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화. 예측불가 >
나는 잿더미 위에서 주변을 둘러봤다.
요새라고는 해도 민가가 없던 것은 아니었던 통곡의 협곡 내부는 전부 쓸려버린 상태.
어차피 제국이 요새를 돌려받아도 내가 한 짓인 걸 모르니 상관없었다.
“그래서 지켜본 감상이 어때? 이 정도면 충분히 보여줬나?”
나는 고개를 돌려 카이락을 바라봤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잿더미 위에 올라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그러면 협상을 이어서 진행해볼까?”
요새에 있는 흑마법사들은 전부 죽었다.
혹시나 싶어 에반과 니켈, 그리고 미리내를 시켜 주변을 탐색시켰으니 걱정할 건 없었다.
툭!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의자가 잿더미 위에 놓였다.
의자에 앉는 카이락을 보며 나는 여전히 소환된 상태인 크리브마허의 손등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좋군.”
“원하는 게 정확히 뭐냐.”
“일단 너희가 다시 설경지역으로 물러나는 게 첫 번째 요구 사항이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우리가 이 요새를 함락했던 시점에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흐름에 휩싸였다. 제국이, 너희 황제가 우리를 그냥 보내줄 거라 생각하나?”
“제국은 그냥 보내줄 거다.”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바로 나온 내 대답에 카이락의 인상이 구겨졌다.
“설명이 필요하다.”
“너도 알다시피 이 전쟁은 제국 입장에서 먹을 게 별로 없어. 물론 어딘가에서는 이득을 보는 이들이 있겠지만 막말로 너희한테서 뺏을 수 있는 게 뭐가 있나? 니들이 제물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옥한 땅을 가진 것도 아니잖아.”
“그렇다고 그냥 놔준다고? 제국의 자존심은 하늘보다 높은 걸 알고 있다. 제국의 귀족인 네가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맞는 말이야. 하지만 그 자존심도 결국에는 실리를 따져서 나온 결과다. 주변국에 얕보일 수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과시용이지. 마치 내가 조금 전에 과할 정도로 힘을 쏟아 부은 것처럼.”
-흐흐흐.
내 말에 크리브마허가 웃음을 흘렸다.
그의 입에서는 여전히 산성 브레스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돌려서 말하는 건 그만하지. 내가 물러나도 된다는 확신을 주거라.”
“제국은 지금 새로운 먹잇감을 찾았다. 너희들 덕분이지.”
“새로운 먹잇감?”
“그래, 새로운 먹잇감. 네놈들이 날뛰어준 덕분에 제국의 위상에 금이 갔다. 그리고 최근 들어 제국의 간섭을 싫어했던 여러 왕국들이 반기를 든 상황이야.”
“그 말은······.”
“중소왕국이 반기를 든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어. 제국 입장에서는 오히려 공격할 명분을 준 것에 감사하며 먹어치울 뿐이지. 혹시나 허튼 생각을 한다면 접어두는 게 좋아.”
카이락의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아무래도 계속 버티면 제국을 괴롭힐 수 있을 거라는 계산도 선 것 같은데, 현실을 직시하게 해줘야겠군.
“카이락. 제국이 그동안 약해서 너희를 놔둔 게 아니야.”
“······.”
“다시 말하지만 네놈들을 죽여 봤자 먹을 게 없으니 그냥 놔둔 거야. 오히려 전쟁을 길게 끌어서 챙길 이득을 생각한 몇몇 귀족들로 인해 이 전쟁이 지속된 거지. 그게 아니었으면 진즉에 네놈들은 다 죽었다.”
주변에는 카이락의 측근으로 보이는 야만인들도 있었다.
특히 오러 마스터로 보이는 2명의 인물들도 보였다.
그들은 카이락의 고민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우리는 전사들이다. 명예를 깎아내린 제국놈들과 싸우다 죽으면 죽었지, 절대 물러날 생각은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카이락. 네 아들이 살아 돌아오면 좋겠지만 우리가 전쟁을 일으킨 이유를 다시 생각해라.”
누가 야만인들 아니랄까봐 엄청 호전적이네.
나는 그저 조용히 카이락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들의 말을 들었나.”
“어.”
“이들이 말한 대로다. 무슈의 생사는 사실 이 전쟁에 의미가 없다. 이 전쟁이 일어난 원인은 대족장인 내 명예가 실추되었다는 것, 그거 하나 때문이지.”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야만인들과 눈을 마주치며 면면들을 살폈다.
“그렇단 말이지?”
“하지만 내 아들을 데려온다면 다른 거래에는 응해줄 수 있다.”
“아니. 이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게 너희의 복귀야. 이걸 들어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내 말에 점차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어느새 탐색을 마치고 돌아온 에반이 그 모습을 보고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고, 크리브마허가 낮게 으르렁댔다.
“무슈가 죽으면 네 녀석들도 모두 죽는다.”
“안 죽여. 그렇다고 돌려줄 생각도 없지만.”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카이락!”
“무슨 일이냐.”
“만델 고원을 지키던 와투나가 큰 부상을 입고 부대가 전부 후퇴했다!”
“와투나가?”
와투나라면 야만족 오러 마스터 중 하나였다.
오러 마스터라고 보기 힘든 외모여서 더욱 기억에 남는 인물.
특징으로는 엄청난 방어력을 지녔다는 점이었는데 그런 와투나가 큰 부상을 입었다는 이야기는 제국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움직이기 시작했군.”
“그게 무슨 소리냐?”
“타국을 침공하기 전에 너희들부터 깔끔하게 정리하고 가려는 거겠지.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일 거다. 그리고 이건 너희가 물러날 마지막 기회이기도 해.”
“본격적으로 움직인다면서 우리가 물러날 기회라고?”
“말했듯이 제국이 너희를 죽여서 얻을 건 아무것도 없어. 오히려 귀찮을 뿐이지. 니들이 알아서 물러난다면 굳이 추격하지 않을 거야.”
“그걸 어떻게 장담하지.”
“왜냐하면 더 맛있는 먹잇감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거든.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이유는 그 맛있는 걸 먹기 전에 미리 후환을 없애려는 것뿐이니까”
“으음.”
“지금 물러나면 내가 직접 나서서 뒤를 봐주겠다. 내가 추격하는 제국의 병력들을 붙잡아 시간을 끌면 그 사이에 충분히 물러날 수 있을 거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카이락은 고민을 하는 듯 말없이 날 바라보기만 하는 가운데 상황은 급박해져갔다.
“카이락! 부트라 산맥의 게릴라 부대가······.”
“가이던 영지를 공격하던 우리 부대가 후퇴 중이다!”
“갑자기 나타난 제국의 대전사가 막칸 족장을 죽였다.”
여기저기서 도착하기 시작한 전령들이 급박한 상황을 전해왔다.
점차 침울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야만족의 오러 마스터 하나가 카이락에게 말했다.
“내가 전장으로 나서겠다.”
“······.”
“대답해라, 카이락.”
“우리는······용감한 것과 무모한 것의 차이를 알아야한다.”
“카이락?”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갖 전장에서 찾아온 전령들과 요새에 있던 야만족들이 그런 그를 쳐다보았다.
“돌아가자.”
“카이락, 저 녀석 때문이냐? 저 녀석 때문에 흔들린 거라면 내가 당장 죽여주지.”
거대한 도끼를 꺼내든 상대가 나를 보며 살기를 드러냈다.
그러자 에반이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우습군요. 조금 전에 우리의 실력을 보았을 텐데도 앞뒤 없이 행동하는 걸 보면.”
“난 베카비의 대전사, 막둘. 치우의 명예를 위해 네놈들을 처단하겠다.”
-어리석은 미물아. 상대를 알아가면서 덤벼라.
크리브마허가 산성으로 인해 연기가 나오는 입을 열며 말했다.
그러자 기세 좋던 막둘이 움찔거리며 본 드래곤의 눈치를 살폈다.
오러 마스터인 것과는 별개로 미신적인 신앙을 믿는 야만인으로서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만. 막둘, 물러나라.”
“카이락! 이대로 치우의 명예를 더럽힐 생각이냐?”
이대로 가다가는 끝이 안 나겠네.
결국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도끼를 든 막둘에게 말을 걸었다.
“치우의 명예를 지킨다는 게 자살하는 건가?”
“넌 닥쳐라.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 주제에.”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하면 안 되지. 내가 알기로 치우의 율법은 율법을 아는 이들 사이에서만 통용된다고 알고 있다. 제국민 중에 율법을 아는 사람도 없을 텐데 굳이 명예를 들먹이면서 자살을 하러 간다니 대단하군.”
“네놈이 뭘 안다고 주둥아리를 놀리지. 죽고 싶은가?”
“그래. 차라리 나랑 붙어보자고. 난 율법을 알고 있거든.”
나는 괜한 변명이 나오는 게 듣기 싫어 크리브마허의 소환을 해제했다.
어차피 상대의 오러 비기나 정보를 알고 있는 이상 검과 마법만으로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스릉-
내가 크리브마허를 집어넣고 검을 뽑은 걸 확인한 막둘이 이를 드러냈다.
“정말로 죽고 싶은 모양이군. 멍청한 건가?”
“너야말로 대전사라는 알량한 칭호에 취해서 네 주변까지 다 죽이게 만드는 멍청이다. 주변을 봐라. 저 전령들의 모습을 보고 한 번 다시 말해봐.”
내가 가리킨 이들은 하나같이 부상을 입고 피칠갑을 한 모습이었다.
아마 지금도 전장은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고 있겠지.
내 말에 그들을 한 번 쳐다본 막둘은 날 비웃었다.
“저들도 싸우다 얻은 상처를 영광으로 알 것이다. 너 따위가 명예와 영광을 알 바 없겠지.”
“말이 안 통하는군. 그냥 덤벼라.”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모두가 긴장된 눈으로 나와 막둘을 바라봤다.
우우웅---
그때 예상치 못한 마나의 뒤틀림이 일어났다.
“마법?”
갑작스러운 마법의 전조 현상에 나와 막둘의 갈등이 소강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이내 마법이 발현되었다.
우웅-!
“공간 마법······설마?”
“설마, 뭐. 더 말해보거라.”
익숙한 목소리가 허공에서 울렸다.
그리고 이내 모습을 드러낸 한 인물이 웃음을 흘리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이 음침하기 짝이 없는 녀석아. 또 혼자서 뭘 꾸미고 있던 게냐.”
“마탑주님.”
홀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바하트 알븐이었다.
그의 등장에 야만인들이 무기를 꼬나 쥐며 긴장한 기색으로 그를 바라봤다.
“누구냐?”
“이곳에서도 한바탕 난리가 났었군. 아드리아스, 네가 이리 만든 건가?”
“묻는 말에 대답해라, 마법사.”
카이락의 물음을 무시한 채 내게만 말을 거는 바하트에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흐흐. 고얀 놈.”
그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카이락을 바라봤다.
“내가 누구냐고? 난 제국의 공작이자 알븐 가문의 가주, 그리고 로들렌 마탑의 주인이지.”
“공작?”
“그래. 내가 바로······.”
쿵!
주변 공간이 전부 비틀리기 시작했다.
그 광범위한 마법의 힘에 모두가 입을 벌리며 그를 바라봤다.
“바하트 알븐이다.”
**
“음?”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던 막시민이 무언가를 느끼고 고개를 들어 어딘가를 보았다.
조금 전에 끝난 전투로 흥분이 가시지 않은 루나는 그런 막시민을 보며 물었다.
“왜? 왜? 또 있어?”
그녀의 물음에도 대답이 없던 막시민은 이내 검을 집어넣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뭐야! 대답해!”
“끝났어?”
그런 루나를 향해 티무르의 등 뒤에 붙어있던 무슈가 고개를 내밀었다.
루나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당당하게 끄덕였다.
“그럼!”
“대단해!”
“그럼, 그럼! 난 대단해!”
“우리 거의 다 도착했지?”
“응!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돼!”
통곡의 협곡이 바로 앞이었다.
< 222화. 예측불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