 말했지만 쓰다가 죽으면 언데드로 소환할 거니 다시 돌아가는 일 따위는 없다.
“그게 끝인가?”
“더 말하고 싶은데 솔직히 너희가 줄 수 있는 건 이게 다잖아?”
“그렇긴 하지. 그러면 무슈는 언제 돌려주는 거지?”
티무르의 기척을 확인해봤다.
그리고 바로 앞까지 도착한 걸 확인하고 고민에 빠졌다.
하필이면 바하트가 오는 바람에 일이 복잡해졌군.
그렇다고 도와주겠다는 바하트를 쫓아낼 수도 없으니.
‘티무르는 소환해제 시키고, 무슈만 안으로 들여보내야겠다.’
원래였으면 다 같이 들어오게 할 생각이었지만 굳이 바하트를 막시민이나 루나와 마주치게 할 이유는 없지.
“근처에 있다. 지금 부르지.”
티무르로 내 전달사항을 대충 알린 뒤 곧바로 소환을 해제했다.
무슈가 혼자 이곳까지 오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살펴본 야만족의 표정들은 침울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흘린 피가 전혀 엉뚱한 곳에 쓰였다는 걸 알게 되면 당연한 반응이겠지.
“궁금한 게 많구나.”
“알려주지 않을 겁니다.”
“호오? 네가 그럴 수 있는 처지냐?”
싱글벙글한 표정의 바하트는 마치 장난감을 찾은 아이의 그것과 같았다.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설명할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왔습니다.”
에반이 내 옆에서 말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지?
그러나 이내 나도 그가 고개를 갸웃거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씨발, 막시민이 왜 같이 오고 있는 거야.’
루나는 없었다.
하지만 막시민이 변장한 모습으로 태연하게 무슈를 데리고 걸어오고 있었다.
“흐응?”
바하트가 막시민과 무슈를 보며 콧소리를 냈다.
정확히는 막시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둘이 도착하고, 바하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좀 부탁해도 될까?”
그의 눈이 내게 향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막시민 크로넬이 왜 이곳에 있는 거지?”
< 223화. 결착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