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화. 아드리아스의 과시 >
카이락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우선 장소를 옮기지.”
그는 대답도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에반을 눈짓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호위는 두고, 너만 따라와라.”
“말도 안 되는 소리.”
에반이 고개를 흔들며 카이락의 앞을 막았다.
그런 에반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했다.
카이락은 오러 마스터.
누가 봐도 내가 위험해보일 거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그가 원하는 건 그의 아들이 무사히 이곳까지 오는 거니 저를 어쩌지 못할 거예요.”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방금 일어났던 일도 다 거짓된 연기라면 주군께서는······.”
“그리고 에반.”
나는 고개를 돌려 에반을 똑바로 쳐다봤다.
“전 아드리아스 크롬웰입니다.”
“······.”
“제가 누구라고요?”
“주군께서는 빛이시자 이 세상의 진정한 왕이십니다.”
나는 그 거창한 칭호에 싱겁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러자 에반은 천천히 길에서 비켜났다.
“조금만 놀고 계세요.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만약 주군께서 해가 지기 전까지 안 오시면······.”
에반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카이락을 노려보았다.
“전부 죽이겠습니다.”
“예. 마음대로 하세요.”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카이락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미친놈들이군. 얘기가 끝났으면 따라와라.”
그는 건물 안쪽으로 들어갔다.
뒤를 쫓자 바닥에 지하로 이어진 문이 있었고 그 문을 지키고 있는 야만족이 하나 있었다.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게 해라.”
“알았다.”
카이락은 문지기에게 그 말만 하고 먼저 내려갔다.
내려가자 보이는 건 그냥 평범한 창고 겸 지하실이었다.
아무도 없이 그저 컴컴한 지하실에는 도축한 짐승과 몬스터들의 고기가 천장에 매단 갈고리에 여기 저기 걸려있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이라고 했나?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 흑마법사놈들이 우리를 우롱하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궁금한 점은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거다.”
“조금 전에 퀜튼과 내가 한 대화를 못 들었나? 그는 내 파벌의 사람이다. 비록 그는 인정하지 않지만.”
“네 파벌? 아아. 그렇군. 자네도 흑마법사였어.”
그의 시선이 내 허리춤에 달린 갈락슈르에 향했다.
아마 검을 지니고 있는 게 의문이겠지만 묻지는 않는 모양이군.
“우리 흑마법사 사회에서도 각자의 의견이 달라서 말이야. 나는 전쟁을 막는 쪽에 베팅했지.”
“제국의 개가 집회 소속 흑마법사라니 웃기는군. 남들도 알고 있나?”
“내 형편을 걱정할 처지가 아닐 텐데.”
내 말에 카이락은 여유롭게 웃어보였다.
“조금 전에는 내가 잠시 흥분했었지만 충분히 상황을 파악했다. 내 아들은, 물론 내게도 중요하지만 너에게도 중요한 거래 품목이겠지. 내 아들이 죽으면 거래는 고사하고 네 목숨부터가 위험하니 말이야.”
“그래서. 거래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난 죽지 않는다.”
난, 이미 각오를 하고 왔다.
무력이 없는 설득은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는 게 이쪽 세상.
한 번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네 호위 기사를 너무 믿는 모양이지만 이곳에는 너희들이 말하는 오러 마스터가 무려 셋이다. 게다가 너와는 반대편에 선 흑마법사들도 다수 있지.”
“굳이 확인해봐야겠다면······. 좋아.”
난 검집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만인적의 기세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카이락은 강하다.
게임에서 겪어본 바로는 무안공, 싱클레어 클로슈보다 한 수 위의 실력.
아마 대륙 10인이라 불리는 오러 마스터와 견주어도 그닥 부족하진 않겠지.
“······전사라고?”
내 기세를 예상하지 못했던 건지 카이락의 표정에 놀라움이 담겼다.
하긴 흑마법사라고 소개했으니 당연한 말이지만.
“그래서 지금 내게 검을 휘두를 생각인가. 너무 멍청한 생각이다.”
“아니, 넌 그냥 확인만 하면 돼. 곧 휘두를 일이 생길 거거든.”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 카이락은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처음 왔을 때부터 미리 짐작한 일이었지만.
쿵! 쿵!
“소란스럽군. 네가 벌인 짓이냐?”
“내가 한 짓이기도 하고, 네가 한 짓이기도 하지.”
“뭐?”
“말했잖아. 전쟁이 끝나길 원치 않는 이들이 많다고.”
푸후우우욱-----
검은 연기가 우리가 있는 지하실로 자욱하게 깔리기 시작했다.
“아주 가지가지 하는군.”
카이락이 마나를 활성화시키며 밖으로 나가려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멈춰 세우며 미소를 지어내 보였다.
“내가 처리한다. 말했지? 확인하게 해주겠다고.”
아마 흑마법사들이 나와 카이락의 협상을 막기 위해 나선 걸 거다.
카이락의 실력과 내 실력을 모르니 할 수 있는 행동.
그리고 내가 데려온 에반의 정체도 모르니 하룻강아지처럼 뭣 모르고 일을 저지르는 거겠지.
스르릉-
투명할 정도로 눈부신 백색의 검이 검집을 타고 흘러나왔다.
마치 겨울을 노래하듯 울려 퍼지는 청명한 소리에 카이락의 시선이 갈락슈르에 꽂혔다.
“좋은 검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연기 속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카이락! 이건 제국의 음모다! 당장 이 협상을 중단하고 저 녀석을 죽여라!”
“시끄럽군.”
칼이 춤을 췄다.
순식간에 움직인 내 검은 스승님의 무아검과 세계수에서 익힌 무결이 섞여 상대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컥?”
말을 하던 흑마법사는 목에서 피를 울컥거리며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으로 쓰러졌다.
“넌, 대체 뭐냐.”
카이락이 두 눈을 부릅 뜬 채 나를 바라봤다.
“아직 보여줄 건 더 남았어.”
우리는 곧바로 지하실을 벗어났다.
위로 올라가자 어느새 몰려든 야만인들과 흑마법사들이 집 주위를 둘러싼 채 대치하고 있었다.
“대족장이여! 우리말을 들어보게!”
저 늙은이는 코단인가.
늙은 흑마법사치고 까다롭지 않은 녀석이 없었다.
게다가 저 녀석은 제스터 파벌의 흑마법사.
‘죽이면 또 지랄 염병을 하겠군.’
겁나지는 않았지만 벌써부터 귀찮음이 몰려왔다.
피융-!
성격 급한 한 녀석이 마법으로 만든 검은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정확히 내게 날아왔고 곁에 있던 에반이 간단하게 막아냈다.
“감히!”
에반이 분노를 토해내며 앞으로 나서려하자 내가 막았다.
“카이락. 보르기옌에서 네 부하들이 신이라 부르던 존재들. 뭔지 궁금하지 않나?”
“뭐?”
“일단 여기서 보고만 있어. 전투의 신, 치우의 율법에 따라.”
“······!”
카이락의 놀란 얼굴을 뒤로 하고 쓱 둘러보았다.
면면들을 대충 훑어보니 우리 파벌 녀석은 퀜튼을 제외하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퀜튼도 딱히 내 편 같지도 않고.
‘자기 자리를 뺏겼다고 생각하는 건가.’
뭐라 생각하든 상관없다.
내 앞을 막으면, 그저 때려 부술 뿐.
우우우웅---
마나가 공명하며 내 등 뒤로 거대한 아공간이 입을 벌렸다.
그 엄청난 마나의 폭풍에 주변에 있던 모두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미안하지만 너넨 살려줄 수가 없다. 이 언데드들은 집회에 숨겨야 하거든.”
후웅!
아공간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팔이 대검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휘둘러진 대검은 흑마법사들이 있던 곳에 그대로 떨어졌다.
콰앙-----!
엄청난 충격이 땅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그 일격에 죽은 흑마법사는 아무도 없었다.
“뭐냐, 그 골렘은?”
“골렘?”
나는 웃으면서 대답해주었다.
“골렘이 아니라 구울이다.”
-구어어어어어!
드디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루도가 거대한 포효를 내지르며 기세를 뿜었다.
그와 동시에 땅에서 용아병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게 도대체······.”
“말도 안 돼! 설마 네가······!”
흑마법사들의 당혹성이 터져 나오고 야만인들이 얼어붙었다.
나는 내 옆으로 소환된 니켈에게 말했다.
“단 한 놈도 놓치지 마라.”
따닥!
니켈이 용아병들을 이끌고 달려갔다.
루도도 계속해서 포효를 지르며 흑마법사들에게 다가갔다.
“막아라!”
온갖 흑마법이 내 언데드들을 향해 날아왔다.
하지만 언데드에게 흑마법이란 영 상성이 좋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흑마법에 대한 내성이 존재하는 언데드들은 적들의 마법을 무식하게 뚫으며 달려갔다.
그 모습이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들 같았다.
“에반, 같이 갈까요?”
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만 하며 그대로 앞서 나갔다.
갈락슈르가 검은 오러에 휩싸여 묘한 빛을 띠었다.
콰드득—콰직!
우르르콰과과광------!
흑마법사는 고작 7명.
나와 에반, 그리고 언데드들이라면 별로 힘들 것도 없는 숫자.
“말도 안 된다! 도대체 어째서 네가 용아병과 거인을······!”
소리 지른 퀜튼이 이내 본인의 언데드를 꺼내기 시작했다.
역시 모른의 직속 제자답게 수준이 높은 녀석들이었다.
‘카론 디플렌보다 낫군.’
당연한 이야기지만, 내게 네크로맨시를 처음 알려줬던 카론보다 뛰어난 네크로맨서가 그였다.
“차라리 잘됐다. 내가 네놈을 죽이고 모두 빼앗아주마!”
“퀜튼 브룩. 감히 파벌의 주인이 내가 되었다는 네 스승의 말을 무시할 셈이냐?”
“닥쳐라! 네놈만 사라진다면 다 의미 없는 얘기!”
“어리석군.”
퀜튼의 데스나이트가 용아병 하나를 썰어 버리며 내게 다가왔다.
하지만 니켈이 그 앞을 막으며 귀기 어린 검으로 상대를 밀어냈다.
채챙!
혼전이 시작됐다.
퀜튼의 언데드들은 정예이면서도 그 수가 꽤 되었다.
다만 용아병보다 강한 개체는 몇 없었기에 균형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죽어라, 아드리아스 크롬웰!”
“멍청한 놈.”
나를 저격하던 흑마법사 하나가 에반이 날린 빛의 검에 그대로 꿰뚫리며 절명했다.
그 외에도 나를 노리고 날아든 수많은 마법들은 내 검을 넘지 못했다.
“그 빛의 검은······서, 설마 에반 폰 오를레옹?”
“전 더 이상 오를레옹이 아닙니다.”
웃으며 답하는 에반이 또 다른 흑마법사를 죽였다.
에반이 없었으면 치열했을 수도 있는 싸움이었지만 난이도가 대폭 감소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퀜튼. 소환 마법을 다루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몸을 숨겨야하는 게 정석이야. 왜 그렇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고 싶어 안달이지? 뭐라도 노리고 있는 건가?”
“······.”
“네가 내 언데드들을 노린다고 말했을 때부터 네 계획은 들켰어. 아무래도 ‘돌체의 비명’을 네가 갖고 있는 모양인데, 당해줄 생각 따위 없거든.”
돌체의 비명은 영혼을 가두는 항아리였다.
내가 알기로 원래였으면 살아있었어야 할 아스란 블루가 가지고 있던 아이템.
저 항아리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내 언데드들을 빼았으려 한 모양인데 이를 어쩌나.
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아이템들과 능력들을 꿰뚫고 있었다.
“······아스란이 말해준 건가?”
“그렇다고 해두지. 결과는 변하지 않겠지만.”
이제 끝을 낼 때가 왔다.
이왕이면 야만족들에게 큰 인상을 남겨줘야겠군.
우웅--
다시 한 번 거대한 아공간이 열렸다.
루도가 나왔던 것과 비슷할 정도의 크기.
“아아아······.”
절망의 한탄이 노래처럼 울려 퍼졌다.
그 감미로운 노랫소리는 마치 지금 등장하는 존재에 대한 찬송가와 같았다.
“크리브마허.”
-자주 좀 불러줬으면 좋겠군. 저 안에는 이상한 녀석들 밖에 없어.
거대한 본 드래곤이 검은 왕관을 쓴 채 악취를 풍기며 등장했다.
그 모습은 마치 모든 역병의 왕.
웅장하기 짝이 없는 크리브마허의 등장에 야만족들이 무릎을 꿇고 이마를 숙이기 시작했다.
“신! 신이 등장하셨다!”
“치우의 사자다! 치우의 사자가 강림했어!”
흑마법사들도 야만족들처럼 주저앉았다.
다른 점이라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만 볼 뿐.
“피날레를 맺어볼까.”
-크르르르.
크리브마허가 거대한 주둥이를 벌리기 시작했다.
< 221화. 아드리아스의 과시 > 끝